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아득한 청춘의 그림자들이 고요히 스며들던 한 생애의 뒷골목, 저녁이면 녹색의 별들이 뜨는 리스본 7월 24일 거리

    나는 7월 23일의 거리를 걸어 한없이 그대에게로 가고 있었는데 그대는 여전히 7월 24일 거리에서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테지

    우리의 청춘은 늘 시차가 다르던 생의 거리

- 리스본 7월 24일 거리 중에서


    이번 주 내내 장소들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이야기들이 시작되고, 성장하고, 끝을 맺게 되는 장소들을 찾아 헤맸다. 여전히 찾고 있지만. 어제는 조금 늦게 회사에서 나와 Y씨랑 사람들이 꽉 찬 이천이백번을 타고 합정으로 왔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 아쉬워 산책길을 걸어 떡볶이와 맥주를 먹으러 갔다. 가는 길에 누군가를 본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본 것 같아요. Y씨에게 말하니, 아 K요? 라며 그럼 따라가 보자고 했다. 우리는 조심조심 그의 뒤를 쫓았는데 아무래도 뒤태가 그가 아닌 것 같았다. 그라고 하기엔 너무 살이 쪘다. 그를 못 본지 1년은 넘은 거 같으니 살이 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옆의 여자랑 너무 다정했다. 부인일까요? Y씨가 말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들으니 너무 굵었다. 아무래도 그가 아닌 것 같았다. K가 맞다면 아무래도 패션이 마음에 들지 않네요. Y씨가 말했다.

    오늘 아침에는 Y언니가 보라고 한 장진과 장항준 감독이 나오는 놀러와를 틀어놓고 컵라면을 먹었다. 장항준이 그런다. 내가 장진보다 하루 더 살 거예요. 이번 생에서는 절대 장진을 이길 수가 없을 거 같으니까, 하루 더 살아서 씹을 거예요. 장진을. 장항준은 장진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는 문자를 받을 때 술자리에 함께 있었다고 한다. 술을 마시다 장진이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는데 상기된 얼굴로 들어와서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 장항준은 젠장, 이런 심정이었겠지. 왠지 그 장면이 눈에 그려지는데, 재밌고 슬프고 그렇다. 누군가 또 그랬는데, 장진이 군대 가기 전엔 바보였는데 군대 갔다 오니 천재가 되어서 돌아왔다고. 내가 본 장진 영화들이 모두 좋진 않았지만, 내가 본 장진 연극은 좋았다. 너무 웃겨서 배꼽을 잡고 웃다보면, 어느새 슬퍼지는 그런 연극이었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책상 주변 정리를 하고, 계속 앉아만 있다.



    작년 12월에 이 책을 읽었다. 어떤 글에서 '좋은 소설이지만 주목받지 못한 2011년의 책 베스트 10'을 꼽았는데, 거기에 이 책이 있었다.

"누구에게든 하나쯤 있기 마련인 '지워지지 않는 어떤 순간'을 회상하고,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그 기억에 아파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들을 편안한 언어로 그려냈다. 작가는 우리 주위에 흔히 있을 법한 친근한 인물들을 통해 상처나 아픔으로 남은 기억이라고 해도 그 역시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소중한 과거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 문득 떠올라 잠을 이룰 수 없게 하는 기억들이 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잊으려고 노력해도 자꾸만 되살아나서 가슴 한구석을 간질이는 삶의 어떤 순간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젊지만 과거의 그런 순간들을 잊지 못하고, 또 그것을 마주 보지도 못하며 살아간다."

   책소개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바로 주문했다. 좋았다. 좋은 소설들이 가득했다. 표제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두 번 읽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다. 두번째 읽을 때는, 순전히 이 장면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로버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콜린이 수련의 생활을 시작하고 2년째, 그러니까 수련의 생활이 끝나가던 해였다. 사실 콜린의 동료를 따라간 저녁 파티 자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 일을 모르고 지날 수도 있었다. 콜린의 동료는 젊었을 적 물리학자였다. 그는 우리에게 로버트가 림프종으로 죽었다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먹고 있을 때 말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나의 표정이 어땠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충격과 슬픔을 숨기지 못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콜린이 잠시 뒤 양해를 구하더니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콜린이 아직도 그날 밤 바에서의 일 - 로버트와 내가 손을 잡고 있던 모습 - 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 안의 침묵 속에서 나는 거리감을, 몇 년에 걸쳐 서서히 우리집의 어둠 속에서, 우리 사이에서 자라고 있던 거리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뜰로 나가 통곡했다. 나는 지금도, 콜린이 내 통곡 소리를 들었는지 알지 못한다." p.126

    이 소설집에서 내가 아끼는 인물들은 누군가를 질투하고, 어떤 감정에 절망하며, 그것을 애써 숨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구멍'의 아버지, '아술'의 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헤더, '폭풍'의 누나. '폭풍'도 내가 아끼는 소설. '폭풍'에서 진짜 폭풍이 지나간 뒤, 저녁을 먹자는 '나'의 말에 누나는 술을 마시자고 한다. 취해보자고. 둘은 폭풍이 물러간 저녁 시원한 테라스에 나가 술을 마신다. 서로 잔을 채워주면서 취할 때까지 마신다. 그리고 행복했던 어린 날들을 추억해 나간다. 누나가 자기 잔에 술을 채우고, 담뱃불을 붙이고 말한다. "내가 그이를 버린 게 아니야. 그이가 나를 버렸어." 이 장면. 내가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된다면, 이 장면 때문이다. 내가 그이를 버린 게 아니야. 그이가 나를 버렸어. 이 대사에 정말 마음이 철커덩했다. 폭풍은 물러갔다. 이제 한동안 평온한 여름날이 계속될 거다. 그리고 가을이, 겨울이, 봄이, 또 여름이 올 거다. 다른 이름을 가진 폭풍이 몰려 올 거다. "더 나쁜 일이야 있겠어?" 고요한 폭풍 뒤, 여름 밤바람이 불어온다. 남매는 테라스에 서로의 몸을 기대고 앉아 있다. '나'는 어린시절 불빛을 생각한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올 때의 불빛. 저 멀리 사랑하는 이가 내게 오고 있다는 불빛.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면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취한 거 같은 기분이 든다.


