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밤의 홍수

from 모퉁이다방 2009. 5. 24. 16:41
    어제는 하루종일 친구 집에서 친구가 해 주는 밥을 먹고, 티비를 보면서 뒹굴었다. 오전에 동생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언니, 노무현이 자살했대. 친구와 나는 말도 안 된다면서 티비를 틀었는데, 뉴스에서 앵커가 이상한 말을 하고 있었다. 노무현이 자살을 했는데, 자살인지 실족사인지, 그리고 확실히 사망한 것인지 확인은 안 되고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앵커 밑에 자막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이라고 커다랗게 씌여져 있었다. 우리는 무슨 뉴스를 저렇게 보도하느냐고 투덜되었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밤 늦게야 친구집을 나섰다. 지하철에서 지금 읽고 있는 책 <파크 라이프>를 펼쳤다. 문장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계속 어떤 한 문장만 떠올랐다. '책을 읽을 수도, 글도 쓸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도 쓸 수가 없다. 건대 입구에서 7호선으로 갈아탔다. 집에 도착하니 11시 30분이었다.

    얼마 전부터 욕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조금씩 새어나왔다. 세탁기랑 연결해 놓은 수도꼭지인데,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제는 그 물소리가 내내 신경이 쓰였다. 유독 다른 날보다 더 많이 새고 있는 거 같아서, 세탁기와 연결되어 있는 호수를 빼어봤는데 갑자기 물이 콸콸 쏟아졌다. 수도꼭지를 활짝 다 열어놓았을 때보다 더 많은 물이 콸콸 쏟아졌다. 수도를 잠그려고 보는데, 그게 다 잠근 거였다. 다른 방향으로 수도꼭지를 돌리니 그것보다 더 많이 물이 폭포처럼 콸콸 쏟아졌다. 조그만 욕실 바닥에 금새 물이 가득 찼다. 세탁기 호수로 다시 막아보려는데 물줄기가 어찌나 센지 세워져 있던 목욕용품들이 다 쓰러지고, 화장지도 물에 흥건해지고, 천장에까지 물이 튀었다. 내 옷은 이미 물에 흠뻑 다 젖은 상태. 그야말로 대홍수. 잠그지도, 멈추지도 못하는 상태. 순간, 눈물이 났다. 12시가 다 된 이 밤에 그야말로 수도가 터진 것이다. 폭포처럼 쉴 새 없이. 당황해서 동생들한테 전화를 걸었지만, 둘 다 너무 멀리 있었다. 바닥에 물이 금새 차 부엌까지 넘어올 것 같았다. 세숫대야로 물을 퍼서 변기에 부었다. 물 쏟아지는 소리에 귀가 찢어질 것 같았다.

    울먹거리면서 내가 좋아하지 않는, 아니 싫어하는 주인 아줌마에게 전화를 했다. 아줌마가 울먹이는 내 소리를 듣더니 진정하라며 일단 내려가서 계량기를 끈다고 했다. 아줌마가 계량기를 끄셨는지 물줄기가 조금 잦아들었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더니, 괜찮으냐고, 물이 이제 안 나오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줄어들었다고, 밤늦게 죄송하다고, 물이 너무 한꺼번에 많이 나와서 당황했다고 말씀드렸다. 아줌마는 괜찮다고, 어딘가에 연락을 해 뒀으니 사람이 곧 올거라고, 걱정말라고 하셨다. 평소에 내가 알던 신경질적인 주인 아줌마가 아니었다. 주인 아저씨가 오셔서 이리저리 보더니 막혔던 하수구를 뚫어주셨고, 아줌마는 내 옷이 다 젖어있는 걸 보더니 옷을 얼른 갈아입으라고 해 주셨다. 자다가 일어나서 전화를 받고 달려오신 비몽사몽의 수리공 아저씨는 수도꼭지를 새로 바꿔주셨다. 그러고 났더니 정말 거짓말처럼 물이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더라.

    아줌마는 물이 계속 샜냐면서,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바로 말하라고, 그게 나중에 문제가 커진다고 다정하게 말해주고 올라가셨다. 나는 평소의 아줌마랑 참 다르구나, 생각하며 뒷정리를 하고 이불을 깔고 누웠다. 그런데 그 때부터 다시 눈물이 났다. 처음엔 그냥 눈물이 조금씩 흐르기만 했는데, 나중에는 울음이 터져 버렸다. 그 수도처럼. 나는 엉엉 소리내서 울기까지 했다. 새벽 1시였다. 불을 끄고, 티비를 껐다. 그러다 다시 떠올린 그의 문장, '책을 읽을 수도, 글도 쓸 수가 없다'. 그렇게 울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 곳에서는 마음의 짐 모두 내려놓으시고, 편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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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달게 늦잠을 잤고, 꿈도 꿨다. 한옥집으로 이사하는 꿈이었는데, 그 한옥집이 근사했다. 국민학교 친구들도 만났다. 그 한옥집은 지금 사는 곳보다 꽤 먼 곳에 있었고, 친구들은 먼저 떠나는 바람에 나는 지리로 모르는 그 곳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면서 서성거렸지만, 깨어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뭐 괜찮았던 꿈이었던 것 같다. 꿈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이야기를 해버리거나, 어딘가에 끄적이고 나면 이상해 보이는 이야기니까. 고 느낌이 중요한 거니까. 괜찮은 꿈이었다. 최근에 내 주위에 꿈을 꾸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그 중 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해줬다. 꿈을 꾸면 좀 더 즐거울텐데요. 꿈을 꾸면 꿈꿀 수 있으니까. 내 생각은 그렇다.

