'극장에가다'에 해당되는 글 257건

  1. 제인 오스틴 북 클럽 2012.09.19
  2. 주말의 영화 1 2012.09.02
  3. 케빈에 대하여 5 2012.08.12
  4. 모모에게의 편지 6 2012.08.05
  5. 여름, 부천, 반딧불 언덕에서 7 2012.07.25
  6. 시작은 키스 6 2012.06.26
  7. 디센던트, 봄 2 2012.03.01
  8. 치코와 리타 2012.02.12
  9. 이야기의 이야기 - 머니볼, 50/50 2011.12.06
  10. 마더 앤 차일드 - 그녀의 편지 6 2011.10.26

 

    월요일부터 친구를 만나 술을 마셨다. 꼬치에 맥주를 마신 뒤, 히레 정종에 시샤모 구이를 먹어주었다. 어제도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셨다. 족발에 맥주를 마시고 광화문으로 왔다. 샐러드에 생맥주를 마셔주고, 꼬치집에 들러 병맥주도 마셔주었다. 꼬치집 앞에서, 바람이 불었다. 이제 정말 누가 뭐래도 가을. 버스를 타고 들어오다 조는 바람에 종점 근처까지 갔다. 덕분에 조금 걸었다. 요즘 나의 플레이 리스트. 김목인의 그가 들판에 나간 건 - 토마스 쿡의 꿈 - 루시드 폴의 그 밤, 으로 이어지는 음악을 들으며 이 계절을 좀더 적극적으로 타주어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뭐 까짓것. 좀 더 가을을 탄다고 죽기야 하겠어.

 

    술을 마시지 않은 일요일, 이 영화를 봤다. 사놓고 한참을 기다렸다. 숙성이 필요한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지난 일요일, 동생들이 모두 나간 뒤 청소기를 돌리고 방을 닦고, 이불 하나를 덮고 이 영화를 봤다. 실비아의 남편은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며 이혼을 요구한다. 실비아는 이 상황이 믿겨지지 않고, 중년에 찾아온 실연에 견딜 수가 없다. 실비아가 그런다.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이불 뒤집어 쓰고 책이나 읽었음 좋겠어. 그런 그녀를 위해 절친 조셀린이 제인 오스틴 북 클럽을 만든다. 실비아의 딸 엘레그라(그녀는 열정적인 레즈비언). 제인 오스틴을 사랑하는 할머니 베네뎃(그녀는 결혼을 여섯 번인가 일곱 번인가 했다). 제자를 사랑하게 된 고등학교 교사 푸르디(그녀는 유부녀다). 우연히 알게 된 매력적인 연하의 남자 그릭(그는 SF소설 매니아. 제인 오스틴 따위 읽어본 적이 없다. 그가 제인 오스틴을 읽기로 결심한 건 그녀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섯 명이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 여섯 편을 읽는다. 모임은 한 달에 한 번, 각자의 집에서, 와인과 간단한 음식과 함께.

 

    여섯 달이 지나고, 여섯 편의 소설을 읽어 가는 동안 여섯 사람은 각자 조금씩 성장한다. 여섯 달 전보다 좀더 나은 사람이 된다. 실비아는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고 아름다워진다. 엘레그라에게도 실연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더 열정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할머니 베네뎃은 좋은 사람을 만났으며, 푸르디의 남편도 제인 오스틴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릭과 조셀린. 제인 오스틴의 소설 <엠마>의 주인공을 쏙 빼닮은 조셀린은, 엠마처럼, 자신이 이어주려고 했던 사람과 연인이 된다. 이 부분이 아주 근사하다. 조셀린은 그릭을 실비아와 이어주려고 하는데,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실비아에게 잘 대해주는 그릭을 자신이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날 새벽, 조셀린은 그릭이 권해줬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읽지 않고있던 소설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릭은 그녀에게 SF소설 두 권을 선물했는데, 그 날 그녀는 두 권 모두를 읽어 버린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그녀는 차를 타고 그릭의 집 앞으로 간다. 그 새벽에! 차마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들뜬 마음을 다독거리며 차 안에서 잠이 든다. 아침 출근길에 그릭이 조셀린을 발견한다. 이 영화는 이런 이야기. 좋다. 결국 모든 사랑은 이루어지고,  책을 읽는 장면들이 계속 나온다. 침대에 누워서, 벤치에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어제 이 책을 소개받았는데, 아주 근사한 여행기인 것 같다. 이 책의 소개글 중에 이런 부분이 있었다.

 

  『송라인』의 표지에는 해진 수첩이 놓여 있다. 이 수첩은 바로, 채트윈이 숭배에 가까운 말로 애정을 표했던 ‘몰스킨’이다. 이 책만의 가장 두드러진 점은, 오늘의 일이 내일의 계획을 정하듯, 하나의 탐구로부터 다음의 탐구를 계획해나가는 ‘철학적 여정’이라는 점인데, 이 여정에서 채트윈은 한시도 저러한 수첩을 놓지 않았다.

