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 감독님께.

   감독님. 오늘 <행복> 시사회를 보고 나왔는데 맥주 생각이 간절했어요. 영화를 보면 술, 담배하면 몸 다 망친다는 교훈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술이 땡기던지요. 같이 간 친구랑 좋아하는 술집에 가서 한 잔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 그냥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맥주 두 병을 샀습니다. 그리고 영화 생각을 하면서 한 병 마셨어요. 친구도 집에 들어가서 한 잔 한다고 했으니 어쩌면 장소만 다르지 우리는 함께 술 한잔 하는건지도 모르겠어요.

   감독님 영화를 처음 본 건 진주의 극장이었어요. 친구가 소개해준 남자아이와 함께 봤는데, 영화가 그 아이만큼이나 심드렁했어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저 사실 그때 졸았는지도 모르겠어요. 지루하다는 느낌만 남아있거든요. 그러다 대학생이 되고 다시 영화를 봤는데 영화가 완전 딴판인거예요. 너무나 좋았어요. 이 영화를 내 인생의 영화로 꼽는 사람이 지인 중에 있는데요. 매번 이 영화를 말할 때마다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어요.

   그리고 두번째 영화는 서울의 스타식스였어요. 아직도 생생해요. 감독님 작품이기도 하고 제가 좋아하는 유지태가 나오는 영화여서 첫날 첫회로 봤어요. 개봉날이 추석즈음이었고 집에 내려가려고 버스를 예매해놓은 날이었는데도 꼭 첫날 첫회의 부지런한 관객이 되고 싶어서 그날 영화보고 엄청 뛰어서 터미널로 갔어요. 그때 같이 본 사람은, 흠... 갑자기 마음이 아파오네요. 패스.

    그리고 세번째 영화. <행복>을 같이 본 친구와 봤었는데요. 그 친구가 저만큼이나 감독님 영화를 좋아하는 아이거든요. 무지 기대를 하고 봤었는데 친구는 이 영화가 별로였다고 했어요. 저는 뭐 첫번째, 두번째보다는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좋았어요. 욘사마가 너무 부담스럽긴 했지만 저는 이 영화의 설정 자체가 매력적이였거든요. 그리고 제게는 손예진의 재발견이었어요.

   흠. 첫번째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요. 그 장면이 참 좋았어요. 한석규와 심은하가 놀이동산에 놀러가잖아요. 심은하가 놀이기구때문에 멀미하는 한석규를 위해 파워에이드랑 아이스크림이랑 둘 다 양손 가득 사 가지고 와서 캔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잖아요. 그 장면. 미소와 눈물이 함께 떠오르는 장면이었어요. 짝짝짝. 그 장면은 술 한 잔하고 보면 정말 눈물이 나요.

   그리고 두번째 <봄날은 간다>. 이 영화의 명장면은 너무 많은데, 저는 그 장면이 그렇게 좋았어요. 유지태가 술 마시다가 이영애 보러 친구 택시 타고 강릉까지 갔던 장면. 새파란 새벽에 술에 얼큰하게 취한 유지태와 기다리고 서 있던 이영애가 껴안던 장면. 나란히 서 있던 가로등까지도 연기를 해대던. 꺄. 정말 좋았어요.

   세번째 <외출>은요. 두 사람이 회 먹던 장면. 손예진이 그런 대사 하잖아요. 우리 확 사귈까요? 두 사람 기절하게... 그 장면에서 손예진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깨물어주고 싶었어요. 정말 술이 얼큰하게 오른 거 같았어요. 이번에 인터뷰에서 보니까 허진호 감독님이 회를 엄청 좋아하신다면서요? 저도 좋아하는데. 언제 한번 회 한 접시 하고파요. 소주랑 함께. 흐흐


