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예담


    가난에 대해 생각했다. 고흐는 가난했다. 자기애가 강했으며, 동생에게 신세 지는 것을 평생 미안해했다. 자신의 그림에 대해 자신감이 있었지만, 현실은 녹록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금요일 밤 지하철 안에서 읽었다. 와인을 마시고 집에 들어오는 길이었는데, 내가 너무 바보같았다. 바람도 좋았고, 테라스도 좋았고, 와인도 좋았는데, 내가 못생겨 먹었단 생각이 들었다. 말년의 고흐는 자주 아팠다. 잦은 발작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동생이 직장에서의 갈등으로 심각한 고민에 빠지자 그는 불안했다. 동생과 돈 문제로 심각하게 다투고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가슴에 방아쇠를 당겼다.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고 6개월 뒤, 갑자기 건강이 악화된 동생 테오가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은 평생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가 테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를 읽는데 눈물이 났다. 술 기운 때문인지. 지난 일주일, 출퇴근 길에 늘 고흐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편지와 그의 그림들, 특히 그의 가난에 대해. 그가 남긴 마지막 편지는 다정한 편지와 50프랑을 고맙게 잘 받았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50프랑 고맙게 잘 받았다. 마지막까지 이 말이다. 그의 가난이 마음 속 깊이 박혔다.

     책은 고흐의 편지로 주로 이루어져 있는데, 후반부에는 동생 테오의 편지도 있다. 고흐는 자신이 늘 동생에게 신세지어야 한다는 사실을 미안해했다. 언젠가 좋은 값에 그림이 팔려 테오에게 진 빚을 다 돌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편지에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의 표현은 늘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는 현실적이고 넓고 깊지 못한 사람이니까) 그의 동생 테오가 어느 정도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평생 자신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형. 형을 믿지만 그도 부담이 될 거라 생각했다. 고흐의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편지글들을 계속 보니 더욱 그럴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테오의 편지를 보니 내가 얼마나 작은 사람인가 깨달았다. 그는 형을 존경했고, 늘 걱정했고, 형의 그림을 사랑했다. 그를 도울 수 있는 것에 감사했고, 돈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고흐는 안 되면 영혼이라고 주겠다고 말했다. 이 책은 내 2011년의 책. 고흐가 계속 마음에 남는다. 그의 가난이, 그의 글귀가, 그의 그림이. 곧 고흐의 그림을 보러 갈 거다. 

    책 귀퉁이를 아주 많이 접었다. 자주 훌쩍였다. 다행히도 마로니에북스에서 나온 <반 고흐 명작 400선>을 반값 할인할 때 사두었다. 밤 들기 전에 이렇게 저렇게 뒤적거리며 마음에 드는 그림들을 보고 있다. 고흐의 편지를 읽으며 좋아졌던 그림은 그의 연인이었던 시엔이 알몸으로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그림 '슬픔'과, 의자에 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는 노인'. 보고 있으면 정말 슬퍼진다. 


p.13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자연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사람이다. 

p.30
올 여름 나는 케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p.35
봄이 되면 종달새는 울지 않을 수 없다.

p. 59
그녀에게 특별한 점은 없다. 그저 평범한 여자거든. 그렇게 평범한 사람이 숭고하게 보인다. 평범한 여자를 사랑하고, 또 그녀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인생이 아무리 어둡다 해도. 

p. 137
성당보다는 사람의 눈을 그리는 게 더 좋다. 사람의 눈은, 그 아무리 장엄하고 인상적인 성당도 가질 수 없는 매력을 담고 있다.
거지든 매춘부든 사람의 영혼이 더 흥미롭다. 

p.140
계속 그림을 그리려면, 이곳 사람들과 함께하는 아침 식사와 저녁에 찻집에서 약간의 빵과 함께 마시는 커피 한 잔은 꼭 필요하다. 형편이 허락한다면, 야식으로 찻집에서 두 잔째의 커피를 마시고 약간의 빵을 먹거나 가방에 넣어둔 호밀 흑빵을 먹어도 좋겠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면 그런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모델이 떠나버리고 혼자 남게 되면 갑자기 나약한 감정이 나를 덮치곤 한다. 

p.154
내가 가장 불안하게 생각하는 점은, 글을 쓰려면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네 믿음이다. 제발 그러지 말아라, 내 소중한 동생아. 차라리 춤을 배우든지, 장교나 서기 혹은 누구든 네 가까이 있는 사람과 사랑을 하렴. 한 번도 좋고 여러 번도 좋다. 네덜란드에서 공부를 하느니 차라리, 그래 차라리 바보짓을 몇 번이든 하렴. 공부는 사람을 둔하게 만들 뿐이다. 공부하겠다는 말은 듣고 싶지도 않다. 