 

    토요일, 대학로에서 나도 저 색깔의 몰스킨을 샀다. 두 권을 사서 친구와 하나씩 나눠 가졌다. 술에 취한 어젯밤에도 그 노트에 일기를 쓰고 잤다. 내 노트도 채트윈의 것처럼 너덜너덜해지면, 나도 뭔가가 되어 있겠지. 고맙게도 비가 올 것 같다. 나는 오늘 커피도 마시고, 미술관에도 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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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의 영화

from 극장에가다 2012. 9. 2. 21:24

 

   금요일 밤에는 동대문에서 <이웃사람>을 보고, 일요일 오후에는 건대에서 <577프로젝트>를 봤다. 요즘 나는 영화를 보면서 한 번씩 꼭 울어주고 있으니까, 이 두 영화를 보면서도 눈물을 흘러주었다.

 

   <이웃사람>에서 김윤진은 새엄마로 나온다. 그 날, 중학생 딸 학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마중을 나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갑작스런 사고로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그리고 그 날, 딸이 실종되고, 얼마 뒤 토막된 사체로 발견된다. 그 뒤 열흘동안 매일 밤 죽은 딸이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찾아온다. 딸깍, 하고 현관문이 열리면 김윤진은 얼음이 된다. 죽은 딸은 김윤진의 등에 대고 조그만 소리로 말한다. 다녀...왔어요. 김윤진은 매일 밤, 딸이 찾아올까봐 공포스럽다. 두 사람 다 조심스런 성격이라, 서로를 좋아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워지지 못했다. 그러던 중 딸이 사고를 당한 것. 매일 밤 무서워 식탁 밑에 기어가 덜덜 떨고 있는 아내를 보며 남편은 말한다. 당신은 그 애를 당신 딸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던 거야. 나는 꿈에라도 그 아이를 만났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 날, 김윤진은 어김없이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딸깍, 현관문이 열렸다. 뚝뚝, 교복에서 빗물 떨어지는 소리. 죽은 딸이 김윤진의 등에 대고 말한다. 다녀...왔어요. 오늘도 대답없는 새엄마의 등을 보고 그냥 방으로 들어가려는 딸. 다음 장면. 김윤진이 등을 돌리고, 용기 내서 말한다. 응. 그래. 배고프지. 그리고 두 사람은 껴안고 엉엉운다. 미안해. 무서웠지. 엄마가 미안해. 

 

    <577프로젝트>는 하정우가 2년 연속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 국토대장정을 하겠다는 말에서 비롯된 영화다. 그 말을 실행에 옮기고 영화로도 만든 것. 이 영화에서는 점심밥을 먹으러 들어간 어느 식당에서 식당 사장님이 한 말에 울었다. 영화는 중반 즈음이었다. 초반에는 그저 신나고 의욕이 충만했는데, 하루 8시간 이상씩 걸으면서 다들 조금씩 지치고 있었다. 사장님이 그러신다. 나중에 나이들면 돈을 십미터 앞에 던져놔도 못 걷는다고. 그 아름다운 청춘을 아끼지 말라고.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아았다. 영화 속에서 누군가도 사장님의 그 말에 울어버렸다. 정말 아름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아름다운 청춘,이라니. 공효진과 하정우와 십여 명의 배우들이 오백칠십칠키로를 함께 걷는다. 서울에서 해남까지. 해남에 도착하고 누군가 그런다. 해남에 금은보화가 있을 줄 알았는데, 와 보니 아무 것도 없네. 하정우도 그런다. 정말 아무 것도 없네.

 

    토요일에는 김기덕 감독이 나온 두드림을 봤다. 거기서 노홍철이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김기덕 감독이 엠씨들에게 살면서 펑펑 울어본 적이 있냐고 묻는데, 노홍철이 그런다. 자신은 항상 즐겁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100의 에너지가 있으면 80을 쓰곤 했다고. 그런데 방송을 하면서 주위 사람들이 100의 에너지를 쓰면서 열심히 방송하는 걸 보면서 자신도 80만 쓸 수는 없었다고. 그래서 100을 쓰면서 일을 했는데, 어느 날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는데 거기에 확 늙어버린 자신이 있었다고. 갑자기 그게 서러워 엉엉 울었다고.

