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밀라, 지은, 우리

from 서재를쌓다 2013. 1. 24. 21:51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어제 꿈을 꿨다. 꿈에 지금은 만나고 있지 않지만, 가끔 보고파지는 사람이 나왔다. 그 사람이 내 옆에 꼭 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내게 하는 말이 다 거짓이었다. 그는 도망쳐 나온 거였고, 쫓기고 있는 거였는데, 내겐 평온하다 했다. 행복하다 했다. 꿈에서도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의 말들과 행동이 거짓이라는 걸. 꿈에서도 나는 생각했다. 이건 너무하잖아. 그리고 슬퍼졌다. 어제 그 꿈을 꾸기 전에, 집에 오는 길에 아주 밝은 달과 아주 선명한 별을 봤다. 별들이 많았다.

 

    작년 추석에 서울로 올라오기 전에 엄마와 통영에 갔다. 나는 중학교 때까지 거기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았다. 통영이 충무였던 시절. 이렇게 동양의 나폴리가 될 줄 몰랐던 시절. 나는 바다가 있는 곳에서 성장했는데, 의외로 바다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답답해서 바다를 보러 간다든지, 신이 나서 바다를 보러 갔다든지 그런 기억이 없다. 그냥 진한 굴 껍데기 냄새 뿐이다. 아무튼 통영에 가서 엄마랑 바다를 옆에 두고 걸었다. 통영의 바다는 고향의 바다와 다르게 정말 반짝반짝 빛났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때 본 통영의 바다를 생각했다. 동피랑 마을 꼭대기에 불었던 바람도 생각했다. 초판 3쇄. 작가님이 너무 인기가 많아져서 조금 심드렁한 마음으로 (왠지는 몰라도) 천천히 구입했다. 다른 책들 주문하면서 슬쩍 집어 넣었다. 그러고도 한참. 몇 장을 읽다가 또 심드렁해져 다시 책들 사이에 끼어 두었었다. 12월 어느 날, 책 표지와 책등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다시 읽기 시작했다.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마음이 아파서, 행복해졌다. 이번 책은 영화 같다. 장면들이 머릿 속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카밀라, 동백꽃, 지은, 양관, 진남. 특히 마지막 장 '2012년의 카밀라, 혹은 1984년의 정지은'.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다. 카밀라에서 정지은으로 바뀌는 순간, 페이지도 바뀐다. 앞장에는 카밀라가 뒷장에는 정지은이 서 있다. 이 장면이 나는 영화처럼 생생하게 그려진다. 아, 좋았어. 벅찬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심연이 존재한다. 깊고 어둡고 서늘한 심연이다. 살아오면서 여러 번 그 심연 앞에서 주춤거렸다. 심연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다."

    나를 혼잣말하는 고독한 사람으로 만드는 게 바로 그 심연이다. 심연에서, 거기서, 건너가지 못한 채, 그럼에도 뭔가 말할 때, 가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심연 저편의 당신을 향해 말을 걸 때, 그때 내 소설이 시작됐다."

- 작가의 말 중에서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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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서재쌓기

from 기억의기억 2013. 1. 21. 22:21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주말엔 숲으로.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원숭이와 게의 전쟁.

우연한 산보.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

 

나를 닮은 집짓기.

 

삶의 속도, 행복의 방향.

두근두근 혼자가는 등산여행.

비자나무 숲.

아버지와 함께한 마지막 날들.

 

바닷가의 모든 날들.

슬픈 외국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지지 않는다는 말.

 

눈의 여행자.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제7일.

대설주의보.


정체성.


야만적인 앨리스씨.

 

매거진 B - 기네스.

고독한 미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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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지난해 겨울의 일. 친구가 읽고 있던 책이었다.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친구가 좋은 책이라며 읽어보라고 선물해준 책이다. 총 열 개의 챕터로 되어 있는데, 좋은 챕터도 있었고, 그냥 눈으로만 읽은 챕터도 있었다. 평범하지 않은 예술가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떤 부분은 소설 같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구절들은 정말 좋아서 잠시 읽던 페이지를 덮어두기도 했다. 특히 챕터의 마지막 문장들이 그러면 쉽게 다음 챕터로 넘어가질 못했다. 하루를 쉬었다 다시 읽었다.

 

    피에르 보나르의 경우가 그랬다. 이 책에서 제일 처음에 소개되는 화가이다. 보나르는 평생 한 여자에게 중독되었다. 한 여자만 사랑한 건 아니다. 다른 여자도 있었다. 보나르는 한 여자에게 평생 중독되었다. 그를 중독시킨 여자 마티에르는 몸이 약한 사람이었다. 병약한 마티에르 때문에 보나르도 점점 은둔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사람들을 멀리하고, 자신들만의 공간에만 머물렀다.