p.191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지.

p. 208 *
나는 늘 두 가지 생각 중 하나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는 물질적인 어려움에 대한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색에 대한 탐구다. 색채를 통해서 무언가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서로 보완해 주는 두 가지 색을 결합하여 연인의 사랑을 보여주는 일, 그 색을 혼합하거나 대조를 이루어서 마음의 신비로운 떨림을 표현하는 일, 얼굴을 어두운 배경에 대비되는 밝은 톤의 광채로 빛나게 해서 어떤 사상을 표현하는 일, 별을 그려서 희망을 표현하는 일, 석양을 통해 어떤 사람의 열정을 표현하는 일, 이런 건 결코 눈속임이라 할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표현하는 것이니까. 그렇지 않니.

p. 298
저는 계속 고독하게 살아갈 것 같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도 망원경을 통해 희미하게 바라보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홍진경의 글. 
빈센트 반 고흐.
그는 자기 귀를 자랐고 자주 사랑에 빠졌으며 동생에게 늘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가난했고 총명하였으며 심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하는데 그러나 한 번도 그처럼 살아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처럼 정직하게, 그처럼 오만하게, 그처럼 순순한 마음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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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클턴의 위대한 항해
알프레드 랜싱 지음, 유혜경 옮김/뜨인돌



    지난 겨울, 친구와 나는 모험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겨울은 어김없이 추웠다. 눈도 많이 왔지. 늘 그렇듯이 별달리 할 일은 없었다. 친구는 내게 <희박한 공기 속으로>를 권했고, 나는 친구에게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를 권했다. 우리는 각자 책을 읽고 만나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마시며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이야기하고, 서로 조금 울었노라고 고백했다. 우리가 왜 이렇게 극한에 도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뭐 그건 우리의 겨울이 별볼 일 없었기 때문. 맥주를 마신 홍대의 술집에서는 계산을 하는 우리에게 여자 둘이 이렇게 맥주 많이 마시는 건 처음 봤다고 했다. 우리는 오늘은 양껏 못 마신 거라 얘기해줬다. 책을 읽고 맥주를 마시는 동안 봄이 왔다. 그리고 어느새 여름.

    20세기의 영국, 어니스트 섀클턴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모험가였다. 섀클턴이 살았던 시대는 탐험의 시대였다. 남극 탐험에 열을 올렸던 사람 중에 섀클턴이 있었다. 1914년 8월 섀클턴은 인듀어런스 호를 타고 남극 횡단 탐험에 나선다. 27명의 대원과 함께. 그들의 도전은 634일간 계속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그들은 항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단단한 얼음 빙판을 만났고 배는 얼음과 얼음 사이에 갇히고 말았다. 기다렸지만 배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들은 고립됐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생존과의 싸움. 그들은 계획했던 남극 탐험에는 실패했지만,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을 버텼다. 그들은 실패했지만, 실패하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배를 버렸다. 식량이 있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언제 구조될 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들은 이동했다. 빙판 위를 걸었다. 육지에 가까워지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식량이 떨어지자 남극에 사는 펭귄과 물개들을 사냥했다. 어떤 날은 그들이 이동하는 거대한 빙판이 깨어질까 불안해했고, 어떤 날은 남극의 바다 위를 부유하는 빙판 때문에 그들이 이동한 거리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침울해했다. 매일 먹는 것과 추위를 걱정했다. 집으로 영영 돌아가지 못할까봐 걱정했다. 오직 그것뿐이었다. 책은 거의 대부분이 사냥 이야기, 먹는 이야기, 이동하고 실패한 이야기이다. 식량이 부족해 함께 데려간 개들을 잡아먹기도 했다. 개들에게 먹일 먹이도 먹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2년 여를 버틴 그들. 이 부분이다. 이 구절이 나를 행복하게도, 슬프게도 했다. 별일없이 고만고만한 겨울날들을 보내고 있는 나는 순간 그들이 부러워졌다. 얼마나 추울지 상상이 갔다. 얼마나 배고플지, 얼마나 외로울 지 상상이 갔다. 그리고 얼마나 무서울지도 상상이 갔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런 일기를 남겼다. "연기에 찌들고 꾀죄죄하며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비좁은 오두막에서 우리는 콩나물 시루처럼 서로 뒤엉켜 살고 있다. 한 솥의 물을 마시고 종기가 난 사람 옆에 바짝 누워서. 정말 끔찍한 생활이다. 여기서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는 행복하다."