 

 

 

구월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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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에 대하여

from 극장에가다 2012. 8. 12. 23:58

 

 

 

    토요일, 접속무비월드를 보는데, '영화는 수다다'에서 이동진이 그랬다. 좋은 영화란 어떤 영화인지에 대해 질문을 많이 받는데, 자신이 생각하기에 좋은 영화란 영화가 끝났는데도 계속되는 이야기인 것 같다고. 극장을 나와서도 계속 떠오르고, 회자되고, 논쟁이 되는 영화라고. 그리고 이 영화 <케빈에 대하여>가 그렇다고. 밥을 챙겨먹고, 낮잠도 자고, 내내 뒹굴다가 저녁에 나왔다. 광화문에서 이 영화를 봤다. 강렬한 영화였다. 영화의 주제는 한없이 무거운데, 지루할 틈이 없었다. 재밌었다. 배우들의 연기도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잔상이 많이 남는 영화다. 이야기도 그렇고, 색감도 그렇고. 이동진의 말대로, 극장을 나선 후에도 계속되는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그것이 누구의 잘못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극장 여기저기에서 긴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나역시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영화다. 돌아오는 길에 바디샵에 들러 올리브향 바디워시를 사고, 역앞에서 파는 한묶음에 이천원하는 장미꽃다발도 샀다. 교보에 들러 보노보노 만화책을 사고, 원작 <케빈에 대하여> 앞부분을 조금 읽었다. 소설에는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던 재판 장면이 자세히 나온다고 한다. 재판과정에서 사람들은 틸다 스윈튼, 그러니까 케빈의 엄마에게 비난을 퍼붓는단다. 우리 아이들은 모두 같은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고, 유해한 것을 접하는 것도 같다고. 하지만 자신들은 옳은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가르치며 키웠다고. 그래서 내 아이는 너의 케빈처럼 되지 않은 거라고. 그러니까 니가 잘못한 거라고. 아무래도 소설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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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에게의 편지

from 극장에가다 2012. 8. 5. 20:40

 

 

   자막버전으로 봤는데, 그러길 잘했다. 부천에 갔을 때, Y언니가 그랬다. 이 영화가 의외로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어떤 사람들은 울었다더라고. 그래서 어떻게든 이 애니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요즘 좀 울고 싶거든. 길을 걷다가, 계단을 오르다가, 버스를 타고 가다가, 밥을 먹다가 그런 순간들이 내게 온다. 아, 나 좀 울고 싶다. 어제 이 영화를 건대에 가서 봤다. 건대 안에 극장이 있다. 조조로 딱 한 타임만 하길래 일어나서 세수만 하고 밥을 챙겨먹고 서둘러 나갔다. 정말정말 더운 여름이다. 이런 더위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여름의 한 가운데. 나와 다른 여름을 보내고 있는 모모의 이야기를 보고, 나는 좀 울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마음이 철컹하더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울고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한글 제목은 '모모와 다락방의 수상한 요괴들'인데, 영화를 보니 일본어 제목은 모모에게의 편지였다. 모모는 얼마 전 아빠를 떠나보냈다. 갑작스런 사고였다. 모모는 마지막으로 아빠와 나눈 대화가 마음에 걸린다. 아빠와 엄마의 결혼기념일을 위해 공연티켓을 준비했는데, 아빠에게 갑자기 일이 생겼다. 모모는 티켓을 샀다는 걸 말하지 않고 오늘만 안 가면 안되느냐고 한다. 아빠가 오늘만 이해해달라고, 정말 미안하다고 하자, 화가 나 티켓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안 돌아와도 돼'라고 말하며 방을 나가버린다. 그게 아빠와의 마지막이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아빠 방에 들어가서 서랍을 보는데, 거기에 '모모에게'로 시작하는 아빠의 편지가 있다. 그런데 그것 뿐이다. '모모에게'. 아빠는 뭔가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을 텐데, 그것 뿐이다. 모모에게. 모모는 그 종이를 뜯어서 항상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가끔씩 꺼내서 가만히 바라보곤 한다.

 

    영화는 남편 없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모모의 엄마가 모모를 데리고 어릴 때 요양한 적이 있는 섬으로 이사를 가면서 시작한다. 삼촌과 숙모의 오래된 집의 별채에서 살게 된 모모는 이 섬이 싫다. 엄마가 새로운 일을 배우기 위해 매일 집을 비우는 것도 싫다. 혼자 먹는 밥도 싫다. 아빠는 하늘나라로 갔는데, 엄마가 씩씩한 것도 싫다. 새로 사귄 섬 친구들은 다리에서 다이빙을 잘도 하는데, 자신은 겁이 나서 뛰어내리지 못하는 것도 싫다. 그런 모모에게 어느 날 요괴들이 눈에 보인다. 처음에는 요괴들을 보고 무서워 달아나기 일쑤였지만, 어떤 계기로 요괴들과 친구가 된 모모. 모모와 요괴들은 땀을 흘리며 잊을 수 없는 여름을 함께 보낸다. 그리고 어마어마했던 태풍이 지나간 뒤, 모모는 다이빙에 성공한다. 그건 무더운 여름이 지났다는 이야기고, 아빠를 떠난 보낸 모모가 괜찮아졌다는 이야기다. 모모는 밝아졌고, 다행스럽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성장했다. 다이빙에 성공한 모모에게 친구들이 그런다. 야, 너 멋있다. 너 같이 빨리 성공한 아이는 처음이야. 섬 아이가 다 됐구나. 모모가 웃는다. 물 속에서 아주 해맑게. 자신이 보낸 그 해 여름 같이. 건강하게. 요캇따, 모모.

