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이렇게 적어줬다. 이천십년 꽃봄. 이번엔 어디에 사인을 받을까 고민하다 <청춘의 문장들>을 들고 나갔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은 처음부터 사인본이었고. 그를 만나러 가는 지하철 안에서 책을 뒤적거리다 글 몇 개를 읽었다. 봄이었다. 책이 온통 봄이었다. 지하철 창 밖도 봄이었고, 날씨도 봄이었다. 신촌도 봄이었고, 소설가도 봄이었다. 갈색의 예쁜 자켓을 입고 등장해서는, 어김없이 예의 그 유머를 남발한 소설가. 소설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 맘 때에 태어났어요. 이 맘 때에는 아무 것도 안 해요. 그냥 있어요. 오늘 여기 온 것도 오늘 하는 일의 다예요. 따뜻한 바람이 불기 전에 시와씨 노래를 많이 들었어요. 그러다 자기도 했어요. 좋았어요. 소설가는 말했다. 시와의 음악을 듣었고, 곧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그 생각만으로도 조바심이 났다고.

    어제 신촌에서 구두소리가 텅텅 울리는 나무 바닥에 앉아서 시와의 음악을 듣고, 김연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두 사람은 번갈아가며 낭독을 했다. 어떤 불꽃에 대해 이야기했고, 어떤 예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와는 소설가의 소설을 읽고 영감을 받은 노래를 불러줬고, 우리는 그 노래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소설가는 사실은 잘 몰라요, 라는 말을 남발했다. (그래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으응?) 소설가는말했다. 결심을 하는 건 정말 멋진 일 같아요. 여러분도 여러 번 결심하세요. 이틀 뒤에 깨지는 결심이라도, 하는 순간만은 정말 멋진 거예요. 수도 없이 결심을 하는 거예요. 나는 오늘 셔틀 버스 안에서 옆의 동료에게 결심하는 건 정말 멋진 거 같애요, 라고 말했다. 올해는 수백번 결심해 보리라 다짐했다지.

     아, 작가의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응?) 작가의 말을 읽으려고 소설을 읽는 어이없는 사람이 있다면서. (으응?) 그건 속지 살려고 음반을 사는 것과 똑같다며 (끙) 그리하여 생애 최초로 작가의 말을 낭독하겠다며. (와) <세계의 끝 여자친구> 작가의 말을 낭독해주셨다. 내가 어제 얼마나 멋진 시간을 보냈는지 더이상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리고 우리의 유머러스하고 멋지고 센스있으시며 수줍어하시는 소설가님은 이 열혈독자를 알아봐주셨다. 고마워요, 작가님. 아, 정말 열혈 감동이었답니다. 

     비님이 오신다. 아, 비님. 오늘 명란젓국을 끓였다. 간단하다. 명란젓 넣고, 두부 넣고, 다진 마늘 넣고, 파 넣고, 물 넣고 팔팔 끓이는 것. 그러면 약간 짭잘한 밥도둑 국이 완성된다. 비님은 오시고, 보일러를 간만에 빵빵하게 틀었고, 내일 아침 일찍 먹을 명란젓국 냄새가 집 안 가득하고, 내일은 춥단다. 그렇다면 소설가가 적어준 꽃봄은 조금 기다려야겠지만, 그러다 잡지도 못하고 금세 가버리겠지만, 곧 소설가를 설레게 만드는 4월의 따뜻한 바람이 또 불어올 거니까. 목련꽃이 활짝 피었으니까. 개나리도 활짝 피었으니까. 진달래도 활짝 피었으니까. 봄이 가고 있으니까. 소설가는 얼른 소설을 쓰시고, 이 봄이 가기 전에 이 열혈독자에게 새 책을 안겨주시길.





    정말 아름다운 여름이었다. 햇살을 받은 이파리들은 초록색 그늘을 우리 머리 위에 드리웠고 바람에 따라 그 그늘이 조금씩 자리를 바꿨다. 금방이라도 초록색 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나무 그늘 아래를 달리면서 나는 "열무와 나의 두번째 여름이다"라고 혼자 말해봤다.
p.25 청춘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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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

from 서재를쌓다 2010. 3. 31. 00:10



    한강이 봄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나를 불러 세운다. 잠깐만요. 여기 앉아볼래요? 이제부터 내가 아주 긴 노래를 들려줄게요. 나는 얕은 눈보라가 치는 미시령 절벽 위에 서 있다. 눈보라 때문에 앞이 보이질 않는다. 무릎을 안고 쪼그려 앉아본다. 까마득하다. 정확히 두 발만 더 내디디면... 그녀를, 그녀의 엄마를 만날 수 있다. 한강이 긴 노래를 끝낸 날, 어떤 이가 목을 맸다. 그이는 그 날 미시령 고개에 있었던 거다. 두 발 앞이 벼랑이었던 거다. 그이는 그 벼랑의 허공에서 그녀를 보았던 거다. 그녀가 손짓했겠지. 그이는 안심했던 거다. 그리고 발을 내밀었던 거다. 우리는 모두 미시령의 어느 절벽 위에 서 있다. 한강이 아주 긴 노래를 끝내고 떠나고, 나는 얕은 눈보라가 치는 절벽 위에 남았다. 절벽 위에 무릎을 세우고 가만히 앉아 있다. 눈보라가 서서히 잦아들고, 바람이 견딜만 해졌다. 한강은 떠났지만, 어디선가 그녀의 기타선율이 미시령의 바람에 머물고 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앉아 있는다. 그리고 본다. 미시령에 봄이 찾아오는 것을. 눈이 멈추는 것을. 눈이 녹는 것을. 새싹이 돋는 것을. 꽃이 피는 것을. 그리고 바람이 부는 것을.


