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여행

from 서재를쌓다 2014. 2. 12. 21:23

 

 

 

    군산에 가게 된 이유 중에 하나가 최갑수였다. 어느 토요일, 늦은 아침으로 죽을 사 먹고 들른 커피집에서 보게 된 최갑수 시인의 글 때문이었다. 최갑수 시인은 군산에 가라고 했다. 특별한 일 없이 가을을 쓸쓸히 보냈다면, 철길이 있고 예쁜 창문을 볼 수 있는 군산으로 여행을 떠나라고 했다. 그 글이 좋아서 결국 잡지까지 샀다. 여러 번 읽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군산에 가야지. 군산에 갔고, 철길과 예쁜 창문을 보지 못했지만, 쓸쓸한 기분이 더해져 돌아왔지만, 좋았다. 쓸쓸해서 마음에 남는 군산이었다.

 

    또 어딘가 나를 떠나게 만들어 줄 것만 같아서 산 책이다. <당신에게, 여행>. 사실 처음에는 좀 실망했다. 여행지마다 소개하는 글이 너무 짧았다. 한 페이지에서 세 페이지 정도다. <트래블러>에 실린 긴 글을 기대했던 내게는 너무 짧았다. 그래, 한번 떠나볼까? 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글이 끝났다. 그래도 끝까지 읽어보자 마음 먹고 읽었다. 그러자 장점들이 보였다. 이 책에 소개된 여행지가 99곳. 가고 싶은 생각이 들때마다 포스트잇을 붙여뒀다. 그러자 포스트잇이 가득 찼다. 시인의 글은 넘치는 감성에, 적당한 정보가 곁들여 있었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니 만족스러웠다. 와, 나 가고 싶은 데 정말 많이 생겼다. 뿌듯했다. 

 

    시월의 군산. 십이월의 강릉 보헤미안. 어느 때나 좋은 태안 꽃지해변. 삼월의 남해 물미해안도로. 십일월의 경주. 십일월의 동해. 시월의 정선 만향재. 유월의 횡성 숲체원. 사월의 강진 백련사. 십이월의 주문진. 시월의 영주 부석사. 삼월의 통영. 사월의 부산 기장 대변항. 유월의 안동.

 

    아쉬운 점은 모든 길 안내가 자가용이라는 것. 그래서인지 왠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는 가기 힘든 곳 같은 느낌이 든다. 뚜벅이들을 위한 길 안내가 있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

 

 

   이 책은 최갑수 시인이 밑줄 그어 놓은 곳, 그리고 아래는 내가 밑줄 그어 놓은 문장들.

 

- 복성루는 1973년에 개업한 집이다. 우리나라 5대 짬뽕집(복성루, 강릉 교동반점, 공주 동해원, 평택 영빈루, 대구 진흥반점)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p.45, 군산 근대문화 여행

 

- 다방 같았다. 열 개 남짓한 갈색의 테이블과 의자가 별다른 장식 없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갈색 설탕병이 놓여 있었고, 창문을 넘어온 투명한 겨울 햇살이 설탕병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바다. 멀리, 아득하게 바다가 보였다. 수평선에서 흰 파도가, 설탕 같은 파도가 일렁였다.

p. 53, 강릉 보헤미안.

 

- 당신과 다투었을 때, 그래서 나나 당신이나 낙담하고 있을 때, 나는 당신을 태안 안면도 꽃지해변으로 데려갔다. 낙조 아래에서 나는 당신의 손을 슬며시 잡았고 우리는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아왔다.

p. 57, 태안 꽃지해변.

 

- 파도가 밀려왔다 갈 때마다 해변은 자르륵 하는 소리를 낸다. 해변 한 켠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의 모습이 평화롭기만 하다.

p. 61, 남해 물미해안도로.

 

- 무덤을 보러 가끔 경주에 가곤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첨성대 건너편에 자리한 노서 노동동 고분군이라고 불리는 몇 기의 능을 보러 간다. 그 앞에서 딱히 하는 일은 없다. 이 능들, 참 예쁘다, 요렇게 감탄하며 우두커니 서 있다.

p. 75, 경주 노서 노동동 고분군.

 

-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도 아름다워 한국의 100대 명소리로 선정되었다.

p. 81, 동해 망상해변에서 추암해변까지.

 

- 몽환이다. 그 풍경 속에 서 있으면 마음도 저절로 만발한다. 사랑 따위는 없어도 살 수 있겠다 싶다.

p. 136, 정선 정암사와 만향재.