 

    다행이다. 이 영화를 놓치지 않고 한 여름의 극장에서 보아서. 내게 여름이 남아 있어서. 나도 남은 여름, 모모처럼 건강하고 밝아지고 아주 조금 성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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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부천영화제에 다녀왔다. 지난 토요일. 딱 한 편만 보고 바로 올라왔지만, 대만족. <반딧불 언덕에서>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영화는 두 시였고, Y언니랑 만화박물관에서 두 시 즈음 보기로 했다. 부천까지는 머니까 여행하는 기분으로 가자. 기분 좋을만한 책도 골랐다. 이걸 전철에서 다 읽어버리자며 룰루랄라 챙겨두었지만, 토요일 나는 늦잠을 자고, 늦게 준비를 시작하고, 동생이 컵라면을 먹고 있었는데 그게 너무 맛있어 보여서 짜장 컵라면에 신김치를 곁들여 한 컵 해치우고 나섰다. 당연히 늦었다. 여유있게 책을 읽으며 여행하는 기분을 내기는 커녕 조마조마해서 자리가 났는데도 앉지도 못하고 서서 계속 발만 동동 구르면서 지하철 네비게이션 앱 검색만 해댔다. 그 앱에 의하면 나는 1시 53분에 부개역에 도착한다. 거기서 버스로 10분 거리라니까, 택시를 잡아타고 가면 2시 조금 넘어 도착하겠지. 영화제에서 10분까지는 들여보내줬었나, 아니다. 아예 시작하면 안 보내줬었나. Y언니랑 조마조마한 메세지들을 주고받다보니 어느새 송내역. 거기에 택시승강장이 있다고 해서 내렸는데, 택시 타려는 사람들 줄도 길고, 택시를 타니 엄청 막히고.

 

    Y언니는 내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아예 안 들어올까봐 걱정했단다. 언니는 나를 잘 아는 거지. 사실 진짜 그러려고 했거든. 2시 10분쯤 도착해서 완전 뛰어서 상영관 도착. 다행히 들여보내준다! 대신 자봉아이가 안내해주는 자리에만 앉을 수 있단다. 상영관 안은 아주아주 깜깜해서 한 치 앞의 계단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자 자봉 '남자'아이가 제 손을 잡으세요, 한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나를 안내해준다. 내가 넘어질 거 같으면 더 손을 꽉 잡아주고, 발을 못 디디고 있으면 한 계단만 더요, 바로 지금 계단이요, 이제 다 왔어요, 한다. 아, 친절한 남자'아이'. 그렇게 어렵게 보게 된 <반딧불 언덕에서>. 불빛이 너무 환해서 방해될까봐 핸드폰도 못 꺼냈다. 그래서 Y언니에게 들어와 보고 있다는 문자도 못 보냈는데, 언니는 영화가 계속 될수록 걱정했단다. 이 좋은 걸, 이 아이가 못 보고 있으면 어떡하지, 하고. 나도 같은 상영관에서 언니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다, 이 좋은 걸 놓치지 않고 보아서. 우리는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이 영화, 정말 좋다, 라고.

 

    영화에도 내내 여름이었다. 옛날 우리의 시골같은 풍경이 영화 내내 펼쳐진다. 댐이 들어서기 직전 어느 일본의 산골 마을. 반딧불이 별처럼 반짝이는 그 곳으로 주인공은 시간여행을 한다. 그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짧지만 깊은 우정도 만들어가고, 함께 다이빙도 하고, 함께 수영도 하고, 함께 달리기도 하고, 함께 목구멍이 뻥하고 뚫릴만큼 시원한 냇물을 벌컥벌컥 들이키키도 하고, 그 냇물 위에 동동 띄워놓은 토마토를 한 입 깨물어 먹기도 하고, 마을의 마지막 축제를 위한 등을 만들기도 하고, 불꽃놀이도 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기도 하고, 눈물이 핑 도는 이별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인사한다. 사요나라. 짧지만 길었던 나의 여름방학아, 안녕. 마지막 엔딩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것만 빼면 영화는 정말 좋았다. 나도 이번 여름에 저렇게 인사를 고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벅차고 서운한 마음을 가득 담아서, 안녕, 올 여름아. 내년에는 오질 않을, 그래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단 하나 뿐인 올 여름아, 안녕. 그렇게 인사할 수 있으려면 지금쯤 뭔가 열심히 그리고 신나게 하고 있어야 하는데. 쩝.