     한강의 새 소설을 읽었다. 아주 긴 노래였다. 헝겊 위에 퍼지는 별의 흔적처럼 마음이 먹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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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김이설 지음/문학과지성사


    삼월인데 눈이 온다. 내가 기억하기론 벌써 세 번째다. 처음에는 예전에도 삼월에 눈이 왔던가 생각했다. 두 번째는 언젠가 삼월에도 눈이 온 적이 있었는데 내가 기억을 못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세 번째는, 영화 <외출>을 생각했다. 영화의 마지막, 거짓말처럼 사월에 눈이 내렸다. 사월에 눈이 내리고, 인수는 서영을 생각한다. 그리고 전화를 한다. 내가 곧 갈게요, 이런 대사였던 것 같다. 그 땐, 인수가 서영에게 달려가는 상황이 아니라, 그리하여 둘의 사랑이 어찌어찌된다는 그 결말이 아니라, 사월에 눈이 온다는 설정 자체가 너무 터무니 없어서 이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결론이야, 생각했는데. 사월에 눈이 올 수도 있겠다. 인수가 서영을 만나러 갈 수도, 그리하여 둘이 결국 잘 될 수도 있겠다. 사월에 눈이 올 수도 있겠어.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이건 내가 삼월에 읽은 소설이다. 정말 벽돌같이 생긴 책이다. 이 책을 쌓고 또 쌓으면 단단한 벽이 만들어질 것 같다. 아주 단단한 책이다. 나는 그녀를 안다. 안다고 말해도 되는 건가. 나는 그녀를 자주 훔쳐봤다. 나는 안다. 그녀는 아기 엄마이고, 서울이 아닌 곳에 산다. 그녀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비염 때문에 고생하고, 소설을 쓸 때 그 소설만의 배경음악이 있다. 두 아이 다 딸이고, 작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 큰 아이와 함께 미술관을 자주 갔다. 나는 그녀의 일상을 자주 훔쳐봤다. 그리고 그녀가 어떤 글을 쓰는지 궁금했다. 내가 훔쳐보는 것이 바로 그녀의 글이었음에도, 나는 그녀의 글이 궁금했다. 그리고 이 책을 만났다. 이게 진짜 그녀의 글이다. 

    쎄다. 소설을 하나, 둘, 읽어나가면서 나는 그녀가 쎄다고 생각했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가를 밴 아가, 대리모, 아빠라고 부르는 이와 잠자리를 하는 아이, 딸이 걸린 병을 똑같이 앓는 엄마, 짐승보다 못한 남편을 결국 죽이고 마는 여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자살하는 엄마 등이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그녀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소설을 읽으니 하나도 모르겠다. 이건 소설이지만, 그녀가 쓴 것이고, 허구지만, 그녀가 쓴 것이고.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죄다 외롭고, 아프고, 쓰라리고. 나는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장이 시큰거렸다. 어떤 소설은 아랫배쪽이기도 했고, 어떤 소설은 가슴 윗쪽이기도 했다. 세고, 아프고. 어떤 소설은 너무나 쓸쓸했는데, 그래서 가슴 한쪽이 시큰거렸는데, 그건 어쩌면 이 이야기가 나의 미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나는 정말이지, 이렇게 늙고 싶지 않았다. 이 책 속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그득하다.

    김혜리가 만난 사람, 김연수편을 읽었는데, 나는 그가 징글징글하게 느껴졌다. 소설가란 이런 직업이구나, 생각했다. 이건 정말 아무나 하지 못하는 거구나 생각했다. 그는 소설을 쓰는 자아와 일상의 자아가 또렷하게 분리된다고 했다. 연변에서는 <밤은 노래한다>의 어떤 장면을 쓰기 위해 소설에서와 같이 오르막 산길을 직접 뛰어봤다고 했다. 소설가란 정말 대단하구나, 말도 안 되는 사람이구나, 가까이하지 말아야지,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나는 그녀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 그녀에게도 소설을 쓰는 자아와 내가 훔쳐보는 일상의 자아가 분리되어 또렷하게 존재한다는 것. 그리하여, 소설가는 무섭고, 위대하다는 것.

