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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먹고 마시고 여행할 나를 위해 - 열대식당
    서재를쌓다 2012. 8. 6. 20:40

    열대식당
    박정석 지음/시공사

     

     

       내게도 단골집이 있고, 좋아하는 메뉴가 있다. 투다리에서는 깻잎말이와 감자베이컨말이. 너무 멀어서 이제는 못가지만 양재역에는 오동통한 닭을 아주 바싹 튀겨주는 통닭집이 있다. 시장건물 지하에 있고, 바로 옆에 다른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있어 정신이 없지만, 여기 통닭이 진리다. 닭똥집 튀김도. 맥주도 아주 싸다. 양도 엄청 많다. 요즘의 네네치킨과는 비교가 안된다. ('양'이! 네네치킨도 아낀다. 사실 아끼지 않는 통닭은 없음.)

     

        얼마 전, 비오는 날 홍대의 술집에서는 기가 막힌 훈제연어 샐러드를 먹었다. 훈제연어를 좋아해서 여러 곳에서 몇 번 시도해봤는데 모두 다 실패. 비린맛이 나거나, 짜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여기 샐러드는 사르르 녹았다. 금방 통닭을 먹고 와서 연어 한 점을 앞접시에 옮겨놓고 한참을 있었는데 친구가 여기 맛있다, 라고 했다. 친구는 내가 그래? 그러고도 맛있다는 얘길 안해서 이상하다 생각했단다. (내가 이미 맛을 봤다고 생각했음.) 이거 분명 얘가 좋아할 맛인데, 맛있으면 맛있다고 생난리를 치는 앤데. 한시간쯤 지나서 겨우 통닭이 소화되서 앞접시에 옮겨놓은 연어를 맛봤는데 그때부터 내가 얼마나 생난리를 쳤는지는 말하면 입, 아니 손 아프다.

     

        맛있는 해물국물떡볶이가 나오는 집, 반지하라 소리가 울리는 통에 시끄러워 죽겠지만 꼬치구이가 기가 막힌 집, 비리지 않은 따듯한 히레 정종을 만들어 주는 집, 탕수육에 소스국물을 잔뜩 얹어주는 데도 바삭바삭한 집. 모두 올 여름에 친구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찾아낸 집이다. 아, 정말 죄다 술집이구나. 흑흑.

     

        이 책을 읽었다. 제목하야 <열대식당>. 계속 망설였었다. 집에 읽을 책은 넘쳐나고, 저 많은 안주와 술을 여름내내 마셨고, 마시고 있고, 또 마시려면 아껴야 하니까. 책값 만 사천원. 1주일 넘게 고민하다 지른 책인데, 이번 주말에 이 작가의 책 한 권을 더 주문해서 받았다. 이 책도 마음에 들었고, 이 작가도 궁금했다. 그래서 작가의 전작들을 훑어보는데, 쭉 이 작가의 여행책을 읽어온 사람이 남긴 글이 있었다. 그 사람은 자기가 변한건지, 작가가 변한건지, 아니면 둘 다 변한건지, 작가의 최근의 책들이 자신에게 편안해졌다고 했다. 뭔가 근사했다. 어떤 작가의 책을 시간을 두고 읽어나가는 거. 작가는 여행을 하고, 글을 쓰고, 책을 내고, 나는 책을 사고, 책을 읽고, 또 다음 책을 기다리고. 각각의 자리에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얼마간의 변화를 겪어나가는 거. 다음 책을 읽을 때 서로의 변화를 어렴풋이 느끼게 되는 거.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는 책의 작가 말고, 사람들이 많이는 모르지만, 그래서 더 좋은, 아끼는 작가. 나도 그녀의 그런 독자가 되어보기로 했다.

     

       먼 바다를 건너고 싶게 하는 것이 때로는 그렇게 조그만 일이라는 게 놀랍기도 하다. (p.32)

     

       내가 택한 그녀와 나의 두번째 책은 유럽 여행책이고, 우리의 첫번째 책 <열대식당>은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며 먹은 음식들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주문하고 첫 장을 펼치기까지는 고민이 많았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자 금방 빠져들었다. 음식 이야기라면, 그것도 맛있는 음식 이야기라면 정신을 못차리는 나. 그녀는 여기에 여행 이야기까지 들려준다. 내가 못 가본 도시들, 풍경들, 내가 못 먹어본 음식들, 문장을 따라 고이는 침들, 떠올려지는 맛들, 내가 못 만나본 사람들. 그리고 언제고 가 보고 싶은 도시, 맛보고 싶은 음식들, 만나보고 싶어지는 사람들. 이래서 사람들이 여행책을 읽는구나 싶다. 떠나기 위해서, 혹은 떠나지 않기 위해서. 이 책의 173페이지에 '해피 아워'에 대해 나온다. 이 책이 내게 7월의 '해피 아워'였다. '해피 아워'를 꿈꾸게 만드는 책.

