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서재쌓기

from 기억의기억 2012. 1. 7. 19:18

심야식당 8.
우리, 선화.
파씨의 입문.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골드보이, 에메랄드 걸.

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
행복이 번지는 곳, 크로아티아.
원더보이.
패션왕 1.

 

울분.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

화성의 인류학자.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

집을 짓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

물방울.

노인과 바다.

은교.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3 - 중국.라오스.미얀마 편.

먼 북소리.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킬리만자로의 눈.

제49호 품목의 경매.

열대식당.

소중한 날의 꿈.

 

비행운.

사랑해야 하는 딸들.

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삶.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2만원의 행복 : 게스트하우스에서의 하룻밤.

계간 아시아 2012.가을호 : 삿포로.

에브리맨.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일층, 지하 일층.

우연한 걸작.

이백오 상담소.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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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슬픈 짐승

from 서재를쌓다 2011. 10. 23. 00:04
슬픈 짐승 (반양장)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문학동네


"나는 기록보관실에 배치되었다. 이제 브라키오사우루스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분명 내 마음을 상하게 했을 텐데 지금 생각하니 별로 상관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이 믿었던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예배에 가기를 포기하는 것처럼 나도 이미 얼마 전에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발아래서 드리는 나의 아침 예배를 포기한 뒤였다. (...)"  p.190-191



    9월의 어느 날이었다. 자주 가는 서재에 이 책에 관한 리뷰가 올라왔다. 어떤 리뷰는 당장 오프라인 서점으로 달려가게도 한다. 지금 당장, 이 책을 읽지 못하면 죽을 것처럼. 내게 이 책이 그랬다. 오랜만에 오프라인 매장에서 책을 구입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고, 문을 열고 들어가, 검색대에서 검색을 한 뒤, 책을 찾았다. 니가 그 아이구나, 반가웠다.

    주말에 비가 내리면 이 책을 한번 더 읽을 작정이었다. 분명 어제 늦게까지 술을 마셨을 때는 보슬보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눈을 뜨니 아쉽게도 그쳐 버렸다. 비가 오면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보일러를 틀어놓고 이불 속에 들어가 이 책을 읽을 작정이었다. 비가 오질 않아 내내 잤다. 그리고 이 밤, 리뷰를 다시 찾아 읽었다. 이 소설은 지금은 이 땅에 살지 않는 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와 사랑에 빠져 버린 여자와,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뼈대를 보고 "아름다운 동물이군요."라고 이야기한 남자와의 이야기이다. 사랑, 이야기라고 해야겠지.


"나는 오히려 현실이 너무 아름답게 보일 때는 그것을 꿈이라고 여기는 편이지. 행복은 무상한 거야. 프란츠가 말한다. (...) 프란츠의 손가락 끝 사이에서 포도알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프란츠가 우리를, 자기와 나를, 꿈이라고 여기고 있는지 현실로서 참아내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려고 애쓴다. 꿈이라면 조만간에 어쩔 수 없이 깨어나야 하는 것이고, 그에게 우리가 현실이라면 우리가 너무도 아름다운 존재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p.96-97


   독일소설이다. 통독이 된 즈음의 이야기다. 한때 장벽을 두고 이쪽과 다른 저쪽에 있었던 남녀가 장벽이 무너지고 만났다. 남자는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뼈대를 앞에 두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행복은 무상(無常)하니까. 아주 오래 전 이 땅에 발 디디고 있던 거대하고 아름다웠던 공룡은, 이제 뼈대만 남아 남자 앞에 전시되어 있다. 남자는 그 뼈대 위에 둘러졌던 몸덩어리를 상상한다. 아름다운 육신. 그것은 꿈이고, 아름다운 현실. 사라져버려서, 뼈대만 남은 아름다운 현실. 그건 추억. 가슴 아프지만 아름다운 추억. 

   여자는 생각하고 생각했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 그녀에게 사랑이 왔다. 그녀에게 없는 것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건 슬픈 일이었다. 여자는 괴로웠다. 행복이 무상(無常)하듯, 사랑도 무상(無償)했다. "그는 그녀 옆에서 자지만 너와는 함께 자잖아. 그와 함께 살고 싶어. 내가 아테에게 말했다." p.154 "나는 프란츠의 어깨와 목 사이 움푹한 곳에 나의 뭉툭한 짐승코를 파묻었다. 프란츠는 내 호흡의 그늘 안에 숨고 싶은 것처럼 그 안에서 낮게 숨쉬었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 나는 이 시간 속에서 죽고 싶었다." p.170