    이제 그녀가 쌓은 벽돌 두 개. 그녀가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걸 지켜보고 싶다. 그리하여 단단한 벽이 만들어지는 것을. 그리하여 하나의 튼튼한 집이 만들어지는 것을. 시간이 갈수록 더 튼실한 벽돌이 세공되는 것을. 내가 가끔 시멘트도 발라주고. 그렇게 멀리서, (소설가는 무서운 사람들이니까) 보이지 않게 응원하고 싶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그 때는 당신의 벽돌을 읽은 적이 없었지만, 난 그 때부터 당신의 팬이었으니까. 이 밤에도 당신의 주인공들이 야심한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겠지. 다음에는 조금 밝은 벽돌이었으면 좋겠다. 사실 이번 벽돌은 좀 놀랬거든. 너무 어두워서. 그나저나 사월에 눈이 오면, 누구에게 전화를 해야 되지. 누군가 만날 사람은 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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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궁리


   내게도 헬렌이 있다. 그녀도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우리의 경우는 메일이었다. 나는 채링크로스 84번지에 근무하지도, 희귀한 헌 책들을 뚝딱 구해올 능력도 없지만, 내게는 그녀에게 없는 책 한 권이 있었다. 그건 어디서도 더 이상 살 수 없는 책이었다. 출판사에서 아주 소량만 만들어 배포했던 거니까. 나는 그 책을 두 권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 책을 한 권 보냈다. 우리는 같은 작가를 좋아했고, 그 책은 그 작가의 블로그 모음집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내게 책을 보내왔다. 절판되어서 구하지 못하고 있던 책, 그 작가는 페루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게도 헬렌이 있다.

   그녀와 나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마크스 서점의 식구들과 헬렌이 그랬던 것처럼. 헬렌은 어느 날 평론지에 실린 마크스 서점의 광고를 보고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그녀는 원하는 책을 말했고, 마크스 서점 사람들은 그것을 구해서 그녀에게 보내주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들은 일종의 전표. 주문서와 영수증이었다. 헬렌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냈고, 마크스 서점 사람들은 그녀의 마음을 소중히 여겼다. 고마움은 또 다른 고마움을, 감사함은 또 다른 감사함을 낳았고,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 20여 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 서로의 일을 걱정해주고, 서로의 먹을거리를 걱정해주면서, 진짜 친구가 되었다.

   얼마 전 읽은 책도 역시 서간집이었다. 마종기 시인과 루시드 폴의 편지 모음집. 두 사람은 스위스와 미국에서 그 편지들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두 사람 다 고국을 떠나 있으니 외로웠고, 쓸쓸했고, 고독했다고 한다. 한 사람은 의사이고 시인이고, 한 사람은 과학을 연구하며 음악을 만들고 부르는 사람. 두 사람은 공통점을 찾았고,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했고, 서로의 메일을 기다렸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는 동안, 그리고 가을이 왔다, 겨울이 가는 동안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았고, 서로를 응원했다. 헬렌과 마크스 서점 식구들처럼. 그렇게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면 이제 영국의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찾아가도 마크스 서점은 없다고 한다. 단지 여기 언젠가, 마크스 서점이 있었다는 동판만 남겨져 있을 뿐. 조금은 엉뚱한 생각을 해 봤다. 만약 헬렌이 아주 유명한 작가였다면, 혹은 아주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면, 마크스 서점이 여전히 남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 그곳에는 사나운 표정의 헬렌 (표지를 넘기자마자 있는) 사진이 서점 어느 한 모퉁이에 걸려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그 모퉁이 책장에는 헬렌이 마크스 서점에서 구입한 책들만 꽂혀 있는 거다. 그러니까 버지니아 울프의 <일반 독자> 2권, 월턴의 <낚시의 명수> 같은 책.

   헬렌과 마크스 서점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만나지 못했지만, 나와 나의 헬렌 곡예사와는 벌써 한 번 만났다. 우리는 대학로에서 연극을 한 편 봤고, 고기를 먹고 술을 마셨다. 우리가 읽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며, 우리가 열렬히 좋아하는 작가 이야기도 했다. 지나간 사랑에 대해서도, 앞으로 무얼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 날 우리는 취했고, 나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같은 작가를 좋아하게 된 것을, 같은 연극을 볼 수 있음을. 그래서 많이도 건배, 건배했다. 헬렌과 마크스 서점 사람들도 만났더라면 그랬을 텐데. 두 말 할 것도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텐데. 그게 조금 안타깝다. 그러면 이 책은 훨씬 두껍고, 풍요로워졌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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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

from 서재를쌓다 2009. 12. 24. 00:12
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그책



