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민음사


"래리가 숫총각일까요?"
"이사벨, 그 친구 벌써 서른둘이야."
"분명히 숫총각일 거예요."
"어째서?"
"여자라면 그 정도는 직감으로 알 수 있거든요."
"내가 아는 어느 젊은 친구는 예쁜 여자만 보면 지금껏 여자를 한 번도 안 사귀어 봤다고 거짓말을 해서 몇 년째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고 있어. 그 친구 말로는 그게 무슨 주문처럼 효과를 발휘한다더군."
p.281


   500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나는 왜 이 페이지에만 책모서리를 접어놓았을까. 서머싯 몸이다. 내가 좋아하는 서머싯 몸. 이 소설에는 작가 서머싯 몸이 등장한다. 그런데 나는 그가 너무 세상사를 달관한 듯한 모습으로 등장해서, 젊고 예쁜 여자를 좋아해서, 점잖은 속물이라서 실망했다. 래리. 래리는 가끔 생각날 것 같다. 이사벨도 마찬가지. 두 사람은 하고자 하는대로 했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았다. 한 사람은 부를 버렸고, 한 사람은 부를 쫓았다. 모두가 예상했겠지만, 래리는 서른둘, 숫총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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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

from 서재를쌓다 2010. 3. 31. 00:10



    한강이 봄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나를 불러 세운다. 잠깐만요. 여기 앉아볼래요? 이제부터 내가 아주 긴 노래를 들려줄게요. 나는 얕은 눈보라가 치는 미시령 절벽 위에 서 있다. 눈보라 때문에 앞이 보이질 않는다. 무릎을 안고 쪼그려 앉아본다. 까마득하다. 정확히 두 발만 더 내디디면... 그녀를, 그녀의 엄마를 만날 수 있다. 한강이 긴 노래를 끝낸 날, 어떤 이가 목을 맸다. 그이는 그 날 미시령 고개에 있었던 거다. 두 발 앞이 벼랑이었던 거다. 그이는 그 벼랑의 허공에서 그녀를 보았던 거다. 그녀가 손짓했겠지. 그이는 안심했던 거다. 그리고 발을 내밀었던 거다. 우리는 모두 미시령의 어느 절벽 위에 서 있다. 한강이 아주 긴 노래를 끝내고 떠나고, 나는 얕은 눈보라가 치는 절벽 위에 남았다. 절벽 위에 무릎을 세우고 가만히 앉아 있다. 눈보라가 서서히 잦아들고, 바람이 견딜만 해졌다. 한강은 떠났지만, 어디선가 그녀의 기타선율이 미시령의 바람에 머물고 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앉아 있는다. 그리고 본다. 미시령에 봄이 찾아오는 것을. 눈이 멈추는 것을. 눈이 녹는 것을. 새싹이 돋는 것을. 꽃이 피는 것을. 그리고 바람이 부는 것을.


     한강의 새 소설을 읽었다. 아주 긴 노래였다. 헝겊 위에 퍼지는 별의 흔적처럼 마음이 먹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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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5일의 일기

from 모퉁이다방 2010. 3. 25. 14:35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꿈을 꿨는데, 이상했다. 이상했다. 그 말밖에. 이불을 개고, 얼큰한 맛 생생우동을 끓여 먹었다. 방을 쓸고, 운동화 두 켤레를 빨았다. 좋아하는 비누를 잔뜩 묻히고 칫솔로 빡빡 문질러 닦았다. 시커먼 흙탕물이 한 가득. 4월 한 달도 잘 부탁한다, 운동화야. 세탁기도 돌렸다. 창문도 활짝 열어뒀다. 분명 날이 환했는데, 청소를 하다보니 어둑어둑해졌다. 비가 쏟아졌다. 엠피쓰리 플레이어에 들어있는 모든 곡을 랜덤으로 재생해 놓았는데, 갑자기 김갑수 아저씨 목소리가 들렸다. 'K양, 행복해지고 싶죠? 행복해지기가 쉬운줄 아십니까? 노력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는 법입니다. 은호야, 행복해져라. 은호야.' 노력해지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는 법인데. 그런 법인데. 친구랑 영화를 보기로 했다. 햄버거도 먹고, 커피도 마셔야지. 오늘 날씨에 딱 어울리는 영화도 봐야지.