   어쩌면 모든 게 꿈일 지도 몰라. 여자의 상상일 지도 몰라. 남자가 여자를 떠난 것은, 아니 두 사람이 지금은 멸종된 브라키오사우루스 앞에 만나 사랑을 시작한 것은. 모든 게 여자의 상상일 지도 몰라. 인생은 무상(無常)하니까. 사랑 또한. 애써 그렇게 상상하려 했다. 그럼에도 마음이 아팠다. 남겨진 여자가 견딘 추억들이 무서웠다. 서러웠다. 두 사람이 함께 한 사랑을, 한 사람만 추억한다는 건 무섭고 서러운 일이라는 걸 배웠으니까. 결국 사랑이 무상(無常)한다는 걸 배운 건, 혼자 남겨졌을 때였으니까. 여자는 추억하고 추억한다. 그녀에게 남은 일은 그것밖에 없다. 슬픈 짐승. 옛날, 아주 먼 옛날, 이 지구상에 인간이라는 동물이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걸 상상하지도 못했을 아주 먼 옛날, 브라키오사우루스도 사랑을 했겠지. 그렇다면 그들도 슬픈 짐승. 아름답지만 슬픈 짐승. 비가 내리길 기다리고 있다. 그때 이 슬프고 아름다운 소설을 다시 읽을 거다.


"카린과 클라우스는 학창시절부터 알던 사이였다. 그들은 내가 결코 잡지 못했던 것, 즉 청춘의 사랑이었다. 청춘의 사랑이 무엇이냐고 누군가가 물었다면 나는 카린과 클라우스라고 말했을 것이다. 청춘의 사랑은 단순히 젊은 시절에 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다. 청춘의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견주어 잴 수 있을 어떤 것도 아직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유일하게 그 사랑 자체를 위해서 존재한다. (...) 우리는 고치 속에서 어느 날 무엇이 되어 피어날 것인지 아직 불안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그 두 사람은 이미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학교 운동장 위의 먼지 나는 안개 속에서 춤추고 있었다."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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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청어람미디어


 
    다행인지, 아닌지 그 사진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누군가 조작한 거라 했다. 하지만 그가 곰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것은 사실이라 했다. 밤이었고,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그의 친구들이 그렇게 이야기했단다. 그는 43년을 살다 갔다. 그 중 많은 시간을 알래스카에서 보냈다. 그는 그 곳에서 가장 행복했다. 1996년 7월의 일이다. 그가 쿠릴 호반에서 취침 중 불곰의 습격을 받은 것은. 친구와 나는 이 책을 함께 읽었다. 나는 김남희에게서 이 책을 추천받았다. 추석에 내게 고즈넉한 일본의 길들을 소개해 준 그 김남희. 나는 그녀에게 반했고, 그녀의 인터뷰를 찾았고, 그 인터뷰 속에 그가 있었다. 호시노 미치오. 한때 그녀는 그와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너무 좋아서 그러고 싶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검색을 했는데, 그 사진이 나왔다. 우리가 착각한 그 사진. 나도 한 권 사고, 친구에게도 한 권 보냈다. 친구는 책을 다 읽고 벌떡 일어나 옆에 있는 신랑에게 나 알래스카에 갈래, 라고 말했다고 한다. 호시노 미치오. 구월의 어느 금요일 저녁에 만나 우리는 내내 이 사람 이야기를 했다. 그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았는지, 알래스카가 얼마나 근사한 곳이었는지, 그의 친구들은 또 얼마나 멋진지, 그가 만난 고래들과 곰들과 카리부의 발자국 이야기. 우리는 결코 그처럼 살 수 없을 거라는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들을 하며 함박스테이크를 먹고, 맥주를 마시고, 소주를 마시고, 커피를 마셨다. 함박스테이크를 먹고 나와 거리를 걷다 어떤 책을 발견했는데, 그 책에 흑고래가 무리를 지어 청어떼 사냥을 하는 사진이 있었다. 우리는 그 사진을 보고 반가워했다. 그건 그가 우리에게 알려준 것.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이 책은 친구와 내가 올해 초 함께 읽은 책. 어찌나 반갑던지. 