   그런데요. 감독님. 이번 영화 <행복>에서는요. 모르겠어요. 저는 영화가 종반부에 치달을수록 절망했어요. 전작들에서 느껴지던 주인공을 향한 감정이입이 전혀 되질 않았거든요. 특히 황정민, 영수 캐릭터요. 제가 처음 <봄날은 간다>를 봤을 때 이영애 캐릭터를 얼마나 욕했는지 몰라요. 천하에 나쁜 엑스라고 해가면서. 그런데 두번째로 영화를 보니까 이해가 되더라구요. 그 때는 유지태 캐릭터가 너무 어리게 느껴졌거든요. 아무튼. 영수는 정말 아니예요, 감독님. 도저히 공감이 가질 않아요. 영수는 정말 나쁜놈일 뿐이예요. 비겁하고 나약하고. 영수가 이제는 너 없으면 못 살겠다고 말할 때도 그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아요. 그냥 말만 그렇게 하는 거 같아요. 사랑할 땐 마음과 말이 함께여야 하는 거잖아요. 비록 그게 금방 무너지더라두요. 그런데 영수는 다 거짓말 같아요. 새빨간.

   영수는 너무 나약하고 약았고 은희는 너무 강하고 순수해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두 사람의 만남이예요. 너무나 극적인 캐릭터에 감독님 영화들 중에서 가장 극적인 스토리, 저는 조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요. 그냥 영화였으면 모르겠는데, 이건 감독님 영화니까요.

   아무튼. 이번 영화 만드시느라 수고하셨어요. <행복>은 조금 실망스럽긴 했지만, 감독님의 느낌이 구석구석 묻어나는 영화였어요. 저는 계속 감독님 영화라면 기대할 거랍니다. 누가 말해듯이 저는 감독님의 빠순이거든요. 흐흐. 저도 좋은 감성으로 읽었던 김훈의 '화장'을 다음 작품으로 만드신다는 기사를 봤어요. 정말 기대돼요. 감독님 영화 중에서 중년의 남성이 주인공이 되는 첫 영화가 되겠어요. 캐스팅도, 그 짧은 단편이 두 시간 남짓 스크린에서 어떻게 표현될지 정말 기대되요. 부탁이 있는데요. 감독님, 영화 좀 많이많이 빨리빨리 만들어주세요. 네? 감독님 장편이 이제 겨우 네 편이라니요. :)

   그럼 감독님. 저는 이제 마지막 한 병을 마시고 잘께요. 감독님도 굿나잇하세요. (행복 속 신신애처럼) 하이파이브! 그나저나. 임수정씨 영화 속에서 너무 예쁘게 나오시는 거 아니예요? 정말 여자인 제가 쏙 반해버렸다구요. 너무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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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매번 명작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 영화 &lt;행복&gt;을 보고...

    Tracked from 바위풀의 이야기 2007/10/03 22:01  delete

    행복. 허진호 감독의 신작인 <행복>의 시사회에 당첨 되어서 영화를 보고 왔다. 원래 허진호 감독의 팬이었던지라 기대를 좀 하고 있었는데, 영화는 솔직히 내 기대치를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가히 명작이라 불릴만한 가치가 있는 전작들인 <8월의 크리스마스>나 <봄날은 간다>에 비하면 좀 부족한 듯 하니까. 그래도 개인적인 팬으로서 수작의 반열에는 올려 주고 싶다. 이번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허진호 감독의 작품들이 갈수록 아프게 현실적이 되어 가고 있다..

  2. Subject: 영화 행복: 1. 임수정 물오른 연기! 2.베드신은 낚시 3. 행복이란 뭘까?

    Tracked from 살아가는 일이 허전하고 등이 시릴 때... 2008/01/25 04:47  delete

    한대수-행복의나라로 착한 남자, 순한 남자, 순박한 남자의 대명사였던 황정민이 나쁜 남자로 변신했다? 청순하고 여린 임수정이 남자를 유혹한다.! 황정민과 임수정의 베드씬! 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멘트로 관객에게 알려졌던 영화 행복. 미안하다 사랑한다(이하 미사)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임수정. 장화홍련 때의 당찬 연기와는 달리 미사나 새드무지에서는 참 재미없고 식상한 연기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는데 영화 행복에서는 "엇! 제법인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1. 달빛아래 2008/01/21 15:0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안녕! GoldSoul (=금령인가요?)

