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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라하이나 거리에서 시작되었다. 라하이나 거리는 마우이의 메인 스트리트라고 한다. 왠만한 상점들은 이 곳에 다 있어 선물을 사기에도 좋고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고. 별다른 계획없이 하루에 하나씩 기억에 남을 일을 해보기로 한 우리는 전날 바다 위에서 저녁도 먹고 석양도 구경할 수 있는 선셋요트투어를 예약해뒀다. 모이는 장소가 라하이나 거리에서 차로 이십분 정도여서 라하이나 거리에서 점심을 먹고 시간에 맞춰 가기로 했다. 아침은 느즈막히 일어나 전날 마트에서 사온 라면과 남은 고기로 무려 아침 스테이크를 해먹었다. 사이좋게 먹고 길을 나섰다. 오늘도 마우이의 선명함은 이상무. 라하이나에서 주차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점심을 먹으려고 한 치즈버거인파라다이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할 수 밖에 없었다. 주차장에서 내려 부러 해변쪽으로 걸었다. 이때만해도 분위기가 좋았지. 하와이의 파도, 구름, 햇빛. 각자 쪼리와 슬리퍼를 벗고 모래사장의 까슬까슬한 모래와 제법 센 파도를 발끝으로 느끼며 걸었다. 수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서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치즈버거인파라다이스는 유명한 햄버거집이었는데 창문을 열면 바로 바다가 보이는 바다 위에 세워진 오래된 가게였다. 분명 생맥주를 시켰는데 캔맥주가 나왔다. 캔맥주가 이미 컵에 가득 따라진 채 나와서 그냥 마시기로 했다. 컵에 캔을 끼워둔 모양이 귀여웠다. 치즈버거와 어니언링 하나를 시켰는데 양이 많았다. 맛은 나쁘지 않은 정도. 창가에 앉으니 파도소리가 크게 들려 파도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서둘러 요트출발지로 이동했어야 했는데, 현지물건들을 파는 커다란 편집샵에 있어 그곳에 들어갔다가 내가 기분이 상해버렸다. 이유는 어제부터 계속 영어로 말하는 걸 꺼리고 있던 나를 안타까워하던 남편이 계산을 하다 또 못 알아들은 나를 옆에서 도와주지 않고 가르쳤기 때문인데, 내가 너무 감정적이었다. 매장에서 나오자마자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꼭 그렇게 했어야 했냐로 시작해 큰소리로 쏘아붙였고, 예전에도 그런 격앙된 나에게 질린 (연애 때는 참 많이도 싸웠었다) 남편이 나를 두고 그냥 가버렸다(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그 행동에 더 열받은 나는 이 놈을 따라가지 말아버려? 부글부글 상태가 되었지만 방법은 없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숙소로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남편은 멀리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면서 아주 천천히 걸었다. 결국 시간이 꽤 지난 뒤에 주차장에서 만났고 아슬아슬하게 요트 출발지에 출발시간 가까이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출발지를 찾는데 나는 뛰고 남편은 멀찌감치 따라오고. 급해서 울렁증도 잊고 주위사람에게 찾는 장소가 맞는지 물어봤다. 맞다고 해서 아슬아슬하지만 다행이다 안심했다. 사람들이 요트에 타기 전 명단을 작성하길래 틈에 끼여 이름을 적었더랬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왜 이리 출발을 안 하지. 진행요원에게 물어보니 그 배는 아까 떠났다는 거다. 아. 내가 본 예약 사이트의 시간은 배 출발시간이었다. 그러므로 그보다 훨씬 전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어야 했던 거였다. 아직까지 냉전상태였지만 남편이 물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러니 그 진행요원이 다행스럽게도 사무실에 전화를 해보면 다른 날 배를 탈 수 있게 해줄 거라고 답변해줬다. 이게 2차전의 시작이었다.
2차전은 숙소에 도착해 그 전화를 하지 않을 거냐는 남편의 말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전에 안타까운 이야기부터 해야지. 그러니까 돌아오는 길에 넓디 넓은 태평양을 높은 곳에서 감상할 수 있는, 심지어 운이 좋으면 분홍돌고래가 보인다는, 해가 질 때는 석양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서 있기도 힘들다는 장소가 있었는데 뭔가 표지판이 있고 본능적으로 여기가 핫스팟이라는 걸 직감한 남편은 차를 세웠고 내려서 구경을 하자고 했다. 나는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았으므로 거절을 했고 남편은 혼자 보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무척 장관이었다고. (으, 그놈의 자존심) 나중에 그 길을 한번 더 가게 되었는데 그때 내려서 보았지만 밤이라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2차전은 여전히 삐져서 숙소 침대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나에게, 간단한 영어도 못해 자존심이 상한 나에게, 남편이 업체에 전화를 걸어 배를 놓친 우리의 사정을 말하고 다시 탈 수 있는지 물어보라는 말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다시 격앙되어서 내 돈으로 낼 거고, 나는 전화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남편은 그 거금을 그냥 날릴 셈이냐고 했다. 나는 이불 속에서 입을 다물었다. 남편이 방을 나가서 나는 그 틈을 타고 냉장고에 넣어둔 맥주 한 캔과 핸드폰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숙소 야외 벤치에 앉아 맥주캔을 땄고 와이파이 연결을 확인하고 동생에게 톡을 했다. 나 영어 너무 못해. 그래서 싸웠어. 동생은 신혼여행가면 다 싸운다더라. 그래서 지금 어디야? 라고 물어봐줬다. 바람이 엄청나게 불었다. 그 바람을 맞으면서 동생에게 하소연을 하니 속이 조금 후련해졌다. 동생이 이제 기분 풀고 형부에게 가봐, 라고 했다. 남편에게 연락이 왔다. 어디갔어? 비도 내리기 시작해 다 마신 캔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호텔 카운터를 몇번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업체에 전화를 했다고 한다. 전화를 받지 않아 연결은 되지 않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화해를 했다. 나는 내 영어울렁증에 대해 말했고, 남편의 나의 격앙된 돌변화냄에 대해 말했다. 나는 그래도 그렇게 가버리는 건 아니라고 말했고, 남편은 그건 잘못했다고 했다. 나도 사과했다. 남편은 너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영어인데 너무 겁을 먹는 것 같다고 쉽게 생각하고 간단하게 말해보라고 조언해줬다. 그 뒤로 내 영어울렁증으로 싸우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떠나버린 배 따위 말끔히 잊어버리고 내려가서 바베큐를 해먹기로 했다. 비는 그쳤고 바람은 선선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잘 보였다. 수도 많았다. 달도 예뻤다. 그래 이거면 됐지 하면서 맥주병을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