    지난 책과 영화 이야기들. 그냥 보고 흘려버린 것들이 많아서, 간단하게 남겨두려고. 일요일 밤이고 하고. 반짝이 옷을 입고 찰랑거리는 파마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김연아가 이쁘기도 하고. 내일은 월요일이기도 하고. ㅠ 그래도 다음주는 4일이기도 하고.


숏컷
레이몬드 카버 지음, 안종설 옮김/집사재

4월 초의 일. 갑자기 카버의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조금 쓸쓸한 이야기들이 읽고 싶어졌다. 읽고 난 뒤에는 센 술 한 잔을 단숨에 들이킨 것처럼 몸 속 어느 구석이 따스해지는. 그래서 책장에서 아직 다 읽지 못한 카버의 책 중에서 골라냈다. 난 분명히 이 책을 읽다 말았었는데, 그래서 앞 부분의 단편들의 내용들만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신기했다. 다 읽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지난 번에도 이런 기분으로 이 책을 끝까지 읽었다는 걸. 소설을 읽는 내내 알코올 중독 소설가 카버가 따라주는 독한 술을 한 잔, 두 잔 받아마셔서 그런가. 또 몇 년 뒤에 이 책을 읽다 만 것마냥 집어들게 될까. 신기하게도 읽은 지 한 달이 지나지도 않은 지금. 책의 앞 부분 주인공들밖에 기억이 안 난다. 그 내용들만 또렷하게 기억나는 거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작품들에 대해 코멘트한 내용들도 고 앞 부분만 또렷하다. 신기한 일이지.



3월의 일. 원작소설보다 극적인 면을 '헐리웃스럽게' 부각시킨 영화. 뭐. 나는 재밌었다. 나중에 'W'에서 이 영화에 나온 아역배우들의 실생활을 취재해 보여줬는데, 그 때 좀 그랬다. 영화가 허상인 줄은 진작에 알았지만. 씁쓸했다.


3월의 일. 이 영화에선 브래드 피트랑 프랜시스 맥도먼드만 생각났다. 세상에 존 말코비치도 생각 안 난다니까. 둘의 콤비가 어찌나 웃기던지. 브래드 피트는 이 영화에서 귀여워 죽겠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또 펼쳐놓아주시니. 그런데 또 끝나고 보면 이게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지. 아, 자꾸 브래드 피트가 귀에 이어폰 꼽고 웨이브 추던 장면이 생각난다. 귀여워, 귀여워!


화차
미야베 미유키 지음, 박영난 옮김/시아출판사

친절한 J씨는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 갔지만 없었다,는 글을 보고 이 책을 가져다 주었다. 게다가 나더러 이 책을 가져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아, 친절한 J씨.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나는 미야베 미유키에 푹 빠졌다. 흠. 그리고 그 관심이 고스란히 일본 추리소설에 옮겨갔다. <화차>는 슬프고도 따스한 소설이었다. 꽤 오래전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소설인데, 지금의 우리 사회에 대입해봐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설정이다. 결국 개인의 파산은 개인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책임이 크다는 이야기. 책장을 펼치면 단숨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가서 읽는 재미가 있다. 지하철에서 잠깐 읽었는데 새끼 손가락 손톱 길이만큼 읽어버릴 정도. 이 책은 정말 강추다. 엔딩이 인상적이다. 이야기는 끝났는데도, 현실에서 이 이야기가 계속되는 것같은 느낌이 드는 엔딩이다. 예전에 신경숙이 말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서울 땅, 한국 땅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 같다고 말한. 그러니까 힘을 내어서,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씩씩하고, 행복하게 살아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딱 고 느낌. '좋은' 소설이다.


쓸쓸한 사냥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북스피어

그리하여 시작된 나의 미야베 여사를 향한 팬심. 도서관에 가서 골라온 책이다. 원래 친절한 J씨가 골라준 세 가지 책이 있었는데, 도서관에 그 책들이 다 없어서, 이 책으로. 단편집인데, <화차>만 못하지만, 재밌다. 헌책방 주인 할아버지와 그의 손자가 등장하는 연작단편집이다. 역시 따스하고, 재밌다. 할아버지 손자 콤비 덕분에. 마지막 단편 '쓸쓸한 사냥꾼' 실종된 미스터리 작가의 미완성 소설을 누군가 현실에서 재현하겠다는 메시지가 오면서 시작된다. 예상대로 미완의 소설 내용은 연쇄 살인 사건. 이 단편이 <모방범>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방범>을 찾아 도서관에 갔지만, 역시 인기있는 미야베 여사의 책은 대출 중이시다. 대신 <이유>를 빌려왔다. 아, 여름까지는 미야베 여사에 빠질 수 있을 듯하다. 게다가 아는 동생에게서 <백야행>이 굉장히 재밌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미야베 여사 소설 읽다 슬쩍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로 빠져보아야지. 근데 정말 침대 위에서 그 자세 그대로 저녁에서 새벽까지 <백야행> 읽은 거야? 그 정도로 재밌었던 거야?


3월의 일. 시사회로 본 영화. 그냥 예쁜 영화 본다는 생각으로 갔다. 아무 생각없이 보면 좋은 영화. 앤 해세웨이가 예쁘게 나온다. 케이블에서 마주치면 딱 좋을 영화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빔 벤더스

4월의 일.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극장에서 보면서 이 영화를 집에서 음 봤던 때가 떠올랐다. 여름이었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니다, 시원한 여름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는 말끔하게 샤워를 마치고창문을 활짝 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이 영화를 봤다. 어떤 노래는 너무 슬퍼 눈물이 절로 났다. 극장에서는 내가 못 본 부분들이 마지막에 이어 나왔다. 카네기 홀에서 공연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그리고 왠지 모르게 제천에서의 밤이 생각났다. 언니와 함께 묶었던 모텔, 아름다웠던 선율의 사노바, 밤까지 이어졌던 후끈했던 더위, 그리고 부채질을 하며 봤던 호수가의 영화, 샤워하고 걸어가서 본 3편의 심야 영화. 결국 3편 다 못 봤지만. 그 날이 그리웠다.