 

    "보나르는 고독과 프라이버시를 사랑했다. 그가 가족도 연고도 없고 과거를 알 수 없는 사람에게 끌린 걸 이해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중산층 출신이고 그 가치를 잊지 않았던 보나르는 마르트와의 관계가 도리에 어긋난 것임을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몇 십 년 동안 혼외 관계로 지냈다. 결국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렸을 때 참석한 사람은 아파트 관리인과 그녀의 남편, 루이자 포일라르와 조제프 탕송 뿐이었다. 보나르의 가족들은 오랜 세월 후 그가 죽고 나서야 둘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p.23

 

    보나르는 그리고 또 그렸다. 메모하고 또 메모했다. 보나르는 늘 주머니에 조그마한 수첩을 넣고 다녔는데, 날씨나 쇼핑 목록, 전화번호 같은 것들을 스케치한 페이지에 함께 적어두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에는 늘 마티에르가 있었다. 그림의 한 가운데 있기도 하고, 구석에 있기도 하고, 작게든 크게든 항상 마티에르가 그림 속에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마르트는 1942년 1월 26일 죽었다. 보나르는 그날 수첩에 "맑음(beau)"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 밑에 약간 흔들린 필체로 작은 십자가를 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수첩에 날씨를 기록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마르트의 침실 문을 잠그고 다시는 들어가지 않았다. 마르트의 죽음은 친한 친구들에게만 알렸다.

- p.43-44

 

 

    '죽음을 물리치고 인생을 구원한 걸작' 챕터도 좋다. 여기에는 세 명의 예술가가 소개되는데, 읽다가 좋아서 자주 책을 덮었다. 제이 드페오라는 화가가 있다. 그녀는 대형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고, 벗겨내고, 또 칠하고, 벗겨내고. 매일같이 그림을 그렸다.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거의 브랜디와 담배로 때우며 그림만 그렸다. 그림의 제목은 '장미'. 몇 년에 걸쳐 그리다보니 화풍도 계속 변했다. 드페오는 상업적인 면과 경력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미술관 창고에 옮겨진 뒤에도 미술관을 찾아가 그림을 계속 고쳤다. 점점 두꺼워지는 물감의 벽. 그림을 시작한 지 11년 뒤에 비로소 작품을 전시할 수 있게 되었는데, 미술계가 변한 뒤였다. 그리고 11년간 쌓인 두꺼운 물감 덩어리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미술관들은 구입을 꺼렸다. 드페오는 암으로 죽었다. 책에서 좋았던 부분은 몇년동안 드페오의 방 안에 있던 '장미'가 세상에 공개되던 순간. 전시를 하기 위해 그림을 꺼내는데 캔버스가 너무 커서 창틀이랑 벽을 들어내고 인부 8명이 매달려 지게차를 이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친구가 이 이사를 담은 단편 영화를 만들었단다. "길 에반스의 슬픈 음악을 사운드트랙으로 쓴 이 영화는 사람들이 드페오의 '장미'를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p.156) 

   

    드페오는 언젠가 이런 꿈을 꾸다 깼다고 말한 적이 있다. 미래에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는데 미술관에서 방에서 방으로 헤매던 중 갑자기 '장미'를 발견했다고 한다. 작품은 복원되어 있었고 어떤 사람이 그걸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있잖아요." 그녀가 말을 걸었다. "그거 내가 한 거예요."

- p. 177

 

    다행 '장미'는 기금이 조성되어서 복원되고 전시되었다. 이 책에 있는 에바 헤세 이야기도 좋고, 샬로트 살로몬 이야기도 좋고, 프랭크 헐리 이야기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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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 바질

from 서재를쌓다 2012. 12. 13. 22:55

1F/B1 일층, 지하 일층
김중혁 지음/문학동네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일곱 편의 단편을 모두 다 읽고도 계속 생각이 났다. 소설은 이별 이야기로 시작한다. 박상훈과 지윤서가 헤어졌다. 첫 문단은 이렇다.

 

    "이별은 육체적인 단어다. 헤어진다는 것이고, 그래서 다시는 가까워질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멀어진다는 것이다. 이별이라는 단어의 물리적인 실체가, 거리에 대한 실감이, 박상훈을 괴롭게 했다. 사흘이 지나자 어딘가 아파왔다. 아프긴 했지만 상처를 집어낼 수는 없었다. 살을 파고 뼈를 헤집어 상처를 들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상처는 계속 이동했다. 때로는 무릎이 아팠고, 때로는 등이 아팠고, 때로는 발뒤꿈치가 아팠다. 모든 고통은 이별로부터 왔다. 닷새가 지나자 모든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걷고 있다는 게 기적 같았고,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고통은 산발적이지만 끊임없었다."

 

    제목은 '바질'. 박상훈은 지윤서와 헤어지고 아팠다. 아프고 아팠다. 아팠지만, 늘 다니던 길로 퇴근을 하고 지윤서 생각을 했다. 박상훈의 퇴근길에 지윤서의 집이 있었다. 박상훈의 이별은 그랬다. 지윤서는 아픈 줄도 몰랐다. 박상훈과 헤어진 지 사흘만에 네덜란드로 세계단추박람회 출장을 갔다. 바빴다. 바쁜 게 다행이었다. 지윤서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열심히 일을 했다. 성공적으로 일을 끝내고 남은 시간동안 네덜란드 이곳저곳을 구경 하고 있던 중, 한 할머니로부터 바질 씨앗을 사게 된다. 아무 때나 심어도, 아무 곳에나 심어도 우리 바질은 잘 자란다는 할머니의 말에 지윤서는 생각한다.