    더이상 버틸 수 없던 섀클턴은 최정예 멤버를 꾸렸다. 배를 만들었다. 마지막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남겨진 대원들과 이제 영영 못 볼 수도 있었다. 배가 남극바다를 못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러면 모두가 다 끝장이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방법 밖에 없었다. 책의 표지가 바로 그 모습이다. 남겨진 대원들과 구조요청을 위해 떠나는 대원들.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아 불안하지만, 기적이 일어났으면 하는 손짓들. 그리고 기적은 일어났다. 구조대원들이 육지에 도착했다. 쉽지는 않았다. 

    "너무도 황홀해서 믿어지질 않는군요."
  워슬리가 말했다.
  그들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800여 m쯤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잠시 멈추었다. 워슬리와 크린이 스토브를 넣을 구멍을 파는 동안 섀클턴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발 디딜 곳을 파가며 올라간 언덕 위에서의 풍경은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았다. 단정짓긴 어려웠지만 경사가 끝나는 곳에 또 다른 절벽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어떤 소리가 귓가에 들려 왔다. 희미하고 불확실했지만 기적소리 같았다. 섀클턴은 지금이 6시 30분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포경 기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는 시각이었다. 

    기적소리가 그대로 그들에게 기적이 되었다. 섀클턴은 남은 대원들을 구하러 갔다. 그들은 모두 구출되었다.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이 책의 부제는 '살아있는 한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책 날개에 있는 정보에 따르면, 섀클턴은 다시 탐험을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탐험에서 죽게 되었다고. 그의 생애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평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사람들은 그를 실패한 사람보다 성공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이 책의 제목에 있는 수식어처럼 '위대한' 성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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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from 서재를쌓다 2011. 4. 11. 23:17

    시를 읽는 봄밤. 오래간만에 시집을 샀다. 집에 가는 길에 화장실이 급해 교보에 들렀는데, 오늘 보았던 어떤 시집이 생각났다. 지하철을 타려다 마음을 바꿔 버스를 탔다. 시집을 뒤적거리다 시 한편을 찬찬히 읽고, 졸았다. 어느새 집 앞. 목련꽃이 환하다. 봄밤같다. 이제 자야지. 푹 자야지. 내일부터는 다이어트다. 


상처를 이야기하는 누이들에게
                                            김승강

너희는 상처를 이야기해라 나는 술을 마시겠다 어제는
통닭튀김에 생맥주가 간절히 생각나 생맥줏집에 갔다
통닭튀김에 생맥주가 놓인 풍경은 주기적으로 머릿속에
서 떠오른다 너희는 상처를 이야해라 나는 술을 마시
겠다 비가 내린다 긴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 나는 반가워
또 술을 마신다 어제 한 맹서는 하루 만에 거둔다 너희는
상처를 이야기해라 나는 술을 마시겠다 아내가 인심 좋
게 나가서 술 한잔하고 들어오지요 한다 아내는 병들고
폐경이다 아내와 관계를 가진 적이 언제였던가 술로도
달랠 수 없는 것이 있는 법 세월은 자꾸 흐르는데 아내는
내 마음을 벌써 읽었다 너희는 상처를 이야기해라 나는
술을 마시겠다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다 초등학교 동창
모임 소식이다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가면 여자 동창들
이 더 적극적이다 나에게는 상처가 없으니 그리움이 전
부 그리움 앞에 술은 얼마나 큰 위안인가 나는 간신히 중
년 주기적으로 통닭튀김에 생맥주의 풍경이 떠오른다
너희는 상처를 이야기해라 나는 술을 마시겠다


나는 간신히 중년, 이라는 시구.
이 시집에 이런 제목의 시도 있다. '자판기 커피는 내가 빼올게'


기타 치는 노인처럼
김승강 지음/문예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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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X에게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열화당


    2월. 우리는 광화문의 술집에 있었다. 좁은 나무 계단을 삐걱대며 올라가면 작은 다락방이 있는 술집이었다. 다섯 개의 탁자가 놓여져 있고, 그 중 하나에 앉아 술을 마셨다. 따뜻한 정종을 한 잔 마시니 방바닥이 뜨끈해졌다. 한 잔만 마시고 가자고 한 것이 두 잔이 되었고, 세 잔이 되었다. 아마 다섯 잔 정도 마셨을 거다. 옆 테이블에 영풍문고 종이가방을 든 점잖은 아저씨 일행이 들어와 정종을 시켰다. 우리가 시킨 모듬 꼬치에 참새구이가 들어가 있나 그런 이야기도 했었다. 가족이야기도 했고, 옛날 사람들 이야기도 했다. 조금 울기도 했지만, 많이 웃었다. 밖은 추웠지만 방바닥은 뜨끈뜨끈했다. 내가 이 책을 꺼냈다. 세 잔 정도 마셨을 거다. 