    몇 년 전, 어떤 면접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인가요? 나는 K라고 말했다. 왜 K를 좋아해요? 나는 그의 소설을 읽으면 위로받고 있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는다고. 그건 K의 소설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가 아닌가요? 그 분이 그렇게 정리해줬다. 이 책은 2011년 나의 베스트에 꼽히는 소설이다. 힘든 때가 올 때마다 이 소설들이, 이 소설 속 인물들이 생각날 거다. 그런데 어제의 그는 K가 아니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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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한강 지음/문학동네


   한강의 소설은 시를 읽듯, 그렇게 읽게 된다. 지난해 십일월과 십이월에 천천히 읽어 나간 한강의 노래.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와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은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p.14


   나는 침묵했습니다. 대답을 기다리던 당신은 수첩을 덮어 도로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우리는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허락된 것처럼.
p.36


   ...아침이면 그날 강독할 문장들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며 암기하고, 세면대 위의 거울 속에 어렴풋하게 비쳐 있는 내 얼굴을 곰곰이 바라보고, 마음이 내킬 때마다 환한 골목과 거리를 한가롭게 걷습니다. 문득 눈이 시어 눈물이 흐를 때가 있는데, 단순히 생리적이었던 눈물이 어째서인지 멈추지 않을 때면 조용히 차도를 등지고 서서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p.41


   시간이 더 흐르면...
   그의 목소리가 더 잦아든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꿈에서뿐이겠지요.

    ...장미.
   수박을 반으로 가르면 활짝 꽃처럼 펼쳐지는 붉은 속.
   연등회 날 밤.
   눈송이들.
   옛 여자의 얼굴.
   그때는 꿈에서 깨어나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꿈에서 깨어나 세계가 감기는 거겠지요.
p.158-159


    소설은 두 사람이 어떤 교감을 하기 시작하면서 끝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한 여자와 한 남자, 각각의 이야기이다. 이 두 사람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어떤 이야기들이 아니라, 말을 잃어가는 세계를 살아가는 여자와 눈을 잃어가는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남자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만나게 되는 찰나의 이야기이다.

    십이월 밤. 집으로 오는 7호선의 지하철에서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너를 생각했다. 너도 이 소설을 읽었을지. 이번 겨울, 니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새 소설이 연이어 출간되었는데 너는 그걸 장바구니에 담아두었을지, 아니면 구입해 읽기 시작했을지, 아니면 다 읽은 후일지, 아니면 니 방의 내가 탐나했던 스탠드 옆에 아직 넘겨지지 않은 채 놓여져 있을지. 니가 나를 집으로 초대한 날, 먹었던 닭도리탕과 멸치호두조림과 맥주를 떠올렸다. 엽서들이 가득 붙여져 있던 니 방 벽과, 책들과 폭신폭신했던 침대를 떠올렸다. 그 날도 무척 추웠었는데. 네게 아주 긴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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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함께 있을게
볼프 에를브루흐 글 그림, 김경연 옮김/웅진주니어



어느날, 오리에게 죽음이란 녀석이 찾아온다. 비슷한 키에, 체크무늬 외투를 입고, 깡마른 녀석. 

"와, 드디어 내가 있는 걸 알아차렸구나. 나는 죽음이야."

뒷짐을 즐겨 지고, 어두운 장미 한 송이를 늘 들고 다니는 녀석.

"그동안 죽 나는 네 곁에 있었어. 만일을 대비해서."

친절하게 미소 지을 줄 알고, 축축한 연못을 좋아하지 않고, 안아준다는 오리의 말에 당황해 하는 녀석.

"네가 죽으면 연못도 없어져. 적어도 너에게는 그래."

죽음은 생각한다. 자신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그리고 때가 되었다. 부드러운 눈이 나풀나풀 내리는 날이었다. 죽음은 움직이지 않는 오리 곁에 함께 있어준다. 오랫동안 오리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조용한 죽음이었다. 

죽음은 오리의 깃털을 정리해주고, 정성스럽게 안고 커다란 강으로 간다. 그리고 조심스레 오리를 물 위에 띄운다. 죽음이 늘 가지고 다녔던 어두운 장미 한 송이는 오리의 배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마지막 페이지. "죽음은 오랫동안 떠내려가는 오리를 바라보았습니다. 마침내 오리가 보이지 않게 되자 죽음은 조금 슬펐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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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꺼내보는 동화책. 혼자 있는 밤에만 꺼내 본다. 동화책이 제법 크다. 오리가 내게 말한다. '죽음만 아니라면 괜찮은 친구였어. 그것도 꽤 괜찮은 친구였어.'  오늘밤, "난 꽃들에게 내 아픔을 숨기고 싶네. 인생의 괴로움을 알리고 싶지 않아. 내 슬픔을 알게 되면 꽃들도 울테니까."라고 노래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다. 어제는 눈이 왔는데, 오늘 화장을 지우면서 여름이 와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름은 질색이고, 늘 겨울을 그리워했는데. 그래서 이 노래를 찾아듣고 있다. 그 여름,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이 영화를 봤었다. 바람이 불었고, 슬프고 아름다운 영화였다. 어제 친구의 눈화장이 이뻤는데, 맥주 마시느라 이야기도 못해줬네. 그래서 나도 오늘 퇴근길에 짙은 아이섀도우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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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도 밑줄긋기

from 서재를쌓다 2011. 12. 17. 20:49

   춥다. 춥다. 춥다. 그래서 다시 꺼내 본, 홋카이도 다녀와서 읽은 책들. 