    눈을 감고 상상해봤다. 내가 그의 장례식 한 켠에 있는 상상. 그 곳은 춥지만 따듯한 알래스카 땅. 그가 헌책방에서 보고 반해버린 그 사진 속 땅 위. 그는 도쿄의 헌책방에서 알래스카 어느 마을의 사진을 보고 반해 말도 안 되는 주소를 지어내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 마을에 가고 싶다고. 그런데 아는 이가 없으니 도와달라고. 그렇게 반년이 지나고 답장이 왔다고 한다. 그렇게 그의 알래스카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 땅 위에 그가 사랑했던 알래스카 사람들이 모두 모여있다. 클리포드와 셰리, 밥 율, 미러 웨스턴, 셀리아 헌터, 알과 게이, 월터 할아버지, 케니스 누콘까지. (언젠가 내게 이 책의 딱 한 챕터만 볼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진다면, 정말 딱 한 챕터 뿐이라고 한다면, 난 망설임없이 케니스 누콘 이야기를 읽을 것이다. 그의 집이 잘 있는지, 알래스카의 겨울을 혼자서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가 살아 있다고 믿고 싶다. 여전히 외롭지만 씩씩하게. 사람을 그리워하며.) 그들이 모두 모여 미치오를 떠나보낸다. 슬프지 않게. 그들은 흑곰, 비버, 연어, 블루베리, 크랜베리로 진수성찬을 만들어 놓고, 그를 보낸다. 어떤 이는 낮은 노래를 부르고, 어떤 이들은 천천히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춤추면서 미치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얼마나 알래스카를 사랑했는지, 그가 얼마나 알래스카와 잘 어울렸는지. 따듯하고 따스한 슬픔이 마을 전체에 모락모락 퍼진다. 

   " 이 마을을 찾아가보고 싶었다. 사진 캡션에 'Shishmaref'라고 씌어 있었다. 지도에서 그 이름을 찾아냈다. 그러나 찾아가려도 해도 방법을 알 수 없었고, 편지를 쓰려고 해도 주소를 알 수 없었다. 사전에서 'mayor'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읍장'..... 아마 이장과 비슷한 뜻 같은데 이걸로 하자.

Mayor
Shishmaref
Alaska U.S.A."

    책을 읽는 동안 드문드문 든 생각은 나 지금 뭐하고 있지, 하는 생각. 미치오가 내게 말한다. 진심을 다해 살아가자고. 나는 책장을 덮고 내 진심에 대해 생각한다. 내 생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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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가에 있는 빨간 소파에 걸터앉아 책을 읽다가 문득 목이 말라 곁에 두고 마시는 물통을 흘끗 바라본다. 말간 물이 반쯤 차 있는데 어쩐지 물이 해갈해줄 갈증은 아니다. 주머니에 1파운드짜리 동전 서너 개를 대충 챙겨 넣고, 읽던 페이지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옆구리에 낀 채 집 밖으로 나선다.
    슬리퍼를 신고 쉬엄쉬엄 걸어가도 3분 거리에 펍이 있다. 수없이 열었던 갈색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 수없이 시켰던 맥주를 시킨다. 정성스레 따라 준 맥주를 조심스레 받아들고 종종걸음으로 구석 자리로 가 앉는다.
    손가락을 찔러 넣었던 페이지를 그대로 열어 아까 읽던 구절을 찾는다. 더듬더듬 단어를 헤매며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머릿속엔 문장이, 입안엔 맥주가 쏟아져 들어온다. 책과 맥주에 빠져든다. 술이 술술 넘어갈수록 책장도 흐르르 넘어간다. 취기가 오르니 재미난 구절은 더 재미지고 애달픈 구절은 더 짠하다.
- p.133


    이런 책을 읽었다. 요즘은 먼 나라들에 대한 책을 읽는다. 이 책은 런던의 이야기였고, 걷기 좋은 유럽의 길을 소개한 김남희의 책도 내게 왔다. 알래스카에서 살다가, 그 곳의 자연을 무척 사랑하다가, 불곰의 습격에 사망한 호시노 미치오의 책은 지금 읽고 있는 책. 인터넷에서 그가 찍은 마지막 사진을 봤다. 불곰이 어느 텐트 안을 위협적으로 들여다 보고 있는 사진. 그는 그 시간, 그 텐트 안에 있었다. 결국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 그는 도망가지 않고 이 생의 마지막, 그 사진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삶이 궁금해졌다. 그가 사랑한 알래스카가 보고 싶었다. 역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인가. 책이 잘 읽힌다. 어느 리뷰를 읽고 독일 소설 한 권도 구입했다. 간만에 오프라인 서점에서. 사랑 이야기다.

    비가 온다지. 오늘 중고서점에 올려놓은 책이 네 권 팔렸다. 모두 읽은 책이고, 가지고 있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아 내놓은 것인데 박스에 담으니 왠지 아쉽다. 그래서 한번 더 쓰다듬어 주고, 허브차도 두개 함께 넣는다. 이렇게 보내고 또 보고 싶은 책 맞이해야지. 오늘도 찜해둔 책 하나 있다. 이번주에는 비가 온단다. 그러면 또 추워진단다. 그렇단다.