   편지로만 씌어진 소설이야. 이 소설이 마음에 들었던 건 손 그림이 나오면서부턴데 여기 봐봐. 여자가 남자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기 손을 그려 보내. 처음 그림이 펜을 쥐고 있는 손이야. 손 그리는 법을 설명한 책을 보고 그린 그림이야. 이 소설을 읽다가 눈물이 날 뻔 했는데, 그건 다 손 그림이 나오는 부분이야. 처음엔 편지 쓰고 있는 손. 여기 손에는 눈이 있어. 꼭 잡고 있는 두 손도 있어. 어디든 두고싶은 곳에 두래. 가위 잡고 있는 손, 칼 잡고 있는 손. 여기 이게 마지막 손이야.

   두 잔 정도를 더 마시고 술집에서 나와 집에 있을 동생과 남편을 위해 빈대떡을 사서 각각 포장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아빠가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들고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는 아빠도 아니면서, 술도 얼큰하게 취했고 빈대떡도 샀다. 2월이었고, 3월인 지금도 춥지만, 2월에는 지금보다 더 추웠다. 오늘 종로에서 버스를 타고 오면서 멍하게 앉아 이 소설 생각을 했다. 그 손은 잘 있을까. 펜을 쥐고 있을까, 편지를 쓰고 있을까, 누군가의 손을 맞잡고 있을까, 칼을 쥐고 있을까. 봄은 언제 오는가. 그런 생각들. 

    2011년 2월의 나는 이런 문장들을 다섯 번 반복해서 읽었다. A가 X에게, 167페이지. 역시 손 이야기다. "단추와 콩은 공통점이 있어요. 그게 뭔지 알아요? 힌트를 줄게요. 당신 손을 한번 보세요! 내가 보낸 손 그림들을 창문 바로 아래 붙여 놓았다고 했죠. 그렇게 하면 바람이 불 때마다 그림들이 제멋대로 흔들린다고요. 그 손들은 당신을 만지고 싶은 거예요. 당신이 먼 곳을 보고 싶을 때 당신의 고개를 돌려 주고, 당신을 웃게 해주고 싶은 거라고요. 갓 태어난 아기들이 울음 대신 웃음을 터뜨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상한 질문이죠. 우린 삶이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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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보통 열차
오지은 글.사진/북노마드


   그녀에게는 '혜령'이라는 친구가 있다. 처음에 사인을 받을 때 내 이름을 말하니, 그녀는 자기 친구 중에 혜령이라고 있다고 친구이름과 비슷하니 반갑다고 약간 들뜬 상태로 말해주었다. 그리고 두 번째 사인을 받을 때 내 이름을 말하니, 믿을 수 없게도 그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혜령이라는 친구가 있다고 전에 얘기했었죠. 그녀는 또 한번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아, 나는 참으로 감동받았다. '비록 당신의 미래 위에 그 어떤 사랑이 온대도 당신이 나를 잊지 않기를 바란다'는 오지은님이 나를 알고 있다고. 이 지경이다. (나는 'Wind Blows'가 참 좋다. 이 노래를 들으며 길을 걷고 있는데, 싸아-하고 바람이 불어오면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그러니까 이 책은 보기와 다르게 술을 못 마시고, 보기와 다르게 다정하고 세심하고 꼼꼼한(미안요. 왠지 처음엔 그런 이미지아니였거든요. >.<) 그녀가 들려주는 카이도 여행이야기다.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간다. 재밌다. 그녀와, 그녀의 음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읽으면 조금 재미없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이 책을 통해 그녀의 음악을 접해도 좋을 일. 이번 연휴 때 읽으려고 넣어갔는데, 처음에 꽤 재밌어서 연휴 끝나기 전에 다 읽어버릴까봐 아껴 읽었다. 전 부쳐야 하는 내게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막내동생이 이 책에 손을 대는 바람에 하룻밤 빼앗기기도 했다. 서울 올 때 동생이랑 버스 따로 타고 올라왔는데, 동생이 이 책 계속 읽으려고 (한 권 더 사려고) 서점까지 들렀다는 사실. 안타깝게도 작은 읍내 서점이라 책은 구할 수 없었고, 나는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보조등까지 켜놓고 다 읽었다. 버스 안에서 해가 졌고, 마지막 책장을 넘기니 차가 막히고 있었다. 그때부터 서울까지, 그녀의 음악을 들었다. 1집 노래들. 화, 부끄러워, 오늘은 하늘에 별이 참 많다, Wind Blows...

