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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서재를쌓다 2012. 9. 10. 22:08

     

     

      

       토요일에는 친구가 바람을 쐬러 가자고 했다. 우리는 해질 무렵에 만났다. 광화문에서 비빔밥 한그릇씩을 먹고 경복궁역까지 걸어가 버스를 타고 부암동까지 갔다. 해가 지고 나무들이 많아 으슥한 길을 둘이서 뚜벅뚜벅 걸어 올라갔다. 산모퉁이 카페. 친구가 얼마 전에 여길 처음 와 봤는데, 이곳 야경이 너무 좋아서 내게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올라오는 길에 땀을 많이 흘려 차가운 커피와 차가운 유자차를 시켰다. 주말이라 서울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명당자리는 만석이었다. 명당자리에 자리가 나면 언제든 옮길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고 앉아 커피를 마시고, 밀린 이야기를 하고, 이어폰 한 쪽씩을 끼고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거짓말 같이 자리가 났다. 명당자리. 명당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한쪽 하늘에서는 비행기가 쉴 새 없이 날고, 저 아래 부암동에 마을버스가 오르내리는 게 보였다.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따뜻한 음료를 시킬 걸 후회했다. 친구와는 몇 년 동안 못 보고 지낸 적이 있었다. 한 여름에 다시 만났는데, 그때 삼계탕을 먹었다. 다음에 만나면 삼계탕을 먹자고 해야겠다.   

     

        일요일에는 조조로 <피에타>를 봤다. 나는, 김기덕의 어떤 영화는 좋았고, 어떤 영화는 보고 나와서 한없이 우울했고, 어떤 영화는 보고 싶지 않았다. <피에타>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깊었다. 그 장면이 한동안 기억날 것 같다.

     

        구월의 첫 주. 부암동에 가고, 피에타도 보고, 이 책도 읽었다. 동생이 이 책을 누군가에게 선물하려고 샀는데, 조금 읽다가 너무 좋아서 그냥 자기가 가져버렸다고 했다. 동생은 책귀퉁이를 접지도 못하고, 반듯한 포스트잇을 붙이지도 못하고 되는대로 종이들을 찢어 마음에 드는 페이지에 꽂아뒀는데 나중에 책을 읽으려고 보니까 찢어진 종이가 가득했다. 이대로는 가지고 다니면서 읽을 수가 없어서 동생이 표시해둔 페이지마다 노란 포스트잇을 붙였다. 구월 첫주 내내 이 책을 가지고 다녔는데 그 사이 큰 비가 갑자기 왔다. 집에 오니 가방이 젖어 있었다. 책이 울지는 않았는데, 붙여놓은 포스트잇이 너덜너덜해졌다. 책에 포스트잇의 노란 물도 들었다. 이 책이 더 마음에 들어졌다. 나는 다른 색의 포스트잇을 붙였다. 다행이 동생과 페이지가 겹치지는 않는다.

     

     

    - 문득, 아니 오래전부터 난 참 사랑을 못하는 사람이란 생각을 하곤 한다. 아무리 목숨을 걸어도 목숨이 걸어지지 않는, 일종의 그런 운명 같다. 이래서 사람이 안 되는 것도 같고 아무도 나를 사랑할 것 같지 않으며 사랑이 와도 바람만큼만 느끼는 것. 그래서 내 사랑은 혼자 하는 사랑이다.

     

    - 예전에는 그러질 못했지만, 얼마 전부터 술을 마시고 있는 촉촉한 나의 상태를 즐기게 되었다. 내가 술을 마시는 건 순전히 사람이 좋아서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사람보다 더 믿을 수 있는 건 술이라는 생각이다. 술은 착하며 솔직하다. 확실히 인간보다는 그렇다. 술만큼 인간적이게 하는 화학도 없다. 혼자서는 마시지 못하는 술 습관을 힘들게 고쳐, 혼자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혼자 술을 마신 상태에서는 다른 색깔에 물들기 쉬운 상태가 된다. 그 상태처럼 평화로운 시간도 없다. 인간적이고 싶을 때 술을 찾는 솔직한 상태. 단언컨대 술은 마음에 몸에 색을 밀어올린다.

     

    - 인연의 성분은 그토록 구체적이지도 선명하지도 않은 것으로 묶여 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좋아지면 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저녁이 되면 어렵고, 밤이 되면 저리고, 그렇게 한 계절을, 한 사람을 앓는 것이다.

     

    -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와 있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날씨처럼, 문득 기분이 달라지는 것. 갑자기 눈가가 뿌예지는 것.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지진난 것처럼 흔들리는 것.

     

    그리고,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절.

     

    - 삿포로에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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