 

- 유월의 숲에는 온갖 살아있는 것들의 기척과 디테일로 가득하다. 햇살을 받은 나뭇잎은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유월의 따스한 공기 속에서 나무껍질은 말랑거린다. 엄지손가락으로 지그시 나무를 누르면 지문이라도 남을 것 같다.

p. 145, 횡성 숲체원

 

- 미륵은 석가모니불의 뒤를 이어 56억 7,000만 년 후에 도솔천으로부터 인간세계로 내려와 석가모니불이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다. 미륵불 곁에 서 있는 미륵보살의 합장이 간절하다.

p. 151, 파주 겨울 나들이

 

- 백련사는 7,0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는 곳.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11월부터 동백꽃이 피기 시작해 4월 중순에 만개한다. 4월말이 되면 떨어지기 시작해 바닥을 물들인다. 예로부터 동백꽃은 세 번 핀다고 한다. 나무에서 한 번, 땅에 떨어져서 한 번, 그리고 당신의 마음 속에서 또 한 번.

p. 163, 강진 다산초당과 백련사.

 

-  주문진은 세상사에 지쳤을 때, 회사에 출근하는 일이 정말이지 지긋지긋할 때 한번쯤 찾아보시길. 새벽 네 시의 포구에 나가보시길. 귀를 베어갈 것처럼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수평선을 향해 배를 몰아가는 어부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 속에서 부글거리던 불평과 불만이 깨끗이 사라진다.

p. 181, 강릉 주문진항.

 

-  해질 무렵, 백두대간을 넘어온 장엄한 노을이 절집 안마당에 내려앉을 무렵, 소슬한 가을바람이 무량수전 풍경을 흔들고 지날 무렵, 황금빛 노을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을 비출 무렵, 법고가 울리고 목어가 울리고 운판이 울릴 무렵...

그 무렵이면 부석사를 찾은 모든 이들이 아무 말없이 합장.

p. 184, 영주 부석사.

 

- 도다리쑥국은 오직 봄에만 맛볼 수 있는 통영의 진미다. 도다리쑥국은 봄에 나오는 자연산 도다리와, 역시 봄에 나오는 쑥을 함께 넣어 끓인 국이다. 쌀뜨물에 된장을 풀고 절반 정도로 자른 도다리를 넣고 끓인다. 도다리 살의 촉촉한 질감과 향긋하면서도 강한 쑥의 냄새가 어울린 맛은 어느 문호의 글이나 고급 사진기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도다리 살은 입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는다.

p. 251, 통영 봄맛기행.

 

-  절터는 넓다. 동서 288m, 남북 281m. 이 자리에 구리 3만 근과 황금 1만 198푼이 들어간 본존불 금동장륙상이 있었고, 동양 최대 목탑인 9층 목탑이 있었다. 에밀레종보다도 규모가 4배 더 나간다는 황룡사종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모조리 불타버렸다.

p. 311, 경주 황룡사지.

 

- 한해살이인 멸치는 기장 앞바다로 번식을 위해 찾아들었다가 조류가 순해지는 조금물때를 기다려 암초 위에 알을 쏟고는 짧은 생을 마친다. 기장 대변항의 어부들은 이 멸치들을 쓸어담으며 생을 산다.

p. 330, 부산 기장 대변항.

 

- 선비들은 비 오는 날, 달이 밝은 날, 화창한 날, 만대루에 앉아 글을 읽었다. 스산한 바람이 부는 가을날, 만대루에 앉아 글을 읽는 그들의 심사는 어떠했을까. 배롱나무가 내내 그들의 등을 희롱했으리라.

p. 341, 안동 병산서원.

 

- 이빨 빠져 섭섭해진 접시 위에 사과를 깍아 올리는 일,

오이나무를 비추던 여름 햇빛의 분주에 잠시 어지러웠던

어느 하루라고 해 두자.

여행 말이다. 여행.

아니, 어쩌면 삶일 수도, 그게 사랑일 수도.

p. 358-359, 에필로그.

 

 

    나는 이제, 꽃이 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

 

 

   생각해보니 이번 겨울에는 주로 먹는 이야기를 읽었다. 음식 이야기를 읽으면 왜 이렇게 신이 나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에는 트위터에서 '하루키 레시피'를 팔로우했다. 하루키의 작품 속 레시피들을 트윗해주는데, 오늘은 이런 트윗이 올라왔다. "후카에리는 얼그레이를 마시고 토스트에 딸기잼을 발라 먹었다. 그녀는 마치 옷의 주름을 그리는 렘브란트처럼 주의깊게 시간을 들여 토스트에 잼을 발랐다." <1Q84>의 문장이란다. 먹는 이야기를 쓴 책 뿐만 아니라 먹는 이야기를 하는 영상도 좋아한다. <한국인의 밥상>을 즐겨보는데, 얼마 전에 못생긴 생선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보는 내내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속초에 갔을 때 '도치알탕'이라는 간판을 봤는데, 그저그런 알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야 알탕마니아) <한국인의 밥상>을 보니 보통 알탕이 아니었다. 물컹물컹하게 복어의 배를 닮은 볼록하고 못생긴 생선이 도치였는데 배를 갈라보니 볼록한 것이 모조리 알이었다. 헉. 그 알로 두부도 만들어 먹고, 탕도 만들어 먹고 한단다. 못생긴 고기 편에서는 동해의 시원한 바다도 보고, 그 짠내도 실컷 맡을 수 있었다. 보면서 완전 신났다.