    읽을 때보다, 읽은 후에 더 많이 생각났던 소설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 한 남자의 하루를 그린 소설이라는 소개에 끌려 읽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자의 슬픔, 그 남자의 하루, 그 남자의 그리움과 아픔, 그런 감정들을 예상했었는데, 소설은 언젠가 한 남자에게 다가올 온전한 죽음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한다. 소설의 처음은 남자가 잠에서 깨어날 때이고, 시간은 아침이다. 남자는 잠에서 깨어나자 마자, 자신이 '여기' '지금' '있음'을 깨닫고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은 남자가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잠이 들 때다. 시간은 밤(혹은 새벽). 역시 남자는 죽음을 생각한다. 남자는 늙었고, 사랑하는 사람은 먼저 떠났고, 그에게도 곧 그 날이 올 것이다. 말끔하게 차려입고 대학에 나가 강의를 하고, 외로운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고, 매력적인 제자를 유혹해 보기도 하지만, 그에게 매일매일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다. 내게 십이월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듯이 그의 어떤 시절도 그렇게 순식간에 지나갔겠지. 그리고, 가겠지. 그렇게 매일 아침에 깨어날 때 죽음을 떠올리고, 매일 밤 잠에 들 때 죽음을 느끼는 남자. 콜린 퍼스가 그 남자를 연기했다고 한다. 상도 받았다지.

    마음에 남는 구절이 몇몇 있었는데,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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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카페가 생겼다. 무척 추웠던 토요일, 화요비랑 커피 마실 공간을 찾아 사가정을 헤맬때 우연히 발견한 공간이다. 그러고 두 번을 더 갔다. 처음에 가서는 진한 라떼를 마시고, 또 와인을 마셨다. 두 번째 갔을 때는 돈까스를 먹고 나쵸에 맥주를 마셨다. 세 번째 갔을 때는 볶음밥에 역시 진한 라떼를 마셨다. 음악도 좋고, 공간도 좋다. 커피맛도 좋다. 돈까스는 잘 모르겠다. (사실 좀...) 아직 시도해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혼자 가서 따뜻한 커피를 시켜놓고 창가자리에 앉아 책을 읽을 테다. 요즘에 시작한 뜨개질을 할 지도 몰라. 홍대의 카페처럼 멀지 않으니 주섬주섬 챙겨 일어나 적립카드에 소년, 혹은 소녀 도장을 찍고 10분만 걸으면 바집로 이다. 아, 행복한 공간. 좋아하는 곳 사진이니, 아주 커다랗게 올려야지. 햇빛을 받아 사진이 아주 잘 나왔다.





    결국 지난 주말에 구입했다. DVD가 탐났던 이탈리아 요리 이야기가 있는 책. 술술 잘 읽힌다. 지하철에서 몇 번을 키득거렸다. 한겨레 ESC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은 거라 반복되는 이야기들도 있긴 하지만 괜찮다. 이탈리아 사람들과 이탈리아 레스토랑 주방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책을 쓰신 이 분, 기자일 하시다가 갑자기 요리에 흥미가 생겨 이탈리아로 요리수업 받으러 떠나신 분이란다. 대학때도 문예창작을 전공하셨다. 추천사를 쓴 김중혁 말로는 시니컬하고도 다정다감한 사람이란다. DVD를 보면 정말 그런 거 같애. 뿔테 안경 너머로 시종일관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선 성큼성큼 손을 쭉쭉 뻗으면서 요리를 하신다. 제 3의 손이죠, 이러면서 이빨로 스타게티 봉지를 뜯고 한 두번만 저어주면 되요, 하면서 스파게티를 익힌다. 아주 무덤덤하고, 쉽게 하나의 요리를 금새 만들어내서 접시에 담는다. 뜨거운 스파게티 면 한 가닥을 펄펄 끓는 물에서 건져내서는 얼마나 익었는지 먹어보신다. 그리고 재료만 준비된다면 당신도 나도 금방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한 설명이다. 왠지 시니컬하고도 다정다감한 사람 맞는듯.

