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문태준 시인과 김혜순 시인의 낭독의 밤
    서재를쌓다 2008. 9. 27. 02:38

       문학과 지성사 낭독의 밤에 다녀왔다. 어젯밤, 영화를 보고 맥주 한 캔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묵직한 개똥을 밟았다. 운동화 밑창에 똥냄새가 그득했다. 그걸 샤워기로 씻어내며, 어쩜 그렇게 묵직한 걸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밟아버렸을까, 한치 앞도 못 보는 나를 탓했다. 그런데 문자로 누군가 똥을 밟으면 운이 좋다고 말해줬다. 다행이었다. 좋은 일이 생기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아주 좋은 밤을 보냈다. 낭독의 밤에 다녀왔고, 친구와 술을 마셨고, 우린 좋은 이야기를 나눴다. 막차를 타고 집에 들어왔다. 아슬아슬하게 지하철을 놓치지 않았다.

        홍대 4번 출구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구에서 장미꽃과 수국을 파는 아저씨와 분홍색 물티슈를 나눠주며 헌혈을 하라고 외쳐대는 아저씨를 만났다. 그 앞에서 10분 넘게 서 있었는데, 아가씨가 와서 3000원치 빨간 장미를 사 갔고, 아줌마가 와서 1500원치 노란 수국을 사 갔다.헌혈을 하러 아저씨를 따라가는 아가씨도 아줌마도 없었다. 나는 4번 출구 앞에서 내가 좋아하는 허삼관을 생각했다. 

        친구와 나는 이제 이리카페를 잘 찾아간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잘 찾아가는 거다. 친구는 여전히 길을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이제서야 홍대 지리를 알 것 같다. 우리는 행사 시작 30분 전에 도착해서 따뜻한 커피와 차가운 커피를 시키고, 탁자가 있는 푹신푹신한 쇼파 자리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그 사이 까만 뿔테 안경을 쓴 김혜순 시인이 도착했고, 투명한 무테 안경을 쓴 문태준 시인이 도착했다.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슬쩍 시인들의 자리를 훔쳐 보았는데, 문태준 시인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시인들은 각각 세 편씩 자신의 시를 낭독했다. 김혜순 시인은 '양파', '불가살', '전세계의 쓰레기여 단결하라'를 읊었다. 나는 시인이 '양파'를 낭독할 때 눈물이 날 뻔 했다.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옆에 앉은 친구를 쳐다봤는데, 친구의 눈도 촉촉했다.


    양파 
    김혜순         


       시인은 이 시를 소개하면서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낮이 가는 것, 밤이 오는 것, 사랑하는 것, 헤어지는 것, 그런 걸 생각하면서 썼어요. 나는 생각했다. 낮이 가는 것, 밤이 오는 것, 사랑하는 것, 헤어지는 것, 니가 오는 것, 니가 가는 것.

       문태준 시인도 세 편의 시를 낭독했다. '그늘의 발달', '백년', '화분'. 나중에 바쁜 부인을 대신해서 온 아저씨 관객이 물었다. 혹시 상처하셨어요? 시인이 말했다. 아내는 잘 있습니다. 저 때문에 날이 갈수록 말라가고 있습니다만. 그럼 혹시 주변에 친한 분이 그런 일을 당하셨나요? 시인은 그렇지는 않지만, 이라고 말을 시작했다. 나중에 화장실에서 들었는데, 그 아저씨 아주 열심히 필기하시면서 낭독을 들었다고 한다.

