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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 산책
    서재를쌓다 2020. 11. 7. 06:47

     

        마음을 움직이는 구절이 시시때때로 나타났으나 포스트잇을 가지고 다니지 못해 표시하질 못했다. 집에 가서 얼른 붙여둬야지 생각했는데 막상 붙이려고 하면 그 구절들을 찾질 못하겠는 거다. 지난 남해여행에 가져갔다 앞부분만 살짝 읽고 책장에 꽂아두었는데 어느 시인이 SNS에 무척 좋다는 글을 남긴 걸 보고 책장에서 꺼내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짤막한 글들이라 읽기 좋았는데, 한참을 읽다 생각했다. 시와 산책에 대한 이야기가 많구나. 제목이 시와 산책인 줄도 모르고. 이 책을 읽는동안 <히든싱어> 이소라편을 봤는데 예능 보면서 그렇게 많이 운 적이 없다. 참가자들은 이소라에게 눈물섞인 진심을 전했고 이소라는 이런 마음을 받아본 지 무척 오래되었다고, 노래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이 내게 어떤 힘이 되었다. 누구도 아닌 이소라 언니가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되겠다고 말하다니. 가을에 듣는 이소라 노래 같은 책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꺼내 읽길 잘했다.

     

     

       늦가을부터 과일 트럭이 보이지 않았다. 추위 탓인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두 계절을 보내고 다시 여름이 돌아온 어느 날, 과일 아저씨의 트럭이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멀리서부터 뛰어가, 그새 더 야위고 그을린 얼굴에게 말했다.

       잘 지내셨어요? 그동안 안 보이셔서...

       네, 좀 아파서...

       우리는 반갑게 웃었지만 둘 다 말끝을 흐렸다. 진짜 안부가 말줄임표에 숨어 저녁 어스름에 묻혔다. 돌아서서 손님에게 다가가는 아저씨는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내가 살 수 있는 것은 5000원치의 참외뿐이었다. 아저씨가 봉지 한 장을 털어 공기를 넣었을 때, 다른 손님이 다가와 역시 참외를 달라고 했다. 아저씨가 봉지에 참외 한 소쿠리를 쓸어 넣고 그 손님에게 건넸을 때 나는 약간 의아했다. 내가 먼저 청했으니 당연히 내 것인 줄 알았던 것이다. 손님이 등을 돌려 멀어지자 아저씨는 쌓아둔 상자 쪽으로 절룩이며 걸어갔다. 상자에서 참외를 하나씩 꺼내 어둑한 알전구 밑에서 꼼꼼히 돌려 보고는 봉지에 넣었다. 여섯 개를 넣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러고는 내게 내밀며 말했다. "좋은 것만 줬어요."

        알이 더 실하고 먼지가 덜 쌓인 것을 주려고 일부러 수고하는 마음. 그것을 씹어 먹으며 허기진 날들을 순하게 보냈다.

    - 5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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