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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에르네스
    여행을가다 2017. 7. 1. 07:22


       그런 순간이 있었더랬다. 포르투갈에 혼자 가게 되었을 때, 같이 가지고 하기로 한 동생이 출발을 몇일 앞두고 다리뼈가 산산이 부서져 버렸을 때, 누군가 말했다. 금령씨, 이건 운명같아요. 응, 정말 운명 같았다. 포르투갈이 내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너 혼자 와보라고. 그러면 내가 보여줄 것들이 있다고. 지금도 그 포르투갈의 말들을 믿고 있다. 오늘 아침의 바르셀로나도 그랬다. 어제는 너무 외로워서 힘들었는데, 그래서 다운받아와서 여기서 본 영화 <바르셀로나 썸머 나잇>을 보고 비가 오는 날을 기다렸더랬다. 비가 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면 친구가 준 초에 불을 붙이고 하루종일 숙소에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바르셀로나 일기예보에는 매일 비 그림이 있었는데 (심지어 번개 그림도) 비가 오지 않거나, 와도 조금 오다 말았다. 어제는 일찍 잠이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새벽에 몇번을 깼다. 잤다 깼다 잤다 깼다 하다 새벽 6시 즈음에 눈을 떴는데, 커튼 밖이 깜깜했다. 이상해서 테라스에 나가보니 비가 오고 있었다. 번개도 쳤다. 아.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지금 바르셀로나가 내게 말을 걸고 있구나 생각을 했다. 힘 내라고, 나는 니 편이라고. 말도 안되게 그런 상상을 했다. 그러다 또 잤다 깼다 잤다 깼다를 반복했다. 비는 어느새 그쳤다. 매일매일 나가서 걷고 있으니, 힘든 건 당연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도 그러지 않는데. 오늘은 늦게까지 침대에서 뒹굴다가 오후 늦게 준비를 하고 왕의 광장에 가거나 봐두었던 재즈 바에 가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오늘은 타월 안 갈아줘도 된다는 메모를 문 밖에 붙여두고 조식을 가져와 먹었다. 원래 해변에서 깔 일이 있을까 해서 가져온 마후라인데, 조식 먹는데 사용을 해봤다. 아, 편한데 진작 이렇게 먹을 걸.

        오늘은 크로와상은 남겼다. 아무래도 아침 빵 2개는 무리다. 어제는 정말 맛있게 다 먹었지만.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면서 생각했다. 이런 시간들을 위해 값이 나가는 숙소를 예약했던 거야. 그러니 하루쯤 나가지 않고 뒹굴어도 괜찮아. 보경이와 메시지를 주고 받게 됐는데, 보경이가 이런 말을 해줬다. 난 언니 여행 방식이 좋아. 언니가 먹고 싶은 거 먹고 가고 싶은 곳 가줘. 짧고 굵은 대화들을 나누고 나니 씻고 싶어졌다. 씻고 나가서 다시 걷고 싶어졌다. 어딜 갈까 뒤적거려보다 그래, 카탈루냐 미술관을 못 갔어, 생각했다. 여행 오기 전 책을 읽다가 무척 감동을 했더랬다. 이 미술관의 이야기들에. 그래서 해가 질 적에 계단에 앉아 해지는 풍경을 내려다보는 상상을 했더랬는데. 그래 가보자. 구글 지도로 검색해보니 55번 버스를 타면 한번만에 갈 수 있다. 씻고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챙겨 입었다. 가방에 필요한 것들을 꽉 채우고 방을 나섰다. 붙여 놓았던 쪽지는 없어졌고, 복도에 사용 중인 청소 도구들이 있었다. 아, 내 방은 청소 안하고 정리만 해주고 나가는 거 같은데, 바닥 청소 같은 걸 한 거 였을까 이딴 생각들을 하며 길을 나섰다. 55번 버스는 늦게 왔지만, 나는 시간이 많으니 괜찮았다. T-10 티켓은 미술관 가는 게 마지막 사용이었다. 아, 정말 알뜰하게 잘 썼구나. 대부분 걸어다녀서 티켓 사용할 일이 별로 없었다.