    '책꽂이'라는 어플이 있다. 동생이 추천해준 건데 꽤 괜찮다. 읽은 책, 읽고 있는 책 목록을 만들 수 있고, 읽기 시작한 날과 다 읽은 날도 표시해둘 수 있다. 나만의 별점도 매길 수 있고, 메모도 남길 수 있다. 나는 주로 좋았던 부분들을 남기는데, 그때그때 떠오르는 감상을 남겨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제일 마음에 드는 기능은 내가 남긴 메모를 버튼 하나만 누르면 누군가에게 문자로 보낼 수 있고, 카카오톡으로 보낼 수도 있고, 트위터로도 남길 수 있는 것. 그 사람에게 내 메모랑 그 책 제목이랑 몇 페이지인지가 함께 간다.


     아, 나 차마고도에 관한 책도 읽었다. 그러고보니 이번 달에 책 많이 읽었구나.

차마고도
KBS 인사이트아시아 차마고도 제작팀 엮음/예담

    이 책은 최불암의 나레이션으로 방송되었던 다큐라고 하는데, 나는 못봤다. 뒤늦게 이 책을 읽었는데, 아침 출근길에 자주 훌쩍였다. 차와 말이 다녔던 옛길. 이 책을 읽으면서 세 개의 메모를 남겼다. 

1.
마치 지상에 눕혀놓은 거대한 거울처럼 고원의 한가운데 누워있는 소금호수, 짜부예차카. 이 기적 같은 일 역시 지구의 생명활동과 연관이 있다. 히말라야와 티베트 땅은 오래전에 바다였다. 약 4000만 년 전에 인도 대륙과 아시아 대륙이 거대한 충돌을 일으키면서 그 가늠할 수 없는 힘 때문에 바다 밑의 땅이 솟아올랐다. 실제로 대륙의 융기를 목격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p. 165

2.
파드마삼바바에게 비나이다. 모든 중생을 지켜주소서.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도록 해주소서
중생들이 가는 길이 평안하도록 돌봐주소서
중생들이 마음으로 바라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도록 해주소서
중생들이 재난에서 멀어지도록 해주시고
그들이 늘 평안하도록 돌봐주소서

바람과 검은 하늘과 차가운 별빛뿐인 해발 4000미터의 고원. 모닥불 가에서 모든 중생의 평안을 비는 드룩파들의 기원은 감동적이다.
-p. 177

3.
"소금 한 자루에 옥수수 몇 자루인가?"
중요한 순간이다. 이 순간의 거래로 지난 여정에 대한 보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올해 후리코트 농사는 어떤가?"
"그저 그렇다."
"옥수수 농사가 풍년이라고 소문이 났다."
팽팽한 신경전 겸 탐색전이다.
"풍년이라지만 큰 풍년은 아니다."
"봐라, 소금은 최상급이다. 차도 아주 좋은 차다. 비를 한 번도 맞지 않았다."
"얼마를 원하는가?"
돌포파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한다. 적어도 소금 한 자루에 옥수수 세 자루는 받아야 한다. 네 자루를 받을 수 있다면 대성공이다. 차 한 덩이에 옥수수 두 자루를 받아야 한다. 몇 자루를 부를 것인가? 고심하던 돌포파가 마침내 가격을 제시한다.
"소금 한 자루에 옥수수 세 자루, 차는 두 자루다."
후리코트 사람이 돌포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돌포파가 긴장한다.
"록보! 우리는 록보가 아닌가?"
'록보'는 티베트말로 '친구' 라는 뜻이다. 돌포파의 록보라는 말에 후리코트 사람의 얼굴이 환해진다.
"좋다, 록보. 올해는 옥수수가 아주 풍년이다. 소금 한 자루에 옥수수 다섯 자루, 차는 세 자루를 주겠다.
- p. 226


그리고 박솔, 저 잔에 담긴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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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X에게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열화당


    2월. 우리는 광화문의 술집에 있었다. 좁은 나무 계단을 삐걱대며 올라가면 작은 다락방이 있는 술집이었다. 다섯 개의 탁자가 놓여져 있고, 그 중 하나에 앉아 술을 마셨다. 따뜻한 정종을 한 잔 마시니 방바닥이 뜨끈해졌다. 한 잔만 마시고 가자고 한 것이 두 잔이 되었고, 세 잔이 되었다. 아마 다섯 잔 정도 마셨을 거다. 옆 테이블에 영풍문고 종이가방을 든 점잖은 아저씨 일행이 들어와 정종을 시켰다. 우리가 시킨 모듬 꼬치에 참새구이가 들어가 있나 그런 이야기도 했었다. 가족이야기도 했고, 옛날 사람들 이야기도 했다. 조금 울기도 했지만, 많이 웃었다. 밖은 추웠지만 방바닥은 뜨끈뜨끈했다. 내가 이 책을 꺼냈다. 세 잔 정도 마셨을 거다. 