4월의 일. 이 영화는 감독 때문에 본 영화였는데. 그리고 그 날은 좀 가볍고 즐거운 영화가 보고 싶었기에. 망했지. 뭐. 보다가 간만에 극장에서 잤다.



4월의 일.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보고 잔뜩 기대했다가 (난 숫자에 관련된 영화면 일단 좋다!), 쓰레기같은 영화라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별 기대없이 본 영화. 재밌었다. 제일 인상깊었던 장면은 마지막 장면. 이걸 말하면 스포일러가 될 거니깐. 도미노마냥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이란. 영화는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안 들었던 여자 캐릭터. 왜 맨날 그런 고집쟁이 보조적인 여자 캐릭터의 몫이란 말인가.      



4월의 일. 이 제목 짓는 센스하고는. 원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제목을 요딴 식으로 바꾼거야. 쯧쯧쯧. 일단 아름다운 풍광. 아름다운 배우들. 페넬로페 크루즈의 표독스런 연기. 스칼렛 요한슨의 나들이 옷은 정말 눈부셨다는. 비키 역의 레베카 홀에게도 반했다. 그리고 감미로운 음악들. 바르셀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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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월요일은 끔찍하다. 말할 필요도 없는 소심한 생각들이 내 몸 가득 꽉 차는 요일. 사과를 가로로 반으로 자르면 별 모양이 나온다는데(아직 확인해보진 못했음), 나를 가로로 반으로 자르면 소심이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찍혀 나올 게 분명하다. 이런. 아무튼. 월요일은 끔찍하다. 물론 화요일도, 수요일도, 목요일도, 심지어 금요일도 끔찍할 때가 있다. 그래도 오늘은 비님이 와 주었으니 좀 괜찮았지. 덕분에 커피맛이 맛나서 자판기 커피 2잔에, 원두커피 1잔을 마셨다. 40% 할인하는 쌀국수 집에 들어가 따끈한 국물도 마셨다. 교보에 들러 만화책 한 권과 EBS 교재도 한 권 샀다. 내일은 괜찮을 거야, 생각하면서. 물론 내일도 괜찮지는 않겠지만. 화요일이잖아.

    그래서 들춰보는 지난 주의 사진들. 물론 월요일의 사진은 없다. 모든 월요일은 끔찍하므로. 즐거웠던 요일은 수요일부터다. 당연한 일이지.


    수요일은 브로콜리 공연 보러 간 날. 늦은 아홉시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친구랑 튀김집에 들러서 바삭바삭한 튀김과 함께 생맥주 2잔씩을 해치웠다. 이 튀김집 강추. 다음 날 생각나서 또 갔다. 그래도 맛있더라. 어쩜 튀김이 이렇게 바삭바삭하지? 생맥주 값도 착하다.



   4월에만 브로콜리 공연을 두 번 갔다. 이상하다. 앉아있을 때는 그냥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일어나고 나면 그때부터 마음이 아득해진다. 자꾸 생각나고. 오늘 데모도 신청했다. 이번 주에 도착할 거다. 신난다. '잔인한 사월'이 정말 마음에 든다. 아직 앨범도 안 나왔는데, 멜로디를 흥얼거릴 수 있다. :O



    금요일에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봤다. 원래는 다른 영화를 보러 간 거였는데, 시간이 안 맞아서. 우리가 좋아하는 스폰지 카페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스폰지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세상에. 저기서 앉아서 수다 떤다고 영화 앞 부분도 놓쳤다. 스폰지에 있던 <다카페 일기> 책을 이 날 봤는데, 완전히 반해버렸다. 위시리스트 1순위에 올려뒀다. 꼭 살 거다. 사랑스런 사진들과 의미 있는 한 줄의 메시지.


 

스폰지 카페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잡지 광고인 듯 한데, 마음에 들었다.

더 좋은 일.

더 좋은 일이 있습니까?
매일 집과 직장을 오고 가며
마음도 몸도 피곤할 때
나는 이런 상상을 떠올립니다.

'이번 휴가는 2박 3일의
해외여행을 떠나는 거야.
누가 말려도 이번에는 반드시.
하지만 어디가 좋을까
가까운 도시
자극적인 도시, 음...
그래, 일본은 어떨까?'
라는 상상을...

이런 상상을 하면서
또 하루를 열심히 삽니다
그리고 여전히 여행은 가지 못한 채
시간을 흘러 버립니다

하지만 나는 행복합니다.



   토요일은 정말 신난 날. 고장난 엠피쓰리 플레이어를 고쳤고(양쪽으로 음악이 들리니 귀가 '뚫어펑'처럼 뻥 뚫리는 기분), 헌혈도 했고, 영화도 봤고(그래도 '더블 스파이' 너무 했어. 완전 재미없었음! -_-), 많이 걸었고, 햇살이 좋았고, 저녁에는 맥주랑 막걸리를 마셨다(헌혈한 날 술 마심 안 되는데. 멍청이). 아니다, 막걸리 전에는 동동주였다. 그러니까 그날 통닭에 맥주를 마시고, 동동주와 막걸리에 김치전을 먹었다. 참 많이도 먹었지. 오랜만에 정말 걸쭉하게 취했다. 그래서 어떤 노래를 듣고는 어떤 생각들이 자꾸 떠올랐다. 문자도 보냈지. 이건 좋은 노래일 수도, 나쁜 노래일 수도 있어,로 시작하는 문자였다. 사실 그 날 아침 참 기분 좋은 꿈을 꿨는데(난 꿈에 집착하는 인간이다), 막걸리에 취한 밤에 생각해보니 그 꿈이 좋은 꿈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제는 그 꿈이 예전처럼 나쁜 꿈은 될 수 없다는 것. 그러니까 나 이제 다 컸다. 그러니까 그런 꿈 이제는 가끔 꾸고 싶다.