       두 시인이 서로의 시 중 마음에 드는 한 편을 골라 낭독하기도 했다. 김혜순 시인은 문태준 시인의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을 낭독했고, 문태준 시인은 김혜순 시인의 '당신 눈동자 속의 물'을 낭독했다. 김혜순 시인은 그 시를 고른 이유를 문태준 시인이 이건 낭독 안 할 것 같아서,라고 했고, 문태준 시인도 웃으면서 자기도 그래서 골랐다고 했다. 아, 우리는 시인들이 반복해서 말하는 '모색'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큰소리로 웃었다. 아, 시도 잘 쓰고 유머감각도 뛰어난 시인들, 이거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문태준


       김혜순 시인은 이런 말을 했다. 당신도 팔, 다리가 있어 떠나는구나. 문태준 시인은 얼마 전 중국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곳에서 보았던 깊고 넓은 동굴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가 그 동굴 속에 흐르는 물을 두고 세상의 눈물이라고 했었나. 당신의 눈물이라고 했었나. 

       차분한 시인에 차분한 관객들이 함께 한 낭독의 밤이 끝났다. 나는 화장실을 다녀오고, 친구는 문태준 시인의 시집을 오천원 주고 샀다. 우리는 문태준 시인의 사인을 받았다. 그는 우리들의 이름을 제일 첫 줄에 쓰고, '무거운 지구가 고독에 잠긴다는 이 가을-'이라고 써 주었다. 멋진 말이다. 나는 이번 가을 내내 이 문구를 떠올릴 작정이다. 

       그리고는 친구와 나는 출입구에서부터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인도식 술집에 들어가서 와인을 마셨다. 우리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 와인 한 병을 둘이서 거뜬히 마셔 냈다. 짭잘한 씬 피자도 시켜 먹었다. 내 얼굴만한(이건 거짓말이다) 와인잔에 보라색 와인을 따르면서 나는 화장실에서 들었던 '시집점'에 대해 친구에게 말해 줬다. 시집을 펼치고 나오는 페이지의 시로 지금 우리의 점을 보는 것. 내가 먼저 했다. 나는 친구에게 두 편의 시가 나오면 어느 게 내 시야? 물었고, 친구는 그럼 펴기 전에 오른쪽, 왼쪽을 말해, 라고 간단하게 말해주었다. 나는 왼쪽이라고 말하고 시집을 펼쳤다. 오른쪽에는 '사랑'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었고, 왼쪽에는 백지였다. 우리는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었다. 나는 말했다. 사랑이 북극에 있다면, 나는 남극에 있는거야. 친구는 니가 그럼 그렇지,라고 말해 주었다. 친구는 오른쪽이라고 말했다. 친구가 펼친 페이지에는 오늘 문태준 시인이 낭송했던 '백년'이 있었다. 아저씨 관객이 상처 경험이 있냐고 말했던 시다. 우리는 또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웃고나니 어쩐지 조금 서글퍼졌다. 

        11시 30분에 술집에서 일어났다. 늦게 도착하는 지하철을 타고 나란히 앉아서는 내 엠피쓰리 플레이어에 들어있는 문태준 시인이 직접 낭송한 시 두 편을 들었다. '문장'에 있던 걸 녹음해두었던 거다. '바닥'과 '가재미'. 달리는 지하철도 흔들리고, 시도 우리 마음을 흔들었다. 가을의 바닥, 가재미의 한쪽 눈.김연수 작가의 황순원 문학상 시상식에 축사를 해준 문태준 시인의 파일도 함께 들었다. 지하철이라 깔깔거리지는 못하고,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 세상은 이렇게 찡하고 이렇게 재미있고 이렇게 따스한 곳이다. 

       그리고 지금은 금요일 밤. 실은 토요일 새벽 2시지만, 내게는 금요일 밤이다. 너무 좋은 밤, 시인을 만나고 돌아온 밤, 와인과 친구에 흠뻑 취한 밤, 설레이는 밤, 아름다운 밤, 사랑스런 밤. 나는 이 밤을 길게길게 즐기다 잠들어서 달의 뒷면에 도착하는 꿈을 꿀 거다. 그 곳에서 나는 강아지 로버와 달빛을 쫓으며 토끼는 죽이지 않고 신나게 뛰어다니며 놀거다. (이건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의 내용이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