 

   박찬일의 책도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군산에 하루에 30분만 볶음밥을 파는 중국집이 있다는 걸 알았다. 볶음밥은 윅을 휘두르는 팔 힘 맛이란다. 그러니까 불 맛이란다. 그런데 그 집 주방장이 이제는 늙어 하루종일 윅을 휘두를 팔 힘이 없어 딱 30분만 볶음밥을 판단다. 블로그를 검색해보니 모양은 그냥 그런 볶음밥이던데 맛이 끝내주나 보다. 다음 군산 여행 때 도전해 볼 것 추가. 보슬보슬한 흰 밥에 김이 솔솔 나는 병어 조림, 평일 오후 건강한 육체노동자가 먹는 자장면 곱배기, 사각거리는 수박에 바늘로 잘게 뽀갠 얼음, 촉촉하게 익은 꼬막살, 미디엄 웰던에서 레어까지 노른자 층위가 만들어진 달걀프라이, 둥그런 밀가루 전병 속에 리코타 치즈 크림을 채운, 영화 <대부>에서 사람을 죽이고서도 챙긴 과자 카놀리, 소박하지만 진짜 서해안의 갯벌 맛을 다부지게 보여주는 바지락 칼국수, C의 두툼한 진짜 민어회까지. 음식 이야기로 가득찬 책이다. 재미나게 읽었다. 다음은 만화책이다. 빌려뒀다. <오무라이스 잼잼>. 유후.

 

 

,

그들에게 린디합을

from 서재를쌓다 2014. 1. 27. 22:48

 

   

   언니가 그랬다. 손보미 읽어봤니? 내가 아직이라고 했고, 언니가 말했다. 한번 읽어봐. 이상해. 읽어보면 아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거야. 손보미의 첫 소설집을 읽었다. 그때 언니의 말이 생각났다. 정말 희안하게도, 신기하게도 그때 언니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해서 이상하다는 말.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내 경우에는 좋은 쪽으로 저울의 바늘이 좀 더 많이 가 있다. 동생이 얼굴에 자그마한 혹이 나 수술을 했는데, 평일에 휴가를 내고 병원에 같이 갔다. 동생이 수술을 하는 동안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했다. 아침을 못 먹은 터라 배가 고팠다. 그렇다고 혼자 뭘 먹을 수가 없었다. 수술하는 동생에 대한 배신, 따위는 아니고 수술하고 나오면 바로 죽 먹으러 가기로 했기 때문. 그래서 로비에 가서 편의점에서 천원 짜리 아메리카노를 뽑아왔다. 일단 계산대에 가서 컵을 사고, 그 컵을 가지고 커피 머신으로 가서 빈 컵을 놓고 진한 아메리카노 버튼을 눌렀다. 천원짜리지만 제법이다. 약간의 크레마도 생겼다. 그 커피를 가지고 다시 수술 대기실로 올라왔다. 여기서 마셔도 되는지 간호사에게 물어보고 소파에 앉았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평일의 대학병원은 북적이면서도 한산했다. 친구에게 이 소설집이 마음에 든다는 메세지를 보냈다. 어떤 옷을 보면 어떤 여행이 생각나듯, 평일의 대학병원에 가면 이 책이 생각날 것 같다.

 

    딱 두 군데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먼저 143페이지. '육인용 식탁'이다. 이 소설 재밌었다. 내가 포스트잇을 붙인 부분은 여기.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아내와 나는 간단한 저녁식사를 했다. 내가 설거지를 하다가 컵을 하나 깬 것 이외에는 여느 날과 다름없는 저녁이었다. 아내는 깨진 컵을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유리조각을 꼼꼼하게 치운 후,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하는 개그 프로그램을 함께 봤고, 커피도 한 잔씩 마셨다." 이런 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설거지를 하다가 컵을 하나 깬 것 이외에는 여느 날과 다름없는 저녁이었다, 와 아내는 깨진 컵을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사이. 그 사이에 말하지 않은 것. 그걸 느낄 수 있어 좋았고, 말해주지 않아서 좋았다. 다른 포스트잇은 작가의 말에 있다. 이 소설집은 당연하게도, 어떤 이야기에서 시작해 어떤 이야기로 끝나는데, 이 두 이야기가 연관이 있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그건 우주 너머에 똑같은 내가 한 명 존재하지는 않을까, 라는 상상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내가 너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때 엄마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너가 죽지 않았더라면. 정말 이 우주 너머에 나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또다른 내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그애는 '지금'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무슨 음식을 제일 좋아할까. 그런 상상들.