 

    언니와 나는 부천으로 갈 때와는 달리, 여유롭고 풍요로운 마음으로 서울로 왔다. 시내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와 현대백화점에서 화장실에 들르고, 시원한 아이스 커피를 하나씩 사들고 좌석버스를 탔다. 정말 쾌적하고 안락한 좌석버스였다. 파주의 이천이백번 버스와는 비교가 안 되는. 커튼을 걷고 창밖을 바라보면서 이런 저런 얘기도 하고, 가만히 있기도 하고,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맥주집을 검색하기도 하면서. 그리고 그 날 맥주를 마시면서 한 얘기 중 제일 많이 한 건, 오늘의 영화가 얼마나 좋았는지. 언니는 이 영화가 영화제에서 본 영화 중 베스트 2라고 했다. 내게는 몇 위쯤 되나 점수를 매겨보려고 해도, 영화제에서 본 영화들은 왠지 기억에 남는 게 그리 많지가 않다. 어쩜 내게는 베스트 1인지도 모름. 올 여름에는 반딧불을 보아도 좋겠는데.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니더라도 한 마리 혹은 일곱 마리 정도여도 충분할 텐데. 아, 맞다. 연필도 샀다! 취미가 영화제 연필 모으는 건데, 지난 부산이랑 전주에는 연필이 벌써 다 팔렸거나 아예 만들질 않아서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구입 완료. 아, 정말 짧지만 알찬 부천 여행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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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키스

from 극장에가다 2012. 6. 26. 23:43

 

 

   일요일 오후, 내가 좋아하는 광화문의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개봉했을 때 포스터만 보고 유치한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평들이 좋았다. 친구에게서 토요일 밤에 연락이 왔다. 이 영화를 보지 않았으면, 일요일 오후에 같이 보자고. 일요일은 무척 더웠다. 땀이 그냥 줄줄줄 흐르는 날씨였다. 친구와 만나 영화를 보고 종로까지 걷고, 다시 광화문으로 돌아와 카레를 먹고, 명동으로 걸어 가 버블티를 사 먹고, 다시 종로로 돌아와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이 영화가 다시 생각났다. 이 고마운 영화가, 무료한 6월의 일요일 오후에 우리에게 와 주었다. 기억에 남았던 장면들을 떠올리니 기분이 좋아졌다. 집에 와 2주 동안 고민했던 구두를 주문했다. 나도 사랑스런 오드리 토투처럼 구두를 또각거리며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졌다.

 

    생각해보니, 감독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을 사랑한 것 같다. 한 사람도 허투루 지나간 사람이 없다. 오드리 토투의 남편은 잘 생기고, 멋진데다 용기까지 있다. 그는 오드리 토투에게 첫 눈에 반했고, 그 날 그녀에게 대쉬해 그녀와 연애를 시작했다. 그녀의 두번째 남자는 못 생겼지만, 섬세하고 유머감각이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충격으로 정신을 놓고 있던 오드리 토투의 키스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그 키스로 인해 그녀를 사랑하게 됐다. 영화는 그때부터 이 못 생긴 남자가 얼마나 근사한 사람인지 보여준다. 그는 그녀가 하는 말을 기억해 두고, 감동적인 선물을 건넬 줄 아는 사람. 그녀 앞에 있으면 자신이 최상의 사람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 그녀가 부르면 언제나 달려가는 사람. 이 남자, 정말 못 생겼는데 영화가 계속될수록 그렇게 못 생겨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잘생겨 보인다고는 말할 수 없는 ㅠ) 그리고 심지어 질투의 화신, 사장도 인간미가 철철 넘친다. 또 한 사람. 오드리 토투의 친구. 클럽 장면이었다. 오드리 토투는 클럽에서 혼자 춤을 추고, 친구는 그녀의 슬픔을 본다. 친구의 눈에 금새 눈물이 고인다. 친구는 두번째 남자를 만나고 실망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친구들 앞에서 남자에게 무안을 준다. 그 친구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이 올까. 오드리 토투에게는 왔다. 아주 좋은 사랑이, 아주 근사한 사람이. 그녀는 이제 '그 날', 중간쯤 읽다 덮어버린 책을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책갈피가 있는 페이지를 펴고 다시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오후에 보기 딱 좋은 영화. 영화를 보고 나면 오드리 토투와 두번째 남자가 그랬듯이 조금 걷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영화의 원제 'La delicatesse'는 섬세함, 배려 깊음이라는 뜻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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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센던트, 봄