   편지로만 씌어진 소설이야. 이 소설이 마음에 들었던 건 손 그림이 나오면서부턴데 여기 봐봐. 여자가 남자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기 손을 그려 보내. 처음 그림이 펜을 쥐고 있는 손이야. 손 그리는 법을 설명한 책을 보고 그린 그림이야. 이 소설을 읽다가 눈물이 날 뻔 했는데, 그건 다 손 그림이 나오는 부분이야. 처음엔 편지 쓰고 있는 손. 여기 손에는 눈이 있어. 꼭 잡고 있는 두 손도 있어. 어디든 두고싶은 곳에 두래. 가위 잡고 있는 손, 칼 잡고 있는 손. 여기 이게 마지막 손이야.

   두 잔 정도를 더 마시고 술집에서 나와 집에 있을 동생과 남편을 위해 빈대떡을 사서 각각 포장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아빠가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들고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는 아빠도 아니면서, 술도 얼큰하게 취했고 빈대떡도 샀다. 2월이었고, 3월인 지금도 춥지만, 2월에는 지금보다 더 추웠다. 오늘 종로에서 버스를 타고 오면서 멍하게 앉아 이 소설 생각을 했다. 그 손은 잘 있을까. 펜을 쥐고 있을까, 편지를 쓰고 있을까, 누군가의 손을 맞잡고 있을까, 칼을 쥐고 있을까. 봄은 언제 오는가. 그런 생각들. 

    2011년 2월의 나는 이런 문장들을 다섯 번 반복해서 읽었다. A가 X에게, 167페이지. 역시 손 이야기다. "단추와 콩은 공통점이 있어요. 그게 뭔지 알아요? 힌트를 줄게요. 당신 손을 한번 보세요! 내가 보낸 손 그림들을 창문 바로 아래 붙여 놓았다고 했죠. 그렇게 하면 바람이 불 때마다 그림들이 제멋대로 흔들린다고요. 그 손들은 당신을 만지고 싶은 거예요. 당신이 먼 곳을 보고 싶을 때 당신의 고개를 돌려 주고, 당신을 웃게 해주고 싶은 거라고요. 갓 태어난 아기들이 울음 대신 웃음을 터뜨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상한 질문이죠. 우린 삶이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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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보통 열차
오지은 글.사진/북노마드


   그녀에게는 '혜령'이라는 친구가 있다. 처음에 사인을 받을 때 내 이름을 말하니, 그녀는 자기 친구 중에 혜령이라고 있다고 친구이름과 비슷하니 반갑다고 약간 들뜬 상태로 말해주었다. 그리고 두 번째 사인을 받을 때 내 이름을 말하니, 믿을 수 없게도 그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혜령이라는 친구가 있다고 전에 얘기했었죠. 그녀는 또 한번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아, 나는 참으로 감동받았다. '비록 당신의 미래 위에 그 어떤 사랑이 온대도 당신이 나를 잊지 않기를 바란다'는 오지은님이 나를 알고 있다고. 이 지경이다. (나는 'Wind Blows'가 참 좋다. 이 노래를 들으며 길을 걷고 있는데, 싸아-하고 바람이 불어오면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그러니까 이 책은 보기와 다르게 술을 못 마시고, 보기와 다르게 다정하고 세심하고 꼼꼼한(미안요. 왠지 처음엔 그런 이미지아니였거든요. >.<) 그녀가 들려주는 카이도 여행이야기다.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간다. 재밌다. 그녀와, 그녀의 음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읽으면 조금 재미없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이 책을 통해 그녀의 음악을 접해도 좋을 일. 이번 연휴 때 읽으려고 넣어갔는데, 처음에 꽤 재밌어서 연휴 끝나기 전에 다 읽어버릴까봐 아껴 읽었다. 전 부쳐야 하는 내게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막내동생이 이 책에 손을 대는 바람에 하룻밤 빼앗기기도 했다. 서울 올 때 동생이랑 버스 따로 타고 올라왔는데, 동생이 이 책 계속 읽으려고 (한 권 더 사려고) 서점까지 들렀다는 사실. 안타깝게도 작은 읍내 서점이라 책은 구할 수 없었고, 나는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보조등까지 켜놓고 다 읽었다. 버스 안에서 해가 졌고, 마지막 책장을 넘기니 차가 막히고 있었다. 그때부터 서울까지, 그녀의 음악을 들었다. 1집 노래들. 화, 부끄러워, 오늘은 하늘에 별이 참 많다, Wind Blows...