   이렇게 저번 주는 끝. 이번 주도 수요일부터 좋아질라나? 그렇다면 빨리 수요일이 왔음 좋겠다. 오늘은 몸상태가 완전 엉망이다. 빨리 '놀러와' 보고 자야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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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집 안에서 뒹구는 걸 좋아하는 나지만,  저번주 토요일은 도저히 집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날씨 때문에. 그런 날씨에 방 안에 처박혀 있으면 바보라는 생각밖에. 그래서 갔다. 남산에. 초여름이 되면 남산에 가자,고 얼마나 노래를 불렀던가. 동대입구에서 친구랑 만나 냉면집에 들어가 왕만두랑 회냉면을 맛나게 먹고 (이 집 왕만두 맛은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었다는. 냉면도. 요즘 맛있는 음식 먹으면 그렇게 신날 수가 없다. 흑흑.) 서울타워를 향해 걸었다. 사람들이 어찌나 많던지. 길가에 봄꽃인지, 사람꽃인지.

   오늘 아침, 라디오에서 황정민은 '지난 토요일에 남산에 갔어요. 사람이 어찌나 많던지요' 라는 문자 메시지를 소개해줬다. 잠결에 그걸 누워서 듣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는데, 황정민이 그런다. '저도 그 때 남산 갔었어요. 원래 한적한 게 매력인 곳인데, 사람 엄청 많더라구요.' 헉. 생각해보니, 막내동생도 그 날 남산에 갔다. 너도 나도 남산 생각이 나던 토요일이었구나. 그러니 그렇게 사람이 많았지. 특히 연인들. 여자들은 죄다 높은 구두를 신고 내 앞에서 '예쁘게' 남산을 오르더라. 

    아. 원래 핸드폰이 뭐 때문인지 몰라도 컴퓨터랑 연결이 안 되었는데, 이번에 갑자기 연결이 되더라. 그래서 핸드폰 사진도 올릴 수 있다. 그 날은 카메라를 안 가져가서 핸드폰으로 풍경들을 찍었다. 그렇게라도 찍을 수 밖에 없었다. 꽃들이 너무나 고왔으므로. 그리고 이 꽃들이 이 달 안에 다 질 것이므로.




    이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국립극장에 들러서는 자판기 커피도 한 잔 했다. 벤치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바람이 스르르 불더라. 정말 그대로 누워서 낮잠이라도 자면 싶을 정도로 시원했던 바람. 해가 길어져서 늦게 출발했는데도 쨍쨍했다. 덕분에 벚꽃이랑 진달래랑 눈부시게 빛나고.




    남산 타워랑 팔각정에 사람들이 얼마나 바글바글하던지. 날이 어두워지면 한산해지겠거니 생각했는데, 이게 웬 걸. 더 많아지더라. 다들 삼삼오오 짝지어서 맥주를 마시고, 커피를 마시고, 염장질도 하고. 우리도 그 사이에 끼어서 맥주를 마셨다. 냉면집에서 남겨서 싸온 만두도 먹고 (심지어 식어도 맛있다), 맥주도 마시고, 언덕길에서 파는 오징어도 푹푹 찢어 먹고, 또 맥주도 마시고, 짭잘한 알땅콩도 먹고, 또 맥주도 마셨다. 화장실이고 편의점이고 한참을 줄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도, 사람이 많은 건 싫어하는데도 좋더라. 바람도 좋고, 꽃들도 좋고, 기분도 좋고. 


                                                                     그러니까,


                                        이랬던 남산이,



                                                                        이렇게 변해갈 동안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내려와서 또 맥주를 마시고, 청계천을 걸었고. 버스를 타고 내려오기 전, 친구가 화장실을 간 사이에 저 야경들을 바라보는 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시간에도 내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 중에 분명히 우리가 아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아니면 나중에 알게 될 사람이 있을 거라고. 언젠가 오늘과 비슷한 바람이 불어오고, 꽃들이 코 앞에서 팔랑거리면, 그 사람도 나도 오늘이 생각 날 거라고.

    그러면 그 사람이 그러겠지? 2009년 봄에 남산에 간 적이 있었는데, 사람이 엄청 많았어요. 화장실 가는 데만 한참을 걸렸지 뭐예요. 커플들이 바글바글 으. 그럼 내가 그러겠지? 저두요. 맥주 산다고 편의점에서 한참을 줄을 섰다니까요. 그러면 그 사람이, 서울타워 기둥에 레이저로 불쇼같은 것도 했었는데? (근데 이건 주말마다 하는건가?) 그러면 나는, 맞아요. 맞아. 올라가는 언덕배기에 아줌마들이 쥐포랑 오징어도 팔았는데, 냄새가 완전 좋아서 사 먹었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과 나는 같은 날 같은 장소에 있었던 것이고, 우리는 같은 기억을 가진 것이고, 같은 바람을 들이킨 것이고, 같은 꽃을 본 것이고. 사는 게 영화나 드라마라면, 그걸 누군가 찍어 니네가 그 때 이렇게 스쳐 지나갔었어, 보여줄텐데. 꼭 그 사람이 남자가 아니더라도, 여자라도 좋겠다아, 라는 생각.