  
김남희의 일본 여행책.

p.55
   시레토코에서의 마지막 밤. 허먼도, 마이클도, 나도 시레토코와 사랑에 빠졌다. 이곳의 때 묻지 않은 자연 때문이다. 거주 인구는 거의 없고, 바다와 육지가 일체가 된 원시적인 생태계가 남아 있어 불곰과 참수리, 바다사자 등의 야생동물과 만날 수 있는 곳. 아무리 달려도 현대문명의 흔적이라곤 보이지 않는 깊고 울창한 숲. 비에 젖고 있는 숲도 좋고, 쨍한 햇살에 몸을 말리는 숲도 좋다. 그 숲이 감추듯 품고 있는 폭포와 호수와 계곡, 마음까지 싸하게 만드는 공기와 적막함. 무엇보다 이곳 숲이 지닌 독특한 색감. 싱싱한 연둣빛으로 빛나는 숲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눈자위부터 서서히 초록 풀물이 들 것만 같다. 달이 기울고 차오르기를 몇 번 반복하면 이 시린 연두빛도 지친 초록빛으로 변해갈까? 아니, 홋카이도의 짧은 여름은 이 숲에 여전히 생기를 부여한 채로 지나갈 것 같다.



오지은의 홋카이도 여행책.

p.34-35
   홋카이도에는 맛있는 것이 참 많다. 너무 많아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일단 초밥! 도쿄에서 난다긴다하는 최고급 스시집도 결국 홋카이도에서 오는 재료를 기다리는 게 첫 번째 일이잖아? 그 중에서도 항구 오타루, 영화 <러브레터> '오겡끼데스까'의 무대이며, 만화 <미스터 초밥왕>의 주인공 쇼타의 아버지가 하는 초밥집, 봉초밥(만화는 허구이니 행여나 찾아 헤매지 마시길)이 있는 바로 그곳! 재료가 신선하니 초밥이 맛있을 수밖에 없다. 내가 처음으로 성게초밥을 먹은 곳이 오타루였는데, 그 이후 어디에서도 그 맛을 찾을 수 없어 성게는 항상 안 먹고 그냥 두는 품목이 되었다. 그걸 보고 누군가가 '뭘 그렇게 까탈을 부려요, 흥.'하고 코웃음을 치길래, 하는 수 없이 '성게를 처음 먹은 곳이 오타루여서요.'라고 자백했더니 '아... 그럼 그럴 만하죠.'하고 상대방도 바로 납득하더라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초밥의 고장이다.(참, 도산코는 초밥만 나오면 무지 시끄러워집니다.)

   다른 맛있
는 걸로는 라멘, 삿포로 미소라멘, 아사히카와 소유라멘, 하코다테 시오하멘이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맥주도 신선한 상태가 가장 맛있다는 건 여러분도 익히 아실 터. 홋카이도에는 맥주 공장들이 있다. 특히 '삿포로 맥주'의 홋카이도 한정판 '삿포로 클래식'이 그렇게 맛있다던데...(이미지와는 다르게 의외로 술을 전혀 못 하는 사람이라 친구들의 평을 빌렸다.) 

   그리고 유제품, 강원도에 목장이 많은 것처럼 홋카이도도 그렇다. 그래서 우유가 맛있고(가끔 슈퍼에서 근처 목장에서 나온 유리병에 든 우유를 파는데, 한 모금 마시면 정말 우와와와~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우유가 맛있으니 당연히 버터도, 생크림도, 그러니까 빵도, 케이크도, 과자도, 아이스크림도 맛있다(우유 하나가 맛있으니, 참 많은 것이 맛있어지네). 그리고 감자와 옥수수, 멜론 등도 유명하다. 홋카이도 감자와 옥수수를 홋카이도 버터에 구우면... 캬아~

   홋카이도에는 오래된 전설이 있다. '홋카이도에 오면 하루에 1킬로그램씩 찐다'하는...



홋카이도가 배경인, 사사키조의 소설. 

p.64
   센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올게."
   하늘이 여전히 신경 쓰였다. 오후에 나카야마 고개 통행이 가능할까.
   출입문을 열었을 때 뒤에서 사토미가 자신을 부른 것 같았다. 센도는 돌아보지 않았다. 뒤로 내부 문을 닫고, 방풍실 문손잡이를 잡고 밀었다. 문이 쉽사리 안 열린다. 바람이 거센 모양이다. 바깥에서 밀어붙이는 바람의 세기가 묵직하게 느껴진다. 폭설이 불어 닥치려는 조짐일까. 이 바람이 눈보라를 몰고 와, 오늘 밤 이 마을을 거칠게 할퀴리라.
   그래, 솔직해지자. 센도는 눈보라에 마을이 황량해지는 광경을 자기 눈으로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허영만의 일본 여행책.
이런 카피 - 나가사키 짬뽕 한 그릇에, 아사히 맥주 한 잔, 따뜻한 반신욕~




그리고,

 

이건 세상에서 딱 두 개 뿐인 홋카이도 여행 책.
제목은 <그 여름, 홋카이도>
여행 다녀와서 각자 만들기로 했는데, 미루고 미루다 만드는 거 포기했었다.
고맙게도 친구가 만들어줬다. 지하철에서 펼쳐보고 너무 좋았다.





이 책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페이지. 13페이지. :)
이 늪길을 걸으며 느꼈던 바람과 고요함이 이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홋카이도 도로 표지판에는 이상한 화살표가 있다. 어떤 설명도 없이 그저 화살표만 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도로에도 눈이 가득 쌓인단다. 여기가 도로인지 아닌지 구분되지 않는 정도라고. 그래서 여기가 도로입니다, 그렇습니다, 라며 땅을 향하고 있는 화살표. 오늘 춥다길래 하루종일 방 안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있다. 따듯한 이불 안에서 생각한다. 겨울의 홋카이도, 화살표 표지판, 쌓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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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슬픈 짐승

from 서재를쌓다 2011. 10. 23. 00:04
슬픈 짐승 (반양장)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문학동네


"나는 기록보관실에 배치되었다. 이제 브라키오사우루스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분명 내 마음을 상하게 했을 텐데 지금 생각하니 별로 상관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이 믿었던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예배에 가기를 포기하는 것처럼 나도 이미 얼마 전에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발아래서 드리는 나의 아침 예배를 포기한 뒤였다. (...)"  p.190-191



    9월의 어느 날이었다. 자주 가는 서재에 이 책에 관한 리뷰가 올라왔다. 어떤 리뷰는 당장 오프라인 서점으로 달려가게도 한다. 지금 당장, 이 책을 읽지 못하면 죽을 것처럼. 내게 이 책이 그랬다. 오랜만에 오프라인 매장에서 책을 구입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고, 문을 열고 들어가, 검색대에서 검색을 한 뒤, 책을 찾았다. 니가 그 아이구나, 반가웠다.