 

    "지윤서는 할머니의 말을 믿지 않았다. 바질이 얼마나 키우기 힘든 허브인지 알고 있었다. 따뜻해야 했고, 환기가 중요하며, 물조절을 잘 해야 했다. 지윤서는 바질을 키워본 적이 있었다. 매번 이 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시들시들해져버렸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윤서는 바질을 화분에 심는다. 할머니의 말대로 바질은 금새 싹을 틔웠다. 진한 향을 풍겼다. 지윤서는 바빴다. 회사일로 바빴다. 회사에서 돌아오면 바로 쓰러져 잤다. 바질을 돌볼 틈이 없었다. 물을 줄 시간도 없었다. 그러자 바질은 금새 시들었다. 금새 싹을 틔우고, 금새 진한 향을 풍겼지만, 금새 시들었다. 그게 바질이었다. 지윤서는 시든 바질을 창 밖으로 던져 버린다. 박상훈은 어느 날 퇴근길에 지윤서의 집을 보다가 점점 커지는 어느 덤불을 발견한다. 아무래도 이상해 덤불을 없애려고 하다, 지윤서가 오늘 출근을 하지 않았고 갑자기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지윤서는 커다란 미로 같은 덤불 속에 있었다. 덤불은 거대한 생명체였다. 지윤서를 집어 삼킬 것만 같았다. 덤불 생명체는 박상훈에게도 접근한다. 박상훈은, 박상훈은 칼을 집어든다.

 

    "박상훈은 칼을 꼭 쥐었다. 덤불을 자세히 살폈다. 덤불의 뿌리는 많지 않았다. 뿌리를 공격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뿌리에 접근하는 게 쉽지 않았다. 덤불의 뿌리가 두꺼워 칼로 잘라내기도 힘들 것 같았다. 박상훈은 어떻게든 나가고 싶었다. 박상훈은 덤불 가까이에 앉아서 빈틈을 찾고 있었다. 덤불 뒤에 숨어 있던 덩굴이 박상훈을 향해 달려들었다. 박상훈은 일어서면서 덩굴을 향해 정확히 칼을 휘둘렀다. 줄기가 두 동강 나고 이파리가 흔들리면서 박상훈의 코로 바질 향이 훅 풍겼다."

 

    김중혁은 자신의 작품에서 숨겨진 의미 따위는 없다며, 그냥 그대로 읽어주면 된다고 했지만, 나는 계속 이 '바질'이 생각났다. 쓸쓸하게 시작했다가, SF로 끝나는, 이 미묘한 소설이 계속 마음에 남아서 한 번 더 읽었다. 술을 마시고 지하철에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다 생각했다. 바질이 사랑인 가봐. 그래, 바질이 사랑이었어. 덤불도 사랑이었어. 사랑이었어. 그때 지하철에서 조제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쿠루리의 '別れ'. 이별. 박상훈이 바질 덤불에 칼을 휘둘렀을 때, 줄기는 두 동강 나고 이파리가 흔들렸다. 그리고 바질 향이 훅 풍겼다. 그렇게 사랑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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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에는 친구가 바람을 쐬러 가자고 했다. 우리는 해질 무렵에 만났다. 광화문에서 비빔밥 한그릇씩을 먹고 경복궁역까지 걸어가 버스를 타고 부암동까지 갔다. 해가 지고 나무들이 많아 으슥한 길을 둘이서 뚜벅뚜벅 걸어 올라갔다. 산모퉁이 카페. 친구가 얼마 전에 여길 처음 와 봤는데, 이곳 야경이 너무 좋아서 내게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올라오는 길에 땀을 많이 흘려 차가운 커피와 차가운 유자차를 시켰다. 주말이라 서울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명당자리는 만석이었다. 명당자리에 자리가 나면 언제든 옮길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고 앉아 커피를 마시고, 밀린 이야기를 하고, 이어폰 한 쪽씩을 끼고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거짓말 같이 자리가 났다. 명당자리. 명당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한쪽 하늘에서는 비행기가 쉴 새 없이 날고, 저 아래 부암동에 마을버스가 오르내리는 게 보였다.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따뜻한 음료를 시킬 걸 후회했다. 친구와는 몇 년 동안 못 보고 지낸 적이 있었다. 한 여름에 다시 만났는데, 그때 삼계탕을 먹었다. 다음에 만나면 삼계탕을 먹자고 해야겠다.   

 

    일요일에는 조조로 <피에타>를 봤다. 나는, 김기덕의 어떤 영화는 좋았고, 어떤 영화는 보고 나와서 한없이 우울했고, 어떤 영화는 보고 싶지 않았다. <피에타>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깊었다. 그 장면이 한동안 기억날 것 같다.