       55번 버스는 개선문도 지나고, 카탈구냐 광장도 지나서 간다. 가면서 내가 갔던 곳들을 버스 안의 시선으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엠피쓰리 플레이어도 재생시켜 음악도 듣고, 지루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버스가 신호로 잠시 정차했는데,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커피잔을 비워져 있었고, 막 담배를 재털이에 비벼 끄고 계셨다. 그리고 남은 맥주를 원샷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충만한 순간. 여행을 혼자서 하다보니 외로운 순간도 있지만, 그만큼 충만한 순간들도 있다. 버스 안에서 그랬다. 내려서 미술관까지 걸어가는데 말도 안되는 광경이 펼쳐졌다. 아, 너무나 화창하고, 너무나 밝고, 너무나 선명한 순간.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데 뭐라 말할 수 없이 속이 확 뚫리는 것 같았다. 좋구나. 일반 티켓을 구입을 하고 미술관 구경을 했다. 후기에 건물 자체도 아름답고, 전시되고 있는 것들이 풍성하고 꽉 차있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더라. 너무 배가 고파서 간단하게 요기를 때우고 구경을 시작했는데, 안 그랬음 큰일 날 뻔 했다. 볼 게 정말 많았다. 영어를 잘 알아들을 수 없어서 오디오 가이드는 안 들었는데, 오디오 가이드를 일일이 다 들으면 미술관에서 거의 하루종일 보내도 될 것 같았다. 현대미술관을 보기 전에 잠시 소파에 앉아 쉬었는데, 소파가 정말 편안했다. 나한테 같이 앉아도 되냐고 물어보고 앉은 할머니는 앉자마자 너무나 편안해서 깜짝 놀라며 그렇지 않냐며 표정으로 내게 동의를 구했다. 계속 앉아 있으니 잠이 쏟아져서 빨리 보고 돌아가자 생각하고 현대미술관에 들어갔다.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리얼리즘 코너. '코리안'이라는 이름의 조각상이 있어서 빤히 들여다봤다. 현대미술관 앞에 들어갔던 중세 종교 미술을 전시한 관에서는 책의 내용들이 생각이 났다. 중세시대 산 중턱 즈음 있었던 묵직한 돌들로 간결하게 이루어졌던 성당 건축물들. 그 어두운 공간에 들어서면 보이던 환한 그림들. 집에 가면 다시 읽어봐야겠다.

       지붕까지 올라갔다가 55번 버스를 타러 정류장에 왔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4시에 가까워졌다. 오늘의 점심은 한식으로 하려고 했기 때문에, 다시 숙소 근처로 가야 했다. 어제 시집을 읽다 여행지에서 먹는 김치찌개라는 시구가 나왔는데, 그걸 못 이후로 김치찌개를 먹어야 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한인식당은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오가면서 보았더랬다. 구글 지도 후기를 챙겨보니 조선족 부부가 하는 가게인 거 같은데, 이모님이 무척 친절하다고 했다. 진짜 그렇더라. 친절하시더라. 밥때가 지나 손님은 없었다. 식당에 들어서는 나를 보자마자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아, 한국말로 인사도 하고, 주문도 했다. 일단 맥주를 주문했다. 주문하고 보니 신기한 중국어 캔이 있어서 저것도 맥주냐고 물어봤는데 음료라고 한다. 김치찌개에 공기밥을 달라고 했는데, 찌개에는 공기밥이 포함이라고 했다. 주인 아저씨가 테라스에 있다 들어가시더니 얼마 안 있어 뚝배기에 김치찌개가 나왔다. 고봉밥이랑. 아, 맛있겠다. 처음엔 이 많은 밥을 어떻게 다 먹지 했는데, 다 먹었다. 찌개도, 밥도. 이모님이 치우시면서 이렇게 먹어야 설거지도 편한지, 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내가 말을 먹는 사이 서양인 셋이 와서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갔다.

       너무나 배가 불러 기분이 좋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한 기분으로 숙소까지 걸어왔다. 오는 길에 어제 들렀다 신세계를 발견한 마트에 다시 들렀는데, 어제 검색하다 알게된 초코우유도 사고, 염소우유로 만든 것 같은 요거트도 사고, 돼지고기의 어떤 부위를 말린 것 같은 맥주안주도 샀다. 돼지고기 맥주안주도 먹어보고 맛나면 맥주 좋아하는 친구들 선물로 사가려고 맛보려고 샀다. 그리고 풀을 사러 문방구에 들어갔는데, 들어가보니 풀이라는 단어를 영어로도, 스페인어도 모르는 거다. 주인 아저씨와 왠지 주인 아저씨의 손녀일 것 같은 알바생은 나를 계속 쳐다보며 뭘 찾냐고 스페인어로 물어보고. 파파고로 스페인어 '풀'을 검색해봤다. (이번에 메뉴판 검색에 자주 사용한 파파고는 흠, 별로인 걸로 결론 내림) 당연히 그 풀이 검색이 안되었겠지만, 일단 보여줘봤다.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해서 엽서를 꺼냈다. 사실 엽서의 주소를 잘못 썼는데, 엽서도, 이미 붙여버린 우표도 아까워서 주소를 종이를 덧붙여 쓰려도 했던 것. 덧붙이려고 한 종이를 꺼내 막 풀칠을 하는 시늉을 했더니, 친절한 손녀 아이는 엽서나 우표를 찾는 거냐고 물어봤다. 아니 아니고. 흠. 잇츠 롱 어드레스, 쏘- 그러니 아, 하며 뒤쪽에 있는 화이트를 꺼내려고 한다. 노노우. 하면서 풀칠을 또 막 하는 시늉을 했더니, 아아아. 하더니 풀을 꺼냈다. 나도, 소녀도 함께 웃었다. 라잇! 풀이 꽤 크길래 제일 작은 걸로 달라고 했다. 소녀는 종이에 0.90유로라고 적어줬다. 엽서를 가만히 보더니 한국? 이런다. 씨! 아무래도 아이돌에 대해 알 것 같은 소녀에게 그라시아스! 라고 말하고 나왔다.

