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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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의 일들서재를쌓다 2012. 7. 7. 20:01
소설가 김연수는 언젠가 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에밀리 브론테의 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도입부의 목소리에 전율하지 못하고 이십대가 됐다면 그보다 슬픈 일은 없을 것"이라고 썼다. 그는 을 "십대시절에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소설", "열병의 소설"로 설명하는 한편 "왜 숱한 대중적 멜로드라마는 고전이 되지 못했는데 만은 고전이 되었느냐, 대학 시절부터 나는 이 질문의 해답을 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 문학이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는 생각도 털어놨다. - 씨네21 860호, '사랑은 어떻게 끝내 극렬하게 결렬되는가' 중에서 지난 토요일, 하루종일 잠을 자다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자 보문역에 있는 친구집에 갔다. 친구는 회사에서 20여 분 거리의 집에 최근 이사를 했다. 집들이였다. 친구는 내 바램대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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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만난 좋은 건축가들서재를쌓다 2012. 7. 4. 22:08
비가 오는 날이었다. 연차를 썼는데, 병원에 가야지 싶었다. 일주일 전쯤 술을 마시고 크게 넘어졌는데 계속 팔이 욱신거려서 혹시 이상이 있는 건가 싶어서. 원래 조바심 내는 스타일이 아닌데, 나이를 먹으니 이것저것 걱정되는 것들이 많아졌다. 비오는 날이라 디스크에, 깁스에 동네에 있는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병원에 죄다 모였다. 그 날 세 시간 넘게 기다리고 엑스레이 찍고 진료를 받았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결론. 불친절한 의사의 고 진단이 필요했던 거지. 다음날 욱신거렸던 증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날, 병원에서 할머니들 사이에 앉아 읽었던 책이다. 책장이 빨리 넘어가 금새 다 읽었다. 사고 싶은 책들을 고르다, 어젯밤에 이 책을 중고로 올려놨다. 이상하게 한번 더 읽지 않을 것 같아도, 팔려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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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소리, 투스카니의 태양, 신사의 품격서재를쌓다 2012. 6. 24. 00:08
금요일, 홍대의 한적한 커피집에서 이 책을 끝냈다. 저녁이었고 해가 지고 있었다. 일이 끝나지 않은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고,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한참을 가만히 밖을 내다봤다. 이 책은 좋아서, 정말 좋아서 빨리 읽어버리고 싶기도 했고, 아껴 읽고 싶기도 했다. 마음에 드는 구절들이 많아 자주 멈췄다. 책이 두꺼워서 정말 다행이었다. 하루키가 아내와 함께 3년 여동안 유럽에서 지낸 이야기이다. 그는 그리스와 이탈리아 등지에 집을 빌려 그곳에서 단기, 혹은 장기적으로 '생활'했다. 장을 봐 와서 음식을 해 먹기도 하고, (싱싱한 연어를 사와 회로도 먹고, 초밥으로도 만들어 먹고 머리쪽은 국으로 끓여 먹는다는 이야기에서 침이 꿀꺽) 주변의 마음에 드는 레스토랑과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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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톤과 서머셋 몸, 그리고 여름서재를쌓다 2012. 6. 17. 20:43
이번 주 내내 에피톤 새 앨범을 듣고 있다. 그리고 이번 주 내내 이 소설을 생각했다. 서머셋 몸의 '레드'. 결국 금요일 퇴근길, 교보에 들러 이 책을 샀다. 토요일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이 소설을 읽었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이 세번째인가. 네번째인가. 대학교 때 처음 읽고, 몇 년의 시간을 두고 다시 읽고 있다. 또 몇 년 뒤에 생각이 날 테고, 그러면 나는 네번째인가, 다섯번째로 이 소설을 읽게 되겠지. 내게 몇 년의 시간을 두고 결혼식장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이 있다. 이번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사람 생각을 했다. 나이들고 뚱뚱한 선장이 있다. 선장의 배는 사업차 원주민 마을에 정박하게 된다. 일요일이었다. 선장은 그 마을을 거닐다 야자수를 이어 만든 다리를 건너게 된다. 그 다리 너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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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 걷기 여행 중국, 라오스, 미얀마 - 밑줄긋기서재를쌓다 2012. 6. 3. 21:22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3 김남희 지음/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없어도 되는 것들로 가득 찬 나를 텅 비워 돌아가는 날, 바람만 담은 깃발처럼 가볍게 나부낄 수 있기를... 중국 저장 성 닝보에서 쓰다. p.21 이 부족은 결혼을 하지 않고 자유롭게 연애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남자나 여자나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다가가 손바닥을 간질이면 좋아한다는 의미란다. p.150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은 프랑스인들이 붙인 이름이고 원래 이곳의 이름은 위앙짠이라고 한다. 메콩 강을 따라 흐르던 달이 숨을 멈추고 잠시 쉬는 곳, 즉 '달이 걸린 곳'이라는 뜻이란다. 참 어여쁜 이름의 수도다. p.232 그들은 그저 느리게 섬 곳곳을 어슬렁거리고, 그물침대에 드러누워 책을 읽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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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 밑줄긋기서재를쌓다 2012. 5. 16. 21:14