 

    구월의 첫 주. 부암동에 가고, 피에타도 보고, 이 책도 읽었다. 동생이 이 책을 누군가에게 선물하려고 샀는데, 조금 읽다가 너무 좋아서 그냥 자기가 가져버렸다고 했다. 동생은 책귀퉁이를 접지도 못하고, 반듯한 포스트잇을 붙이지도 못하고 되는대로 종이들을 찢어 마음에 드는 페이지에 꽂아뒀는데 나중에 책을 읽으려고 보니까 찢어진 종이가 가득했다. 이대로는 가지고 다니면서 읽을 수가 없어서 동생이 표시해둔 페이지마다 노란 포스트잇을 붙였다. 구월 첫주 내내 이 책을 가지고 다녔는데 그 사이 큰 비가 갑자기 왔다. 집에 오니 가방이 젖어 있었다. 책이 울지는 않았는데, 붙여놓은 포스트잇이 너덜너덜해졌다. 책에 포스트잇의 노란 물도 들었다. 이 책이 더 마음에 들어졌다. 나는 다른 색의 포스트잇을 붙였다. 다행이 동생과 페이지가 겹치지는 않는다.

 

 

- 문득, 아니 오래전부터 난 참 사랑을 못하는 사람이란 생각을 하곤 한다. 아무리 목숨을 걸어도 목숨이 걸어지지 않는, 일종의 그런 운명 같다. 이래서 사람이 안 되는 것도 같고 아무도 나를 사랑할 것 같지 않으며 사랑이 와도 바람만큼만 느끼는 것. 그래서 내 사랑은 혼자 하는 사랑이다.

 

- 예전에는 그러질 못했지만, 얼마 전부터 술을 마시고 있는 촉촉한 나의 상태를 즐기게 되었다. 내가 술을 마시는 건 순전히 사람이 좋아서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사람보다 더 믿을 수 있는 건 술이라는 생각이다. 술은 착하며 솔직하다. 확실히 인간보다는 그렇다. 술만큼 인간적이게 하는 화학도 없다. 혼자서는 마시지 못하는 술 습관을 힘들게 고쳐, 혼자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혼자 술을 마신 상태에서는 다른 색깔에 물들기 쉬운 상태가 된다. 그 상태처럼 평화로운 시간도 없다. 인간적이고 싶을 때 술을 찾는 솔직한 상태. 단언컨대 술은 마음에 몸에 색을 밀어올린다.

 

- 인연의 성분은 그토록 구체적이지도 선명하지도 않은 것으로 묶여 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좋아지면 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저녁이 되면 어렵고, 밤이 되면 저리고, 그렇게 한 계절을, 한 사람을 앓는 것이다.

 

-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와 있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날씨처럼, 문득 기분이 달라지는 것. 갑자기 눈가가 뿌예지는 것.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지진난 것처럼 흔들리는 것.

 

그리고,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절.

 

- 삿포로에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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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박정석 지음/시공사

 

   그녀와 함께 한 터키, 불가리아, 루마니아, 폴란드, 발트3국, 핀란드 여행. 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핀란드는 지구의 북쪽 끝에 있다. 춥고 매우 조용하다. 여태 추우면서 조용하지 않은 곳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나.

   그 나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가이드북에 나와 있지 않은 소소한 것들, 설명하고 싶지만 불가능한 것들, 직접 가서 보지 않고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미묘한 몇 가지다. 글이나 사진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의 눈과 귀, 피부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특징들.

   바싹 말라 보기보다 아주 쉽게 불이 붙고 놀랄 만큼 화력이 세던 자작나무 장작.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푸른 빛은 물론 잔잔한 정도 또한 하늘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던 호수와 물풀, 들꽃, 덤불.

   하늘을 향해 똑바로 뻗은 채 가느다란 가지에 앙증맞은 초록 잎사귀를 가득 달고 있던 하얀 숲.

   평화 속에 어쩐지 우울함이 느껴지는 도시의 인적 드문 거리.

   언제 들어가도 붐비는 일이 절대 없던 슈퍼마켓.

   한밤중에도 파르스름하게 빛나던 청색 하늘.

   아무리 어려운 질문이라고 해도 술술 대답할 준비를 마친 듯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오던 젊은이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의 북쪽으로 날아들 메일 한 통, 조금 낯선 형상과 배열의 알파벳으로 발신인이 찍혀 있을 그 희고 바삭한 편지봉투를 기다리는 중이다.

 

   첫눈 소식처럼 반갑지는 않을지라도.

p.363-364

 

    그렇게 여행이 끝났다.

    헬싱키에서의 일정이 이틀 더 남아 있지만 실질적인 여행을 마무리한 것은 사본린나에서였다. 여행이 끝난 장소뿐 아니라 시간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오페라를 본 다음날 아침, 숙소의 정원에 앉아 아침밥을 먹는 도중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그때 나의 여행은 이미 끝이 나 있었다. 정말 그랬다. over. the end. finis. finale. fin. 쫑.

   아름다운 아침이다. 정원이 꽤 넓었다. 테이블에 앉아 건너편에 펼쳐진 호수와 성을 바라봤다. 핀란드의 풍경들이 모두 그러하듯 그림을 보득 정적인 느낌이 풍기는 고요한 경치다. 어젯밤 오페라 공연의 화려함과 시끌벅적함, 성 안으로 모여든 3000명의 인파 속에 끼어 2시간 동안 무아지경에 빠져 있던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p.356

 

   "좋았어요. 좋았어."

