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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스트레일리아 - 꿈과 이야기를 믿는 아이
    극장에가다 2008. 12. 4. 21:40

        지난 금요일에는 영화를 봤다. <오스트레일리아>라고 니콜 키드먼과 휴 잭맨이 나오는 영화다.  호주 출신의 바즈 루어만 감독 영화다. 당연하게도 호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사실 내가 관심있었던 건 영화보다는 와인이었다. 영화 상영 1시간 전에 와인 파티를 한다는 거였는데, 안타깝게도 압구정 지리에 깜깜한 친구와 나는 길을 잃고 상영 전에 겨우 극장에 도착했다. 그래도 와인 한 잔은 마셨다.

        그리고 영화를 봤다. 오랜만에 극장에서 보는 영화. 벌써 일주일 전 이야기다. 나는 요즘 책도 잘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고, 영화도 보지 않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데,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이 이렇게도 살아지는구나,였다. 이렇게도 살아지는구나. 무미건조하게. 이야기도 읽지 않고, 이야기도 보지 않고. 밥 먹고, 잠만 자고.

       <오스트레일리아>에는 한 아이가 등장한다. 이야기는 이 아이로부터 시작된다. 아이의 이름은 눌라. 호주 원주민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아이. 이 아이는 마법을 부린 줄 안다. 이 말은 그 아이가 바람의 소리를 내며 한 말이지만, 나는 정말 이 아이의 마법을 믿었다. 지금도 믿는다. 이 아이는 이야기라면 엄마가 죽은 슬픔도 폴짝 잊어 버리는 아이다.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말한다. 네,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아이는 노래를 사랑하는 아이. 노래를 잘 부르는 것 같은데 못 부르는 척 하는게 분명한 니콜 키드먼의 '오버더레인보우'를 들으며 머리털을 바짝 세운다. 계속 해요. 계속 불러요. 빨리요. 그 때의 이 아이의 모습이 직접 봐야 한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손을 뻗어 스크린을 쓰다듬고 싶을 정도였다. 이야기와 꿈과 노래를 믿는 아이. 그게 바로 눌라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그야말로 호주영환데, 나는 호주를 가본 적 없지만 그 곳이 꽤 넓다는 건 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호주를 닮았다. 어찌나 긴지. 상영시간을 확인하지 못하고 들어간 탓에 이제 끝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한 두 번쯤 한 것 같다. 커다란 사건이 하나 해결되면, 다른 큰 사건이 또 터지고, 또 터지고 그런 식이다. 어찌나 많은 걸 영화 속에 담았던지, 감독의 욕심이 확실히 과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크게 소몰이 사건, 니콜 키드먼과 휴 잭맨의 애정행각,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눠지는데, 사실 애정행각 정도에서 끝났어야 했다. 아, 아. 안다. 그러면 갈등이 너무 없고, 감동도 너무 없고. 그렇다면 소몰이 이야기를 좀 더 길게 했어야 했다. 거기서 니콜 키드먼과 휴 잭맨의 '폴링인러브' 버전보다는 '나의' 눌라와 니콜 키드먼의 모정에 더 집중해서 감동을 이끌어 내었어야 했다. 소몰이 이야기에선 니콜 키드먼도 휴 잭맨도 눌라도, 호주의 땅과 하늘까지도 아름다워 보였으니까. 몇 백 마리의 소떼들이 정말 쿵쿵거리며 뛰어가는데 내 마음이 다 쿵쾅거렸으니까. 극장 음향이 좋아서 그런지 정말 심장도, 바닥도 쿵쾅거렸다. 그 크고 높고 깊은 호주땅을 담은 스크린에 가슴이 뻥 뚫릴 지경이었다니까.

       아무튼 나는 오늘 별로 나쁜 이야긴 하고 싶지 않으니까 (맥주를 마시고 있는 중이다) 눌라에 대해 더 말해야겠다. 이 아인 노래 듣는 것도 좋아하고, 노래를 꽤 잘 부른다. 이야기를 좋아하고, 당연하게도 꿈꾸는 걸 좋아한다. 별도 좋아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영화도 좋아한다. 본 영화라곤 흑인 분장을 하고 야외 극장에서 본 <오즈의 마법사>가 전부지만.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순수하다. 꿈을 믿는 아이는 말이 많다. 노래를 하는 아이는 눈이 맑다. 눌라는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닌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만, 맑고 밝은 아이라서 바람소리를 내며 마법을 부려 제 주위 세상을 후리지아 꽃처럼 환하게 만들 줄 아는 아이다. 

       오늘 이런 책을 발견했다. <내일은 맑음>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케냐 지라니어린이합창단의 이야기다. 세계 3대 빈민가 중 하나의 고로고초 마을의 아이들로 구성된 합창단. 가난해서 밥도 못 먹는 아이들이 노래를 부른단다. 나는 이 책을 한 부분을 읽는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노래를 배우는 모습을 상상했다. 음계도 모르는 아이들이 배고픈 것도 잊고, 집에 가는 것도 잊은 채 노래에 빠지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낮은 도음과 높은 라음을 떠올려 봤다. 아이들의 노래가 든 CD가 책과 함께 제공된다니 사야 할까, 싶다. 그러니까 이 아이들은 눌라같은 아이들일 거다. 꿈과 이야기와 노래를 사랑하는 아이. 이 아이들도 분명 영화 <오즈의 마법사>와 '오버더레인보우' 노래를 좋아할 거다. 그리고 이 아이들의 입에서 바람소리가 날 거다. 쉿쉿. 이건 마법이예요,로 시작하는.



     아. 오늘 대한민국영화대상에서 공효진이 여우주연상을 탔다. 만세. 어찌나 기뻤는지 그녀다운 수상소감을 내뱉는 내내 함께 울었다. (물론 그때도 나는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축하해요. 정말 받을만했다니까요. 욕심낼만 했어. 그 영화에서 그녀는 정말 멋.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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