        숙소에 들어와서 일단 침대에 누웠는데, 아 정말 아무 것도 못할 지경의 피곤함이 온몸에 몰려왔다. 티비를 틀었는데, 어쩌지 오늘 그날이다. FC바르셀로나와 맨체스터 레전드의 자선경기가 있는 날. 거리에서 포스터를 보고 이날 갈 축구펍을 알아뒀었다. 이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열광적으로 응원하는지 정말이지 현장에서 보고 느끼고 싶었는데, 몸이 천근만근이나 일어날 수가 없다. 결국 전반전은 침대에서 시체처럼 누워 보는둥 마는둥 했다. 그러다 이제 이틀밤밖에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들자, 근처 바르에 가서 맥주를 마시면서 보고 들어오자 생각했다. 쪼리를 챙겨 신고 천근만근 몸으로 숙소를 나섰는데, 마땅한 바르가 보이지 않았다. 이 곳은 티비가 아예 없고, 이 곳은 너무 흥분해 있는 남자들이 많고. 지나가니 이상한 소리를 내보인다. 결국 아저씨들이 몇 있는 바르에 들어갔는데, 아저씨들은 나를 힐끔거리며 보았지만 신경쓰지 않았고, 주인아저씨도 친절했다. 일단 맥주를 시키고 앉았는데 티비에서 하는 축구경기가 낯설다. 다른 유럽팀 경기였다. 아저씨들 왜 FC바르셀로나 경기 보지 않나요?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다 바르셀로나 축구에 열광하는 거 아니였나요? 나는 이 바르에서 세 병의 맥주와 하나의 안주를 시키고, 내가 할 줄 아는 모든 스페인어를 사용했다. 안녕하세요. 맥주 주세요. 맥주와 소브라사다(처음 시켜봄) 주세요. 화장실 어딘가요? 얼마인가요? 감사합니다. 잘 있어요. 책에서만 보면 바르 문화를 제대로 경험했는데, 여기서 한잔씩들 하고 본격적인 저녁을 먹으러 다같이 가는 듯 했다. 이를테면 이곳이 집합소인 듯. 주인 부부랑도 다 친하고, 누가 새로 들어오면 다들 인사를 하더라. 다 아는 사이인듯. 저녁 먹으러 가지 않는 사람들은 여기서 몇가지 코스로 저녁을 먹더라. 처음엔 스파게티가 나오고, 나중엔 갑오징어 인 것 같은 요리가 마요네즈와 함께 나왔다. 아, 침 나오더라. 맥주 세병에 안주까지 하나 시켰는데 9유로가 나왔다. 와우. 진작 많이 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횡단보도를 건너 숙소로 들어왔다. 오늘은 엽서를 한 장 썼고,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시집 한 권을 끝냈다.

      

    바르셀로나, 열번째 날 - 오늘의 행복했던 일 : 금요일 깊디 깊은 밤 테라스 밖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이제 놀랍지 않고 정겹게 된 것. (아, 숙소 앞에 타파스 가게가 있는데, 지난 금요일 12시가 넘는 시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줄지어 왁자지껄하게 들어가는 광경을 목격했더랬다. 너무나 궁금해서 후기를 검색해보니, 일반 음식의 맛은 그냥 그렇거나 별로인데, 단체 손님에게 무척 인기가 좋았다. 여러가지를 시켜 다양하게 맛보기 좋은 듯. 지금도 그러하다. 즐거워하는 소리부터 길가에 고스란히 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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