  그녀는 생각보다 세심한 여자였다. 꼼꼼하고 소심하기도 했다. 나쁜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보내지 않고, 속에 들여놓고 곱씹고 아파한 뒤에 내어보냈다. 그렇게 2집까지 끝내고 나니, 마음이 아픈 일이 많았다 했다. 상처를 많이 받았다 했다. 홋카이도 여행은 그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보통 열차를 타고, 보통의 속도로, 보통의 나를, 보통의 마음으로 돌아보는 일. 그녀가 한 카이도 여행이다. 빨간머리 앤 모자와 닮은 밀집모자를 쓰고, 맛집을 찾아가고, 기차역에서 소문난 에키벤을 사 먹고, 돌아다니면서 하나씩 사온 과자며 케이크를 꺼내 먹으며 즐기는 보통 열차 여행. 처음부터 상처받은 마음의 치유 목적으로 떠난 여행이었기에, 그녀는 이 여행의 모든 것에서 위로를 받는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초록의 풍경, 역에서 맞이하는 카이도의 바람, 옆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 할머니가 건네주신 훈제굴, 덜컹덜컹거리며 느리게 움직이는 보통 열차의 소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밤의 풍경, 혼자이지 않아서 좋은 유스호스텔, 조금은 쓸쓸하게 느껴졌던 흐린 날의 하나비, 편의점의 스티커를 모아 마침내 구입하게 된 벼랑위의 포뇨 그릇까지. 그리하여 이 여행의 끝, 그녀의 상처는 아물어졌는가. 그건 이 책의 하얀색 겉표지를 벗겨보면 알 수 있다. 

   아쉬운 건, 그녀가 맥주를 조금만 좋아했더라면, 카이도의 맥주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에... 그러니까 요 맥주로 말할 것 같으면... 으로 시작하는 그녀스러운 수다를 잔뜩 들으며 대리만족할 수 있었을텐데. 고 맛들을 상상할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아. : D 헤헤- 고마웠어요, 지은씨- 지은씨 덕분에 이번 연휴 돌아오는 길이 즐거웠어요. 저도 올해 꼭 카이도 여행을. 기필코. 

   나는 역에서 미리 산 커피와 함께 내 자랑스러운 전리품들을 뜯었다. 먼저 류게츠의 신작 쿠로미츠카린, 흐음, 우리 할머니가 좋아할 맛이야. 맛동산 같은 만쥬였다. 겉은 쫄깃한 빵, 속은 부드러운 앙금. 흑설탕맛이 깔끔하고 진했다. 보후린은 참으로 맛있는 아몬드 비스킷이었다. 지나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우물무물. 어떤 사람의 눈에는 그냥 그런 시골 풍경에 그냥 그런 시골역들일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모두가 흥미진진했고 소중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것, 이 심심한 풍경과 부드러운 초록색이 지금의 나에게 치료제가 되어주겠지. 나는 다시는 못 볼 것처럼 눈을 떼지 못하고 밥을 꼭꼭 씹어 먹듯 눈 속에 꼭꼭 담았다. p.66_7.보통 열차를 좋아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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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종사는 내 텐트 위를 세 번 빠르게 연속해서 저공비행하더니 한 번 지날 때마다 상자를 두 개씩 떨어뜨렸다. 그런 다음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졌고 또다시 나는 혼자가 되었다. 침묵이 다시 빙하에 내려앉았다. 아무 힘없이 버려진 채 길을 잃은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나는 당황해서 얼른 울음을 멈추고 목이 쉴 때까지 큰 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p.274


   첫 눈이 왔다. 영화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하늘에서 하얀 이물질이 떨어지는데, 그게 바로 눈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눈이 펑펑 날리고 있었다. 그 눈을 고스란히 맞으며 돌아왔다. 