  그녀는 생각보다 세심한 여자였다. 꼼꼼하고 소심하기도 했다. 나쁜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보내지 않고, 속에 들여놓고 곱씹고 아파한 뒤에 내어보냈다. 그렇게 2집까지 끝내고 나니, 마음이 아픈 일이 많았다 했다. 상처를 많이 받았다 했다. 홋카이도 여행은 그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보통 열차를 타고, 보통의 속도로, 보통의 나를, 보통의 마음으로 돌아보는 일. 그녀가 한 카이도 여행이다. 빨간머리 앤 모자와 닮은 밀집모자를 쓰고, 맛집을 찾아가고, 기차역에서 소문난 에키벤을 사 먹고, 돌아다니면서 하나씩 사온 과자며 케이크를 꺼내 먹으며 즐기는 보통 열차 여행. 처음부터 상처받은 마음의 치유 목적으로 떠난 여행이었기에, 그녀는 이 여행의 모든 것에서 위로를 받는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초록의 풍경, 역에서 맞이하는 카이도의 바람, 옆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 할머니가 건네주신 훈제굴, 덜컹덜컹거리며 느리게 움직이는 보통 열차의 소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밤의 풍경, 혼자이지 않아서 좋은 유스호스텔, 조금은 쓸쓸하게 느껴졌던 흐린 날의 하나비, 편의점의 스티커를 모아 마침내 구입하게 된 벼랑위의 포뇨 그릇까지. 그리하여 이 여행의 끝, 그녀의 상처는 아물어졌는가. 그건 이 책의 하얀색 겉표지를 벗겨보면 알 수 있다. 

   아쉬운 건, 그녀가 맥주를 조금만 좋아했더라면, 카이도의 맥주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에... 그러니까 요 맥주로 말할 것 같으면... 으로 시작하는 그녀스러운 수다를 잔뜩 들으며 대리만족할 수 있었을텐데. 고 맛들을 상상할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아. : D 헤헤- 고마웠어요, 지은씨- 지은씨 덕분에 이번 연휴 돌아오는 길이 즐거웠어요. 저도 올해 꼭 카이도 여행을. 기필코. 

   나는 역에서 미리 산 커피와 함께 내 자랑스러운 전리품들을 뜯었다. 먼저 류게츠의 신작 쿠로미츠카린, 흐음, 우리 할머니가 좋아할 맛이야. 맛동산 같은 만쥬였다. 겉은 쫄깃한 빵, 속은 부드러운 앙금. 흑설탕맛이 깔끔하고 진했다. 보후린은 참으로 맛있는 아몬드 비스킷이었다. 지나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우물무물. 어떤 사람의 눈에는 그냥 그런 시골 풍경에 그냥 그런 시골역들일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모두가 흥미진진했고 소중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것, 이 심심한 풍경과 부드러운 초록색이 지금의 나에게 치료제가 되어주겠지. 나는 다시는 못 볼 것처럼 눈을 떼지 못하고 밥을 꼭꼭 씹어 먹듯 눈 속에 꼭꼭 담았다. p.66_7.보통 열차를 좋아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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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서재쌓기

from 기억의기억 2011. 1. 4. 21:58


7번 국도 Revisited.
골든 슬럼버.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

홋카이도 보통열차.
A가 X에게.
고백.
우리 집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내가 함께 있을게.
저녁의 구애.

7년의 밤.

서울 동굴 가이드.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정위 스님의 가벼운 밥상.
감성에 물주기.

백석의 맛.

일본의 걷고 싶은 길 1.
일본의 걷고 싶은 길 2.
폐허에 바라다.
차마고도.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내 인생의 절밥 한 그릇.
슬픈 짐승.
도보 여행가 김남희의 유럽의 걷고 싶은 길.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흑산.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
희랍어 시간.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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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종사는 내 텐트 위를 세 번 빠르게 연속해서 저공비행하더니 한 번 지날 때마다 상자를 두 개씩 떨어뜨렸다. 그런 다음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졌고 또다시 나는 혼자가 되었다. 침묵이 다시 빙하에 내려앉았다. 아무 힘없이 버려진 채 길을 잃은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나는 당황해서 얼른 울음을 멈추고 목이 쉴 때까지 큰 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p.274


   첫 눈이 왔다. 영화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하늘에서 하얀 이물질이 떨어지는데, 그게 바로 눈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눈이 펑펑 날리고 있었다. 그 눈을 고스란히 맞으며 돌아왔다. 

    이번 주의 일이다. 아침, 지하철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그 때 예감했어야 했는데. 그 날이 아픈 날이 될 거란 걸. 그 날, 밤에도 울었다. 술집 화장실에서, 버스 안에서. 나는 쿨한 여자가 되고 싶은데, 그건 내 소망일 뿐. 사실 쿨하다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 그 날, 나는 너무 바보같았다. 상처받았고, 지난 여름부터 차곡차곡 쌓아왔던 나의 믿음들이 무너졌다. 그건 오해였다. 우린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는데, 그 시간 이후로 모든 게 틀어졌다. 분명한 건, 그건 나의 잘못이 아니였다는 것. 너의 잘못이고, 나의 오해였다는 것. 그 날은 아침부터 밤까지, 슬픈 날이었다. 오랜만에 울었다. 