   늘 하는 말이지만 사실이다. 도둑을 맞든, 동행과 싸웠든, 기대보다 별로였든, 돌아와서 생각하니 좋지 않았던 여행은 없었다. 세상은 넓고, 아름답고,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갈 가치가 충분한 곳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누구나, 나도, 여행을 좋아한다.

p.369

 

 

   그렇게 그녀의 여행이 끝났다. 그리고 나는, 자꾸만 덜컹덜컹 마음이 서늘해진다. 가을이 오긴 올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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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문학과지성사

 

    나는 이 책을 7월 6일에 주문해 7월 21일에 받았다. 첫장은 7월 23일에 넘겼고, 마지막 장은 8월 6일에 넘겼다. 언젠가 김애란을 만난 적이 있다. 작가와의 만남 자리였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녀는 청바지에 까만 구두를 신었다. 조곤조곤 조금은 수줍게 이야기를 하는데, 말을 잘했다. 어떤 말들은 수첩에 적어놓고 싶을 정도로 의미있었고, 어떤 말들은 웃겼다. 정말 웃겼다. 그녀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지난 번 장편도 빨리 주문한 덕분에 사인본으로 받았다. 그때는 사인을 한 필기구도 별로였고, 글씨도 별로였는데, 이번엔 제법 근사하다. 2012년 7월이라는 날짜 밑에 '여름비행'이라고 적어줬다. 그녀와 나는 동갑. 얼마 전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궁금했다. 그녀는 어떤 아내일까. 어떤 엄마가 될까.

 

    모두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읽다보니 반은 문예지나 다른 묶음 소설집에서 읽은 적이 있는 작품들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그때는 모두 심드렁했던 작품들이었는데, 지금 이렇게 모아놓고 읽으니 다르다. 한 편, 한 편에 마음이 움직인다. 이렇게 근사한 작품이었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심드렁했었나, 라고 생각하며 한 편 한 편 읽어나갔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 벌레들. 물속 골리앗.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하루의 축. 큐티클. 호텔 니약 따. 서른. 그리고 작가의 말. 호텔 니약 따는 일요일 밤에 요를 깔고 누워 읽고 있었다. 마음은 서늘해지는데, 자꾸만 잠이 밀려와 읽던 페이지에 손바닥을 끼고 잠들어 버린 무더운 여름밤. 월요일 출근길에 호텔 니약 따를 마저 읽고, 서른을 읽었다. 몇 페이지 밖에 남지 않았는데, 덮어버리질 못하겠어서 셔틀 기다리는 곳에서도 읽었다. 마지막 장을 넘기니 셔틀이 왔다. 선풍기 미풍같은 에어컨 바람이 불어오고, 셔틀은 출발하고, 쨍-한 하늘과 몽실몽실한 구름을 올려다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사는 게 뭐 이래. 출근 같은 거는 하지 말고, 그대로 집에 돌아가 커튼을 내리고 선풍기를 틀어놓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울고 싶어졌다. 그렇게 조금 울다보면 잠이 솔솔 올 거 같았다. 그렇게 하루종일 자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좋니, 이 사람들. 어쩜 좋으니, 이 바보들. 그러는 중에 내가 있다. 어쩌면 좋은지, 어떻게 하면 좋은지 모르겠는 사람들 중에 내가 있다. 김애란이 꼭꼭 그리고 꾹꾹 눌러 쓴 낱말과 낱말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내가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집을 읽으며 이따금 숨고 싶어졌다. 이따금 울고 싶어졌다. 어쩌지, 나. 어쩌면 좋지, 나.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서 선배가 미영에게 했던 말. 옷이랑 너무 안 어울리는 가방을 들고 있는 사진을 보고 선배가 미영에게 그런다. "난 저 가방 때문에 이 사진이 좋은데. 이 여자의 '생활'이 보여서." 나도 김애란의 '생활'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그녀가 이 소설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생활'들. 공사가 진행 중인 재개발 지역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모습,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 '여기서 멉니까?' 라는 뜻의 중국어 문장을 소리내어 따라해 보는 모습, 인천 공항에 앉아 오고가는 사람들을 몇 시간이고 올려다보는 모습, 손톱 관리를 받으며 어색해지는 자신의 손톱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는 모습, 친구와 동남 아시아 어딘가를 여행하는 모습, 책상 위에 의자를 올려야만 발을 뻗을 수 있는 고시원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 내가 상상하는 이 모든 것이 그녀겠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나이기도 하겠다. 그녀가 내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 고맙다. 사십 대의 그녀와 나는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있을까. 부디 이번처럼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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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식당
박정석 지음/시공사

 

 

   내게도 단골집이 있고, 좋아하는 메뉴가 있다. 투다리에서는 깻잎말이와 감자베이컨말이. 너무 멀어서 이제는 못가지만 양재역에는 오동통한 닭을 아주 바싹 튀겨주는 통닭집이 있다. 시장건물 지하에 있고, 바로 옆에 다른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있어 정신이 없지만, 여기 통닭이 진리다. 닭똥집 튀김도. 맥주도 아주 싸다. 양도 엄청 많다. 요즘의 네네치킨과는 비교가 안된다. ('양'이! 네네치킨도 아낀다. 사실 아끼지 않는 통닭은 없음.)