    주말에 비가 내리면 이 책을 한번 더 읽을 작정이었다. 분명 어제 늦게까지 술을 마셨을 때는 보슬보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눈을 뜨니 아쉽게도 그쳐 버렸다. 비가 오면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보일러를 틀어놓고 이불 속에 들어가 이 책을 읽을 작정이었다. 비가 오질 않아 내내 잤다. 그리고 이 밤, 리뷰를 다시 찾아 읽었다. 이 소설은 지금은 이 땅에 살지 않는 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와 사랑에 빠져 버린 여자와,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뼈대를 보고 "아름다운 동물이군요."라고 이야기한 남자와의 이야기이다. 사랑, 이야기라고 해야겠지.


"나는 오히려 현실이 너무 아름답게 보일 때는 그것을 꿈이라고 여기는 편이지. 행복은 무상한 거야. 프란츠가 말한다. (...) 프란츠의 손가락 끝 사이에서 포도알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프란츠가 우리를, 자기와 나를, 꿈이라고 여기고 있는지 현실로서 참아내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려고 애쓴다. 꿈이라면 조만간에 어쩔 수 없이 깨어나야 하는 것이고, 그에게 우리가 현실이라면 우리가 너무도 아름다운 존재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p.96-97


   독일소설이다. 통독이 된 즈음의 이야기다. 한때 장벽을 두고 이쪽과 다른 저쪽에 있었던 남녀가 장벽이 무너지고 만났다. 남자는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뼈대를 앞에 두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행복은 무상(無常)하니까. 아주 오래 전 이 땅에 발 디디고 있던 거대하고 아름다웠던 공룡은, 이제 뼈대만 남아 남자 앞에 전시되어 있다. 남자는 그 뼈대 위에 둘러졌던 몸덩어리를 상상한다. 아름다운 육신. 그것은 꿈이고, 아름다운 현실. 사라져버려서, 뼈대만 남은 아름다운 현실. 그건 추억. 가슴 아프지만 아름다운 추억. 

   여자는 생각하고 생각했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 그녀에게 사랑이 왔다. 그녀에게 없는 것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건 슬픈 일이었다. 여자는 괴로웠다. 행복이 무상(無常)하듯, 사랑도 무상(無償)했다. "그는 그녀 옆에서 자지만 너와는 함께 자잖아. 그와 함께 살고 싶어. 내가 아테에게 말했다." p.154 "나는 프란츠의 어깨와 목 사이 움푹한 곳에 나의 뭉툭한 짐승코를 파묻었다. 프란츠는 내 호흡의 그늘 안에 숨고 싶은 것처럼 그 안에서 낮게 숨쉬었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 나는 이 시간 속에서 죽고 싶었다." p.170


   어쩌면 모든 게 꿈일 지도 몰라. 여자의 상상일 지도 몰라. 남자가 여자를 떠난 것은, 아니 두 사람이 지금은 멸종된 브라키오사우루스 앞에 만나 사랑을 시작한 것은. 모든 게 여자의 상상일 지도 몰라. 인생은 무상(無常)하니까. 사랑 또한. 애써 그렇게 상상하려 했다. 그럼에도 마음이 아팠다. 남겨진 여자가 견딘 추억들이 무서웠다. 서러웠다. 두 사람이 함께 한 사랑을, 한 사람만 추억한다는 건 무섭고 서러운 일이라는 걸 배웠으니까. 결국 사랑이 무상(無常)한다는 걸 배운 건, 혼자 남겨졌을 때였으니까. 여자는 추억하고 추억한다. 그녀에게 남은 일은 그것밖에 없다. 슬픈 짐승. 옛날, 아주 먼 옛날, 이 지구상에 인간이라는 동물이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걸 상상하지도 못했을 아주 먼 옛날, 브라키오사우루스도 사랑을 했겠지. 그렇다면 그들도 슬픈 짐승. 아름답지만 슬픈 짐승. 비가 내리길 기다리고 있다. 그때 이 슬프고 아름다운 소설을 다시 읽을 거다.


"카린과 클라우스는 학창시절부터 알던 사이였다. 그들은 내가 결코 잡지 못했던 것, 즉 청춘의 사랑이었다. 청춘의 사랑이 무엇이냐고 누군가가 물었다면 나는 카린과 클라우스라고 말했을 것이다. 청춘의 사랑은 단순히 젊은 시절에 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다. 청춘의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견주어 잴 수 있을 어떤 것도 아직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유일하게 그 사랑 자체를 위해서 존재한다. (...) 우리는 고치 속에서 어느 날 무엇이 되어 피어날 것인지 아직 불안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그 두 사람은 이미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학교 운동장 위의 먼지 나는 안개 속에서 춤추고 있었다."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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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청어람미디어