                                           이건 인증샷. 남산에 올라갔으니깐 서울타워를 찍어야지.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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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맥주

from 모퉁이다방 2009. 4. 7. 23:55



맥주도 체할 때가 있다. 나랑 맞지 않는 사람과의 술자리에선, 그렇게 좋아하는 술도 이제 그만, 마시고 그냥 집에 가고 싶어진다. 역시 무얼 마시느냐 보다는, 누구랑 마시느냐가 제일 중요하다. 3월에도 맥주를 많이 마셨다. 혼자 마시는 날은 줄고, 함께 마시는 날이 늘었다. H씨와 나는 일이 끝나면 배회하다 자주 홍대로 가서 비닐의 작은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비닐은 술과 음악이 있는 곳이니, 거기는 천국이다. 처음에는 주로 칵테일을 시켰다. 나는 진토닉과 보드카토닉을 마셨다. H씨는 달달하고 알콜이 적은 칵테일을 마셨다. 그런 칵테일들은 이름도 예쁘다. 색깔도. 그리고 우리는 일어나기가 싫어 맥주를 한 잔씩 더 마셨다. 어떤 날은 바깥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메리진도 만났다. 팔짝팔짝 뛰며 아는 척을 하며, 사인이라도 받고 싶었지만, 소심한 나는 가만히 앉아 그저 그를 염탐하며, 맥주만 홀짝거렸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공연을 본 날도 우리는 비닐에 갔다. 그 날은 J씨도 함께였다. 우린 2시간 여를 쌀쌀한 날씨 속에서 오돌오돌떠면서, 토스트로 저녁을 때우고 줄을 서 앞자리를 사수했다. 그리고 1시간 여의 공연을 보고나니 10시. 빨리 벌컥대며 맥주를 마시고 싶은 마음에 그 먼 거리를 뛰었다. 중간에 이해영 감독도 만났다. 물론 만났다,기보다는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헉헉대며 뛰는데, TV에서 (난 EBS 시네마 천국의 당신들의 수다를 사랑했다우), 기사에서 봤던 사람이 스윽 스쳐 지나가자 다른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을 지도 모를, 그를 봤다는 생각에 우리는 여고생마냥 깔깔거렸다. 그리고 뛰었지. 지하철 끊기기 전에 맥주를 한 잔이라도 더 마시기 위해서. 그리고, 그 밤 나는 지하철이 건대에서 끊겨서 귀찮게 버스로 갈아타서 집에 도착했지만, 행복했다. 입 속에선 계속 브로콜리의 음악들이 맴돌고, 귀에 꼽은 엠피쓰리에는 그들의 음악이 들리고, 아직 알딸딸한 술 기운이 남아 있고. 매일, 오늘만 같아라, 생각했다.

그리고  크라제 버거. 친구와 나는 홍대역에서 만나 비닐을 가기 위해 이동하다, 비닐 건너편에 크라제 버거를 발견했다. 나는 어느 블로그에서 봤다고, 우리도 그들처럼 감자튀김에 맥주를 먹으러 가보자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본 블로그의 메뉴와 똑같은 메뉴를 시켜 먹었다. 그게 세트 메뉴로 있더라고. 칠리 어쩌고저쩌고 감자튀김이랑 맥주 두 잔. 크라제 버거의 식기들은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모조리 탐이 났다. 그 심플한 유리컵에 담긴 맥주는 또 어찌나 맛있던지. 친구와 나는 한 잔씩을 더 시켜 마시고, 비닐로 가서 또 마셨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D 4월에도 맥주를 많이 마실 거다. 보옴이 와 주었으니. 단,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맥주 마시고 체하는 건 정말 질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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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씨가 선물해준 봄

from 모퉁이다방 2009. 3. 21. 14:57



 

H씨가 내게 봄을 선물해줬다.
오늘 문자로 이름이 호야래요,라고 말해줬다.
집에 있는 화분으로 옮겨 심고
햇볕이 잘 들어오는 창가에 올려다두고 가만히 들여다봤다.
잎이 크고 두꺼운 아이다.
봄만큼이나 강한 아이.
잎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새로 돋아나는 잎은 전체가 아이보리빛이다.
 그 잎이 자라면서 연두색으로 번져나가는 것 같다.
신기하고, 예쁜 색깔이다.
고마워요, H씨.
봄햇살만큼 고운 식물이예요.
잘 키울께요. :)

오늘 날씨가 너무 좋다.
아.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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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봄

from 모퉁이다방 2009. 3. 10. 00:34
   오늘은 5호선을 쭉 타고 군자역에서 내려 간만에 중랑천을 걸었다. 썩어가고 있는 게 뻔한 시궁창 냄새가 스물스물 올라오는데도 물이 흐르는 곳 가까이 오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중랑천을 걸을 때면 항상 기분이 좋다. 좋아하는 음악도 볼륨 크게 틀어 놓고 들으니깐 기분 더더욱 업이다. 어제는 좋은 음악을 또 발견했다. 짙은. 이 분은 저번에 직접 기타치고 노래부르는 걸 코 앞에서 봤는데, 이제서야 빠지기 시작했다. 괜찮아,랑. 시크릿,이랑. 아침,이 특히 좋다. 

