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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망의 구 - 세계는 멸망했습니다
    서재를쌓다 2009. 9. 9. 22:15

    절망의 구
    김이환 지음/예담



        약속 없는 일요일 오전에 내가 하는 짓. 일어나자마자 MBC에서 하는 프로그램 섭렵하기. 해피타임-환상의 짝꿍-서프라이즈-출발비디오여행, 까지 보고나면 일요일이 벌써 다 가버린 것만 같다. 월요일의 공포가 스멀스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고. 일요일에는 늦잠을 자는 경우가 많아서 거의 환상의 짝꿍 후반부나 서프라이즈부터 시작할 때도 많다. 저번 일요일에도 환상의 짝꿍 후반부에서 시작했다. 하고 싶은 얘기는 서프라이즈에 나왔던 2012년 종말론. 서프라이즈에 따르면 2012년의 종말론은 마야 문명(난 요것만 알고 있었는데)뿐만 아니라, 중국의 주역에서도 2012년에 지구가 종말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 노스트라무스의 예언도 1999년이 아니라 2012년이란다. 2012년에 한 행성과의 충돌이 있을 것이고, 나사도 이걸 알면서 쉬쉬하고 있고 등등. 그 이야기를 잠에 취한 채로 보고 있는데, 이 책이 생각이 났다지. <절망의 구>.

         1억원 고료 멀티 문학상 수상작이다. 검은 구와 한 남자의 이야기다. 어느 날, 남자는 검은 구를 발견한다. 이 구는 아주 천천히, 사람이 아주 천천히 걷는 속도와 비슷하게 움직이는데, 남자가 멀찍이 떨어져서 보니 이 구가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거다. 구에 닿기만 하면 사람들이 구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이 남자가 제일 먼저 목격한다. 남자는 구를 피해서 도망가기 시작한다. 이게 소설의 시작이고, 남자와 구의 절망적인 운명의 시작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스토리는 '구가 쫓아오고, 남자가 도망친다' 이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상황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도 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구는 그저 구다. 책 속의 사람들은 그 구를 '절망의 구'라고 부른다. 구에 흡수되는 순간 사람들은 절망을 느끼기 때문에. 그게 구의 내부에 대한 정보의 전부다. 

        서프라이즈를 보면서 생각났던 이 소설의 어떤 장면. 제일 기억에 남는 부분이었다. 마트 안에서 남자와 남자와 마지막을 함께한 청년이 티비가 진열되어 있는 매장에서 함께 본 파란 바탕 위에 선명한 하얀 글자. '세계는 멸망했습니다.' 그 티비 화면을 배경으로 어떻게든 살아 '남아'보기 위해 두 사람은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신다. 그런 그들의 뒤로 계속해서, 변함없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하얀 '세계는 멸망했습니다.'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이 장면이 제일 보고 싶다. 대여섯 개의 티비 화면에 불이 들어와 있고, 변함없이 세계는 멸망했다지만, 언젠가 저 글자가 마술을 부린듯 세계는 멸망'하지않았'습니다,로 바뀔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멸망한 세계를 살아가는 남자의 모습.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이 장면은 아주 쓸쓸하고 쓸쓸하고 쓸쓸했으면 좋겠다.

        소설은 빨리 읽힌다. 분량이 제법 되지만, 손에 잡으면 금방 읽을 수 있다. 열심히 읽다가 마지막 결론에 다다르면, 뭔가가 다시 시작된다. 결국 끝도 없이 이어지는 거다. 남자의 도망도, 구도, 절망도. 그러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구라는 생명체라고 해야 하나, 괴물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검은 구는 작가의 상상 속에서 존재하고 키워져서 동그란 구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졌지만, 그건 진작부터 우리가 하나씩 가지고 있던 '그 무엇'이 아닌가 하는.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나를 뒤쫓고 있는 수많은 '그 무엇'이 어느 날 절망의 구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내게 아주 천천히 다가온다면, 나도 남자처럼 도망쳐야 하나. 사실, 나는 그냥 그 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남자가 그냥 빨려 들어갔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왠지 그 안에 뭔가 특별한 세상이 존재할 것만 같았거든. 결국 그런 건 없고, 절망 뿐이라지만. 결말이 좀 흐지부지하게 끝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엔딩 공모전을 하는 건지. 그나저나 2012년에 종말이 올까. 그래서 우리의 파란 세계도 하얗게 멸망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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