    DVD는 책에서처럼, 그가 배워온 시칠리아의 요리사 쥬제빼 바로네의 가르침대로, 신선한 재료를 준비하러 시장을 기웃거리는 것부터 시작한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는 너의 재료로, 가장 전통적인 조리법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먹는 요리를 만들어라'라고 했던 스승의 가르침. 언젠가 그가 요리하는 '누이누이'라는 레스토랑에 가 볼 수 있을까. 나 뭐 먹을지 벌써 정했잖아. 봉골레 스파게티, 아니면 알리오 올리오 뻬뻬론치노 스파게티. 지금 DVD를 계속해서 보고 있는데, 이 스파게티 만들때 침이 꼴깍 넘어갔다. 별다른 소스가 들어가지 않는 요리들이다. 봉골레 스파게티의 재료는 조개, 올리브유, 화이트 와인, 마늘, 소금, 스파게티, 파슬리. 알리오 올리오 뻬뻬론치노 스파게티의 재료는 더 간단하다. 마늘, 올리브유, 스파게티, 파슬리, 이탈리아 고추. 아, 맛나겠다. 꿀꺽. 글 잘 쓰고 요리하는 남자라니. 어쩐지 마음에 든다. 와인책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동안 나름 영화도 읽고, 책들도 읽었는데, 자주 기록하지 않는 생활이 이어지고 있다. 겨울이 되어서 그런가. 그냥 빨리 자고 싶어진다. 아, 요즘 겨울맞이 뜨개질을 시작했다. 2009년 11월 전의 나는 목도리와 벙어리 장갑을 뜰 줄 아는 아이였다면, 2009년 11월 후의 나는 목도리에 벙어리 장갑, 그리고 방울 모자까지 뜰 줄 아는 아이가 되었다. 점점 뭔가 하나라도 더 할 줄 아는 아이가 된다는 건 기쁜 일이야. 카페에서 본 컵받침도 코바늘로 떠 볼 작정이다. 컵받침을 떠서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선물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나중에 혹시나 카페 같은 걸 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과연) 그 날을 위해 아주 많이 떠 놓아야지. 물론 선물도 할 것이예요. 헤헤- 비어있는 다이어리도 채워야지. 친구에게 선물받은 공책도 채워나야가지. 기록하는 내가 되어야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내가 되어야지. 요즘 미투데이에 빠졌다. 매일매일 짧게 내 얘기도 할 수 있고, 남의 얘기도 많이 들을 수 있다. 또, 그에게 내 얘기도 자주 전할 수 있다. 좋다좋아. 겨울이고,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고, 걸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계절이고, 이어폰 사이로 음악이 아주 깊게 들리는 계절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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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님이 내려주시니 맥주를 샀다. 집에 들어와서는 흰옷들은 손빨래하고, 새로 산 청바지는 세탁기에 돌렸다. 싸구려 옷이라 세탁기에 새파란 물이 가득 했다. 친구는 다음달이 상경한 지 1년이 된다고 문자를 보냈다. 왕십리 버스 정거장에서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다 방을 보러 갔던 때가 엊그제같은데. 그 문자를 받자마다 다음 달의 날씨가 짐작됐다. 가을비가 이렇게 몇 번 더 내리면, 겨울이 올테지. 그러면 버스 정거장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버스를 기다려야 하는 계절이 오겠지. 설거지를 하고, 화장을 지우고, 씻었다. 형광등을 끄고 스탠드를 켰다. 맥주를 (물론 카스다) 한 잔 거품나게 콸콸 따르고 책상 앞에 앉았다. 아, 좋구나. 화요일 밤이다.
 
    <심야식당>은 변함이 없었다. 마스터도 그대로고, 단골손님들도 여전하다. 새로 온 손님들도 사연을 그득하고. 모두 심야식당을 사랑한다. 내가 그렇듯이. 4권에서는 사랑하는 선생님을 잃은 제자가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엉엉 울음을 터뜨리자 마스터는 문을 닫아 버린다. 그이가 목 놓아 엉엉 울 수 있도록. 아, 정말 내게 필요한 곳인데. 얼큰하게 마시고, 맛나게 먹고, 목 놓아 울 수 있는 곳. 요즘은 사각사각거리며 연필로 자주 메모를 한다. 종이 한 장을 뜯어놓고 책상 위에 대고 연필을 사각거리면 그 소리며, 느낌이 너무 좋아 볼펜을 쓸 수가 없다. 이런 메모들을 했다. 책에서 본 문장들이다. '스물다섯살 4월의 나만 보고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 '만나주어서 고맙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흔적이자 이력입니다', 그리고 옆의 사진 속 문장들. <가을여자>라는 책의 보도자료에서 본 문장들이다. 어찌나 좋은지.

    그러니까 가을이다. 오늘 지하철에서 읽은 이번주 씨네21 김연수의 칼럼은 정말 좋았다. 쓸쓸했던 내 마음이 단번에 따뜻해져 버렸다. 아, 맞다. 맥주를 짝수로 사서 첨잔했어야 했는데. 한 병만 사 버렸네. 헤헤- 그래도 마지막은 홀수로 입가심이니까, 홀수가 맞다. <스모크>는 예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DVD가 나오면 좋겠는데. 마이앤트메리 예전 곡을 보면 <스모크>의 대사가 흐르는 가운데 연주를 한 곡이 있는데, 그 음악 들으면 '막' 쓸쓸해진다. 그러다가 '어느새' 따뜻해지고. 봐야해 봐야해. 그러니까 가을. 이번주부터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이 시작한다. 삶의 낙이 생겼다. 야호. 심야식당에 찾아가고 싶은 날에 이제 드라마를 들여다봐야지. 부디 좋은, 느낌이 좋은, 쓸쓸하고도 따뜻한 드라마가 되기를. 그리고 오다기리가 꼭 나오기를 기원합니다아. 빗소리 좋다아. 오늘은 음악이 따로 필요없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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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퓨터 시계가 21시가 되자마자 메일을 보내고, 엑셀 파일을 열어서 오늘의 숫자를 입력하고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왔다. 서대문까지 걸어와서는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 안에서는 스페이스 공감에 나왔던 박지윤 공연 영상을 봤다. 그걸 보느라고 군자에서 한 정거장 더 가버렸다. 아차산에서 다시 군자로 되돌아와서, 7호선으로 갈아탔다. 역에서 나오기 전에 지하철 안 쎄븐일레븐에서 씨네를 살까말까 망설이다가 샀다. 은행에 들러 돈도 뽑았다. 맥주를 한 캔 살까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들어왔다. 엠비씨 수목드라마, 정말 할 말이 없구나. 저게 뮝미? 으아. 9월이 가고 있다. 추석, 10월. 제발 시간이 늦게 갔으면.