 

    얼마 전, 비오는 날 홍대의 술집에서는 기가 막힌 훈제연어 샐러드를 먹었다. 훈제연어를 좋아해서 여러 곳에서 몇 번 시도해봤는데 모두 다 실패. 비린맛이 나거나, 짜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여기 샐러드는 사르르 녹았다. 금방 통닭을 먹고 와서 연어 한 점을 앞접시에 옮겨놓고 한참을 있었는데 친구가 여기 맛있다, 라고 했다. 친구는 내가 그래? 그러고도 맛있다는 얘길 안해서 이상하다 생각했단다. (내가 이미 맛을 봤다고 생각했음.) 이거 분명 얘가 좋아할 맛인데, 맛있으면 맛있다고 생난리를 치는 앤데. 한시간쯤 지나서 겨우 통닭이 소화되서 앞접시에 옮겨놓은 연어를 맛봤는데 그때부터 내가 얼마나 생난리를 쳤는지는 말하면 입, 아니 손 아프다.

 

    맛있는 해물국물떡볶이가 나오는 집, 반지하라 소리가 울리는 통에 시끄러워 죽겠지만 꼬치구이가 기가 막힌 집, 비리지 않은 따듯한 히레 정종을 만들어 주는 집, 탕수육에 소스국물을 잔뜩 얹어주는 데도 바삭바삭한 집. 모두 올 여름에 친구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찾아낸 집이다. 아, 정말 죄다 술집이구나. 흑흑.

 

    이 책을 읽었다. 제목하야 <열대식당>. 계속 망설였었다. 집에 읽을 책은 넘쳐나고, 저 많은 안주와 술을 여름내내 마셨고, 마시고 있고, 또 마시려면 아껴야 하니까. 책값 만 사천원. 1주일 넘게 고민하다 지른 책인데, 이번 주말에 이 작가의 책 한 권을 더 주문해서 받았다. 이 책도 마음에 들었고, 이 작가도 궁금했다. 그래서 작가의 전작들을 훑어보는데, 쭉 이 작가의 여행책을 읽어온 사람이 남긴 글이 있었다. 그 사람은 자기가 변한건지, 작가가 변한건지, 아니면 둘 다 변한건지, 작가의 최근의 책들이 자신에게 편안해졌다고 했다. 뭔가 근사했다. 어떤 작가의 책을 시간을 두고 읽어나가는 거. 작가는 여행을 하고, 글을 쓰고, 책을 내고, 나는 책을 사고, 책을 읽고, 또 다음 책을 기다리고. 각각의 자리에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얼마간의 변화를 겪어나가는 거. 다음 책을 읽을 때 서로의 변화를 어렴풋이 느끼게 되는 거.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는 책의 작가 말고, 사람들이 많이는 모르지만, 그래서 더 좋은, 아끼는 작가. 나도 그녀의 그런 독자가 되어보기로 했다.

 

   먼 바다를 건너고 싶게 하는 것이 때로는 그렇게 조그만 일이라는 게 놀랍기도 하다. (p.32)

 

   내가 택한 그녀와 나의 두번째 책은 유럽 여행책이고, 우리의 첫번째 책 <열대식당>은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며 먹은 음식들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주문하고 첫 장을 펼치기까지는 고민이 많았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자 금방 빠져들었다. 음식 이야기라면, 그것도 맛있는 음식 이야기라면 정신을 못차리는 나. 그녀는 여기에 여행 이야기까지 들려준다. 내가 못 가본 도시들, 풍경들, 내가 못 먹어본 음식들, 문장을 따라 고이는 침들, 떠올려지는 맛들, 내가 못 만나본 사람들. 그리고 언제고 가 보고 싶은 도시, 맛보고 싶은 음식들, 만나보고 싶어지는 사람들. 이래서 사람들이 여행책을 읽는구나 싶다. 떠나기 위해서, 혹은 떠나지 않기 위해서. 이 책의 173페이지에 '해피 아워'에 대해 나온다. 이 책이 내게 7월의 '해피 아워'였다. '해피 아워'를 꿈꾸게 만드는 책.

 

     "우리 식당도 맛있어요. 뭐든 주문해보세요."

   소녀는 내가 건너편 식당을 쳐다보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렇게 손님이 많은 식당 바로 맞은편에서 텅 빈 식당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별로 재미없는 일이겠지.

     "우리 식당도 맛있어요. 정말이에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 소녀가 열심히 말한다.

     "전부 다 맛있어요. 메뉴판에 있는 것 아무거나 주문해보세요."

    메뉴판을 펼친다. 모두 아주 싸다. 호이안의 올드쿼터에 즐비한 멋진 식당들의 반에도 못 미치는 가격이다. 요리 세 개를 시켰지만 다 합쳐 5달러를 넘지 않는다.

    해피 아워에는 모든 칵테일이 한 잔에 1달러라고 씌어 있다. 마가리타, 싱가포르 슬링, 블랙 러시안 모두 1달러다.

    "언제가 해피 아워지?"