 

 

 

,

 

 

    사실 표지에 반했다.  잘 지은 밥에 명란젓 한 쪽. 진짜 맛있어 보인다. 제목도 <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 재미나게 읽었다. 여행 에세이를 읽고 싶은데, 읽다 보면 실망스러운 책이 많았다. 사진만 너무 많거나, 감성적이기만 한 책. 뭔가 정보와 감성이 섞인 여행책을 읽고 싶었는데, 이 책은 재미났다. 일본 규슈의 맛집들을 찾아다니며 쓴 책인데, 그 음식들의 역사를 함께 살펴본다. 이 음식이 어찌하여 일본 땅에 뿌리내려 사랑을 받고 있는지,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그 음식의 맛집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지. 추천사에서 요리사 박찬일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일본행 비행기를 버스처럼 타고 다니느라 집 몇 채를 날려 먹었다는 소문도, 그를 앞세우고 가면 오직 손으로 모든 걸 말하는 쇼쿠닌들을 친구 삼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는 관심 없다." 그리고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은 "가서 먹어봤다며 글과 사진의 흔적을 남기기는 쉽다. 그곳에 왜 그 음식이 있는지 의미망을 엮는 것은 어렵다. 박상현은 일본을 들낙거리며 이 어려운 일을 해치웠다."고 말한다.

 

    우리집 밥솥이 고장났다. 어디선가 밥솥을 청소하는 방법을 본 뒤에 한밤 중에 밥솥을 청소한다고 솥을 씻고 고무밴드도 꺼내서 씻었다. 그런데 고무밴드를 다시 끼는게 쉽지 않았다. 낑낑대며 겨우 끼었는데 그 뒤로 밥맛이 달라졌다. 김도 제대로 나지 않고, 밥을 하고 그냥 하루 놔두면 딱딱하게 굳어 있다. 영화 <좋지 아니한가> 생각이 났다. 그 영화에서 밥솥이 고장났는데도 새로 사지 않고 밥을 할 때마다 밥솥을 아빠의 오래된 허리벨트로 꽁꽁 싸맨다. 시집 안 간 노처녀 이모 김혜수는 하나 좀 사지 지지리 궁상이라고 궁시렁거린다. 식구들 모두가 불만이다. 엄마만 밥솥을 고수한다. 그 밥솥 생각이 났다. 막내는 우리 밥솥이 정말 오래된 밥솥이라고 했다. 그럴만도 하다는 뜻이다. 나는 뭔가 밴드를 잘못 껴서 그런거 같은데, 다시 제대로 낄 엄두가 안난다. 오래되긴 했다. 그런데 오래된 기준은 뭘까. 아무튼 요즘 집에서 한 밥은 그리 맛있지가 않다.

 

   이 책 <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 중에서 제일 흥미있었던 부분은 쌀밥에 대한 이야기다. 일본인들은 밥을 정말 중요시한단다. 돈까스며 다른 외국의 음식들이 일본에서는 모조리 밥과 함께 하는 '반찬' 이 된 것은 이런 이유란다. 좋은 원산지의 쌀을 잘 지어 갓 먹는 것. 그것이 가장 좋은 음식이라는 것이다. 그런 부분을 읽을 때면 우리집 밥솥 생각이 나고, 빨리 밥솥을 새로 사야 하는데 생각이 들고, 잘 지은 밥을 갓 먹는 상상을 했다. 책의 표지처럼 좋은 명란젓 한 쪽만 있으면 밥 한 그릇 뚝딱 할 수 있을 것 같은 맛난 밥. 그런 밥 한 공기를 생각했다.

 

   "하지만 2개월 동안 먹어 치웠던 수많음 음식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그래서 지금도 수시로 생각나는 음식은 '밥'이다. 음식 좀 아는 체 폼 잡으려고, 혹은 대단히 형이상적인 기준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려는 의도가 아니다. 정말로 일본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하얀 쌀밥이다. 아마도 일본 좀 다녀 본 분이라면 대부분 동의하실 거다.