          
         

  9월에 이런 책들을 읽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단편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읽는 동안 마음이 시큰거렸던 소설. 문예지에 이 단편이 공개되었을 때, 사보진 않았지만 이 제목 때문에 읽지도 않고 마음이 들떴던 바로 그 소설이었다. 이 책에는 내가 좋아하는 '모두에게 복된 새해'도 있어서, 이제 도서관을 가지 않아도 언제든 펼쳐볼 수 있게 됐다. '케이케이를 불러봤어', '달로 간 코미디언'은 두 번, 세 번 읽는 거였는데 처음보다 더 좋았다. 신형철의 해설도 좋았고.

  <무더운 여름>은 내가 좋아하는 위화 단편집. 위화의 소설 중 제일 좋아하는 <허삼관 매혈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이게 위화 소설 맞나 싶을 정도로 웃음기가 거의 없다. 처음엔 어리둥절했는데 몇 편 읽다보니 마음이 역시 시큰거렸다. 가장 마음에 남았던 단편은 '다리에서'. 아주 짧은 이야기다. 남편은 여자의 생리를 기다리고, 지금은 아이를 가질 때가 아니라고 여자를 설득한다. 여자는 생리가 늦어지는 것도, 그래서 혹시 아이가 생겼을 지도 모르는 것도 무덤덤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데, 남편은 그렇지가 않다. 빨리 친구(여자의 생리를 그는 그렇게 표현한다)가 와 달라고, 병원에 가서 혹시 아이가 생긴 거라면 지우자고 재촉한다. 여자와 남편이 병원에 가는 날, 진료를 받기 전에 여자의 몸 속에 뜨겁고 끈적거리는 그것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걸 느끼고, 여자는 어떤 말을 남편에게 전해듣는다. 그렇게 소설은 끝나는데, 그 여운이 엄청나서 아침 지하철역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인도 출신의 미국 작가인데, 이 소설집의 첫 단편을 읽고 완전히 그녀의 팬이 되었다. 한국에 출간된 그녀의 책은 현재 세 권. 이제 두 권이 남았다. 그래서 기대 중. 금방 그 두 권을 읽고 싶지만, 다 읽고 나면 그녀의 다음 책이 없어지는 거니까 그 달콤한 기다림을 위해 조금 늦게, 천천히 주문할 거다. 정말 별 다섯 개. 이 가을에 읽기 딱 좋은 소설. 한 편 한 편이 끝날 때마다 마음이 서늘해지고, 충만해진다. 소설은 끝났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이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드는 소설들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또 읽고 싶은 느낌이다. 그리고 그들이 잘, 살고 있었으면 하는 느낌. 정말 좋은 소설집이다. 강추. 내가 1억 정도의 여유가 있는 엄청난 부자라면, 약속이 생길 때마다 상대방에게 사서 선물해 주고 싶은 소설이다. 흠. 아, 마지막 이야기는 세 편의 연작인데, 여자의 이야기 한 편, 남자의 이야기 한 편, 그리고 여자와 남자가 성인이 되어 만나게 되는 이야기 한 편이다. 그 마지막 남자와 여자가 만나게 되는 이야기는 그저 그랬다.



   아, 짧게 쓰고 자려고 했는데. 오늘부터 서머싯 몸의 <면도날>을 읽는다. 좋아하는 작가니까, 아껴서 차분하게 음미해가면서 읽어야지. 뭐든지 따라하기 좋아하는 나는 영화 <선샤인 클리닝>을 보고 지난주 내내 징하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아주 사소한, 그냥 지나가는 대사였는데, 난 이런 거에 확 꽂히는 이상한 여자다. 아버지에게 아들을 맡기고 일을 하러 가려는 에이미 아담스.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한다. 엄마와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하는 중간에,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샌드위치 만들어 먹어도 되요?" 할아버지가 대답한다. "재료 다 있다. 들어가서 만들어 먹으렴." 그때부터 샌드위치가 머릿 속을 떠나지 않는 거다. 특히 모든 재료가 냉장고 안에 갖춰져 있고, 언제든 먹고 싶으면 빵에 이것저것 넣어 후다닥 만들어 먹는 고 장면. 맛있는 빵을 샀다. 하얀 빵 말고 건강에 좋은 색깔 있는 빵. 빵 위에 슬라이드 햄과 치즈를 얹고, 양상추를 잔뜩 넣고 아일랜드 소스를 뿌리고 빵을 또 얹어 반으로 잘라 먹었다. 반으로 자를 때 칼 끝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들렸다. 커피랑 같이 먹고, 우유랑도 먹었다. 토마토를 썰어 넣으면 씹는 순간, 내가 막 건강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아주 신선한 느낌. 아, 배고프다. 빨리 자야지.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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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구
김이환 지음/예담