노인과 바다 (반양장)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문학동네 책이 아주 잘 읽히는 한 주를 보내고 있다. 짧은 두께의 책들을 읽고 있는 탓이긴 하지만. 독서욕구가 마구마구 샘솟는 요즈음. 그동안 뜸했었지. 어느새 일반회원이 되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한 무더기의 책을 주문했다. 이걸 다 읽고 나면 여름이 와 있겠지. 이번주 월요일에는 를 읽었다. 아침 출근길에 시작해서 저녁 퇴근길에 연이어 읽고, 집에 와 씻고 누워서 마저 읽었다. 노인은 청새치와 싸우고, 상어떼와 싸웠지만, 나는 잠과 싸웠다. 요즘 하도 일찍 자는 습관이 들어서 10시 전에 자는 일이 부지기수. (오늘은 적도의 남자를 봐야 하므로 버텨야 한다!) 졸린데 기필코 다 읽고 자야겠는 거다. 졸다가 깨고 또 졸다가 깨서 책을 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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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날마다 축제 - 헤밍웨이의 젊은 날서재를쌓다 2012. 5. 13. 15:10
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주순애 옮김/이숲 운 좋게 그날 작업이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줄줄이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글을 쓸 때면 언제나 한 대목을 완성하기 전에는 중간에 일을 멈추지 않았고, 또 다음번에 쓸 내용을 미리 생각해둔 다음에야 하루 일을 끝냈다. 그런 식으로 다음 날도 무난히 글쓰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때로 새로 시작한 글이 전혀 진척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벽난로 앞에 앉아 귤 껍질을 손가락으로 눌러 짜서 그 즙을 벌건 불덩이에 떨어뜨리며 타닥타닥 튀는 파란 불꽃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창가에서 파리의 지붕들을 내려다보며 마음 속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넌 전에도 늘 잘 썼으니,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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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코와 리타극장에가다 2012. 2. 12. 11:14
나는 죽은 뒤에 뭔가 남는다거나, 다시 태어난다는 거, 믿지 않아. 왜. 믿고 싶지 않으니까. 어째서. 가혹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아. 뭐가 가혹해. 예를 들어, 네가 죽어서 나한테 붙는다고 해도 나는 모를 거 아냐. 모를까. 모르지 않을까. 사랑으로, 알아차려봐. 농담이 아니라, 너는 나를 보는데 내가 너를 볼 수 없다면 너는 어떨 것 같아. 쓸쓸하겠지. p.56 대니 드비토 너의 이름은 유라. 나의 이름은 유도씨. 황정은의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화자인 나는 유라. 죽은 원령이다. 나는 죽었고, 유도씨는 살아가고 있다. 나는 죽었고, 원령이 되었다. 언젠가 두 사람이 침대에 나란히 누워 나눴던 말. 내가 먼저 죽으면 유도씨가 나를 붙여줘. 나는 죽어서도 쓸쓸할 테니까. 그러자 유도씨가 붙어.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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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앤드루 포터!서재를쌓다 2012. 1. 14. 14:15
여기는 아득한 청춘의 그림자들이 고요히 스며들던 한 생애의 뒷골목, 저녁이면 녹색의 별들이 뜨는 리스본 7월 24일 거리 나는 7월 23일의 거리를 걸어 한없이 그대에게로 가고 있었는데 그대는 여전히 7월 24일 거리에서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테지 우리의 청춘은 늘 시차가 다르던 생의 거리 - 리스본 7월 24일 거리 중에서 이번 주 내내 장소들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이야기들이 시작되고, 성장하고, 끝을 맺게 되는 장소들을 찾아 헤맸다. 여전히 찾고 있지만. 어제는 조금 늦게 회사에서 나와 Y씨랑 사람들이 꽉 찬 이천이백번을 타고 합정으로 왔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 아쉬워 산책길을 걸어 떡볶이와 맥주를 먹으러 갔다. 가는 길에 누군가를 본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본 것 같아요. Y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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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밑줄긋기서재를쌓다 2012. 1. 8. 13:44
희랍어 시간 한강 지음/문학동네 한강의 소설은 시를 읽듯, 그렇게 읽게 된다. 지난해 십일월과 십이월에 천천히 읽어 나간 한강의 노래.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와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은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