from 극장에가다 2012. 3. 1. 14:14




   이 영화를 이틀 연속으로 봤다. 처음에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울었다. 두번째는 어떤 장면에서 울었다. 월요일,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OST를 들으면서 야근을 하는데, 그 생각이 났다. 처음에 모든 장면에서 울고, 두번째에 어떤 장면에서만 운 것. 어떤 슬픔을 견딘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어떤 슬픔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무뎌지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첫번째는 모든 것에 울고, 두번째는 어떤 것에 우는 것. 어떤 것들은 여전히 슬프고, 어떤 것들은 견딜 수 있어지는 것. 2월에 나는 <디센던트>라는 제목의 영화를 두 번 봤다.

   하와이에도 슬픔이 있다. 고통도 있고, 고독도 있다. 하와이에도 떠나는 자가 있고, 남겨지는 자가 있다. 이 영화는 남겨지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 같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이 남겨지는 세 사람이 이 세상을 꽤 잘 버텨나갈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엄마가 혼수상태인 상태로 병원에 있을 때 덮었던 노란색 이불을 아빠와 두 딸이 함께 덮어가는 장면. 세 사람은 휴양의 섬 하와이에서 일상을 살아가며 또 다른 슬픔을 만들고, 또 다른 고통을 만들고, 또 다른 고독을 느끼며,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며 살아갈 거다.

    아침에 시장에 가서 딸기도 사고, 담백한 맛 베지밀도 사고, 잡채 해 먹으려고 당면과 버섯도 사고, 새 칫솔과 물티슈도 샀다. 꽃집에 새로 나온 화분들도 구경하고, 갓 나온 빵 냄새도 맡고, 열번 다 찍은 쿠폰으로 라떼도 사 먹었다. 삼월이 되니 공기가 달라졌다. 봄이 왔나 보다. 당연하게도 중랑구에 사는 내게도 슬픔이 있고, 고통이 있고, 고독이 있다. 요즘 나는 술을 마시고 지하철만 타면 외롭다. 누군가 결혼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외롭고, 새로 만들어진 동아리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도 외롭다. 책은 잘 읽히지 않고, 내 나이만 계속 곱씹게 된다. 하지만 나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고통이 되어주면서. 요시다 슈이치의 새 책이 나왔고, 어제는 회식을 했다. 일산에서 합정까지 택시를 타고 오면서 최근 연애를 시작한 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좋아요. 아주 좋아요. 그 분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 봄이 오고 있나니. 이소라의 다섯번째 봄은 없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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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코와 리타

from 극장에가다 2012. 2. 12. 11:14

나는 죽은 뒤에 뭔가 남는다거나, 다시 태어난다는 거, 믿지 않아.
왜.
믿고 싶지 않으니까.
어째서.
가혹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아.
뭐가 가혹해.
예를 들어, 네가 죽어서 나한테 붙는다고 해도 나는 모를 거 아냐.
모를까.
모르지 않을까.
사랑으로, 알아차려봐.
농담이 아니라, 너는 나를 보는데 내가 너를 볼 수 없다면 너는 어떨 것 같아.
쓸쓸하겠지.
p.56 대니 드비토

   너의 이름은 유라. 나의 이름은 유도씨. 황정은의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화자인 나는 유라. 죽은 원령이다. 나는 죽었고, 유도씨는 살아가고 있다. 나는 죽었고, 원령이 되었다. 언젠가 두 사람이 침대에 나란히 누워 나눴던 말. 내가 먼저 죽으면 유도씨가 나를 붙여줘. 나는 죽어서도 쓸쓸할 테니까. 그러자 유도씨가 붙어. 얼마든지 붙어, 라고 한 그 대화 때문일 거다. 나는 유도씨가 살아가는 것을 지켜본다.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무심코 부르는 모습을, 새로운 여자가 집으로 찾아오는 모습을, 두 사람이 결혼을 하는 모습을, 나와 유도씨가 함께 기르던 고양이 복자가 죽는 모습을, 유도씨에게 아이가 생기는 모습을, 새로운 여자 그러니까 미라씨가 죽는 모습을, 결국 유도씨가 죽는 모습까지. 쓸쓸하게, 오랫동안 지켜본다. 황정은의 소설들이 그렇듯, 이 소설 또한 무척이나 쓸쓸한데 따듯하다. 