    약속 없는 일요일 오전에 내가 하는 짓. 일어나자마자 MBC에서 하는 프로그램 섭렵하기. 해피타임-환상의 짝꿍-서프라이즈-출발비디오여행, 까지 보고나면 일요일이 벌써 다 가버린 것만 같다. 월요일의 공포가 스멀스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고. 일요일에는 늦잠을 자는 경우가 많아서 거의 환상의 짝꿍 후반부나 서프라이즈부터 시작할 때도 많다. 저번 일요일에도 환상의 짝꿍 후반부에서 시작했다. 하고 싶은 얘기는 서프라이즈에 나왔던 2012년 종말론. 서프라이즈에 따르면 2012년의 종말론은 마야 문명(난 요것만 알고 있었는데)뿐만 아니라, 중국의 주역에서도 2012년에 지구가 종말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 노스트라무스의 예언도 1999년이 아니라 2012년이란다. 2012년에 한 행성과의 충돌이 있을 것이고, 나사도 이걸 알면서 쉬쉬하고 있고 등등. 그 이야기를 잠에 취한 채로 보고 있는데, 이 책이 생각이 났다지. <절망의 구>.

     1억원 고료 멀티 문학상 수상작이다. 검은 구와 한 남자의 이야기다. 어느 날, 남자는 검은 구를 발견한다. 이 구는 아주 천천히, 사람이 아주 천천히 걷는 속도와 비슷하게 움직이는데, 남자가 멀찍이 떨어져서 보니 이 구가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거다. 구에 닿기만 하면 사람들이 구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이 남자가 제일 먼저 목격한다. 남자는 구를 피해서 도망가기 시작한다. 이게 소설의 시작이고, 남자와 구의 절망적인 운명의 시작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스토리는 '구가 쫓아오고, 남자가 도망친다' 이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상황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도 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구는 그저 구다. 책 속의 사람들은 그 구를 '절망의 구'라고 부른다. 구에 흡수되는 순간 사람들은 절망을 느끼기 때문에. 그게 구의 내부에 대한 정보의 전부다. 

    서프라이즈를 보면서 생각났던 이 소설의 어떤 장면. 제일 기억에 남는 부분이었다. 마트 안에서 남자와 남자와 마지막을 함께한 청년이 티비가 진열되어 있는 매장에서 함께 본 파란 바탕 위에 선명한 하얀 글자. '세계는 멸망했습니다.' 그 티비 화면을 배경으로 어떻게든 살아 '남아'보기 위해 두 사람은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신다. 그런 그들의 뒤로 계속해서, 변함없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하얀 '세계는 멸망했습니다.'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이 장면이 제일 보고 싶다. 대여섯 개의 티비 화면에 불이 들어와 있고, 변함없이 세계는 멸망했다지만, 언젠가 저 글자가 마술을 부린듯 세계는 멸망'하지않았'습니다,로 바뀔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멸망한 세계를 살아가는 남자의 모습.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이 장면은 아주 쓸쓸하고 쓸쓸하고 쓸쓸했으면 좋겠다.

    소설은 빨리 읽힌다. 분량이 제법 되지만, 손에 잡으면 금방 읽을 수 있다. 열심히 읽다가 마지막 결론에 다다르면, 뭔가가 다시 시작된다. 결국 끝도 없이 이어지는 거다. 남자의 도망도, 구도, 절망도. 그러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구라는 생명체라고 해야 하나, 괴물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검은 구는 작가의 상상 속에서 존재하고 키워져서 동그란 구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졌지만, 그건 진작부터 우리가 하나씩 가지고 있던 '그 무엇'이 아닌가 하는.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나를 뒤쫓고 있는 수많은 '그 무엇'이 어느 날 절망의 구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내게 아주 천천히 다가온다면, 나도 남자처럼 도망쳐야 하나. 사실, 나는 그냥 그 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남자가 그냥 빨려 들어갔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왠지 그 안에 뭔가 특별한 세상이 존재할 것만 같았거든. 결국 그런 건 없고, 절망 뿐이라지만. 결말이 좀 흐지부지하게 끝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엔딩 공모전을 하는 건지. 그나저나 2012년에 종말이 올까. 그래서 우리의 파란 세계도 하얗게 멸망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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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예담


그래도, 날, 사랑해 줄 당신에게 

    소설을 읽어내려가던 나는, 그 순간 이 소설이 판타지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못 생긴 여자라니요. 너무나 못 생겨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쳐다보게 되는 여자라니요. 그래서 그 옆에 있는 남자까지 쳐다보게 되는 여자라니요. 이 세상에 그런 여자가 있나, 생각을 했었어요. 그러니까 이건 너무 과장이 심하잖아, 생각을 하고, 그러니까 이 소설은 판타지야, 라고 생각을 했지요. 소설을 마지막 장을 덮고 일주일이 지났어요. 그동안 나는 이 소설과 여러 사람들을 떠올렸어요. 그동안 나와 테이블을 마주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던 많은 사람들 중에, 그래요, 그런 사람들이 꽤 많았더군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래요. 거의 모두가 그랬죠. 그제서야 이 소설은 판타지가 아니구나, 생각했지요. 내 곁에 많은 사람들이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고, 그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외모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를 하니까요. 심지어 나도 그런 사람이지요. 잘난 것도 없으면서. 그러다 또 다시 박민규의 소설 중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지요. 소설집 <카스테라>에 있던 문장이었어요. "이십대엔 누구나 이름과 외모만으로 세상을 판단하며,"