    일본의 밥이 맛있다는 사실이야 진작부터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는 길어야 일주일 정도에 불과한 단기여행이었기에 맛있는 집만 엄선해서 다녔고, 그러니 밥이 맛있는 거야 당연하다 여겼다. 하지만 일상적인 혹은 대중적인 수준에서까지 그러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아니, 한국인의 입장에서 솔직히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저희나 우리나 밥이 밥상의 중심인데, 이 밥에서 밀리다는 것은 크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단히 안타깝게도 다년간의 일본 여행과 두 달간의 체류 경험을 종합해 봤을 때, 일본의 밥은 확실히 우리보다 한 수 위에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 그렇다. 오래전부터 왜 그럴까 고민도 하고 확인도 해 봤다. 쌀이 다른가? 물이 다른가? 밥 짓는 기구나 솜씨가 좋은가?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봤다."

-p.318-319

 

    정말 황교익 추천사의 말처럼 이 책을 읽고 나니 우리가 먹는 우리 음식에도 여러 의문이 생겼다. 며칠 전에 부대찌개가 너무 먹고 싶어 놀부 부대찌개 매장에서 포장을 했다. 포장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생각했다. 그래 부대찌개도 미군이 들어와서 의정부에 어쩌고 저쩌고. 이런저런 역사가 있는데. 황교익은 추천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책을 읽는 내내 '한국 음식은...' 하는 물음이 돋았다. 박상현이 의도한 것이다. 책 안에서 그와 나는 일본음식을 먹으며 한국음식 이야기를 나눈다. 한국음식의 과거와 미래가 이 안에 있다." 이렇게 정갈하고 맛깔스런 표지에 흥미로운 이야기로 채운 '우리' 음식 이야기도 나왔으면 좋겠다. 그 책을 읽고나면 뭐를 먹던 간에 예사롭지 않겠지. 그러저나 밥솥! 너무 비싼 거 아닙니까? 우리의 흥청망청 생활비로는 엄두가 안난다!

 

   "입속에 들어간 밥은, 무르익은 봄날 벚꽃이 휘날리듯 산산이 흩어졌다. 막무가내로 흩어진 밥알은 형태가 온전하고 자기주장도 강해 꼭꼭 씹을 수밖에 없었다. 꼭꼭 씹으니 밥맛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향기롭고 달았다. 옅은 소금간이 밥에 생기를 더했다. 밥맛이 절정에 이를 즈음 이번에는 반찬이 가세했다. 밥과 반찬은 섞이면 섞일수록 맛이 깊어졌다. 그럴수록 턱을 더욱 부지런히 움직였다. 음식을 씹는다는 행위가 이토록 즐겁다는 사실을 대체 얼마 만에 느껴 보는 건가 싶었다. 오니기리 한 입, 바지락된장국 한 모금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허기나 달랠 요량이었으나 배가 부르도록 오니기리를 위장에 채워 넣었다."

p.158

 

 

,

 

    '2013년 11월의 우리, 김연수'라는 연두색 싸인이 있는 책. 다른 곳에서 먼저 읽었던 소설은 읽지 않았다. 깊은 밤 기린의 말, 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가지 즐거움. 면목동에 살 때 파주 회사까지 1시간 여를 전철을 타야 했다. 출근할 때 1시간, 퇴근할 때 1시간. 그 시간이 아까워 열심히 책을 읽었다. 물론 잠이 모자라 졸고,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하는 시간들이 더 많긴 했지만 그래도 책을 많이 읽었다. 책을 읽는 장소로 전철이 최고였다. 집중이 최고로 잘됐다. 응암동으로 이사를 하고 전철을 타는 시간이 10여 분으로 줄었다. 단편 하나를 읽기에도 짧은 시간이고, 금새 합정역에 도착하니 책 읽는 시간이 줄었다. 요즘 책이 잘 읽히지도 않고. 그래서 그런가. 내가 변한건가. 잘 읽히고 이야기가 궁금해 금새 페이지를 넘겼지만, 마음에 오래 남지는 않았다. 내가 변한건가.

 

 

 

,

2014 서재쌓기

from 기억의기억 2014. 1. 11. 13:16

치에코 씨의 소소한 행복 1, 2.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

그들에게 린디합을.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당신에게, 여행.

오므라이스 잼잼 1.

오므라이스 잼잼 2.

오므라이스 잼잼 3.


다른 길.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

서울을 먹다.

엄마, 일단 가고봅시다!

엄마, 결국은 해피엔딩이야.

 

하루키의 여행법.

청춘의 문장들+

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

새로운 오키나와 여행.

 

오므라이스 잼잼 4.

소년이 온다.

 

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

한낮에 뜬 달.