    "바로 지금이요. 사실 하루 종일 해피 아워예요!" (p.173)

 

   내가 입맛을 다진 요리들은 대단한 요리들이 아니라, 소박한 요리들이었다. 제일 먹고 싶었던 음식은 태국의 프래에서 먹었던 계란덮밥. 식용유를 뿌려 팬을 달구고, 마늘 썬 것을 던져 넣고 들들 볶아, 붉고 푸른 고추를 다져 넣은 계란물을 단숨에 들이부어 만든 계란덮밥. 조그맣고 허름한 밥집에서 먹었던 그녀의 아침식사였다. 그 집에서 일하는 조수인 듯한 여인이 테이블에 와서 얼음 냉수 한 잔을 내민다. 워터 포 유. 그리고, 피시소스 포 유. 마침내, 오믈렛라이스 포 유.

 

    아침밥이 내 앞에 놓였다. 얼굴을 가까이 대자 훈기가 확 올라온다. 한국이나 일본식 오믈렛의 얇고 매끄러운 계단지단에 비해 몇 배 두툼한 계란옷을 얹은 밥이다. 피시소스 때문에 빛깔이 탁해진 계란옷 속으로 붉고 푸른 칠리 조각이 반투명하게 비쳐 보인다.

    숟가락을 꽂자 계란부침이 갈라지며 새하얀 쌀밥이 나타난다. 한 알 한 알 으깨지지 않고 쌀알의 모양이 고스란히 보존된, 이런 길거리 밥집에서 내놓는 것치고는 상태가 좋은 밥.

   아직 뜨거운 계란덮밥을 후후 불면서 먹는다. 구리구리한 피시소스의 짭짤함과 폭신한 계란부침이 주는 구수한 감칠맛, 거기에 매끄럽고 달콤한 라이스의 맛이 함께 느껴진다. 간이 완벽하고 재료간 조화가 어우러진 밥이다. (p. 29-39)

 

    아흑. 내일 도시락은 계란덮밥으로 하기로!  7월에 나는 이런 구절들을 출퇴근길의 지하철에서 읽었다. 그래서 배고프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허기졌지만 행복했다. 요즘 계속 좋은 책들을 읽고 있다. 한 권도 도중에 덮어버린 책은 없었다. 역시 책 값은 아끼는 게 아니다. 다행이다. 아직 못 읽은 좋은 책들이 우리 집에, 그리고 이 세상에 셀 수 없이 많이 남아있고, 팔월에는 광복절도 있으니까. :) 모두들 굿나잇-

 

    "아아, 좋은 밤이야!"

   알리시아, 하이네켄 홍보부서에서 근무하는 쌀쌀맞은 인상의 그녀가 만족스럽게 한숨을 쉰다. 모두 맞장구를 친다. 굿나잇. 정말 좋은 밤이라는 생각이다. 굿나잇.

   수면은 거울처럼 잔잔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마침 바람이 한 오라기도 불지 않는 밤이다. 바다 위에 떠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 정도 고요라면 우리가 앉아 있는 배 아래 깊은 물속 모래 바닥에 배를 깔고 쉬는 물고기들도 지금쯤 깊은 잠이 들었을 것이다.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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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요일. 마트에 들렀다 집에 바로 들어왔다. 훈제연어와 맥주를 사들고 들어왔다. 현관문을 닫자마자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니 엽서도 와 있었다. 이번주에 못 본 <로맨스가 필요해>를 봤다. 훈제 연어를 3분동안 흐르는 물에 두고 해동시켰다가 맥주와 함께 먹었다. 조금 느끼해지기 시작할 때쯤 뜨겁게 달군 팬에 연어를 구웠다. 자악자악 연어 구워지는 소리가 들리고, 쏴아쏴아 쏟아지는 빗소리도 들렸다. 나는 오늘 헤밍웨이만 생각하고 있다.

 

   지난 주 목요일부터 수업을 듣고 있다. 어떤 소설을 읽고, 그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수업이다. 처음에는 그냥 여름이 허무하게 가 버리는 게 아까워서 큰맘 먹고 결제했는데, 두 번 수업을 듣다 보니 이건 정말 좋은 수업이다. 올 여름을 나름 잘 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실까지 가는 동안 옛날 빙수를 파는 카페를 지나게 되는데, 어제는 거기서 라떼를 사마셨다. 수업 듣는 내내 비가 오거나, 비가 올 거 같거나, 비가 왔다. 처음 수업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이었고, 두번째 수업은 헤밍웨이였다. 밀란 쿤데라의 책은 읽지 못했고, 헤밍웨이 책은 읽었다. 짧막하고 조금은 긴 소설들이 뒤섞인 소설집이었는데, 좋았다. 선생님은 수업내내 좋은 작가지만, 정말 문제가 많다,라고 했는데. 그 말에 동의하겠다. 문제가 많다는 것에.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작가라는 것에.

 

   수업 중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 헤밍웨이 신드롬에 대한 이야기. 당시 헤밍웨이는 정말 붐이었단다. 지금의 소녀시대 인기만큼이나. 헤밍웨이도 그걸 즐겼다고 한다. 그는 마초였고, 영웅주의자였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경험한 것만 썼단다. 그런데 나중에 자신이 신화화되고 영웅화되었을 때, 그리고 그걸 자신이 즐기고 있었을 때는, 자신이 쓴대로 살려고 노력했단다. 그래서 그는 불행했단다. 그래서 그는 우울증에 걸릴 수밖에 없었단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무수히 많은 짐승들을 사냥했던 총으로 자기자신을 쏠 수밖에 없었단다.