 
    다행인지, 아닌지 그 사진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누군가 조작한 거라 했다. 하지만 그가 곰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것은 사실이라 했다. 밤이었고,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그의 친구들이 그렇게 이야기했단다. 그는 43년을 살다 갔다. 그 중 많은 시간을 알래스카에서 보냈다. 그는 그 곳에서 가장 행복했다. 1996년 7월의 일이다. 그가 쿠릴 호반에서 취침 중 불곰의 습격을 받은 것은. 친구와 나는 이 책을 함께 읽었다. 나는 김남희에게서 이 책을 추천받았다. 추석에 내게 고즈넉한 일본의 길들을 소개해 준 그 김남희. 나는 그녀에게 반했고, 그녀의 인터뷰를 찾았고, 그 인터뷰 속에 그가 있었다. 호시노 미치오. 한때 그녀는 그와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너무 좋아서 그러고 싶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검색을 했는데, 그 사진이 나왔다. 우리가 착각한 그 사진. 나도 한 권 사고, 친구에게도 한 권 보냈다. 친구는 책을 다 읽고 벌떡 일어나 옆에 있는 신랑에게 나 알래스카에 갈래, 라고 말했다고 한다. 호시노 미치오. 구월의 어느 금요일 저녁에 만나 우리는 내내 이 사람 이야기를 했다. 그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았는지, 알래스카가 얼마나 근사한 곳이었는지, 그의 친구들은 또 얼마나 멋진지, 그가 만난 고래들과 곰들과 카리부의 발자국 이야기. 우리는 결코 그처럼 살 수 없을 거라는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들을 하며 함박스테이크를 먹고, 맥주를 마시고, 소주를 마시고, 커피를 마셨다. 함박스테이크를 먹고 나와 거리를 걷다 어떤 책을 발견했는데, 그 책에 흑고래가 무리를 지어 청어떼 사냥을 하는 사진이 있었다. 우리는 그 사진을 보고 반가워했다. 그건 그가 우리에게 알려준 것.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이 책은 친구와 내가 올해 초 함께 읽은 책. 어찌나 반갑던지. 

    눈을 감고 상상해봤다. 내가 그의 장례식 한 켠에 있는 상상. 그 곳은 춥지만 따듯한 알래스카 땅. 그가 헌책방에서 보고 반해버린 그 사진 속 땅 위. 그는 도쿄의 헌책방에서 알래스카 어느 마을의 사진을 보고 반해 말도 안 되는 주소를 지어내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 마을에 가고 싶다고. 그런데 아는 이가 없으니 도와달라고. 그렇게 반년이 지나고 답장이 왔다고 한다. 그렇게 그의 알래스카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 땅 위에 그가 사랑했던 알래스카 사람들이 모두 모여있다. 클리포드와 셰리, 밥 율, 미러 웨스턴, 셀리아 헌터, 알과 게이, 월터 할아버지, 케니스 누콘까지. (언젠가 내게 이 책의 딱 한 챕터만 볼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진다면, 정말 딱 한 챕터 뿐이라고 한다면, 난 망설임없이 케니스 누콘 이야기를 읽을 것이다. 그의 집이 잘 있는지, 알래스카의 겨울을 혼자서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가 살아 있다고 믿고 싶다. 여전히 외롭지만 씩씩하게. 사람을 그리워하며.) 그들이 모두 모여 미치오를 떠나보낸다. 슬프지 않게. 그들은 흑곰, 비버, 연어, 블루베리, 크랜베리로 진수성찬을 만들어 놓고, 그를 보낸다. 어떤 이는 낮은 노래를 부르고, 어떤 이들은 천천히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춤추면서 미치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얼마나 알래스카를 사랑했는지, 그가 얼마나 알래스카와 잘 어울렸는지. 따듯하고 따스한 슬픔이 마을 전체에 모락모락 퍼진다. 

   " 이 마을을 찾아가보고 싶었다. 사진 캡션에 'Shishmaref'라고 씌어 있었다. 지도에서 그 이름을 찾아냈다. 그러나 찾아가려도 해도 방법을 알 수 없었고, 편지를 쓰려고 해도 주소를 알 수 없었다. 사전에서 'mayor'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읍장'..... 아마 이장과 비슷한 뜻 같은데 이걸로 하자.

Mayor
Shishmaref
Alaska U.S.A."

    책을 읽는 동안 드문드문 든 생각은 나 지금 뭐하고 있지, 하는 생각. 미치오가 내게 말한다. 진심을 다해 살아가자고. 나는 책장을 덮고 내 진심에 대해 생각한다. 내 생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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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가에 있는 빨간 소파에 걸터앉아 책을 읽다가 문득 목이 말라 곁에 두고 마시는 물통을 흘끗 바라본다. 말간 물이 반쯤 차 있는데 어쩐지 물이 해갈해줄 갈증은 아니다. 주머니에 1파운드짜리 동전 서너 개를 대충 챙겨 넣고, 읽던 페이지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옆구리에 낀 채 집 밖으로 나선다.
    슬리퍼를 신고 쉬엄쉬엄 걸어가도 3분 거리에 펍이 있다. 수없이 열었던 갈색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 수없이 시켰던 맥주를 시킨다. 정성스레 따라 준 맥주를 조심스레 받아들고 종종걸음으로 구석 자리로 가 앉는다.
    손가락을 찔러 넣었던 페이지를 그대로 열어 아까 읽던 구절을 찾는다. 더듬더듬 단어를 헤매며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머릿속엔 문장이, 입안엔 맥주가 쏟아져 들어온다. 책과 맥주에 빠져든다. 술이 술술 넘어갈수록 책장도 흐르르 넘어간다. 취기가 오르니 재미난 구절은 더 재미지고 애달픈 구절은 더 짠하다.
- p.133


    이런 책을 읽었다. 요즘은 먼 나라들에 대한 책을 읽는다. 이 책은 런던의 이야기였고, 걷기 좋은 유럽의 길을 소개한 김남희의 책도 내게 왔다. 알래스카에서 살다가, 그 곳의 자연을 무척 사랑하다가, 불곰의 습격에 사망한 호시노 미치오의 책은 지금 읽고 있는 책. 인터넷에서 그가 찍은 마지막 사진을 봤다. 불곰이 어느 텐트 안을 위협적으로 들여다 보고 있는 사진. 그는 그 시간, 그 텐트 안에 있었다. 결국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 그는 도망가지 않고 이 생의 마지막, 그 사진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삶이 궁금해졌다. 그가 사랑한 알래스카가 보고 싶었다. 역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인가. 책이 잘 읽힌다. 어느 리뷰를 읽고 독일 소설 한 권도 구입했다. 간만에 오프라인 서점에서. 사랑 이야기다.