    이번 주의 일이다. 아침, 지하철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그 때 예감했어야 했는데. 그 날이 아픈 날이 될 거란 걸. 그 날, 밤에도 울었다. 술집 화장실에서, 버스 안에서. 나는 쿨한 여자가 되고 싶은데, 그건 내 소망일 뿐. 사실 쿨하다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 그 날, 나는 너무 바보같았다. 상처받았고, 지난 여름부터 차곡차곡 쌓아왔던 나의 믿음들이 무너졌다. 그건 오해였다. 우린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는데, 그 시간 이후로 모든 게 틀어졌다. 분명한 건, 그건 나의 잘못이 아니였다는 것. 너의 잘못이고, 나의 오해였다는 것. 그 날은 아침부터 밤까지, 슬픈 날이었다. 오랜만에 울었다. 

   그래서 이번주는 조금 우울했는데, 정말 다행인 건 그 날 아침 내가 이 책을 읽고 있었다는 거. 이 책이 나를 위로해줬다. 정말이다. 다름아닌 지금 이 책이 내게 와 주어서, 나를 스쳐 지나가지 않고 만나주어서, 마침 내가 그 부분을 읽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는 몇 번이고 책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인투 더 와일드
존 크라카우어 지음, 이순영 옮김/바오밥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야생의 삶을 살고자 알래스카의 어느 외진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에겐 약간의 식량과 소총, 카메라와 책 몇 권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철저히 야생의 삶을 살고자 했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느끼고 생각하려 했다. 그렇게 세상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러다 시간이 되면, 다시 사람들 속으로 돌아오려고 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자신의 삶이라 생각했다. 남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땅 위를 떠돌았으며, 방황했다. 그 방황의 끝을 알래스카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가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땅이고, 삶이었다. 동경해 왔던 그 무엇이었다. 그는 자신감에 가득찬 채 숲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다시 돌아오지는 못했다. 남자는 백일을 알래스카에서 살았다. 사소한 실수를 했고, 결국 그 실수로 인해 숲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남자의 이름은 크리스 매캔들리스. 아니,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렉스라고 소개했다. 그건 그가 방랑을 시작하며 자기 자신에게 붙인 새로운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을 기록한 또 다른 남자, 존 크라카우어. <희박한 공기 속으로>의 작가. 그가 이 책을 썼다.

    이 책이 이번주 내내 내게 위안이 되어 주었다. 내가 읽은 존 크라카우어의 두번째 책인데, 이 책으로 나는 이 사람에게 완전히 반했다. 잔상이 오래 남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이야기 속의 그가 숲에서, 산에서 살아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책을 읽고나서 그런 생각들이 자꾸 마음 속을 맴돌았다. 그도 그래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신문에 관련된 기사를 기고한 뒤에도 자꾸 마음에 남아서, 잊을 수가 없어서, 주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의 흔적들을 찾아서 이렇게 책으로 엮을 수 밖에 없었다고. 책을 읽으면 그런 존 크라카우어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내가 책 귀퉁이를 접은 부분이 두 군데인데, 둘 다 크리스의 이야기가 아니라 존 크라카우어의 이야기이다. 존 크라카우어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책에 나온다. 그 부분을 읽으면 왜 존이 크리스의 삶에 의문을 품고, 더 깊이 추적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이건 사실 크리스의 이야기보다, 존 크라카우어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크리스는 죽었고, 두 사람은 생전 단 한번도 마주친 적 없다. 존은 크리스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존도 말한다. 자신의 젊은 시절과 크리스의 삶은 공통점이 아주 많다고. 

     이 책이 내게 왜 위안이 되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이 책은 알래스카에서 이상을 실현하다 죽은 한 남자의 이야기이고, 나는 그 사람이 멀어지고자 했던 그 세상 속에 있다. 이상하게도 책을 읽을 때마다 외롭지가 않았다. 알래스카의 인적 없는 숲에 홀로 있는 알렉스를 떠올리면 그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발 디디고 있는 이 곳이 더 외로웠다. 크리스가 살아 나와, 직접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으면, 그래서 내가 지금 그 책을 읽고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더이상 없으니까. 책 속에서만 존재하니까. 길 위에서 그를 만난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에게 반했다. 그래서 마지막 한 장의 사진에 가슴 아팠다. 존 크라카우어의 표현이 맞다. 그는 행복해보인다. 평화로워보인다. 