    나는 나이듦에 대해서 말하겠어요. 이 소설을 읽던 중에 작가와의 만남에 다녀왔지요. 박민규 작가는 예의 독특한 선글라스를 낀 채, 앉아서 이야기를 하니 정말 '마흔 둘'이 된 거 같다면서 일어서서 질문을 받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지요. 그 날의 여러 말들 중에 가장 잊지 못한 말은 이거예요. "믿기지 않겠지만, 언젠가 마흔 두 살의 나이가 됩니다." 이런 말도 있었어요. 자신의 팬이 되라는. 누군가의 팬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의' 팬이 되어야 한다고. 잘난 척 해도, 모두들 별 볼 일 없으니까요. 마흔 두 살이구요.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은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 소설을 쓴다고 했어요. '믿음'이 있기 때문에요. 소설을 선물해주고 싶은 그와 같은 수만 명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요. 사랑한다는 표현을 자주 하라고 하셨지요. 늦기 전에.

     그러니까, 나이듦에 대한 이야기요. 어릴 적에 생각했던 외모의 아름다움과 지금의 아름다움이 다르다고 이야길 하셨지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난 마흔 두 살이 되려면 아직 십 년이 넘게 남았지만, 내게도 스무 살에 생각했던 사람의 아름다움과 지금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달라요. 이게 바로 나이드는 게 행복한 이유예요. 난 성숙한 인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스무 살때보다는 현명해졌지요. 스무 살때보다는 상처를 덜 받는 인간이 되었지요. 난 그때 상처투성이었거든요. 사람에게 100의 상처가 매년 주어진다면, 열 아홉살과 스무 살의 나는 100의 상처 중에 100을 고스란히 상처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스무 다섯 살의 나는 조금 달라졌지요. 서른 살, 지금의 나는 75정도만 상처받는 사람이 되었어요. 25는 그냥 흘러보낼 수 있어요. 마음에 담아두지 않을 수 있어요. 난 75의 튼튼한 인간이 되었지요. 그게 눈가의 주름살이 늘어도, 체력이 떨어져 밤새 술을 마실 수 없어도, 행복한 서른 살의 나예요. 난 25를 버릴 수 있으니까요.

    소설은 못 생긴 여자와 (세상 사람들이 못 생겼다고 생각하는 여자와)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예요. 그 때의 그들은 켄터키 치킨을 먹으며, 맥주를 마시며, 호프Hope를 꿈꾸죠. 라디오에 어떤 음악을 신청하고, 어떤 음악을 함께 듣죠. 테이블 밑에서 손을 마주잡고 쪼물딱거리며 행복하다, 생각하죠. 야채를 듬뿍 넣은 안주를 만들고, 중국집에 요리를 시켜놓고, 술을 마시죠. 서로를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해주고, 서로가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해주고. 눈이 내리는 길을 함께 걷기도 하고, 컴컴한 밤 거리를 걷으며 잊지 못할 밤을 만들기도 하죠. 내가 예전에 읽었던 박민규 소설과는 다른 소설이지만, 결말의 갑작스런 신파가 당황스러웠지만, 서른의 여름, 이 소설을 읽은 건 다행이예요. 마흔 두 살의 박민규는 몇 년이 지나서야 이 소설을 쓸 수 있었고, 서른의 나는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고보니 같이 들어있던 씨디를 듣지 못했네요. 이건 다음 번에 읽게 될 때 함께 들을래요.

    아, 그 때 작가와의 대화 때 독자들이 낭독을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때 하얗고 예쁜 원피스를 입고 온 커트머리의 귀여운 여자분이 '세상 사람들이 못 생겼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한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죠. 난 그 여자분의 목소리가 너무 고와서, 그 떨리는 음성이 무척 사랑스러워서, 그 시간이 정말 좋았어요. 그 여자분은 박민규 작가님에게 이 소설이 자신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었다고, 감사하다고 얘길 했죠. 난 그 귀여운 여자분에게 감사를. 작가님께 고맙다고 이야기를 하는 그 여자분의 떨리는 음성이 내겐 위로가 되었거든요. 정말이예요. 우린 모두 달의 뒷면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누군가 보이지 않는 그 달의 어두운 뒷면을 다독거려주면, 나도 모르게 따뜻한 눈물이 솟아지니까요. 그러니까, 우리, 모두, 못 생긴 외모보다 잘 생긴 마음을 첫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해요. '행복하세요.' 이건 작가님이 우리들에게 해 준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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