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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를린 일기
    서재를쌓다 2017. 3. 9. 23:13




       이 글은 밀크팬이 없어 양은냄비로 끓인 핸드메이드 밀크티를 마시며 쓰고 있다.


       베를린에 가볼까 했다. 그렇다면 관련된 책을 읽어야지, 하면서 검색을 했는데 이 책이 나왔다. 최민석 작가가 '고독한 도시' 베를린에 90일간 머물면서 쓴 일기다. 평에 엄청 웃기다는 얘기가 있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웃겼다. 어떤 페이지는 정말이지 너무 웃겨서 책을 덮고 소리내서 엄청 웃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무 웃겨서. 그리고 역시 사람은 일기를 써야 돼, 라는 결론을 내렸다. 최민석 작가도 와이파이가 잘 터지지 않는 고독한 도시 베를린에서 가을과 겨울을 보내면서 '한 번 써볼까' 하고 독자에게 선물받은 다이어리가 마침 있어 쓰기 시작한 일기다. 일기를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고,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하루도 빠짐없이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쓰다보니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처음엔 혼자였던 작가에게 꽤 많은 친구들이 생겼다. 고독한 도시 베를린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일기를 읽어보면 꽤 많은 일들을 했다. 이렇게 완성된 90일의 일기는 근사했다. 매일매일은 별 게 아닌데, 그 매일매일이 500여 페이지로 모이니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작가만의 근사한 어떤 것이 되었다. 나는 그 어떤 것이 부러워, 나의 일상도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500페이지쯤 모아보고 근사할 것이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베를린 일기 표지색을 닮은 대망의 2017년 스타벅스 다이어리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겨우 이틀치를 썼을 뿐이다. 젠장.


       나의 이 게으름은 "밥 먹고 바로 자면 소 된다"의 소만이 이해할 것이다.


       아, 버섯머리, 택시국제호구 등등의 이야기는 정말 웃기다. 버섯머리 일기가 끝나고 문제의 그 버섯머리 사진이 나올 때는 정말 책을 덮고 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흐흐흐흐흐흐-



       포스트잇,


       고독은 현재 진행형일 때는 처참하지만, 과거 완료형일 때는 낭만적일 수 있다.

       자발적인 이 일기가 그 낭만의 증거가 되길 바란다.

       일곱 번째 날이었다.

    - p. 42


       생각보다 체코인의 생활이 풍요롭지 않은 것 같다. 숙소를 제외한 물가가 예상보다 훨씬 낮다. 나보다 나이가 약간 많아 보이는 한 남자가 주변을 살피다, 거리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털어 주머니에 넣었다. 서울에서 평소에 치르는 값의 반, 혹은 1/3을 치르고 먹고 마셨다.

       어쩌면 나는 이곳에서 부자일지도 모르겠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순간 "왜 독일은 맥주가 싸느냐?"라는 내 질문에 대한 학과장의 대답이 떠올랐다. "맥줏값이 비싸지면,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요!" 노동자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땀의 가치가 다이아몬드보다 빛난다는 전설이 이 세상에도 통용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프라하는 살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흔한 수사지만, 슬프도록 아름다운 도시다.

       하루를 더 묵기로 했다.

       열여섯 번째 날이다.

    - p. 85


       유럽인들이 왜 눈인사를 하고, 즉각 동거를 하고, 시와 소설을 들고 다니고, 사소한 모임에 모이는지 알겠다. 이들은 춥고 외로운 것이다.

    - p. 97


      오늘은 학원을 개강한 이틀째다.

      나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친구들과 저녁을 함께 했다. 모두가 실업자였다.

      그들은 모두 어렸고, 모두 가난했다.

      나는 이차와 삼차를 샀고, 전철이 끊겨 택시를 타고 왔다.

      택시비는 서울에서 수원까지 가는 비용 이상이 나왔지만 나는 친구를 사그ㅟ었다.

      모두가 나를 좋아했다.

      Tonight everyone liked me.

      구것이 전부다.

    - p. 104


       지난 한 달간 나는 生에서 人間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아직 생의 종착역까지는 많이 남았다. 내 열차가 너무 많은 승객들로 대화조차 불가능한 것은 곤란하지만, 아무 승객도 없이 그저 운행 일정을 지키기 위해 달리는 열차가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종착역은 같지 않더라도,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한 명의 승객이 있었으면 좋겠다.