   단단하지 못한 깃털 성에를 보니 그 마지막 6미터를 올라가기가 얼마나 힘들고 무섭고 성가실지 알고도 남았다. 그런데 어느 순가 갑자기, 더는 올라갈 곳이 없었다. 내 갈라진 입술이 벌어지며 힘겨운 미소로 변했다. 나는 데블스 섬의 정상에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상은 초현실적이고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가늘고 뾰족한 바위와 성에는 넓이가 서류 캐비닛 정도였다. 어슬렁거리며 다닐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장 높은 지점에 양다리를 벌리고 서고 보니, 남쪽 절벽은 내 오른쪽 신발 아래로 760미터 이어져 있었고, 왼쪽 신발 아래로 북쪽 면은 그 길이가 두 배였다.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사진 몇 장을 찍고 액스의 굽은 끝을 똑바로 펴기 위해 낑낑거리면서 몇 분을 보냈다. 그런 다음 일어서서 조심스럽게 방향을 돌린 다음 캠프로 향했다.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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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는 캄보디아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앙코르와트를 걷고 또 걸었다고 했다. 거길 다녀오니, 어딘가로 또 떠나고 싶어진다고 했다. 그날 밤, 우리는 여행 책을 샀다. 김남희의 책이다. <일본의 걷고 싶은 길> 1권. 사진이 너무 많아 실망했지만, 사진이 많아서 좋기도 했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연두빛 나뭇잎들이 글과 글 사이에 놓여 있다. 나무들이, 산들이, 고즈넉한 일본의 거리가 글과 글 사이에 놓여 있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매일 밤 퇴근하면서 이 책을 읽었다. 김남희를 따라 그 길을 걸었다. 내가 늘 가고 싶어했던 일본 북쪽의 마을들. 김남희는 내가 하고 싶어했던 노천 온천을 원없이 했더라. 하루종일 걷다, 예약해둔 숙소에 들러 생선 반찬에 된장국의 소박한 저녁밥을 먹고, 온천을 하고, 잠이 드는 그런 여행. 난 항상 겨울의 홋카이도를 생각했는데, 봄과 여름의 카이도도 근사하더라. 언젠가 나도 그런 여행할 수 있겠지?




    그 밤, 이런 잡지도 샀다. 도보여행가 김남희씨가 아닌, 뼛속까지 영화인 김남희 언니가 추천해 준 잡지. 월간지고, 한 달에 한 번씩 여행을 떠날 도시를 선정한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장소들, 풍경들, 사람들을 소개해 준다. 지난 달부터 사 보기 시작했는데, 이번 달은 한국의 도시다. 담양. 이번 호를 보면 담양에 가서 얼마나 멋진 나무들을 볼 수 있는지, 얼마나 맛있는 남도 음식들을 먹을 수 있는지, 또 얼마나 근사한 숙소들이 있는지 알 수 있다. 느긋하고 편안한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 근사한 대나무 숲도, 입이 쩍 벌어지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도 만날 수 있단다. 여행 책이 있고, 여행 잡지가 있어 다행인 무더운 여름밤. 꿈꿀 수 있어 다행이다. 



   <다카페 일기>가 반값 할인 중이다. 신나서 구입. 내가 아끼는 책이다. 소심한 아빠가 오랜 시간을 두고 쓴 사진일기. 아내가 등장하고, 딸아이가 등장하고, 새로 태어난 남자아이가 등장한다. 천연덕스럽게 귀여운 와쿠친도 빼놓을 수 없지. 첫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봄이 되었다가, 여름이 되었다가, 가을이 되었다가, 겨울이 되었다가. 1살이 되었다가, 2살이 되었다가, 3살이 되었다가.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마지막 장을 넘겼는데 왠지 마음이 찡했다. 아, 이렇게 시간이 흐르구나. 나이를 먹는 구나. 그걸 내가 이렇게 지켜 보고 있구나. 좋은 책이다. 건조한 한 줄의 메세지와 지극히 사적인 사진이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니. 놀라운 책이다. 2권은 좀 천천히 구입하려고. 다카페 가족들의 시간을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한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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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30.06.10

from 서재를쌓다 2010. 7. 4. 21:48

    그가 알고 있는 슬픔 중에는, 이른 아침 막 깨어났을 때의, 준비되지 않았으면서 아무런 방어도 없이 만나게 되는 그런 슬픔이 가장 시적이었다. 창밖에는 새가 울고 입안에는 비린내나는 눈물이 가득 찼으며 아주 멀리서 자동차의 소음이 이제 막 시작했다는 듯이 그렇게 들려오고 창 아래로 난 길에는 이른 시간에 일하러 가는 사람들의 자박거리는 발걸음 소리, 부엌에서는 개가 신음하고 나뭇잎과 햇빛과 바람, 발코니의 꽃들은 어제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데 그는 침대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마치 그가 바로 어제 심장이 쨍 하고 깨어질 만큼 치유되지 못할 슬픔을 가졌는데 오랜 잠 때문에 그 일을 잊어버리고, 마치 종이가 물속에서 녹아버리듯이 자기 자신마저 잊어버리고, 망각의 강을 따라 먼 곳으로, 더 먼 곳으로 흘러 여기에 있게 된 듯한 그런 막연한 슬픔을 느끼곤 했다.
'양의 첫눈' p.12-13 [올빼미의 없음]