햇살이 비치는 언덕길.

남빛.

도쿄의 북카페.

잠깐 저기까지만.

 

마음이 풀리는 작은 여행.

내 누나.

꿈꾸는 하와이.

 

이 고도를 사랑한다.

가장 잔인한 달.

순간의 꽃.

 

도쿄 일상산책.

최초의 한입.

타이페이 일상산책.


소설가의 일.

이방인.

라틴아메리카 춤추듯 걷다.

 

이 별의 모든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백년식당.

토우의 집.

 


 

 

 

,

야만적인 앨리스씨

from 서재를쌓다 2013. 11. 30. 01:58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많은 아버지가 있고, 많은 어머니가 있다. 많은 아들이 있고, 많은 형제가 있다. 이 소설은 그 중 한 명의 아버지, 한 명의 어머니, 두 명의 아들, 한 형제의 이야기. '씨발'년인 어머니와 폭력을 방관하는 아버지를 부모로 둔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의 이야기다.

 

   처음엔 뭔가 싶었다. 잘 읽히지 않고 자주 책장이 덮혔다. 이런 식의 이야기 진행이 책장을 빠르게 넘기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황정은이 말하는 당신,이 누굴까 생각했다. 짧은 소설인데, 속도가 더뎠다. 그러다 마지막 장이 가까워지고, 마침내 책을 덮게 되었을 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마음에 남았다.

 

   황정은을 직접 본 적이 있다. 홍대에서 했던 작가와의 만남이었는데, 그 때 황정은이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대화에 신경을 많이 쓴다고. 잘 쓰고 싶어 오래 고심하고 쓴다고. 이번 작품에도 대화가 인상적이다. 부모의 폭력에 무자비하게 노출된 앨리시어와 동생의 대화인데, 이 대화가 거듭될수록 슬퍼진다. 특히 동생이 너무 가엾어진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는 슬픔에 가까운 것이다.

 

    소설은 고요하게 시작했다 고요하게 끝난다. 뭔가 커다란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한 건 주인공의 '행동'이 변화되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한차례의 냄새나는 하수가 동네를 휩쓸고 그렇게 소설은 끝난다. 앨리시어가 뭔가 행동해야 했어야 했는데. 책을 덮고 바로 든 생각이었는데, 그렇지 않아서 황정은의 소설 같기도 하다. 그렇지 않은 게 더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아쉽기도 하고 그렇다.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

 

(...) 차갑게 식은 몸으로 바닥에 눕는다. 꿈도 없이 짤막한 잠을 자고 새벽녘 정적 속에서 눈을 뜬다. 높다란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곧 날이 밝을 것이다. 앨리시어는 부은 손가락들을 가슴에 올리고 눈을 깜박인다.

눈을 뜨기 직전에 무슨 소리인가를 들었다고 생각한다.

퍽, 하고 눈꺼풀이 벌어지는 소리. 뼛속의 성장판이 끓는 소리. 그 소리와도 같은 소리.

목이 마르다.

p.148-149

 

    인터뷰를 읽었는데, 똑같은 문장으로 끝나는 세 편의 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두 편을 완성했는데, 그 중 한 편이 <야만적인 앨리스씨>라고. 쓰다보니 두번째 소설을 같은 문장으로 끝내지 못했다고 한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천천히 올 것이고, 그대와 나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

 

    휴대폰을 스피커에 연결하고 멜론의 플레이 리스트를 랜덤으로 선정하고 앉았다. 첫 곡은 내가 정한 곡. 오지은의 서울살이는. GMF에서 오지은이 이 노래를 부르다 울었단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쩐지 이 노래를 계속 듣게 된다. 그 다음으로 랜덤 재생된 곡이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여름부터 나는 질투에 빠져 있었다. 내가 못났다는 자괴감에 이어 너희들이 가진 모든 것들이 부러웠다. 내게 없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이 부러웠다. 못난 내 자신에 화도 났다. 술자리에서 여러 번 울었다. 울고 나면 창피했다. 내 질투심이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서른 네 살의 내가 너무 어른답지 못해서 두려웠다. 어느 날, 내 질투심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친구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며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더이상 남자들이 나를 봐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여자. 그런 여자를 위해 가짜 편지를 쓰는 남자. 여자는 남자의 애인이다. 여자는 점점 알지 못하는 상대의 편지에 빠져들고, 남자는 자신이 만들어 낸 그 남자를 질투하게 되는 이야기. 뒷이야기가 궁금해 당장 구입해서 읽었는데, 잘 모르겠다. 내겐 좀 어려웠다. 중간부터는 글자만 읽어나간 느낌이다.