       젠장, 이곳도 가을이다.

       서른한 번째 밤이다.

    - p. 162


      살면서 여러 번 느꼈지만 영어를 전혀 못 하면 인생의 범위는 60억분의 5천만, 즉 120분의 1로 줄어든다. 달리 말해 전 세계의 범위가 1이라면, 인생을 살며 분노를 느끼든, 좌절을 겪든, 정부에 불만이 쌓이든, 혹은 주머니에 돈이 쌓이든 간에 상관없이, 그저 120분의 1의 세계에만 머물러야 한다. 하지만 영어를 그럭저럭 구사하면 자신이 머무를 수 있는 세계의 범위는 2분의 1로 확장된다. 스페인어까지 하면 5분의 3, 그 외 불어, 독어, 이태리어까지 하면 자기 세계의 범위는 점점 더 넓어지는 셈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은 고단한 이방인의 삶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애석하지만 이것이 현실이기에, 다시 영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해 볼까 생각 중이다. 그다음에 어중간하게 끝내 버린 일본어를 다시 해 볼까 싶다. 프랑스엔 별 관심이 없으니 통과하고, 이태리어와 독어는 (양국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다음이다(냉정하게 말하지만, 그만큼 쓸 일이 없는 것이다).

      두번째 일기장을 다 썼다.

    - p. 251-252


       확실히 동독 출신 독일인들은 세속적인 욕심과는 거리가 멀다는 인상을 준다(한국 나이로 예순인 그는 유행이 지난 청바지를 매일 입고, 배낭을 직접 메고 다니며, 학교에서 독일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지낸다). 그러면서 그는 "연금이 나올 때까지 계속 일해야 해" 하며, 내 식사 값까지 치르고 연구실로 갔다.

       (...)

       돌아오는 길에 캠퍼스 한구석에 대나무가 심겨 있었는데, 그는 잠시 멈추더니 "으음, 한국 냄새"하며 공기 중에 떠다니는 대나무 향을 흠뻑 마셨다.

    - p. 281


       나는 이제 무엇에도 크게 들뜨지 않거나, 무엇에도 심드렁하거나, 무엇이든 이미 최상의 경험을 해 봤을 나이에 도달했는지 모른다. 혹, 그런 나이가 아니라면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겪고 즐기고, 고통받았는지 모르겠다. 그 탓에 크게 화를 내거나, 크게 실망할 일은 없지만, 이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 p. 302


      돌이켜 보니, 일기를 쓰는 시간이 큰 힘이 됐던 것 같다.

      돌아갈 날까지 일기를 계속 쓸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실수하면 인정하고, 잘못을 저지르면 사과하고, 좋은 것이 있으면 감사하고, 남은 시간을 소중히 쓰기로 했다.

    - p. 319


       포르토는 실로 마음에 들었다. 베니스처럼 아름답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친절하고 여유가 넘쳤으며, 적당한 자존심과 적당한 관용을 선보였다. 거리엔 따뜻한 햇살이 넘실거렸으며, 믿기 어렵게도 나는 1월 1일에 노천카페에 앉아 몇 시간 동안 식사를 했다. 많은 시민들이 시 당국이 설치한 의자에 앉아 햇살을 쬐고 있었다. 아마 훗날 내가 불순한 예술적 반역 행위를 저질러, 모국의 정부로부터 추방을 당한다면 그때 나는 포르투갈의 포르토를 자발적 유배지로 선택할 것이다. 사람들과 풍경과, 바다와 강과, 건물의 적당한 낡음과 거리의 적당한 어지러움이 내 마음을 활짝 열고 들어왔다. 

    - p. 426-427


       어젯밤 택시 기사에게 요금을 두 배로 지불한 것 빼고는 모든 것이 순조롭다(역시, 유럽은 방심할 수 없는 곳이다. 그래도 나폴리나 상하이만큼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 p. 450


       많은 사람을 만났고, 해일처럼 그 만남들이 모두 지나가니, 결국 비수기의 해변처럼 쓸쓸하고 차가운 일상만이 남았다. 다시 할 일은 없어졌고, 어쩌면 1년 내내 이런 날들이 이어질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인가'하는 상대성이지만, 크게 보자면 지금 맞은 한 해가 여생과 별 차이 없을 지도 모른다.

    - p. 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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