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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나주어서 고맙습니다
    서재를쌓다 2009. 9. 25. 00:40


      컴퓨터 시계가 21시가 되자마자 메일을 보내고, 엑셀 파일을 열어서 오늘의 숫자를 입력하고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왔다. 서대문까지 걸어와서는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 안에서는 스페이스 공감에 나왔던 박지윤 공연 영상을 봤다. 그걸 보느라고 군자에서 한 정거장 더 가버렸다. 아차산에서 다시 군자로 되돌아와서, 7호선으로 갈아탔다. 역에서 나오기 전에 지하철 안 쎄븐일레븐에서 씨네를 살까말까 망설이다가 샀다. 은행에 들러 돈도 뽑았다. 맥주를 한 캔 살까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들어왔다. 엠비씨 수목드라마, 정말 할 말이 없구나. 저게 뮝미? 으아. 9월이 가고 있다. 추석, 10월. 제발 시간이 늦게 갔으면.


              
             

      9월에 이런 책들을 읽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단편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읽는 동안 마음이 시큰거렸던 소설. 문예지에 이 단편이 공개되었을 때, 사보진 않았지만 이 제목 때문에 읽지도 않고 마음이 들떴던 바로 그 소설이었다. 이 책에는 내가 좋아하는 '모두에게 복된 새해'도 있어서, 이제 도서관을 가지 않아도 언제든 펼쳐볼 수 있게 됐다. '케이케이를 불러봤어', '달로 간 코미디언'은 두 번, 세 번 읽는 거였는데 처음보다 더 좋았다. 신형철의 해설도 좋았고.

      <무더운 여름>은 내가 좋아하는 위화 단편집. 위화의 소설 중 제일 좋아하는 <허삼관 매혈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이게 위화 소설 맞나 싶을 정도로 웃음기가 거의 없다. 처음엔 어리둥절했는데 몇 편 읽다보니 마음이 역시 시큰거렸다. 가장 마음에 남았던 단편은 '다리에서'. 아주 짧은 이야기다. 남편은 여자의 생리를 기다리고, 지금은 아이를 가질 때가 아니라고 여자를 설득한다. 여자는 생리가 늦어지는 것도, 그래서 혹시 아이가 생겼을 지도 모르는 것도 무덤덤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데, 남편은 그렇지가 않다. 빨리 친구(여자의 생리를 그는 그렇게 표현한다)가 와 달라고, 병원에 가서 혹시 아이가 생긴 거라면 지우자고 재촉한다. 여자와 남편이 병원에 가는 날, 진료를 받기 전에 여자의 몸 속에 뜨겁고 끈적거리는 그것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걸 느끼고, 여자는 어떤 말을 남편에게 전해듣는다. 그렇게 소설은 끝나는데, 그 여운이 엄청나서 아침 지하철역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인도 출신의 미국 작가인데, 이 소설집의 첫 단편을 읽고 완전히 그녀의 팬이 되었다. 한국에 출간된 그녀의 책은 현재 세 권. 이제 두 권이 남았다. 그래서 기대 중. 금방 그 두 권을 읽고 싶지만, 다 읽고 나면 그녀의 다음 책이 없어지는 거니까 그 달콤한 기다림을 위해 조금 늦게, 천천히 주문할 거다. 정말 별 다섯 개. 이 가을에 읽기 딱 좋은 소설. 한 편 한 편이 끝날 때마다 마음이 서늘해지고, 충만해진다. 소설은 끝났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이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드는 소설들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또 읽고 싶은 느낌이다. 그리고 그들이 잘, 살고 있었으면 하는 느낌. 정말 좋은 소설집이다. 강추. 내가 1억 정도의 여유가 있는 엄청난 부자라면, 약속이 생길 때마다 상대방에게 사서 선물해 주고 싶은 소설이다. 흠. 아, 마지막 이야기는 세 편의 연작인데, 여자의 이야기 한 편, 남자의 이야기 한 편, 그리고 여자와 남자가 성인이 되어 만나게 되는 이야기 한 편이다. 그 마지막 남자와 여자가 만나게 되는 이야기는 그저 그랬다.



       아, 짧게 쓰고 자려고 했는데. 오늘부터 서머싯 몸의 <면도날>을 읽는다. 좋아하는 작가니까, 아껴서 차분하게 음미해가면서 읽어야지. 뭐든지 따라하기 좋아하는 나는 영화 <선샤인 클리닝>을 보고 지난주 내내 징하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아주 사소한, 그냥 지나가는 대사였는데, 난 이런 거에 확 꽂히는 이상한 여자다. 아버지에게 아들을 맡기고 일을 하러 가려는 에이미 아담스.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한다. 엄마와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하는 중간에,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샌드위치 만들어 먹어도 되요?" 할아버지가 대답한다. "재료 다 있다. 들어가서 만들어 먹으렴." 그때부터 샌드위치가 머릿 속을 떠나지 않는 거다. 특히 모든 재료가 냉장고 안에 갖춰져 있고, 언제든 먹고 싶으면 빵에 이것저것 넣어 후다닥 만들어 먹는 고 장면. 맛있는 빵을 샀다. 하얀 빵 말고 건강에 좋은 색깔 있는 빵. 빵 위에 슬라이드 햄과 치즈를 얹고, 양상추를 잔뜩 넣고 아일랜드 소스를 뿌리고 빵을 또 얹어 반으로 잘라 먹었다. 반으로 자를 때 칼 끝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들렸다. 커피랑 같이 먹고, 우유랑도 먹었다. 토마토를 썰어 넣으면 씹는 순간, 내가 막 건강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아주 신선한 느낌. 아, 배고프다. 빨리 자야지.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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