    비가 온다지. 오늘 중고서점에 올려놓은 책이 네 권 팔렸다. 모두 읽은 책이고, 가지고 있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아 내놓은 것인데 박스에 담으니 왠지 아쉽다. 그래서 한번 더 쓰다듬어 주고, 허브차도 두개 함께 넣는다. 이렇게 보내고 또 보고 싶은 책 맞이해야지. 오늘도 찜해둔 책 하나 있다. 이번주에는 비가 온단다. 그러면 또 추워진단다. 그렇단다.

    '책꽂이'라는 어플이 있다. 동생이 추천해준 건데 꽤 괜찮다. 읽은 책, 읽고 있는 책 목록을 만들 수 있고, 읽기 시작한 날과 다 읽은 날도 표시해둘 수 있다. 나만의 별점도 매길 수 있고, 메모도 남길 수 있다. 나는 주로 좋았던 부분들을 남기는데, 그때그때 떠오르는 감상을 남겨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제일 마음에 드는 기능은 내가 남긴 메모를 버튼 하나만 누르면 누군가에게 문자로 보낼 수 있고, 카카오톡으로 보낼 수도 있고, 트위터로도 남길 수 있는 것. 그 사람에게 내 메모랑 그 책 제목이랑 몇 페이지인지가 함께 간다.


     아, 나 차마고도에 관한 책도 읽었다. 그러고보니 이번 달에 책 많이 읽었구나.

차마고도
KBS 인사이트아시아 차마고도 제작팀 엮음/예담

    이 책은 최불암의 나레이션으로 방송되었던 다큐라고 하는데, 나는 못봤다. 뒤늦게 이 책을 읽었는데, 아침 출근길에 자주 훌쩍였다. 차와 말이 다녔던 옛길. 이 책을 읽으면서 세 개의 메모를 남겼다. 

1.
마치 지상에 눕혀놓은 거대한 거울처럼 고원의 한가운데 누워있는 소금호수, 짜부예차카. 이 기적 같은 일 역시 지구의 생명활동과 연관이 있다. 히말라야와 티베트 땅은 오래전에 바다였다. 약 4000만 년 전에 인도 대륙과 아시아 대륙이 거대한 충돌을 일으키면서 그 가늠할 수 없는 힘 때문에 바다 밑의 땅이 솟아올랐다. 실제로 대륙의 융기를 목격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p. 165

2.
파드마삼바바에게 비나이다. 모든 중생을 지켜주소서.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도록 해주소서
중생들이 가는 길이 평안하도록 돌봐주소서
중생들이 마음으로 바라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도록 해주소서
중생들이 재난에서 멀어지도록 해주시고
그들이 늘 평안하도록 돌봐주소서

바람과 검은 하늘과 차가운 별빛뿐인 해발 4000미터의 고원. 모닥불 가에서 모든 중생의 평안을 비는 드룩파들의 기원은 감동적이다.
-p. 177

3.
"소금 한 자루에 옥수수 몇 자루인가?"
중요한 순간이다. 이 순간의 거래로 지난 여정에 대한 보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올해 후리코트 농사는 어떤가?"
"그저 그렇다."
"옥수수 농사가 풍년이라고 소문이 났다."
팽팽한 신경전 겸 탐색전이다.
"풍년이라지만 큰 풍년은 아니다."
"봐라, 소금은 최상급이다. 차도 아주 좋은 차다. 비를 한 번도 맞지 않았다."
"얼마를 원하는가?"
돌포파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한다. 적어도 소금 한 자루에 옥수수 세 자루는 받아야 한다. 네 자루를 받을 수 있다면 대성공이다. 차 한 덩이에 옥수수 두 자루를 받아야 한다. 몇 자루를 부를 것인가? 고심하던 돌포파가 마침내 가격을 제시한다.
"소금 한 자루에 옥수수 세 자루, 차는 두 자루다."
후리코트 사람이 돌포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돌포파가 긴장한다.
"록보! 우리는 록보가 아닌가?"
'록보'는 티베트말로 '친구' 라는 뜻이다. 돌포파의 록보라는 말에 후리코트 사람의 얼굴이 환해진다.
"좋다, 록보. 올해는 옥수수가 아주 풍년이다. 소금 한 자루에 옥수수 다섯 자루, 차는 세 자루를 주겠다.
- p. 226


그리고 박솔, 저 잔에 담긴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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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걷고 싶은 길 2 : 규슈.시코쿠
김남희 지음/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숙소로 돌아와 이자카야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온천욕탕으로 들어간다. 밤의 노천탕을 혼자서 즐긴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고개를 드니 별들이 초롱초롱 빛난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 깊어간다.
- p.48


   이 구절은 고성의 고향집에서 읽은 것. 그녀는 규슈의 유후인에 있었다. 산행을 마치고 온천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있는 그녀의 노곤하고도 행복한 기분을 상상해봤다. 머리 위로 별이 총총하고, 혼자인 밤. 나는 수첩에 '유후인'이라고 적는다. 언젠가 가 보아야지 생각한다.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많고, 따뜻한 온천수가 흘러들어 물안개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호수가 있는 마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사랑하는 마을. 센과 치히로와 토토로의 배경이 되었던 곳. 나는 늦여름 바람이 솔솔 불어드는 고향집에 앉아 유후인의 바람을 상상한다. 이 날, 나는 바닷가까지 산책을 하고 왔다. 그날 유후인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순례는 그 마무리마저 지극히 불교적이었다. 미사에서 신부님이 호명을 하고 모두들 눈물을 쏟아내던 산티아고와는 달랐다. 그 어떤 대리인도, 예식도 없이 일대일로 부처와 대면할 뿐. 시작이 그랬듯 혼자서, 자기만의 힘으로,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반야심경을 외며 혼자 앉아 있는 마지막 밤. 이 담백한 마무리도 나쁘지 않다.
- p.251


   이 문장들은 서울로 올라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읽었다. 드문드문 차가 막혔고, 휴게소를 두 군데 들렀다. 휴게소에서 우리는 반건조 오징어와 우동을 사 먹었다. 그녀는 시코쿠를 걸었다. 산티아고의 순례길처럼 일본의 시코쿠에도 불교 순례길이 있다. 88개의 절을 순례하는 길이다. 그녀는 이 긴 길을 여름에 출발해서 가을을 거쳐 겨울까지 걸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겨울, 그녀의 여행이 끝났다. 오셋타이. 시코쿠 사람들은 순례길을 걷는 이들에게 오셋타이라고 공양물을 건넨다. 무엇이든 된다. 돈이든, 귤이든, 차든, 빵이든. 그들의 순례길에 힘이 될 수 있는 무언가. 순례자들은 오셋타이를 거절해서는 안된다. 그녀가 건네 받은 오셋타이, 그녀가 머무른 료칸과 민슈쿠. 그녀가 만난 사람들. 

