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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서재를쌓다 2010. 3. 22. 22:53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김이설 지음/문학과지성사


        삼월인데 눈이 온다. 내가 기억하기론 벌써 세 번째다. 처음에는 예전에도 삼월에 눈이 왔던가 생각했다. 두 번째는 언젠가 삼월에도 눈이 온 적이 있었는데 내가 기억을 못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세 번째는, 영화 <외출>을 생각했다. 영화의 마지막, 거짓말처럼 사월에 눈이 내렸다. 사월에 눈이 내리고, 인수는 서영을 생각한다. 그리고 전화를 한다. 내가 곧 갈게요, 이런 대사였던 것 같다. 그 땐, 인수가 서영에게 달려가는 상황이 아니라, 그리하여 둘의 사랑이 어찌어찌된다는 그 결말이 아니라, 사월에 눈이 온다는 설정 자체가 너무 터무니 없어서 이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결론이야, 생각했는데. 사월에 눈이 올 수도 있겠다. 인수가 서영을 만나러 갈 수도, 그리하여 둘이 결국 잘 될 수도 있겠다. 사월에 눈이 올 수도 있겠어.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이건 내가 삼월에 읽은 소설이다. 정말 벽돌같이 생긴 책이다. 이 책을 쌓고 또 쌓으면 단단한 벽이 만들어질 것 같다. 아주 단단한 책이다. 나는 그녀를 안다. 안다고 말해도 되는 건가. 나는 그녀를 자주 훔쳐봤다. 나는 안다. 그녀는 아기 엄마이고, 서울이 아닌 곳에 산다. 그녀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비염 때문에 고생하고, 소설을 쓸 때 그 소설만의 배경음악이 있다. 두 아이 다 딸이고, 작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 큰 아이와 함께 미술관을 자주 갔다. 나는 그녀의 일상을 자주 훔쳐봤다. 그리고 그녀가 어떤 글을 쓰는지 궁금했다. 내가 훔쳐보는 것이 바로 그녀의 글이었음에도, 나는 그녀의 글이 궁금했다. 그리고 이 책을 만났다. 이게 진짜 그녀의 글이다. 

        쎄다. 소설을 하나, 둘, 읽어나가면서 나는 그녀가 쎄다고 생각했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가를 밴 아가, 대리모, 아빠라고 부르는 이와 잠자리를 하는 아이, 딸이 걸린 병을 똑같이 앓는 엄마, 짐승보다 못한 남편을 결국 죽이고 마는 여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자살하는 엄마 등이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그녀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소설을 읽으니 하나도 모르겠다. 이건 소설이지만, 그녀가 쓴 것이고, 허구지만, 그녀가 쓴 것이고.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죄다 외롭고, 아프고, 쓰라리고. 나는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장이 시큰거렸다. 어떤 소설은 아랫배쪽이기도 했고, 어떤 소설은 가슴 윗쪽이기도 했다. 세고, 아프고. 어떤 소설은 너무나 쓸쓸했는데, 그래서 가슴 한쪽이 시큰거렸는데, 그건 어쩌면 이 이야기가 나의 미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나는 정말이지, 이렇게 늙고 싶지 않았다. 이 책 속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그득하다.

        김혜리가 만난 사람, 김연수편을 읽었는데, 나는 그가 징글징글하게 느껴졌다. 소설가란 이런 직업이구나, 생각했다. 이건 정말 아무나 하지 못하는 거구나 생각했다. 그는 소설을 쓰는 자아와 일상의 자아가 또렷하게 분리된다고 했다. 연변에서는 <밤은 노래한다>의 어떤 장면을 쓰기 위해 소설에서와 같이 오르막 산길을 직접 뛰어봤다고 했다. 소설가란 정말 대단하구나, 말도 안 되는 사람이구나, 가까이하지 말아야지,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나는 그녀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 그녀에게도 소설을 쓰는 자아와 내가 훔쳐보는 일상의 자아가 분리되어 또렷하게 존재한다는 것. 그리하여, 소설가는 무섭고, 위대하다는 것.

        이제 그녀가 쌓은 벽돌 두 개. 그녀가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걸 지켜보고 싶다. 그리하여 단단한 벽이 만들어지는 것을. 그리하여 하나의 튼튼한 집이 만들어지는 것을. 시간이 갈수록 더 튼실한 벽돌이 세공되는 것을. 내가 가끔 시멘트도 발라주고. 그렇게 멀리서, (소설가는 무서운 사람들이니까) 보이지 않게 응원하고 싶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그 때는 당신의 벽돌을 읽은 적이 없었지만, 난 그 때부터 당신의 팬이었으니까. 이 밤에도 당신의 주인공들이 야심한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겠지. 다음에는 조금 밝은 벽돌이었으면 좋겠다. 사실 이번 벽돌은 좀 놀랬거든. 너무 어두워서. 그나저나 사월에 눈이 오면, 누구에게 전화를 해야 되지. 누군가 만날 사람은 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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