   그래서 이번주는 조금 우울했는데, 정말 다행인 건 그 날 아침 내가 이 책을 읽고 있었다는 거. 이 책이 나를 위로해줬다. 정말이다. 다름아닌 지금 이 책이 내게 와 주어서, 나를 스쳐 지나가지 않고 만나주어서, 마침 내가 그 부분을 읽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는 몇 번이고 책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인투 더 와일드
존 크라카우어 지음, 이순영 옮김/바오밥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야생의 삶을 살고자 알래스카의 어느 외진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에겐 약간의 식량과 소총, 카메라와 책 몇 권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철저히 야생의 삶을 살고자 했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느끼고 생각하려 했다. 그렇게 세상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러다 시간이 되면, 다시 사람들 속으로 돌아오려고 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자신의 삶이라 생각했다. 남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땅 위를 떠돌았으며, 방황했다. 그 방황의 끝을 알래스카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가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땅이고, 삶이었다. 동경해 왔던 그 무엇이었다. 그는 자신감에 가득찬 채 숲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다시 돌아오지는 못했다. 남자는 백일을 알래스카에서 살았다. 사소한 실수를 했고, 결국 그 실수로 인해 숲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남자의 이름은 크리스 매캔들리스. 아니,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렉스라고 소개했다. 그건 그가 방랑을 시작하며 자기 자신에게 붙인 새로운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을 기록한 또 다른 남자, 존 크라카우어. <희박한 공기 속으로>의 작가. 그가 이 책을 썼다.

    이 책이 이번주 내내 내게 위안이 되어 주었다. 내가 읽은 존 크라카우어의 두번째 책인데, 이 책으로 나는 이 사람에게 완전히 반했다. 잔상이 오래 남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이야기 속의 그가 숲에서, 산에서 살아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책을 읽고나서 그런 생각들이 자꾸 마음 속을 맴돌았다. 그도 그래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신문에 관련된 기사를 기고한 뒤에도 자꾸 마음에 남아서, 잊을 수가 없어서, 주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의 흔적들을 찾아서 이렇게 책으로 엮을 수 밖에 없었다고. 책을 읽으면 그런 존 크라카우어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내가 책 귀퉁이를 접은 부분이 두 군데인데, 둘 다 크리스의 이야기가 아니라 존 크라카우어의 이야기이다. 존 크라카우어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책에 나온다. 그 부분을 읽으면 왜 존이 크리스의 삶에 의문을 품고, 더 깊이 추적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이건 사실 크리스의 이야기보다, 존 크라카우어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크리스는 죽었고, 두 사람은 생전 단 한번도 마주친 적 없다. 존은 크리스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존도 말한다. 자신의 젊은 시절과 크리스의 삶은 공통점이 아주 많다고. 

     이 책이 내게 왜 위안이 되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이 책은 알래스카에서 이상을 실현하다 죽은 한 남자의 이야기이고, 나는 그 사람이 멀어지고자 했던 그 세상 속에 있다. 이상하게도 책을 읽을 때마다 외롭지가 않았다. 알래스카의 인적 없는 숲에 홀로 있는 알렉스를 떠올리면 그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발 디디고 있는 이 곳이 더 외로웠다. 크리스가 살아 나와, 직접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으면, 그래서 내가 지금 그 책을 읽고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더이상 없으니까. 책 속에서만 존재하니까. 길 위에서 그를 만난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에게 반했다. 그래서 마지막 한 장의 사진에 가슴 아팠다. 존 크라카우어의 표현이 맞다. 그는 행복해보인다. 평화로워보인다. 


   단단하지 못한 깃털 성에를 보니 그 마지막 6미터를 올라가기가 얼마나 힘들고 무섭고 성가실지 알고도 남았다. 그런데 어느 순가 갑자기, 더는 올라갈 곳이 없었다. 내 갈라진 입술이 벌어지며 힘겨운 미소로 변했다. 나는 데블스 섬의 정상에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상은 초현실적이고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가늘고 뾰족한 바위와 성에는 넓이가 서류 캐비닛 정도였다. 어슬렁거리며 다닐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장 높은 지점에 양다리를 벌리고 서고 보니, 남쪽 절벽은 내 오른쪽 신발 아래로 760미터 이어져 있었고, 왼쪽 신발 아래로 북쪽 면은 그 길이가 두 배였다.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사진 몇 장을 찍고 액스의 굽은 끝을 똑바로 펴기 위해 낑낑거리면서 몇 분을 보냈다. 그런 다음 일어서서 조심스럽게 방향을 돌린 다음 캠프로 향했다.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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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왔다

from 모퉁이다방 2010. 11. 11. 21:44

 