 

   또 다른 한가지는 두려움에 대한 묘사. 단문체로 유명한 그도, 어떤 묘사에 있어서는 결코 단문체가 아니었단다. 집요하게 그것을 묘사하고 묘사했단다. 선생님은 그걸 두려움에 대한 묘사라고 생각한단다. 그리고 이런 문장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엉망으로 터진 머리는 깨진 화분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살아야만 아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읽어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읽고 오십시오. 읽으세요.

 

   그러니까 나는 이 수업을 위해 <킬리만자로의 눈>을 읽었다. 사실 이 수업의 목록 중에 헤밍웨이의 소설이 있어 이 수업을 신청한 것도 있다. 나는 헤밍웨이가 궁금했고, 더 읽고 싶었다. 이 수업은 1시간 정도는 작가의 생애나 배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1시간 정도는 그 작품에 대해 심층적으로 이야기한다. 이번에는 2시간 내내 완전 집중했다. 수업시간에 내가 읽었던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 언급되었던 이야기도 나왔고, 저번주에 본 <미드나잇 인 파리>에 등장했던 인물들도 나왔다.

 

   <킬라만자로의 눈>은 나를 여러 곳으로 데려다줬다. 킬리만자로의 설산으로, 사자가 있고 물소가 있는 사파리로, 아무도 없는 깊은 숲속으로,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게 되는 어느 아침 호수 한 가운데로, 송어가 솟구치는 강가로, 자신을 죽이러 올 킬러를 마냥 기다리는 침대 위로. 헤밍웨이는 그 순간 그 순간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곳에서 나는 때로는 행복했고, 때로는 쓸쓸했으며, 대부분 외로웠다. 그렇지만 기분 나쁜 외로움은 아니었다.

 

    13편의 짧고, 조금은 긴 소설들이 실려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는 지하철 안에서 한번 더 읽었던 소설은 '심장이 둘인 큰 강 1부'였다. 이상하지. 이 소설 속의 주인공 닉은 여러번 반복해서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행복해, 행복해, 라고. 응. 그런데 닉이 행복한 건 알겠는데, 왠지 모르게 나는 쓸쓸해진다. 행복한 동시에 쓸쓸해진다. 그러니까, 불행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온전히 행복한 것도 아니다. 이상하지. 그런데 나는 그런 기분이 참 좋아서 이 소설을 두번이나 읽었다.

 

   그는 도끼로 그루터기에서 잘라낸 소나무 조각 몇 개로 불을 피웠다. 철망을 불 위에 올리고, 장화를 신은 발로 철망의 다리 네 개를 박아 넣었다. 닉은 불 위의 철망에 프라이팬을 얹었다. 배가 더 고팠다. 콩과 스파게티가 따뜻해졌다. 닉은 그것을 휘젓고 함께 섞었다. 음식이 보글거리기 시작했다. 작은 거품들이 힘겹게 표면으로 솟아올랐다. 좋은 냄새가 났다. 닉은 토마토케첩 병을 꺼내고 빵 네 조각을 썰었다. 이제 작은 거품이 보글거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닉은 불 옆에 앉아 프라이팬을 들어냈다. 내용물을 반쯤 주석접시에 부었다. 음식은 천천히 퍼지며 접시를 채워나갔다. 닉은 그것이 너무 뜨겁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거기에 토마토케첩을 조금 부었다. 콩과 스파게티가 아직도 너무 뜨겁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불을 보았고, 이어 텐트를 보았다. 혀를 데어 이 모든 것을 망쳐버리는 짓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랫동안 그는 튀긴 바나나를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었다. 식는 것을 도저히 기다릴 수 없었기 떄문이다. 그의 혀는 아주 민감했다. 배가 몹시 고팠다. 강 건너 늪에서, 거의 어두워진 곳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는 텐트를 한번 더 보았다. 됐어. 그는 숟가락을 깊이 찔러 넣었다.

  "아흐." 닉이 말했다. "죽이네, 아흐." 그가 행복하게 말했다.

p.178-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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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리언 반스 책을 지금까지 세 권 정도 시도했던 거 같다. 한 권은 끝까지 읽었던 것 같고, 한 권은 얼마 못 읽고 덮었던 것 같다. 단숨에 읽은 책은 이 책이 처음. 다 읽었는데, 모르겠다. 줄리언 반스가 원서 150페이지의 이 책을 두고, 자신은 이 책이 300페이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니까, 뭐지?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나, 생각이 든다. 내가 잘 이해한 건지. 내가 생각한 게 맞는 건지. 한글 제목은 왜 이따위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되면, 이 소설은 처음과 전혀 다른 소설이 되는 것이다. 똑같은 문장들이고, 똑같은 사건인데 두번째 읽을 때는 다른 이야기가 되는 소설.

- 어떤 스포일러에도 노출되지 않고 읽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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