    어제는 모모에 가서 <치코와 리타>를 보았다. 멀어서 갈까말까 망설이다가 지금 보지 않으면 못 볼 거 같아서 지하철을 타고 갔다. 가는 길에 이런 문장을 읽었다. "누군가 가슴속에 들어왔다고 인정하는 순간 너는 바보가 되는 거야.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널 이길 수 없어. 알겠니, 모얀?" 화장실을 다녀와서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는 그 곳에 있던 임범의 <내가 만난 술꾼> 문소리 편을 읽었다. 그리고 <치코와 리타>를 보았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야기는 진부하고, 마지막 엔딩은 정말 참을 수 없었지만, 이 영화가 시종일관 풍기는 분위기, 그리고 음악이 꽤 좋았다. 극 중 리타의 목소리가 참 좋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들. 경연에서 우승한 곡도 좋았지만, 나는 치코와 리타, 두 사람이 처음 만날 때 불렀던 그 노래, 베사메 무초가 참 좋았다. 이 노래가 이런 가사를 가지고 있는지 처음 알았다. 키스해 달라고. 오늘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키스해 달라고. 당신을 잃을까봐 두렵다고. 항상 당신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해 보라고. 내일 내가 멀리 있어 보지 못하게 된다고. 그러니 키스해 달라고. 오늘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영화를 보고 나와 두세 정거장을 걸었다. 쓸쓸한 음악들을 들으면서. 그러자 이 밤이 꽤 근사하게 느껴졌다. 다시 전철을 타고 집에 와 황정은의 소설을 다시 읽었다. 어느새 잠이 들었고, 꿈을 꿨다. 꿈에서 전철이 뒤집혔다. 그걸 나는 지켜봤다. 새로운 카페에도 갔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도 만났다. 그러다 새벽에 깼는데, 혼자였다. 티비를 켜고 리모콘을 돌리니 <악마를 보았다>의 마지막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이병헌이 모든 것을 끝내고 텅빈 도로 위를 걸으며 엉엉 울기 시작하는 장면. 그걸 보다가 다시 베사메 무초를 찾아 들었다. 리타의 목소리. 당신을 잃을까봐 두렵다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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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 내내 뒹굴다가 일요일 저녁에 청량리에 영화를 보러 갔다. N언니를 만난 날, 언니는 라오스에 꼭 가보라고 했다. 아직도 거길 생각하면 설레인다고, 아직도 라오스에서 만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고, 지금까지 언니가 다녀온 여행지 중에 최고라고 했다. 언니의 말을 듣고 집에 돌아와 인터넷 창에 '라오스 여행'이라고 치니, 모두들 거기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 뿐이었다. 과연 어떤 곳일까 궁금해졌다. 그리고 언니는 언젠가 삿포로도 꼭 한번 가고 싶다고 했다. 겨울의 삿포로. 삿포로의 골목집 어느 이자까야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조용한 연기. 그 딱 한 풍경을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한 건 언니였나, 언니가 언젠가 들었던 라디오의 유희열이었나. 일요일에 <머니볼>을 봤고, 나도 삿포로 골목길 이자까야의 풍경을 봤다. 이거면 이 영화는 됐다고 생각했다. 이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브래드 피트가 이혼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는 딸에게 기타를 사 주기 위해 기타가게에 들러 딸의 노래를 들은 순간이었다. "인생은 미로같고 사랑은 수수께끼 같죠. 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어요. 혼자서는 할 수 없어요. 시도는 해 봤지만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속도를 늦춰요. 그리고 멈춰요. 안 그러면 내 심장이 터져 버릴 거예요. 왜냐하면 너무나 그래 그건 내가 아닌 게 되잖아요." 내겐 이게 <머니볼>의 삿포로 겨울 뒷골목 풍경이었다. 잔잔하고 좋은 영화였다. 영화를 보고 집까지 걸어왔다. 늘 하던 실수를 또 했다. 집 쪽이 아니라 경희대 쪽으로 걸어 간거다. 청량리에서 영화를 보고 걸어오면 늘 하던 실수다. 늘 똑같은 이정표를 보고 나서 아차차, 잘못 왔구나 하고 돌아섰다. 역시 속도를 늦춰야 한다. 