     

         "우리 식당도 맛있어요. 뭐든 주문해보세요."

       소녀는 내가 건너편 식당을 쳐다보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렇게 손님이 많은 식당 바로 맞은편에서 텅 빈 식당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별로 재미없는 일이겠지.

         "우리 식당도 맛있어요. 정말이에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 소녀가 열심히 말한다.

         "전부 다 맛있어요. 메뉴판에 있는 것 아무거나 주문해보세요."

        메뉴판을 펼친다. 모두 아주 싸다. 호이안의 올드쿼터에 즐비한 멋진 식당들의 반에도 못 미치는 가격이다. 요리 세 개를 시켰지만 다 합쳐 5달러를 넘지 않는다.

        해피 아워에는 모든 칵테일이 한 잔에 1달러라고 씌어 있다. 마가리타, 싱가포르 슬링, 블랙 러시안 모두 1달러다.

        "언제가 해피 아워지?"

        "바로 지금이요. 사실 하루 종일 해피 아워예요!" (p.173)

     

       내가 입맛을 다진 요리들은 대단한 요리들이 아니라, 소박한 요리들이었다. 제일 먹고 싶었던 음식은 태국의 프래에서 먹었던 계란덮밥. 식용유를 뿌려 팬을 달구고, 마늘 썬 것을 던져 넣고 들들 볶아, 붉고 푸른 고추를 다져 넣은 계란물을 단숨에 들이부어 만든 계란덮밥. 조그맣고 허름한 밥집에서 먹었던 그녀의 아침식사였다. 그 집에서 일하는 조수인 듯한 여인이 테이블에 와서 얼음 냉수 한 잔을 내민다. 워터 포 유. 그리고, 피시소스 포 유. 마침내, 오믈렛라이스 포 유.

     

        아침밥이 내 앞에 놓였다. 얼굴을 가까이 대자 훈기가 확 올라온다. 한국이나 일본식 오믈렛의 얇고 매끄러운 계단지단에 비해 몇 배 두툼한 계란옷을 얹은 밥이다. 피시소스 때문에 빛깔이 탁해진 계란옷 속으로 붉고 푸른 칠리 조각이 반투명하게 비쳐 보인다.

        숟가락을 꽂자 계란부침이 갈라지며 새하얀 쌀밥이 나타난다. 한 알 한 알 으깨지지 않고 쌀알의 모양이 고스란히 보존된, 이런 길거리 밥집에서 내놓는 것치고는 상태가 좋은 밥.

       아직 뜨거운 계란덮밥을 후후 불면서 먹는다. 구리구리한 피시소스의 짭짤함과 폭신한 계란부침이 주는 구수한 감칠맛, 거기에 매끄럽고 달콤한 라이스의 맛이 함께 느껴진다. 간이 완벽하고 재료간 조화가 어우러진 밥이다. (p. 29-39)

     

        아흑. 내일 도시락은 계란덮밥으로 하기로!  7월에 나는 이런 구절들을 출퇴근길의 지하철에서 읽었다. 그래서 배고프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허기졌지만 행복했다. 요즘 계속 좋은 책들을 읽고 있다. 한 권도 도중에 덮어버린 책은 없었다. 역시 책 값은 아끼는 게 아니다. 다행이다. 아직 못 읽은 좋은 책들이 우리 집에, 그리고 이 세상에 셀 수 없이 많이 남아있고, 팔월에는 광복절도 있으니까. :) 모두들 굿나잇-

     

        "아아, 좋은 밤이야!"

       알리시아, 하이네켄 홍보부서에서 근무하는 쌀쌀맞은 인상의 그녀가 만족스럽게 한숨을 쉰다. 모두 맞장구를 친다. 굿나잇. 정말 좋은 밤이라는 생각이다. 굿나잇.

       수면은 거울처럼 잔잔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마침 바람이 한 오라기도 불지 않는 밤이다. 바다 위에 떠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 정도 고요라면 우리가 앉아 있는 배 아래 깊은 물속 모래 바닥에 배를 깔고 쉬는 물고기들도 지금쯤 깊은 잠이 들었을 것이다.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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