    바우하우스가 보이는 장한교인가. 그 다리 밑에서 동생이랑 만나 함께 걸었다. 아. 혼자 걸었어야 했는데. 동생은 계속 걸으면서 언니야, 국수가 먹고싶어. 동생은 국수킬러다. 나는 지난주내내 맥주를 마셔주었기 때문에 이번 주는 자제하고 나름 다이어트를 해 볼려고 한 건데. (지난 주말엔 세계맥주를 무려 10병 가까이 혼자 마신 것 같다. 내게 세계맥주를 사주신 그 분은 친절하기도 하시지. 비오는 날에는 홍대 비닐에 가서 맥주를 두 잔씩 마셨다. 음악에도 취했지. 아무튼 저번주는 맥주맥주만 마셨다. 그러니까 영혼도 살찌고 내 살도 띠룩띠룩 쪘다는 이야기. 흑.) 결국 면목까지 신나게 걷다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국수만 먹고 나올려고 했는데, 뽀얗게 진열되어 있는 꼼장어가. 흑. 그래서 꼼장어도 먹었다. 그런데 술이 없음 안 되잖아. 그래서 맥주도 한 병 마셨다. 맥주는 다 마셨는데, 꼼장어가 남았다. 그래서 맥주 한 병 더 시켰다. 아. 우리집 앞 포장마차님은 참으로 양심 있으셔서 꼼장어를 시키면 깻잎 한 가득에 잘게 썰은 마늘과 고추가 나온다. 그걸 초고추장에 찍어 쌈 싸먹으면 캬. 다이어트 실패다.

    한동안 집에서 요리도 하지 않고, 귀차니즘에 빠져서 사먹기만 했는데, 지난 주말부터 요리를 시작했다. 집에서 뭘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는 소리다. 일요일에는 느즈막히 시장에 나가 순두부랑 바지락을 샀다. 냉동실에 있던 돼지고기를 꺼내서 해동시켰다. 참기름에 고춧가루를 풀고 해동한 돼지고기를 넣고 볶은 뒤, 멸치다시물을 넣고 끊였다. 팔팔 끊는 국물에 하얗고 뽀얀 순두부를 통째로 넣고 바지락도 넣고, 집에 새우젓이 없으니깐 소금을 조금 넣고 다진마늘이랑 청량고추도 넣어줬다. 팔팔 끓은 순두부찌개에 흑미 넣은 밥까지 해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아침밥으로 든든하게 먹어줬다. 아. 오늘밤에는 어제 남은 순두부찌개랑 냉이나물(아. 생전 처음으로 냉이나물을 무쳐봤다. 그런데 뭐가 잘못된 건지 살짝 맛이 없는데. 내가 만들었으니깐 내가 다 먹는다는 각오로 먹고 있다)이 있고, 동생이 오늘 사온 가래떡이 있으니까 그걸로 간장떡볶이를 만들어 놓고 내일 아침밥으로 먹을 거다. 집에 쇠고기며 버섯이며 하나도 없으니깐 그냥 다시국물내서 간장이랑 설탕 넣고 졸여서 밥반찬으로.

    그러니까 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중랑천을 걷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는.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다는. 아쉽기도 하지만, 신나기도 한다는. 오늘 점심에는 정말 벚꽃구경 가고 싶었다. 드라마시티에 나왔던 벚꽃비과 막걸리. 캬. 봄이 오지 않았으면 했는데, 또 봄이 이렇게 와 주니까 좋구나. 꽃집에 알록달록한 화분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면 역에서 내려서 집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길어지는 거다. 아. 꽃. 아. 보옴. 브로콜리 너마저의 유자차처럼. 봄날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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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와 카프레제

from 모퉁이다방 2009. 2. 24. 23:54

    금요일은 왠지 그냥 일찍 자기가 아쉬워요. 그래서 약속도 만들고, 영화도 보려고 하지만. 모든 금요일이 그렇지 않으니깐, 집에 일찍 들어오는 금요일도 있으니깐. 그땐 꼭 술을 사 가지고 들어와요. 그것도 잔뜩. 중간에 술이 모자르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집에서는 저랑 같이 술 마셔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주로 혼자 마셔요. TV를 보면서 마시기도 하고, 라디오를 들으면서 마시기도 하고, 음악을 들으면서 마시기도 하고. 금요일 밤 '놀러와'는 내 최고의 안주였는데 말이예요. 아쉽다는.

    그래서 저번주 금요일에는 약속도 없고, 아. 영화는 보긴 봤어요. 6시 40분 시작 영화를 보고 8시 10분즈음에 끝나서, 9시에 지하철을 타고 집에 들어왔죠. 맥주를 사 들고. 요즘엔 자꾸만 술에 취하면 영화 <사랑니>가 생각나는 거예요. 봄이 올라고 해서 그런가. (<사랑니>는 저의 봄 영화예요) 거기에 막 비 내리는 장면들이 있었잖아요. 초반에도 있었고, 나중에 인영이의 대사에도 비님이 살포시 앉아 있었는데. 그러잖아요. 인영이가 친구에게. 너 어젯밤에 비 내린 거 알아? 잠자는 사람은 그걸 모르는거야. 그래서요. 내가 금요일 밤, 그러니까 토요일 새벽까지 안 잤잖아요. 비가 내릴지도 모르니까. 깨어있기 위해서 맥주를 마시고, 맥주만 마시면 배가 고프니깐 이걸 만들어 먹었어요. 짜짠. 나름 카프레제예요.
 


일단 재료. 통통한 방울토마토랑 차가운 맥주맥주.


그리고 오늘의 스폐셜 재료. 발사믹 드레싱(이거 대발견!)이랑 벨큐브 치즈.
벨큐브 치즈는 체험단 신청해서 공짜로 받은 건데, 이 치즈 엄청 좋아해요.
지난 여름에 친구랑 한강에서 돗자리 깔아놓고, 맥주랑 와인 사서 이 치즈 냠냠거리면서 먹었는데.
아. 그 때도 둘이서 감탄하면서 먹고 그랬어요. 맛나요, 맛나.
분위기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치즈에 취하고 그랬다는.


배송되어 온 치즈는 세 가지 맛이었어요. 요즘엔 이렇게 나오나봐요.
여름에 먹었던 치즈는 한 곽에 한 종류만 있었던 것 같은데.