    <머니볼>을 보고 나니, 한동안 증발했던 영화에 대한 애정이 마구마구 샘솟았다. 오늘은 퇴근을 하고 시간에 맞춰 <50/50>을 보러 갔다. 케이에프씨에서 트위스터를 사고, 콜드스톤에서 아메리카노를 샀다. 평일 영화표는 팔천원이구나, 표를 보고 알았다. 영화를 보는데, 조셉고든레빗이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친구는 그걸 이용해 여자를 꼬시자고 한다. 같이 사는 애인은 항암치료를 받는 병원에는 같이 들어가지 않겠다고 한다. 병원의 부정적인 기운을 받고 싶지 않아서란다. 그러던 중 잔잔한 음악이 조용히, 여러번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오늘 지하철 안에서도, 지금 이 순간에도 이야기에 위안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그리고 앞으로도 그 사실은 변함없을 거라는 걸. 회사에서 나는 매일 서른 통 이상의 메일을 받는데, 그 메일 하나하나에 하나 혹은 둘 이상의 이야기가 있다. 매일 지하철 안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읽고 본다. 혹은 듣는다. 오늘은 오뚜기가 되어가는 어느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엄마아빠 생각을 했다. 매주 목요일 신촌에 가서 일곱 개의 이야기를 듣는다. 주말에는 티비 앞에 앉아 수십 개의 이야기를 보면서 낄낄거린다. 술을 마시며 하나의 이야기를 듣고, 커피를 마시며 두 개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지금 나는 대한민국 서울시 광진구에 있는 한 극장 안에 앉아 저 멀리 미국에서 날라온 이야기를 보며 울고 있다. 힘들었던 월요일과 화요일을 여기서 위안받고 있다, 라는 생각이 터무니없이, 문득, 새삼스럽게 들었다. 고마웠다. 할리우드에서 날라온 이 이야기가 나를 좀 더 나은 나로 만들어 주고 있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후배녀석에게 연락이 왔다. 오랜만이니, 분명 이 아이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하지? 물었더니 아니란다. 그저 생각나서. 이름이 있길래, 라는 대답이었다. 아, 뭔가 미안하고 다행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래, 우리 한때는 그런 사이였는데, 이제는 연락오면 분명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이라니. 내일부터 추워진단다. 이번 주에 눈이 올 지도 모르겠다. 준비하고 있어야지. 오늘 나는 한 소설가를 새삼스레 사랑하게 됐다. 그의 이야기가 내 마음을 스르르 움직였다. 그의 새 책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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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내 잤다. 6시쯤 한 번 깨고, 9시쯤 한 번 깨고, 12시쯤 한 번 깨고. 3시에야 정신을 차렸다. 은행에 가서 동생이 모은 동전을 바꾸고, 마트에 가서 믹스커피랑 파인애플 사고, 동사무소에 가서 투표를 했다. 집에 오는 길에 새로 생긴 커피집에서 라떼를 샀다. 커튼 내리고 불 다 끄고 라떼 마시면서 이 영화를 봤다. 개봉했을 때 보고 싶었는데, 개봉관이 적어 놓쳤다가 이제야 본 영화. 원래 오늘 광릉수목원에 다녀오고 싶었다. 배가 아파 내내 잠만 잤는데, 다행이었다. 이번 휴가는, 이 영화 하나로 충분했다. 아네트 베닝의 주름이 아름다웠다. 

    아네트 베닝은 14살에 나오미 왓츠를 낳았다. 얼굴도 보지 못하고 딸은 바로 입양되었다. 나오미 왓츠는 새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새엄마와는 연락도 않고 지내지만 성공한 변호사다. 하지만 그녀는 외롭다. 아네트 베닝은 날마다 딸에게 편지를 쓴다. 부치지는 못하는 편지. 어느 날 그녀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그녀는 말한다. 당신이 어떻게 내게 온걸까. 천사같은 남자는 딸을 찾아보자고 한다. 더이상 후회하지 말자고. 어쩌면 그 아이도 당신을 찾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아네트 베닝은 결심한다. 이름도 모르지만, 그 아이를 찾아보자고. 입양기관에서는 편지를 남길 수 있다고 말한다. 어느 날, 그 아이도 엄마를 찾고 싶어 이 기관에 찾아오게 되면, 그 편지를 읽을 수 있게 될 거라고. 그리고 연락하는 건 그 아이의 선택이라고. 아네트 베닝은 묻는다. 그러면 그 아이도 지금의 자기처럼 언젠가 이렇게 왔을 수도 있겠네요. 왔지만 편지를 남기지 않았을 수도 있겠네요.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편지를 남긴다. 편지는 실수로 파일 안에 담겨지지 않았고,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나지 못한다. 영원히. 마더 앤 차일드. 

   "난 네가 머리스타일을 바꾸고 새 신을 신은 것도 보지 못했구나. 초경은 언제 했니? 그때는 누가 도와줬니? 설명은 제대로 해줬니? 내가 빗소리를 듣던 그날 밤 너도 그 빗소리를 들었니? 넌 무엇으로 마음의 안정을 얻었니?"

    좋은 배우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래서 좋은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완득이>도 좋았다. 유아인의 표정들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가 더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을 거 같아서, 그의 팬이 되기로 했다. 완득이에게는 시합에 지고 있을 때, 그래서 맞아터지고 있을 때 미소짓는 스승이 있다. 완득이가 부러웠다. 그런 스승이 곁에 있어, 그애는 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테니까. 이제 <비우티풀> 보는 일만 남았다. 오늘 비가 내려주었어도 좋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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