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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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셰프극장에가다 2015. 1. 22. 23:05
정확한 나이가 기억나질 않는데, 20대 초반 정도였던 것 같다. 우리는 씨네큐브로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를 보고 스파게티를 먹었는지, 스파게티를 먹고 영화를 봤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데, 아무튼 씨네큐브 윗층의 스파게띠아에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손님이 별로 없었다. 우리를 포함해 한 세 테이블 정도였는데, 그 애가 혼자 스파게티를 먹고 있었다. 그애와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얼굴이 빨갛고 통통한 그애는 밝고 쾌활하고 웃음소리가 컸다. 외국에서 살다 왔다고 했나, 아빠가 영어 선생님이라고 했나. 영어 실력이 굉장했다. 발음도 네이티브 수준이었고. 성격도 호탕했다. 그 애와 난 그리 친하진 않았다. 1학년 때 이후로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이과를 갔던지, 반이 아주 멀었던 것 같다. 그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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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의 움직이는 성극장에가다 2015. 1. 8. 22:28
이번 주에 일을 하면서 OST를 처음부터 끝까지 쭉 들었다. 익숙한, 슬프면서 아름다운 선율에서 시작해서 구슬프면서 경쾌한 현악기의 선율, 듣고만 있는데도 왠지 힘이 잔뜩 들어가는 타악기들의 소리까지. 그렇게 25곡을 듣는 동안 소피는 하울을 만나 하늘 위에서 슬라이딩하듯 천천히 첫 걸음을 내딛었으며, 마녀의 저주로 인해 하루 아침에 늙게 되었고, 움직이는 성에 들어가 하울의 분신 갤리퍼를 만났고, 하울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울이 생각했던 것보다 약하고 여린 남자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를 위해 국왕을 만나러 용기 있게 나서기도 했다. 해가 질 때까지 하늘을 날았고, 하울에게 사방이 꽃 뿐인 들판을 선물받기도 했다. 그를 잃지 않기 위해 성을 버렸고, 그를 다시 만날 수 없을까봐 엉엉 울었다. 결국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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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위한 시간극장에가다 2015. 1. 1. 18:54
새해 첫 영화이니, 의미있는 '좋은' 영화를 보고 싶었다. 그렇게 고른 다르덴 형제 영화. 영화를 보는 내내 결말이 너무 아프지 않길 바랬다. 이건 새해 첫 영화니까. 희망이 있어야 한다. 결말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희망도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잘 해나갈 용기를 얻었다. 희망과 절망을 반복해가며 16명의 동료의 집을 주말 내내 방문하면서.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우울증에 걸려 오랜기간 병가를 낸 주인공이 복직을 앞두고 회사로부터 부당한 해고 통보를 받게 된다. 회사는 그녀의 동료들에게 조건을 제시한다. 니네 보너스 받을래? 아니면 산드라를 해고시킬까? 말도 안되는 양자택일 상황을 제시한다. 동료들은 경제적으로 그리 풍요롭지 못하고 보너스가 절실한 사람들. 보너스가 1년치 가스비며 전기세인 사람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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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극장에가다 2014. 12. 31. 23:43
와, 근사했다. 구름 말이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그 '클라우즈'. '클라우드'가 아니라 '클라우즈'. 스위스의 실스마리아라는 곳에서는 이탈리아로부터 넘어오는 '클라우즈'들을 만날 수 있는 깊은 협곡이 있다. 구름들은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넘어오는데, 이 깊은 협곡을 넘어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꼭 파도 같다. 그러니까 산의 파도라고 해야 하나. 강의 파도라도 해야 하나. 영화에 언급되는 것과 같이 뱀 같기도 하다. 거대한 구름뱀. 구름들이 살아 있는 뱀처럼 협곡을 지난다. 부드럽고도 강렬하게. 지난 토요일, 이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기 전, 미용실에 갔다. 늘 가는 이태원의 미용실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인언니 혼자서 운영을 했는데, 너무 바빠서 그런지 인턴 한 명이 들어왔다. 친구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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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따뜻한 색, 블루 - J에게극장에가다 2014. 12. 22. 22:13