 

    추워져서 다행이다. 그동안 영화를 그 전보다 많이 봤다. 하루종일 영화만 보라고 하면 볼 수 있을 정도다. 어제는 동대문 메가박스에 가서 세 편 연달아 하는 심야영화를 보려고 하다 잠이 많은 내가 자버릴 것 같아 안 갔다. 아이맥스관에서 <그래피티>를 보고, 간만에 상상마당에 가서 카세 료가 나오는 <사랑에 빠진 것처럼>도 봤다. 우디 앨런의 새 영화 <블루 재스민>도 봤다. 좋아하는 영화인데 여러 번 보고 싶어 DVD를 사 둔 <허니와 클로버>도 꺼내 봤다. <그래피티>를 보고 산드라 블록의 옛 영화들이 생각 나 <당신이 잠든 사이에>도 다시 봤다.

 

    <허니와 클로버>에서 충동적으로 바다로 떠난 아이들이 바다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졸업은 하지 않고 세계 각지를 떠도는 천재 모리타 선배가 소리친다. 내가 최고다. 그러자 예술대생 치고는 너무 성실하고 평범한 후드티의 남자 주인공 타케모토가 소리친다. 청춘이 최고다. 모리타 선배가 타케모토에게 말한다. 네가 말하니까 실감난다. 청춘이란 단어가. 모리타 선배는 천재 미술 소녀 하구에게 언젠가 이렇게 말한다. 너를 처음 봤을 때 생각했다고. 솔직하고 흔들림이 없구나.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게 청춘인 것 같다고. 솔직하고 흔들림이 없는 것. 카세 료, 마야마는 연상의 회사 상사를 짝사랑하고, 그런 마야마를 학교 동기 아유미가 좋아한다. 어느 날 아유미는 마야마를 향한 마음을 접으려고 노력한다. 마야마에게 차갑게 대한다. 마야마는 그런 아유미가 계속 신경이 쓰인다. 술을 깨려고 풀길을 함께 걷다가 아유미가 덜썩 주저 앉아 버린다. 취해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다. 아유미의 등뼈가 휘었다는 말을 한 적 있는 마야마가 자신의 등을 내준다. 마야마가 아유미를 업고 풀길을 걷는다. 아유미가 등 뒤에서 말한다. 마야마. 좋아해. 마야마. 많이 좋아해. 그 고백을 등 뒤로 묵묵히 듣고 있다 마야마가 말한다. 응. 고마워. 마야마는 자신의 짝사랑을 멈출 수 없다.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어느 날 아유미에게 고백한다. 내가 아는 한 아유미도 그럴 거다.

 

 

 

 

,

 

 

    추석 동안 나와 함께 한 책. 이번 추석에 이 책과 나의 궁합이 잘 맞았다. <눈의 여행자>를 읽고 눈이 내리는 소설이 좀더 보고 싶어서 읽은 책이다. 소설집인데, 표제작인 '대설주의보'에서 눈이 많이 내린다. 펑펑 내려서 대설주의보까지 내려지고, 강원도의 절에서 여자와 만나기로 했던 남자는 발이 묶인다. 인연이었던 남자와 여자가 긴 세월을 둘러 다시 시작하게 되는 이야기다. 소설집 중에서 이 소설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 특히 마지막 장면.

 

    갤로퍼는 유턴을 한 다음 곧 눈발 속으로 사라졌다. 윤수는 가방에서 모자를 꺼내 눌러쓰고 주차장을 모로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산문을 지나 계곡으로 들어갈수록 바람이 잦아들어 그다지 추운 느낌은 없었다. 길은 완만했으나 정강이까지 눈이 차올라 걸음이 더뎠다. 손전등을 빌려오지 않았더라면 사위조차 분간하기 어려웠으리라. 윤수는 해란과 백담사로 처음 소풍 왔던 날을 아득히 떠올리고 있었다. 돌아보니 그새 12년 전의 일이었다.

   어디까지 왔을까. 계곡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위에서 윤수는 발을 멈추고 캄캄한 눈 속을 노려보았다. 어디쯤일까. 멀리 솜뭉치 같은 부연 빛이 윤수의 눈에 빨려들어왔다. 벌써 백담사 가까이 온 것은 아닐 텐데. 실눈을 뜨고 재차 노려보니 그 빛은 이쪽을 향해 느리게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이 전조등 불빛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잠시 후였다.

   차가 다가올 때까지 윤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윽고 눈을 잔뜩 뒤집어쓴 알브이 차량이 체인을 쩔렁대며 그의 앞에 다가와 커다란 짐승처럼 멈춰 섰다.

   운전석에는 젊은 스님이 타고 있었다.