블루치즈, 플레인, 체다. 이렇게.


그리고 요리책이랑 인터넷에서 보고 어설프게나마 만들어본 카프레제.
동네에 '오터스'라고 아담하고 맛난 집이 있는데,
맥주랑 와인이랑 스테이크 스파게티 등등의 요리를 팔아요.
주인 언니가 친절하고, 요리를 잘 해서 우울할 때마다 생각나는 가겐데, 분위기도 좋아요.
여기가서 큰 맘 먹고 와인을 마신 적이 있는데,
그 때 주인언니가 만들어줬었어요. 서비스로. 카프레제.
엄청 맛있었어요. 그래서 흉내내본 거예요. 나름 만족스러웠다는.


토마토 반 자르고 거기 위에 치즈를 조각내서 뿌려 올리고, 후추를 살짝 쳐요. 그리고 발사믹 드레싱.
또 이쑤시개가 있다면, 반 자른 토마토랑 치즈를 예쁘게 꽂고. 후추 치고. 발사믹 드레싱.
요 발사믹 드레싱에 이번에 완전 빠졌잖아요. 소스가 진짜 맛나요.
포장지에 보면 담백한 빵이나 닭고기 요리에 찍어먹으면 맛나나고 써 있어요.
그래볼라구요. 아껴 먹을 거예요. 완소 드레싱.


그래서 슈퍼로 뛰어나가서 사온 담백하고, 내가 좋아하는 참 크래커 위에도 올려서 먹어보고


바게트 빵 위에도 올려서 소스 듬뿍 뿌리고 먹어봤는데. 완전 맛있어요!
이렇게 먹으면, 맥주도 맛있어서 한없이 들어가고, 안주도 맛나고, 금요일밤이 즐거워지고,
그러면 나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예요.
잠자는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새벽의 이슬비를.


    사실 금요일에 이렇게 만들어 먹고, 맥주도 잔뜩 마시고는 취해선 사랑니 DVD를 틀었어요. 이번엔 영화로 말고 코멘터리 들으면서 영화 다시 보자, 응. 김정은이 저 대사를 할 때 감독이랑 김정은이랑 정유미는 뭐라고 하나, 들어보자고 틀었는데 맥주를 하도 많이 마셔서 금방 잠들어버렸어요. 그 다음날, 토요일도 그랬구요. 이번주 금요일에 다시 시도해볼래요. 벚꽃이 만개한 봄의 마지막 장면까지 볼래요. 나는 다시 태어나면 뭐로 태어날까요? 이석? 첫사랑? 아. 정말 보고싶어져 버렸어요. 이렇게 쓰고 보니까. 두 명의 이석과 인영이랑 우리의 훈남 친구(앗, 이름이 생각 안 난다는)가 함께 술을 마셨던 그 마당도, 마당의 화분에 피었던 봄꽃도. 다 보고싶어져 버렸어요. 사랑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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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문프린세스>를 봤다. 시사회로 본 거였는데, 재미있을 수도 있다,고 기대하기도 했었다. 나쵸랑 콜라 큰 걸 사 들고 들어가 폭신폭신한 좌석에 몸을 숨기고 영화를 봤다. 영화는 좀 시시했다. 원작이 오랫동안 사랑받아왔다고, 해리포터가 있게 한 작품이라고 해서 살포시 기대했었는데 그저 그랬다. 완전히 애들 영화. 갈등도 간단하고 엔딩도 아주 간단하다. 판타지 영화치고는 CG도 별로 없고, 좀 엉성하다. 애들 영화에서 발견하는 인생에 있어서의 깊이있는 철학. 나 이런 거에 완전히 광분하는데. 그래서 기대했었는데. 땡.

- <체인질링>도 봤다. 일요일 저녁에. 주말내내 집에서 뒹굴기만 한 게 한심해서 1장을 인터넷으로 예매하고 나갔다. 사실 일찍 출발해서 많이 걸을려고 했는데, 나는 게으른 아이니까. 당연하게도 늦게 출발했고 시간이 모자라 전철을 타고 갔다. 일요일 6시 40분 영화였는데도 매진. (원래 일요일 그 시간에 매진되는 영화들이 많은건가?) 나는 오래간만에 혼자 극장에 왔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가지고 있던 커피 쿠폰으로 엔젤리너스에서 라떼를 사들고, 졸리 언니가 나오는 영화를 봤다. 영화는 좋았다. 난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좋고,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좋다. <미스틱 리버>도 좋았는데. 마지막 자막을 보고, 집에 와서 검색을 좀 해 봤는데, 졸리 언니가 열연한 실제 주인공은 죽을 때까지 아들을 찾았다고 한다. 희망. 죽지 않았을 거라는 희망. 언제고 돌아올 거라는 희망. 그 분은 평생 아들을 기다리며 살아갔다. 평생을 바쳐 기다릴 누군가가 있는 사람. 엄마. 어머니. 감동적인 영화였다. 짝짝짝.