    지난 수요일, 배수아를 만나고 왔다. 배수아를 무척 좋아하는 B가 나를 초대해줬다. B는 꿈만 같은 일이라 했다. 그 날 우리는 마약떡볶이를 먹고, 배수아를 만나러 갔다. 배수아를 만나고 나서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맥주와 감자튀김을 먹었다. 수요일밤의 배수아가 얼마나 근사했는지 이야기하면서.

   배수아는 까만 드레스를 입고 등장했는데, 아주 긴 드레스였다. 모자가 달려있었는데, 꼭 연극 무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그런 의상이었다. B는 배수아의 목소리를 듣더니 상상한 그대로라고 했다. 범상치 않은 소설가였다. 그녀는 성기완의 질문에 그건 대답할 성질의 문제가 아닌 것 같네요, 류의 답변을 생글거리며 건넸다. 모든 것이 독자의 몫이라 했다. 자신이 독일에 가는 것은 생활하러 가는 것이지,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했다. 독일에 가서 3개월 동안 집 안에 틀어박혀 글만 쓰고 온다 했다. 왜 독일이냐는 질문에는, 그저 그렇게 됐다고 했다. 영어권은 싫었고, 프랑스는 맞지 않았다고. 이런 저런 질문과 답변이 오고가고, 그녀가 낭독을 시작했다. 나는 낭독하는 내내 그녀의 얼굴이 클로즈업 된 화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소설가는 연극배우같이 낭독을 했다. 톤을 낮게 깔며 노작가의 목소리를 내고,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면서. 마치 오늘 이 시간만을 기다려온 듯이, 완벽하게 낭독을 했다. 

   근사한 수요일 밤을 보내고 읽기 시작한 배수아의 소설집. 어느 아침, 지하철에서 저 구절을 읽었다. 세상에서 가장 시적인 슬픔. 7월, 배수아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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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샀다. 시인의 첫 시집이다. 이런 시가 있다.


반가사유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함석 간판 아래 쪼그려 앉아
빗물로 동그라미 그리는 여자와
어디로도 함부로 팔려 가지 않는 여자와
애인 생겨도 전화번호 바꾸지 않는 여자와
나이롱 커튼 같은 헝겊으로 원피스 차려입은 여자와
현실도 미래도 종말도 아무런 희망 아닌 여자와
외항선 타고 밀항한 남자 따위 기다리지 않는 여자와
가끔은 목욕 바구니 들고 조조영화 보러가는 여자와
비 오는 날 가면 문 닫아 걸고
밤새 말없이 술 마셔주는 여자와
유행가라곤 심수봉밖에 모르는 여자와
취해도 울지 않는 여자와
왜냐고 묻지 않는 여자와
아,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저문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사랑 같은 거 믿지 않는 여자와
그러나 꽃이 피면 꽃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와
독하게 눈 맞아서
저물도록 몸 버려야지
돌아오지 말아야지




여름이 왔고, 맥주 마시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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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민음사


"래리가 숫총각일까요?"
"이사벨, 그 친구 벌써 서른둘이야."
"분명히 숫총각일 거예요."
"어째서?"
"여자라면 그 정도는 직감으로 알 수 있거든요."
"내가 아는 어느 젊은 친구는 예쁜 여자만 보면 지금껏 여자를 한 번도 안 사귀어 봤다고 거짓말을 해서 몇 년째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고 있어. 그 친구 말로는 그게 무슨 주문처럼 효과를 발휘한다더군."
p.281


   500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나는 왜 이 페이지에만 책모서리를 접어놓았을까. 서머싯 몸이다. 내가 좋아하는 서머싯 몸. 이 소설에는 작가 서머싯 몸이 등장한다. 그런데 나는 그가 너무 세상사를 달관한 듯한 모습으로 등장해서, 젊고 예쁜 여자를 좋아해서, 점잖은 속물이라서 실망했다. 래리. 래리는 가끔 생각날 것 같다. 이사벨도 마찬가지. 두 사람은 하고자 하는대로 했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았다. 한 사람은 부를 버렸고, 한 사람은 부를 쫓았다. 모두가 예상했겠지만, 래리는 서른둘, 숫총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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