    주말은 잘 보냈어요? 전 집에 다녀왔어요.
    우리 둘다 집이 지방인가봐요.
    다른 글에서 집이 경상도라는 말을 언뜻 본 것 같은데,
    이 글을 읽다보니 집이 어딘지 알 것 같다는..^^

    나, 머리가 아파지는 이 맘때쯤엔 이 곳에 놀러와서
    GoldSoul님이 쓰신 글을 하나씩 음미하는 재미로 요즘 살고 있나봐요.
    이런 공간에서, 소통하고 위로받고 내 맘을 전할 대상이 있다는 게 참 신기하면서도 고마워요.

    저 역시 허진호 감독님을 정말 좋아해요.
    영화에 대해서는 일자무식한 저이지만, 허감독님 영화를 볼 때면 늘
    마음이 시리고 저리고...공감이 가요.
    그게 봄날은 간다를 봤을때는 유지태의 마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 볼 땐 이영애의 마음을 느낀 것처럼,
    볼 때마다 공감하는 입장이 달라진다는 님의 말에도 동감하구요..

    행복의 영수는 너무 나약하고 약았고, 은희는 너무 강하고 순수하다는 말.
    그래서 너무 극적인 캐릭터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말.
    저 둘에 대해선 저와 같은 생각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근데 저는 그래서 그 캐릭터에 더욱 공감했어요.
    왜냐면, 그게 바로 저의 사랑이었거든요.

    제가 제 입으로 제가 순수한 사람이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그랬던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행복을 보는 내내, 은희가 너무 가여워서,
    하지만 그만큼 더 행복해보여서 마음이 시렸어요.

    사람이 늘 경험해 본 일에 대해서만 공감하는 건 아니지만,
    그 입장이 되어본 사람은 그 일뿐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나기 전과 후의 마음에 대해서도 공감할 수 있는 거 같아요.
    최선을 다해서 순수한 마음을 주었지만, 돌아온 건 냉랭한 상처뿐이었던...
    제발 헤어져달라고 먼저 말해달라는 말을 들으며,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 밖에 없었던 은희가 내겐 참 아파요.

    극장에서 단 한번, 내 인생의 사랑과 봤던 영화였지만,
    너무나도 할 말이 많은 영화인지라,
    오히려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지금껏, 그냥 맘에 삭히고만 있었는데,
    여기 오늘, 행복에 대한 단상을 보고, 아무리 횡설수설이라도 오늘은 좀 풀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주저리주저리 하고 가요.

    나중에 내 느낌 더 말해줘도 될까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1/22 00:27 GoldSoul

      맞아요. 금령. 그래서 아는 동생이 지어준 별명이 골드소울이예요. 요 별명을 지어주고 그 동생 사람보다 뜻이 더 좋다며 흐뭇해했어요. 흐흐-

      <봄날은 간다>를 시간을 두고 보면서, 같은 영화가 다르게 느껴지는 걸 처음 깨달았던 것 같아요. 그 때 정말 놀라웠어요. 내가 변했구나, 생각이 들면서요. 그리고 내게 좋았던 다른 영화들도 꼭 그렇게 봐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 <행복>도 이번엔 그렇게 봤지만, 나중에 다시 한번 보게 되면 영수든 은희든 어느 한 쪽에 공감될 지도 모르겠어요. 아니면 둘 다요.

      네. 더 말해주세요. 달빛 아래님 느낌들이요. 언제든 기다리고 있을께요. :D

      헤어지고 나면 그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한 게 맞을까, 그렇게 좋았던 시간들이 스르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 같아 제일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도 그 시간들은 분명 존재한 거예요. 그 사랑도요. 그 때 행복했음 그걸로 된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달빛 아래님도 행복하셨죠?