            


    겨울이 왔다. 두터운 이불 안에서 생각했다. 겨울이 왔다고. 지난 주에는 안개가 짙었다. 그 길을 걸었다. 지난 주 토요일, 집에서 뒹굴거리고 있다 저녁 늦게 영화를 보러 갔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영화를 보고 조금 걸었다. 안개가 그득했다. 걸으며 친구가 추천해준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들었다. 존 크라카우어의 <희박한 공기 속으로>를 소개하는 에피소드 21. 지난 주에 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날 밤, 안개 냄새, 불투명한 공기, 소설가의 목소리, 그 책, 그리고 나. 그 눅눅함이 이번 주 계속 나를 따라다녔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는 책장을 덮고나서 더 생각나는 책이다. 이번 주 내내 자꾸만 이 책의 내용들이 떠올라 마음이 먹먹해지곤 했다. 친구는 조금 울었다 했다. 그러던 차에 존 크라카우어의 새 책이 나왔다. <인투 더 와일드>. 당장 주문했다. 오늘 도착했다. 읽어야지. 정말, 겨울이다. 


    다들 잘 지내고 계신지. 나는 질투가 조금 늘었다. 드문드문 옛 영화들이 생각난다. <접속>, <시월애>,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광식이 동생 광태>. 마음을 단단히 여미어야지.







   가을까지 맞춘 퍼즐. 야광이다. 불을 끄면 촛불들이 빛난다. 같이 퍼즐 맞추는 분이 그랬다. 완성한 퍼즐들 속에는 시간과 사람이 있다고. 같이 한 사람들, 그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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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는 캄보디아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앙코르와트를 걷고 또 걸었다고 했다. 거길 다녀오니, 어딘가로 또 떠나고 싶어진다고 했다. 그날 밤, 우리는 여행 책을 샀다. 김남희의 책이다. <일본의 걷고 싶은 길> 1권. 사진이 너무 많아 실망했지만, 사진이 많아서 좋기도 했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연두빛 나뭇잎들이 글과 글 사이에 놓여 있다. 나무들이, 산들이, 고즈넉한 일본의 거리가 글과 글 사이에 놓여 있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매일 밤 퇴근하면서 이 책을 읽었다. 김남희를 따라 그 길을 걸었다. 내가 늘 가고 싶어했던 일본 북쪽의 마을들. 김남희는 내가 하고 싶어했던 노천 온천을 원없이 했더라. 하루종일 걷다, 예약해둔 숙소에 들러 생선 반찬에 된장국의 소박한 저녁밥을 먹고, 온천을 하고, 잠이 드는 그런 여행. 난 항상 겨울의 홋카이도를 생각했는데, 봄과 여름의 카이도도 근사하더라. 언젠가 나도 그런 여행할 수 있겠지?




    그 밤, 이런 잡지도 샀다. 도보여행가 김남희씨가 아닌, 뼛속까지 영화인 김남희 언니가 추천해 준 잡지. 월간지고, 한 달에 한 번씩 여행을 떠날 도시를 선정한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장소들, 풍경들, 사람들을 소개해 준다. 지난 달부터 사 보기 시작했는데, 이번 달은 한국의 도시다. 담양. 이번 호를 보면 담양에 가서 얼마나 멋진 나무들을 볼 수 있는지, 얼마나 맛있는 남도 음식들을 먹을 수 있는지, 또 얼마나 근사한 숙소들이 있는지 알 수 있다. 느긋하고 편안한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 근사한 대나무 숲도, 입이 쩍 벌어지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도 만날 수 있단다. 여행 책이 있고, 여행 잡지가 있어 다행인 무더운 여름밤. 꿈꿀 수 있어 다행이다. 



   <다카페 일기>가 반값 할인 중이다. 신나서 구입. 내가 아끼는 책이다. 소심한 아빠가 오랜 시간을 두고 쓴 사진일기. 아내가 등장하고, 딸아이가 등장하고, 새로 태어난 남자아이가 등장한다. 천연덕스럽게 귀여운 와쿠친도 빼놓을 수 없지. 첫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봄이 되었다가, 여름이 되었다가, 가을이 되었다가, 겨울이 되었다가. 1살이 되었다가, 2살이 되었다가, 3살이 되었다가.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마지막 장을 넘겼는데 왠지 마음이 찡했다. 아, 이렇게 시간이 흐르구나. 나이를 먹는 구나. 그걸 내가 이렇게 지켜 보고 있구나. 좋은 책이다. 건조한 한 줄의 메세지와 지극히 사적인 사진이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니. 놀라운 책이다. 2권은 좀 천천히 구입하려고. 다카페 가족들의 시간을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한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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