- 오늘 커피집에서 이런 글귀를 봤다. "슬픔도 당신의 일부". 곧바로 핸드폰 메모장에 받아 적었다. 슬픔도 당신의 일부. 행복도 당신의 일부. 그리움도 당신의 일부. 쓸쓸함도 당신의 일부. 희망도 당신의 일부. 좌절도 당신의 일부. 사랑도, 이별도 모두 당신의 일부. 오후에는 세 가지 복합적인 현상이 내게 나타났는데, 좀 더러운 얘기다. 사실 난 전혀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오후에 나는 데미언 라이스의 '9 Crimes'를 듣고 있었고, 똥이 마려웠고,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아, 아니다. 네 가지 복합적인 현상이다. 네 번째는 근처에 있는 책장에서 노란색 <대성당>을 본 거다. <대성당> 속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빵집이 생각났다. 쓸쓸하고 따듯했던 빵집의 풍경. 눈물이 날 것만 같았던 그 노오란 풍경. 그러니깐 이 네 가지 복합적인 감정은 본능적인 외로움인 거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 아시는 분이 만화책 <BECK>을 추천해주셨다. 내가 좋아할 것 같다고 말해줬다. 내친 김에 그 분께 만화책도 빌렸다. 그래서 지금 집에 10권까지 있다. 주말에 심심할 걱정은 없겠다. 늦잠 자다 일어나 이불 속에서 만화책을 봐야지. 주말즈음에 비가 온다고 한 것 같은데, 김치전도 만들어 먹어야겠다. 얻어온 김치가 아주 잘 익었다. 돼지고기도 사서 넣어야지. 서울쌀막걸리도. 아. 얼마 전에 이상문학상에 실린 공선옥의 단편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바람님과 빗님이 앉았고만." 아, 바람님과 빗님. 좋아라. 조아질라고 <- 이걸 반복해서 소리내서 읽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누군가 그랬는데. 

- 그러니까 오늘의 핵심은 영화과 책을 다시 보고, 읽기 시작했다는 거. 그래서 하루 중 행복한 순간들이 있다는 거. 보고 싶은 영화도 많아졌고, 읽고 싶은 책이 쌓였다는 거. 내일도 영화 볼 거다. 아, 그리고 <문프린세스>가 영 싫기만 한 영화는 아니었다. 영화를 보고 집에 오는데, 왠지 내가 순수해진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 순진해진 느낌. 아이처럼 마음이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나홀로 집에>가 짱인데. 애들 영화도 가끔 봐줘야겠다. 나쁜 성질 죽이게. 지금 <연애시대> OST를 듣고 있다. 생각난다, <연애시대>. 좋은 밤,이다. 모두에게도 좋은 밤,이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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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밤이예요

from 모퉁이다방 2009. 2. 12. 01:22
    쓸쓸한 밤이예요,로 시작하는 문자를 보내려고 했다. 오래간만에 버스를 탔다. 창가 자리에 바짝 기대 앉아 쓸쓸한 밤이예요,로 시작하는 문자를 쓰려다 말았다. 내가 쓸쓸한 밤이예요,라는 문자를 보내려고 했던 사람은 늦은 밤의 문자임에도 불구하고, 다정하고도 따듯한 답문을 보내줄 게 분명한 사람. 결국 쓸쓸한 밤이예요,라고 시작하는 문자는 보내지 못했다. 너무 길어질까봐, 내 지금 기분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할 것도 같았다. 그래서 그냥 보내지 않았다. 쓸쓸한 밤이예요,라고 시작되는 문장들을.


    쓸쓸한 밤이예요. 잘 지내고 있죠? 어느새 겨울의 끝자락이예요. 봄 좋아한다고 했었나요? 우리가 그런 질문과 답을 했던가요? 기억이 안 나요. 오늘은 술을 마셨어요. 요즘 거의 매일 마시고 있지만. 아무튼 오늘도 술을 마셨어요. 그런데 오늘은 뭔가 이상했어요. 술맛도, 기분도, 날씨도. 창 밖은 안개가 그득했죠.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분이 좋았다가, 그렇지 않았다가 그랬어요. 맥주 한 모금을 들이킬 때는 좋았다가, 두 번째로 잔을 들면 안 좋아지는 거죠. 그런 느낌 있잖아요. 내가 소리내는 말이 누군가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공기 중에 흡수되는 느낌. 내가 하는 행동들이 맞은편의 사람들에게 보여지지 못하고 사라지는 듯한 느낌. 안개 때문인가요? 오늘 보라색 색종이를 멍든 부위에 붙여놓으면 멍자국이 빨리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신기한 거예요. 색종이가 멍의 색깔을 흡수하는 거잖아요. 세 번째 모금을 들이킬 때 그 보라색 색종이가 생각이 났어요. 내 안의 뭔가가 내가 모르는 세상 어딘가로 흩어지는 듯한 느낌.

    그래서 집에 들어와서 세수를 하고, 발도 씻은 뒤 벽에 기대고 앉아 오늘 다이어리 한 귀퉁이에 옮겨 적었던 글귀들을 읽어봤어요. 역시 위로가 되더라구요. 들어볼래요? 혹시 지금 쓸쓸하다면, 그래서 눈물이 날 것도 같다면, 마음이 닫히는 소리가 철커덩하고 들린다면, 확실하게 효과가 있을 거예요. 

    스콧 피츠제럴드의 '오월제'라는 단편에 있는 글귀. 그리고.

    이건. 어느 책 속의 작가의 말에 나오는 글귄데. 책 제목이 생각이 안 나요. 흠. 언젠가 친구는 내게 넌 약해 보이지만 의외로 강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난 때때로 강하기도 하지만, 약하고 여린 부분이 많은 사람이예요. 그래서 상처도 잘 받는 사람인 거예요. 오늘은 많이 쓸쓸한 날이었어요. 지하철에 앉아서 내가 끄적거린 글귀가 있는데, 그건 보여주진 못하지만 오늘의 기분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들이예요. 거기엔 끝,이라는 단어가 있고 시작,이라는 단어도 있어요. 혹시 나처럼 쓸쓸한 하루를 보낸 건 아니죠? 이 모든 게 안개 때문이예요. 안개. 잘 지내요. 사실 오늘 아침, 계단을 오를 때도 연락하고 싶었어요. 결국 못해버리고 말았지만. 봄이 오면 봄바람이 부는 야외에서 술 한잔 마셔요. 커피도 좋아요. 꼭 우리, 그렇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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