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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링크로스 84번지 - 헬렌의 입맞춤을 가득 담아
    서재를쌓다 2010. 2. 6. 20:24
    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궁리


       내게도 헬렌이 있다. 그녀도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우리의 경우는 메일이었다. 나는 채링크로스 84번지에 근무하지도, 희귀한 헌 책들을 뚝딱 구해올 능력도 없지만, 내게는 그녀에게 없는 책 한 권이 있었다. 그건 어디서도 더 이상 살 수 없는 책이었다. 출판사에서 아주 소량만 만들어 배포했던 거니까. 나는 그 책을 두 권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 책을 한 권 보냈다. 우리는 같은 작가를 좋아했고, 그 책은 그 작가의 블로그 모음집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내게 책을 보내왔다. 절판되어서 구하지 못하고 있던 책, 그 작가는 페루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게도 헬렌이 있다.

       그녀와 나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마크스 서점의 식구들과 헬렌이 그랬던 것처럼. 헬렌은 어느 날 평론지에 실린 마크스 서점의 광고를 보고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그녀는 원하는 책을 말했고, 마크스 서점 사람들은 그것을 구해서 그녀에게 보내주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들은 일종의 전표. 주문서와 영수증이었다. 헬렌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냈고, 마크스 서점 사람들은 그녀의 마음을 소중히 여겼다. 고마움은 또 다른 고마움을, 감사함은 또 다른 감사함을 낳았고,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 20여 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 서로의 일을 걱정해주고, 서로의 먹을거리를 걱정해주면서, 진짜 친구가 되었다.

       얼마 전 읽은 책도 역시 서간집이었다. 마종기 시인과 루시드 폴의 편지 모음집. 두 사람은 스위스와 미국에서 그 편지들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두 사람 다 고국을 떠나 있으니 외로웠고, 쓸쓸했고, 고독했다고 한다. 한 사람은 의사이고 시인이고, 한 사람은 과학을 연구하며 음악을 만들고 부르는 사람. 두 사람은 공통점을 찾았고,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했고, 서로의 메일을 기다렸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는 동안, 그리고 가을이 왔다, 겨울이 가는 동안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았고, 서로를 응원했다. 헬렌과 마크스 서점 식구들처럼. 그렇게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면 이제 영국의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찾아가도 마크스 서점은 없다고 한다. 단지 여기 언젠가, 마크스 서점이 있었다는 동판만 남겨져 있을 뿐. 조금은 엉뚱한 생각을 해 봤다. 만약 헬렌이 아주 유명한 작가였다면, 혹은 아주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면, 마크스 서점이 여전히 남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 그곳에는 사나운 표정의 헬렌 (표지를 넘기자마자 있는) 사진이 서점 어느 한 모퉁이에 걸려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그 모퉁이 책장에는 헬렌이 마크스 서점에서 구입한 책들만 꽂혀 있는 거다. 그러니까 버지니아 울프의 <일반 독자> 2권, 월턴의 <낚시의 명수> 같은 책.

       헬렌과 마크스 서점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만나지 못했지만, 나와 나의 헬렌 곡예사와는 벌써 한 번 만났다. 우리는 대학로에서 연극을 한 편 봤고, 고기를 먹고 술을 마셨다. 우리가 읽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며, 우리가 열렬히 좋아하는 작가 이야기도 했다. 지나간 사랑에 대해서도, 앞으로 무얼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 날 우리는 취했고, 나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같은 작가를 좋아하게 된 것을, 같은 연극을 볼 수 있음을. 그래서 많이도 건배, 건배했다. 헬렌과 마크스 서점 사람들도 만났더라면 그랬을 텐데. 두 말 할 것도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텐데. 그게 조금 안타깝다. 그러면 이 책은 훨씬 두껍고, 풍요로워졌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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