   이어 조수석의 문이 열리고 해란이 차에서 내렸다.

- 대설주의보, p.120-121

 

    저 문장으로 소설은 끝이다. 소설은 끝났지만, 해란과 윤수가 만나는 장면이 그려졌다. 두 사람이 눈 내리는 백담사로 들어서는 장면이 그려졌다. 오랫동안 끊어졌던 두 사람이 다시 이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지. 이 소설집의 내용이라고는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고, 두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고, 그리워하고, 잊고 살다가, 또 다시 만나고, 헤어지고. 술 마시고, 여행가고, 먹고, 또 마시고.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 요즘 세상에 있을까 싶은 정도로 올드한 말투를 구사하고. 한때 윤대녕의 소설이 재미없어지던 때가 있었다. 어떤 소설을 읽은 후였는데, 어떤 소설인지는 생각이 나질 않는다. 읽었던 소설을 다시 읽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이번 소설집도 특별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재밌었다.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푹 빠져서 읽었다.

 

    아, 소설도 소설이지만 해설을 쓴 신형철의 문장도 근사하다. 바로 이 문장. "아름다운 단편소설 한 편을 읽는 일. 시는 너무 짧고 장편소설은 너무 길다. 자기 문장을 갖고 있는 작가의 좋은 단편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시간은 음악처럼 흐르고 풍경은 회화처럼 번져갈 것이다. 다 읽고 나면, 기다린 그 사람이 온다. 윤대녕이면 좋을 것이다." 다 읽고 나면, 그 사람이 온다! 내게도 매년 이른 봄에 찾아가는 온천이 있었으면 좋겠다.

 

 

,

 

 

    결국 맥주를 사러 나갔다. Y씨에게 이 책들을 빌렸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처음 세 권의 책을 빌려 읽어서 그런지 마스다 미리 책은 계속 빌려 읽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사지 않고 기다렸다. 이번에 책을 대거 구입한 Y씨가 비닐도 뜯지 않은 이 책들을 빌려줬다. 오후 내내 잠에 취해 있었다. 영화가 보고 싶어서 무료영화를 찾아보다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를 틀어놓고 잠이 들었다. 그 전에는 Y언니가 추천한 <마호로역전번외지> 2회를 보다 중간중간 잠이 들었다. <아빠 어디가> 할 때쯤 잠에서 깨 추석을 앞둔 주말에 이게 뭔가,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들었다. <아빠 어디가>를 보고 마스다 미리 만화를 읽기 시작했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를 읽은 후에 맥주가 땡겼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편의점에 다녀왔다. 요즘 나의 홈메이드 안주는 번데기. 통조림 국물을 다 따라내고 물을 약간 넣어 끓인다. 마늘 다진 것과 청량고추를 넣고.

 

   신기했다. 세 권의 책을 두고 뭐부터 읽을까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싫은 사람>이 제일 괜찮고 격하게 공감이 된다는 얘기를 들어서 일단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를 읽었다. 그 다음으로 <아무래도 싫은 사람>을 읽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제일 기대한 <수짱의 연애>를 읽었다. 나중에 보니 신기하게도 이게 맞는 순서였다. 수짱의 나이순서대로였다. 오, 나 제법이다, 감탄했다. 읽으면서 맥주가 땡겼던 이유는 만화에서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나와서가 아니었다. 수짱은 맥주를 마시기 보다, 장을 보고, 목욕을 하고, 혼자 먹어도 어색하지 않은 체인점에서 끼니를 때우고, 차를 마신다. 그런데 맥주가 땡겼던 건 수짱이랑 나랑 너무 비슷해서. 일본의 한 만화가가 너무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 내가 이렇게 나이 들어가고 있어서. 이렇게 나이 들어가고 있는 사람이 나 혼자 만이 아니여서. 고맙고도 외로워서, 맥주가 필요했다.

 

    아, 수짱의 연애는 어떻게 되었을까. 너무 설레이게 끝내버렸어. 어떻게 된 건가. 여자친구가 있는 그 남자는 수짱을 계속 만났을까.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서른 일곱의 수짱은? 늘 고향 가고시마의 특산물을 택배로 보내고 전화통화로 결혼은 언제 할거야? 남자친구는 있니? 라고 스트레스를 주던 수짱의 엄마는 어느 날, 조카의 결혼식 때문에 수짱의 집에서 하룻밤 머문다. 수짱의 엄마는 수짱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러가지 일이 있었다면 어쩔 수 없지. 그걸로 된 거야. 너도 이제 서른여섯이니까. 슬슬 자신의 감을 믿을 나이가 됐지." 수짱! 응원합니다. 아, 맥주 다 마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