   나는 추석 연휴동안 그녀의 길을 따라 걸었다. 여름에서 시작해 가을을 거쳐 눈이 내리는 겨울까지. 명절 때면 꼭 책 한 권 이상 가지고 가는데, 한번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이번 설에 처음으로 한 권을 다 읽었다. 오지은의 홋카이도 여행기. 그래서 이번에도 여행기를 택했다. 내려가면서 시작해 올라오면서 다 읽었다. 여행기를 읽으면 명절의 불편한 감정들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된다. 올라오는 버스에서 마지막 장을 넘기면 다시 일상이구나, 힘들었지만 고마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잊을 수 없는 명절의 여행책. 이번 추석도 너와 함께 잘 넘겼다. 

   1권은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다 고속터미널 영풍문고에서 각각 하나씩 구입했다. 치맥을 먹다 아마도, 언젠가 일본여행을 가자면서, 최근에 일본 여행책이 나왔다면서, 그렇다면 당장 가서 사서 읽자면서 서점으로 달려갔겠지. 터미널 건너편 지하의 통닭집이었을 거다. 우리가 잘 가던 곳. 통닭 반마리 시켜놓고 맥주를 끝없이 들이부었던 곳. 술을 깨고 책을 읽기 시작하니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였다. 그때는 이 책이 불만스러웠다. 이유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사진이 너무 많아서리라. 책 뒤에 부록으로 들어가 있는 여행 정보나, 간단한 일본어 팁 때문이리라. 그것이 글자가 들어갈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일본을 다녀오고, 이 책을 읽으니 좋다. 좋아졌다. 푸릇푸릇한 사진이 많은 것도 좋고, 언젠가 가고 싶으니 자세한 여행 정보도 고맙다. 일본어 팁 페이지는 여행갈 때 오려가지고 가야지. 그녀가 만난 사람들도 좋고, 그들과 나눈 이야기들도 좋고, 그녀의 독백도 좋고, 그녀의 투정도 좋다. 나도 가고 싶다. 그 길을 걷고, 그 사람들을 만나고, 투정부리고 싶다. 

   언젠가 그녀가 걸었던 그 길을 나도 걸을 수 있을까. 그녀에게 생긴 물집이 내게도 생길 수 있을까. 그녀가 본 7200년 된 오래된 나무 조몬스기를 만날 수 있을까. 그녀가 감탄한 남쪽의 오키나와 섬을 가볼 수 있을까. 오랜 시간과 강인한 체력과 한없는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시코쿠 순례길은 어떻고. 대신 나는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녀가 순례길에서 극찬한 사누키 우동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금요일 모두가 약속이 있는 날, 나는 연락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퇴짜를 맞고 홍대에 있다는 사누키 우동 전문점에 찾아갔다. 주택가에 있어 헤매느라 오래 걸렸다. 자리에 앉아 우동과 튀김 세트를 주문하고, 용감하게 생맥주 300cc도 주문했다. 나는 그 음식들을 창가의 자리에 혼자 앉아 모두 다 해치웠다. 면을 먹고, 국물도 마시고, 튀김도 연한 간장에 찍어 먹고, 중간중간 맥주도 마셨다. 내 생애 처음으로 '가게'에서 혼자 마셔본 술이었다. 기분이 괜찮았다. 어디론가 여행을 온 것도 같았고, 내가 근사해진 것도 같았다. 


   이곳에 오기까지 꼭 한 달하고도 보름이 걸렸다. 길은 삼천 리, 풍경은 다채로웠다. 산과 바다와 들과 마을을 넘나드는 길. 길은 세상을 향해 곧게 뻗어 있기도 했고, 구불거리며 산 깊이 잦아들기도 했다. 바다를 곁에 두고 걷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빈 들판에 혼자 남겨지기도 했다. 두 시간을 걷고 같은 자리로 돌아온 적도 있었고, 새벽 산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눈물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올 수 있었던 건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고 멀어져갔다. 나는 늘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받았다. 한 끼 더운 밥이며 음료수 같은 것부터 진심 어린 애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을. 기코쿠 주민들의 따뜻한 마음이야말로 이 길을 특별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다. 수백 년 동안 그렇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순례자들에게 공양을 바쳐온 주민들의 정성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시코쿠만의 선물이다. 
-p.244



일본의 걷고 싶은 길 1 : 홋카이도.혼슈
김남희 지음/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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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들

심보선



이 길은 아버지의 메모들을 연상시킨다. 아버지의 유일한 유고, 간혹 작고 투명한 새가 종이 바깥으로 방울져서 날아오르는...

아버지는 썼다. "여행을 가면 꼭 한 번은 울게 된다."

오늘 눈먼 외국인 서너 명을 길에서 마주쳤고 그들은 모두 같은 체구에 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사람일지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 분명하다. 길을 잃고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다 나와 우연히 여러 번 마주쳤을 뿐. 그 사실을 그는 모르고 나는 알 뿐.

하지만 내가 짐짓 애달픈 목소리로 "아버지", 하고 부른다면?
그는 흠칫 놀라서 멈출까?
아니면 태연히 계속 걸어갈까?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나는 아버지를 향하여 영원히 눈먼 자다.
아버지는 죽었고 지금 죽어 있으며
나는 살아왔고 살아 있으므로.

여기에서 저기까지, 그 눈먼 외국인의 손을 잡고 걸어가고 싶다. 저기에 도착하면 나는 그에게 말할 것이다. "자, 그럼 여기까지." 그리고 나는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선행과 상관없는 동행.
그런 것을 언제까지고 반복해보고 싶다.