금요일, 우리는 간만에 만났다. 맥주잔을 부딪히는 것도 오랜만. 각자의 이유로 그동안 맥주 섭취를 끊고, 줄였었다. 지난 오뎅집에서도 오랜만이었는데, 이번에도 오랜만이네. 친구는 최근에 을 다시 읽었다고 했다. 처음 읽었을 때보다 더 재미있었다고 했다. 나는 친구 덕분에 을 읽었었다. 십년 쯤 된 것 같다. 그리고 이야기도 했다. 언젠가 이 긴 영화에 대해 친구가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매우 인상적인 영화라고 했다. 여자 둘이 사랑을 하지만, 동성애에 국한할 수 없는 영화라고 했다. 그냥 사랑에 대한 영화라고 했다. 이번에는 친구가, 니가 꼭 봤으면 좋겠어, 라고 말했다. 주말에는 정말 열심히 크리스마스 카드를 썼다. 정말 이렇게 열심히 써 본 적이 없다. 써 볼까,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끝장을 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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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극장에가다 2014. 11. 17. 22:25
지난 금요일, 약간의 야근을 하고 퇴근을 했다. 집에 바로 들어가기 그래서 초겨울 바람을 느끼며 합정에서 상암까지 걸었다. 극장 시간표를 보니 맞는 시간이 였다. 그래서 를 봤다. 흠. 영화는 뻔했다. 예상했던 대로 전개됐다. 살짝 지루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중간중간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울었다. 토요일날, 를 봤다고 하니 누군가 어땠냐고 물었다. 별로없다고 말할 수 없더라. 사실 영화는 그렇게 좋진 않았는데, 그렇게 쉽게 말해버리면 안될 것 같애, 라고 답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염정아를 다시 보게 됐다. 나는 이제껏 염정아가 이런 배우인 줄 몰랐다. 정말 몰랐다. 그래서 염정아에게 조금 미안했다. 그녀를 몰라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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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후드극장에가다 2014. 11. 11. 21:03
12년동안 찍은 영화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도 비포 시리즈 감독 영화라는 이야기를 듣고, 에단 호크도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를 봤다. 지지난주인가 지지지난주인가 주말에 엄마가 올라왔고, 엄마와 축제 마지막 일요일 억새밭을 걸었다. 엄마를 보내고 상암의 극장에 들어가 165분 동안 혼자 본 영화다. 보고 난 다음에 할 이야기가 많았는데, 다 까먹어 버렸다. 이것만 기억에 남았다. 후반부의 한 장면이다. 꼬맹이었던 주인공은 어느새 장성했고, 대학에도 합격했다. 결혼에 세 번 실패한 엄마가 연 대학 입학 축하 파티에 두번째 결혼을 하고 또 다른 꼬맹이를 낳은 아빠도 참석한다. 파티가 끝난 뒤 아빠가 한 공연장으로 주인공을 데려간다. 거기에 아빠가 첫번째 결혼에 실패한 뒤 함께 살던 아저씨가 공연 준비 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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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극장에가다 2014. 9. 20. 22:12
를 보고 캄보디아로의 여행을 꿈꾸다 마침내 다녀온 사람의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때까지 를 제대로 못 봤다. 매번 틀어놓고 왠만큼 보다 잤다. 극장에서 봤어야 했는데. 그 사람 글을 읽고 영화 속 캄보디아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다시 시도했지만, 그때도 잤다. 늘 늦은 밤이었고, 술을 한 잔씩 한 날이기도 했다. 9월의 휴가날, 아침 일찍 일어나 이불을 개고 주변을 정돈하고 소파에 앉아 심호흡을 하고 무료영화 코너를 뒤적거려 를 재생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보았다. 속 캄보디아를. 그곳은 아주 쓸쓸했다. 한때의 영광따위. 양조위는 돌 틈에 흙을 채우고 식물을 심었다. 거기에 자신의 비밀을 묻었다. 비밀은 틈을 메꾸며 잘 자라날 것이다. 오래 머무는 이 없이 쓸쓸한 그 곳에서 홀로. Ss는 백수 시절,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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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극장에가다 2014. 9. 14. 22:48
'기승전결 중에 기승만 있는 영화'라는 누군가의 평을 영화를 본 뒤에 봤다. 완전 웃었다. 맞다. 이 영화에 딱 맞는 표현! 극장에서 우연히 본 예고편이 재밌어서 개봉하면 봐야지 생각했다. 감독에 작가라고 해서 더 기대했는데. 흠. 졸업 후 취직을 하지 않고 빈둥대고 있는 여자아이의 가을, 겨울, 봄, 여름 동안의 이야기이다. 예고편에서 느껴진 스토리는 힘을 내서 으샤으샤 희망적으로 끝나는 거였는데, 실제 영화에는 커다란 변화는 없다. 주인공이 슬쩍 잠이 들었는데, 깨서 그런다. '아, 집이었네.' 대지진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는데 그걸로 끝이었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아쉬움이 많았다. 영화에서 아빠가 매번 요리를 한다. 주인공은 아빠가 집에서 쓸데없이 마지막에 파슬리를 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