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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일 밤의 홍수
    모퉁이다방 2009. 5. 24. 16:41
        어제는 하루종일 친구 집에서 친구가 해 주는 밥을 먹고, 티비를 보면서 뒹굴었다. 오전에 동생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언니, 노무현이 자살했대. 친구와 나는 말도 안 된다면서 티비를 틀었는데, 뉴스에서 앵커가 이상한 말을 하고 있었다. 노무현이 자살을 했는데, 자살인지 실족사인지, 그리고 확실히 사망한 것인지 확인은 안 되고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앵커 밑에 자막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이라고 커다랗게 씌여져 있었다. 우리는 무슨 뉴스를 저렇게 보도하느냐고 투덜되었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밤 늦게야 친구집을 나섰다. 지하철에서 지금 읽고 있는 책 <파크 라이프>를 펼쳤다. 문장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계속 어떤 한 문장만 떠올랐다. '책을 읽을 수도, 글도 쓸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도 쓸 수가 없다. 건대 입구에서 7호선으로 갈아탔다. 집에 도착하니 11시 30분이었다.

        얼마 전부터 욕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조금씩 새어나왔다. 세탁기랑 연결해 놓은 수도꼭지인데,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제는 그 물소리가 내내 신경이 쓰였다. 유독 다른 날보다 더 많이 새고 있는 거 같아서, 세탁기와 연결되어 있는 호수를 빼어봤는데 갑자기 물이 콸콸 쏟아졌다. 수도꼭지를 활짝 다 열어놓았을 때보다 더 많은 물이 콸콸 쏟아졌다. 수도를 잠그려고 보는데, 그게 다 잠근 거였다. 다른 방향으로 수도꼭지를 돌리니 그것보다 더 많이 물이 폭포처럼 콸콸 쏟아졌다. 조그만 욕실 바닥에 금새 물이 가득 찼다. 세탁기 호수로 다시 막아보려는데 물줄기가 어찌나 센지 세워져 있던 목욕용품들이 다 쓰러지고, 화장지도 물에 흥건해지고, 천장에까지 물이 튀었다. 내 옷은 이미 물에 흠뻑 다 젖은 상태. 그야말로 대홍수. 잠그지도, 멈추지도 못하는 상태. 순간, 눈물이 났다. 12시가 다 된 이 밤에 그야말로 수도가 터진 것이다. 폭포처럼 쉴 새 없이. 당황해서 동생들한테 전화를 걸었지만, 둘 다 너무 멀리 있었다. 바닥에 물이 금새 차 부엌까지 넘어올 것 같았다. 세숫대야로 물을 퍼서 변기에 부었다. 물 쏟아지는 소리에 귀가 찢어질 것 같았다.

        울먹거리면서 내가 좋아하지 않는, 아니 싫어하는 주인 아줌마에게 전화를 했다. 아줌마가 울먹이는 내 소리를 듣더니 진정하라며 일단 내려가서 계량기를 끈다고 했다. 아줌마가 계량기를 끄셨는지 물줄기가 조금 잦아들었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더니, 괜찮으냐고, 물이 이제 안 나오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줄어들었다고, 밤늦게 죄송하다고, 물이 너무 한꺼번에 많이 나와서 당황했다고 말씀드렸다. 아줌마는 괜찮다고, 어딘가에 연락을 해 뒀으니 사람이 곧 올거라고, 걱정말라고 하셨다. 평소에 내가 알던 신경질적인 주인 아줌마가 아니었다. 주인 아저씨가 오셔서 이리저리 보더니 막혔던 하수구를 뚫어주셨고, 아줌마는 내 옷이 다 젖어있는 걸 보더니 옷을 얼른 갈아입으라고 해 주셨다. 자다가 일어나서 전화를 받고 달려오신 비몽사몽의 수리공 아저씨는 수도꼭지를 새로 바꿔주셨다. 그러고 났더니 정말 거짓말처럼 물이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더라.

        아줌마는 물이 계속 샜냐면서,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바로 말하라고, 그게 나중에 문제가 커진다고 다정하게 말해주고 올라가셨다. 나는 평소의 아줌마랑 참 다르구나, 생각하며 뒷정리를 하고 이불을 깔고 누웠다. 그런데 그 때부터 다시 눈물이 났다. 처음엔 그냥 눈물이 조금씩 흐르기만 했는데, 나중에는 울음이 터져 버렸다. 그 수도처럼. 나는 엉엉 소리내서 울기까지 했다. 새벽 1시였다. 불을 끄고, 티비를 껐다. 그러다 다시 떠올린 그의 문장, '책을 읽을 수도, 글도 쓸 수가 없다'. 그렇게 울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 곳에서는 마음의 짐 모두 내려놓으시고, 편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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