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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루클린
    서재를쌓다 2018. 7. 1. 09:36



       아주 멀리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아일리시를 생각한다. 2016년 봄에 보았던 영화를, 2017년 겨울 책으로 다시 읽었다. 2017년 겨울, 내가 아는 한 가장 멀리 다녀온 사람이 아일리시였다. 아일리시는 아일랜드 소도시에서 미국 뉴욕 브루클린까지 간 사람이다. 1950년대에. 똑똑하지만 시대상황 상 그럴듯한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있던 아일리시에게 어느 날 신부가 제안을 해 온다. 브루클린에 가면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기 싫었던 아일리시는 아일랜드를 떠나기 싫어한다. 아일리시를 단호하게 보낸 건 그녀의 친언니였다. 동생의 미래를 위해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별은 힘이 들었다. 향수병도 깊었다. 짙은 향수병 덕에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점점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이탈리아 청년 토니도 만나게 된다. 다정하고 배려깊은 토니를 사랑하게 되고, 점점 브루클린 생활에 애정이 생기게 된다. 야간학교에서의 우수한 성적, 공부가 끝나면 지금보다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리란 희망, 하숙집 주인의 신뢰, 토니의 깊은 사랑. 그런 시기에 아일랜드에서 소식이 들려온다. 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언니를 잘 보내기 위해, 그리고 슬픔에 빠져있는 엄마를 챙기기 위해 고향으로 잠시 돌아온 아일리시는 그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유일하게 미국 브루클린에 다녀온 사람인 것이다. 오랜시간 배를 타고 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이곳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생활을 한. 혼인신고까지 한 토니의 존재를 지워버리며, 그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자신감이 한껏 상승한 아일리시. 그곳의 부유한 집안 아들의 애정공세를 즐기던 아일리시에게 어느 날 날벼락이 떨어진다. 브루클린에서 혼인신고를 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나타난 것. 아일리시는 그 길로 아일랜드를 떠난다. 아마도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토니와 결혼을 하고, 잠시동안 다시 머무른 아일랜드에서의 시간들을 추억으로 남겨두고 새로운 직장을 갖고, 아이들을 낳고 생활해 나갈 것이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일리시가 아일랜드로 돌아오고, 토니의 존재를 잊어버리며 고향 친구들 사이에서 달라진 자신의 위상을 즐길 때. 이런 나쁜 년이 있나 생각했다. 그렇게 착한 애였는데, 미국물이 이 아이를 이렇게 나쁘게 만들어 버렸네, 생각했다. 혼인신고를 한 사실이 발각되자 후다닥 떠나버리는 것을 보고도 나쁜 것 나쁜 것, 돌아가서 토니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 보고싶었다고, 너밖에 없다고 속삭이겠지, 욕했었다. 소설을 읽고는 생각이 좀 바뀌었는데, 여전히 나쁜 행동이긴 했지만, 아일리시는 본능에 충실했던 보통의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물인 것이다. 다른 인물들은 지극히 평면적이다. 동생을 위해 헌신하는 언니, 첫눈에 반해 끊임없는 사랑을 펼치는 토니,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한 늘 외로운 엄마. 아일리시는 비록 타의에 의해 자기 일생의 굵직굵직한 일들을 실행했지만, 그 일들에 적응해가면서 그때그때의 감정들에 지극히 충실했던,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처음 브루클린을 떠날 때 배 위에서의 시간, 언니의 부고를 듣고 브루클린에서 아일랜드로 돌아가며 겪은 시간, 도망치듯 아일랜드에서 또다시 브루클린으로 돌아가며 보낸 배 안의 시간. 아일리시는 지난 겨울, 내가 아는 한 가장 멀리 다녀온 사람이었다. 멀리 다녀온 사람은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알아볼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을.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아일리시는 저녁 식사를 건너뛰고 교구 사제관까지 걸어가서 플러드 신부에게 그 공문을 보여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키호 부인에게 메모를 남기고 거리로 나선 아일리시는 저녁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나무는 잎이 무성했고 거리엔 사람들이 나와 있었으며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고 건물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브루클린에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 편지가 기운을 주고 새로운 자유를 준 것 같았다. 기대하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아일리시는 플러드 신부가 사제관에 있다면 이 편지를 보여줄 생각에, 다음 날 약속대로 토니를 만나면 토니에게도 보여줄 생각에, 그리고 편지로 이 소식을 집에 알릴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1년 후면 정식 부기원이 되어 더 나은 일거리를 찾을 것이다. 그 1년 동안 날씨는 점점 찾을 수 없을 만큼 더워지고 다시 열기가 수그러들면 나무들은 잎을 떨어뜨릴 것이며 그러면 브루클린에 다시 겨울이 올 것이다. 그리고 겨울 또한 봄으로 녹아들고 퇴근 후에도 저녁 늦게까지 햇빛이 남아 있는 초여름이 되었다가 그녀는 다시, 브루클린 칼리지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을 것이다. 

       다가올 한 해가 어떻게 지나갈지 꿈꾸면서 길을 따라 걷는 동안, 아일리시는 미소 짓는 토니의 존재, 그의 관심, 그의 재미있는 이야기들, 어느 길모퉁이에서 그녀를 끌어안은 그의 손길, 키스해 오는 숨결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냄새, 그가 그녀에게 집중할 때 느껴지는 소중한 기분, 그녀를 감싼 그의 팔, 그녀 입에서 느껴지는 그의 혀를를 상상했다. 아일리시는 그 모든 것을 갖고 있었다. 이 편지까지 받게 된 지금, 그녀가 가진 것들은 처음 브루클린에 도착할 때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할까 봐 아일리시는 걸으면서도 자꾸 웃음을 참아야 했다. 

    - 223~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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