얼마 전 랍비를 애인으로 둔 친구가 이스라엘로 떠났다. 그리고 나는 지금 교토에 있다. "그곳은 혼자 여행 가기 좋은 곳이지." 그녀는 내게 시 외곽의 미술관을 추천했다. "그곳을 설계한 건축가는 아이I, 엠M, 페이Pei, 흥미로운 이름이지?"

내가 갔을 때 그곳은 휴관 중이었다. 문 닫힌 미술관 앞에 서서 나는 아버지의 메모를 떠올렸다. 거기 서서 나는 오래오래 울지 않았다. 비도 오지 않았다.

여행을 가면 꼭 한 번은 울게 된다..... 엉터리 점쾌.....

이곳에서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내가 몰래 희망을 염원한다는 사실을.
내가 원래 속죄의 전문가라는 사실을.
나의 이름은
페이도, 와타나베도, 토마스도 아니라는 사실을.
나의 지금은
좀 전의 과거가 제 바로 앞에 내팽개쳐버린
무국적의 고아라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지금 교토에 있다.
그리고 심지어 눈도 내린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제 갈 길을 가는 사람들의 어깨 위로
쓰러지기 직전의 '아이I' 같은 검은 목책들 사이로
나이 어린 신의 어리광처럼
눈밭이 흩날리고 있다.




  시집을 읽고 있다. 시집을 읽던 중에 나는 홋카이도에 간다. 두시간 사십분을 날아 홋카이도로 간다. 홋카이도에 도착해서 우유를 사고 맥주를 마셔야지. 맥주를 마시는 동안 생각나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야지. 떠오르는 일들을 적어 둬야지. 그렇게 홋카이도 맥주수첩을 만들어야지. "여행을 가면 꼭 한 번은 울게 된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수첩. 우듬지의 <맥주수첩>은 정말 너무했지. 나는 그것보다 근사해야지.

그리고, 

그렇습니까.

새벽 2시에, 오후 2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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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위 스님의 가벼운 밥상
정위스님.이나래 지음/중앙M&B


    생일선물에 '건강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면, 이 책은 올해 내게 온 가장 건강한 생일선물. 내 취향을 아는 친구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지는 선물이었다. 요리책 '읽기'를 좋아하는 내게 이 책은 정말 안성맞춤. 성북동 말고 관악산에도 길상사가 있단다. 전통 절이 아니라 현대식 건물의 절이라는데, 거기 정위 스님이 계신단다. 스님의 살림 솜씨가 어찌나 뛰어난지, 매화비빔밥을 대접받고 스님의 요리에 첫눈에 반한 기자가 스님을 조르고 졸랐단다. 스님의 요리법과 살림법을 배울 수 없느냐고. 그렇게 스님과 기자가 28개월 동안 (아마도) 한 달에 한 번 함께 하면서 얻어낸 결과물을 엮은 책. 이게 올해 나와 인연을 맺은 가장 건강한 생일 선물이다.

    일요일에 집에 있으면 챙겨보는 티비 프로그램이 있는데, 바로 '한국인의 밥상'. 5월인가, 6월인가 어느 일요일에 뒹굴다가 9번을 틀었는데 운문사의 풍경이 펼쳐졌다. 스님들이 산에 가서 쑥을 캐고 진달래 꽃을 타 먹음직스러운 쑥 칼국수와 진달래 화전을 만들어 내는 장면에 침이 꿀꺽. 뜨거운 물을 버릴 때도 혹시나 하수구에 있는 생명체를 생각해 찬물을 섞어 버리고, 이것도 수행이라며 손가락 마디를 따라 정갈하게 김치를 써는 모습을 보고 있노나니 허기가 느껴졌다. 건강한 음식이 마구마구 땡겼다. 

    이 책도 그렇다. 정위 스님의 살림 솜씨는 그야말로 센스 만점. 스님의 손을 거치면 뭐든 멋스럽게 변한다. 스님은 자신과 인연을 맺은 물건들에 인격을 부여한다고 한다. 스님에게 온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 뿐이라고 한다. 쓰다가 해져 구멍난 앞치마에 스님은 꽃모양으로 과일모양으로 수를 놓는다. 그러면 새 것보다 더 근사한 것이 된다. 이렇게 저렇게 남은 천을 가지고 몬드리안 풍의 방석을 만들고, 흰 천에 나팔꽃, 질경이, 구철초, 제비꽃, 봉숭아 꽃의 수를 놓아 컵받침대도 만들고, 콘센트 가리개도 만들고.

    요리는 또 얼마나 먹음직스러운지. 꽃향기 그득한 매화비빔밥, 내가 정말 좋아하는 새송이 버섯으로 만든 장아찌, 10개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주먹밥, 여름에 커다란 대접에 비벼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머리 맞대고 먹고 싶은 강된장, 곱디 고운 쌈밥, 감기 걸리면 꼭 마시고 싶은(근데 내가 말고 누가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을) 짜이라테, 맛이 궁금한 커피국수, 우리 아빠도 잘 끓이는 땅콩죽, 그리고 절편에 조미김을 감싸는 센스까지. 꽃꽂이도 그저 꽃의 생김새대로 꽂는 것 뿐이라지만 스님의 손길이 닿으면 먼가 다르다. 곱고 멋스럽다.

     더 더워지기 전에 관악산 길상사에 가야겠다. 지하에 있다는 '지대방'에 가서 스님이 직접 팥을 삶아 만드는 팥빙수도 먹어보고, 사발에 내 주시는 맛난 커피도 마셔봐야지. 이 책을 읽는 동안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조용하고 멋스런 산사를 거니는 느낌. 미소가 고운 스님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 시원한 절방에서 달디 단 낮잠 한 숨 잔 느낌. 아무 말도 필요 없는 느낌. 나는 가만 있는데 스님이 이것저것 계속 내 주시는 느낌. 배부른데도 계속 들어가는 느낌. 잘 먹었습니다,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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