   
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3월에 <재와 빨강>도 읽었다. 읽고 나서 왜 제목이 재와 빨강, 일까 한참을 생각했다. 예전에 어떤 기사를 읽었다. 작가 지원 프로그램의 일종인데, 작가들을 해외로 보내준다고 했다. 편혜영 작가가 가는 곳은 일본이었다. 그 곳, 그 기간 동안 완성된 소설인가, 그 곳, 그 기간 동안의 기억으로 완성된 소설인가. 마지막이 섬뜩했다. 그리고 앞 장으로 돌아가, 작가의 사진을 오래 들여다봤다. 예쁜 얼굴. 역시 작가란, 대단하고 무시무시한 존재들이다. 이리카페에서 작가의 낭독을 들을 수 있는 이벤트가 있더라. 신청하면, 갈 수 있을까. 듣고 싶다. 예쁜 얼굴에서 나오는 섬뜩한 문장들.



심야식당 5
아베 야로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심야식당 5권도 나왔다. 캬오. 드라마를 다 끝냈어야 했는데. 중간쯤 보다 다운받고, 엠피에 넣고 하는 과정이 귀찮아서 못 보고 있다. 통조림으로 먹을 수 있는 꽁치구이 덮밥이 신기했는데, 비리지 않을까 모르겠다. 조만간 도전! 햄버그 스테이크와 맥주도 맛나겠고, 김 솔솔나는 군만두도. 쩝쩝. 아, 5권에 특별등장하는 만화가 아베 야로씨. 너무 그리지 어려운 메뉴를 주문하지 말라능. 흐흐. 6권은 여름에 나오다는데, 얼른 여름아 오시오. :D



    오늘 아침에 누워서 티비를 돌리다 <키친>을 봤는데, 오글거려서 혼났다. 어쩜. 그래도 끝까지 봤네. 영화 내내 화면에 있는 자막처럼 봄을 닮은 신민아 때문에. 아, 그 아이는 왜 이렇게 예쁜거야. 좋은 영화 했으면 좋겠다. 두 달 동안 영화를 못 봤더니 볼 영화 투성이다. 일단 지태님 영화도 보아주어야 하고. 비가 그쳤다. 흐리기만 한 날씨. 내가 딱 좋아하는 꿀꿀한 날씨. 아까부터 내내 연애시대 쏭북을 듣고 있다. 손예진이 말한다. 사랑은 언제 끝나는 걸까. 이 드라마, 너무 좋았어. 다시 보고 싶은데 역시 다운받고 넣고. >.< 그나저나 오늘의 꿈은 정말 이상했어. 좋았는데, 이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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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김이설 지음/문학과지성사


    삼월인데 눈이 온다. 내가 기억하기론 벌써 세 번째다. 처음에는 예전에도 삼월에 눈이 왔던가 생각했다. 두 번째는 언젠가 삼월에도 눈이 온 적이 있었는데 내가 기억을 못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세 번째는, 영화 <외출>을 생각했다. 영화의 마지막, 거짓말처럼 사월에 눈이 내렸다. 사월에 눈이 내리고, 인수는 서영을 생각한다. 그리고 전화를 한다. 내가 곧 갈게요, 이런 대사였던 것 같다. 그 땐, 인수가 서영에게 달려가는 상황이 아니라, 그리하여 둘의 사랑이 어찌어찌된다는 그 결말이 아니라, 사월에 눈이 온다는 설정 자체가 너무 터무니 없어서 이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결론이야, 생각했는데. 사월에 눈이 올 수도 있겠다. 인수가 서영을 만나러 갈 수도, 그리하여 둘이 결국 잘 될 수도 있겠다. 사월에 눈이 올 수도 있겠어.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이건 내가 삼월에 읽은 소설이다. 정말 벽돌같이 생긴 책이다. 이 책을 쌓고 또 쌓으면 단단한 벽이 만들어질 것 같다. 아주 단단한 책이다. 나는 그녀를 안다. 안다고 말해도 되는 건가. 나는 그녀를 자주 훔쳐봤다. 나는 안다. 그녀는 아기 엄마이고, 서울이 아닌 곳에 산다. 그녀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비염 때문에 고생하고, 소설을 쓸 때 그 소설만의 배경음악이 있다. 두 아이 다 딸이고, 작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 큰 아이와 함께 미술관을 자주 갔다. 나는 그녀의 일상을 자주 훔쳐봤다. 그리고 그녀가 어떤 글을 쓰는지 궁금했다. 내가 훔쳐보는 것이 바로 그녀의 글이었음에도, 나는 그녀의 글이 궁금했다. 그리고 이 책을 만났다. 이게 진짜 그녀의 글이다. 