  2. 파란토마토 2008/01/22 04:4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어머.. 직접 적으신 글인가요? 세상에 너무 잘 적으시네요.
    멋집니다.. 작가하셔도 되겠어요.

    저도 행복 리뷰하나 쓰고 싶은데 이글보고 나니 손가락이 오그라드네요.
    어찌나 잘 쓰셨는지...

    저는 영수에게 진심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리 나쁜놈 같지도 않았어요.
    그냥 못나고 비겁한 놈이죠. 저런 남자 흔하지 않나요?ㅋ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1/23 00:34 GoldSoul

      저런 남자 흔한가요? 하긴 제가 바라는 남자는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석규나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인데, 그런 남자보다 <행복>의 황정민이 흔하겠죠? ㅠ
      별로 잘 쓴 글도 아닌데 좋은 인사 감사드려요. :)

  3. 파란토마토 2008/01/25 04:4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정말 잘 쓰신 글이에요^^
    제글은 부끄럽지만 트랙백 걸게요.
    근데 은희였나요. 이넘의 건망증.ㅋㅋ
    영희라 썼는데 은희로 고쳐야겠네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1/26 12:13 GoldSoul

      헤헤. 칭찬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그리 잘 쓴 글도 아닌데.
      파란토마토님 글 지금 보러 갑니다. 헤헤-

  4. 필그레이 2008/02/03 02:1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리뷰를 이제 읽어보네요.글 너무 좋아요.처음과 끝을 이어주는 맥주신?(맥주글이라고해야하나요.^^;)도 너무 좋구요.저는 봄날은 간다 영화 보면서 주변분들에게 은수라는 캐릭터 이해시키느라 힘뺐던기억이 있어요.그녀는 사랑이 두려워서 그런거라고...바람둥이라서 그런거 아니라고...

    글 읽으면서 공감갔던 게 한편의 영화를 어떤 시절에 따라 참 달라보인다는 거예요.저는 공지영씨 소설이 이번에 그랬어요.멋모르고 20대초반에 읽을 땐 시큰둥했는데 두번읽을때 느낌이 달라지고 이번에 또 한번 읽게 되면서 (같은 책을요...)정말 판이하게 느낌이 다른거예요. 영화도 책도 나이가 듦에 따라 참 느낌이 달라지는 게 신기하더라고요.^^

    허진호 감독 영화도 그런 것 같아요.왠지 모르게 다르게 차근차근 다가와요.저도 얼른 빨리 감독님 새영화 만났음 좋겠네요.^^

    아...그리고 영수캐릭터는 사실 좀 나쁘죠...ㅋㅋ 뭐랄까...판타지쯤으로 봐도 될 것 같아요.실제 이런남자들이 많다면 정말...ㅡㅜ 은희는...제 눈에는 뭐랄까...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성숙한 여성이랄까요...그런 느낌 받았어요...

    괜스레 오랜만에 와서 댓글만 길게 적고 가네요.^^;;;글 잘 읽고 가요.오늘 작정하고 놀러왔으니깐...찬찬히 둘러보다갈께요.아참...저도 가끔 홀로 맥주 마시는데...버드와이저가 좋더라고요.ㅋㅋ 히힛.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2/04 14:50 GoldSoul

      저도 혼자 맥주 마실 때 버드와이저 좋아해요. 병도 예뻐서 홀짝거리기에 딱이예요. 얼마전에도 일본드라마 보면서 일요일에 홀짝거렸는데 기분 완전 좋았어요. 헤헤 :D 영수 캐릭터는 왠지 많을 거 같아요. 늘 허진호 감독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이상형에 가까운 완벽한 남성상이였는데, <행복>에서는 너무 현실적이고 비겁해서 싫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은희가 이상형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이번에는요. 아, 영수같은 사람 살면서 안 만났음 좋겠어요.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