    쎄다. 소설을 하나, 둘, 읽어나가면서 나는 그녀가 쎄다고 생각했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가를 밴 아가, 대리모, 아빠라고 부르는 이와 잠자리를 하는 아이, 딸이 걸린 병을 똑같이 앓는 엄마, 짐승보다 못한 남편을 결국 죽이고 마는 여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자살하는 엄마 등이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그녀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소설을 읽으니 하나도 모르겠다. 이건 소설이지만, 그녀가 쓴 것이고, 허구지만, 그녀가 쓴 것이고.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죄다 외롭고, 아프고, 쓰라리고. 나는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장이 시큰거렸다. 어떤 소설은 아랫배쪽이기도 했고, 어떤 소설은 가슴 윗쪽이기도 했다. 세고, 아프고. 어떤 소설은 너무나 쓸쓸했는데, 그래서 가슴 한쪽이 시큰거렸는데, 그건 어쩌면 이 이야기가 나의 미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나는 정말이지, 이렇게 늙고 싶지 않았다. 이 책 속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그득하다.

    김혜리가 만난 사람, 김연수편을 읽었는데, 나는 그가 징글징글하게 느껴졌다. 소설가란 이런 직업이구나, 생각했다. 이건 정말 아무나 하지 못하는 거구나 생각했다. 그는 소설을 쓰는 자아와 일상의 자아가 또렷하게 분리된다고 했다. 연변에서는 <밤은 노래한다>의 어떤 장면을 쓰기 위해 소설에서와 같이 오르막 산길을 직접 뛰어봤다고 했다. 소설가란 정말 대단하구나, 말도 안 되는 사람이구나, 가까이하지 말아야지,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나는 그녀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 그녀에게도 소설을 쓰는 자아와 내가 훔쳐보는 일상의 자아가 분리되어 또렷하게 존재한다는 것. 그리하여, 소설가는 무섭고, 위대하다는 것.

    이제 그녀가 쌓은 벽돌 두 개. 그녀가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걸 지켜보고 싶다. 그리하여 단단한 벽이 만들어지는 것을. 그리하여 하나의 튼튼한 집이 만들어지는 것을. 시간이 갈수록 더 튼실한 벽돌이 세공되는 것을. 내가 가끔 시멘트도 발라주고. 그렇게 멀리서, (소설가는 무서운 사람들이니까) 보이지 않게 응원하고 싶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그 때는 당신의 벽돌을 읽은 적이 없었지만, 난 그 때부터 당신의 팬이었으니까. 이 밤에도 당신의 주인공들이 야심한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겠지. 다음에는 조금 밝은 벽돌이었으면 좋겠다. 사실 이번 벽돌은 좀 놀랬거든. 너무 어두워서. 그나저나 사월에 눈이 오면, 누구에게 전화를 해야 되지. 누군가 만날 사람은 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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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준벅>을 봤다. 언제 사다놓았는지 기억도 안난다. 지난 주말, 영화는 보고싶은데 나가기는 귀찮아서 DVD를 뒤적거렸다. 역시 좋은 영화였다. 그러니까, 1월의 나는 '그 많은 세월이 전부 물거품이 됐어요'라는 대사가 있는 영화를 봤다.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또 1월의 나는 '쿼일은 고통이란 모름지기 속으로 조용히 삭여야 한다고 믿었다.'라는 문장이 있는 소설을 읽고 있었다. 아주 두꺼운 소설이었다. 중간에 덮어버렸는데, 이유는 모르겠다. 어쩌면 봄에 더 잘 어울리는 소설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2월에 읽는 소설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사랑, 나는 항상 그걸 참는다.'

    B는 내게 <준벅>을 추천해주면서 한 장면에 대해 이야기했다. 에이미 아담스 부부 이야기였다. 영화에서 에이미 아담스는 무척이나 사랑스럽다고. 그런데 남편이 너무나 그녀에게 무관심하다고. 그런데 단 한 장면에서 남편의 진심이 보인다고. 에이미 아담스는 미어캣이라는 동물을 좋아하는데, 남편은 지하실에서 티비를 보다가 미어캣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나오자 에이미 아담스를 쉴 새 없이 부르다가, 결국 프로그램을 녹화하려는데 테잎 때문에 실패하고. 나중에 지하실로 온 에이미 아담스에게 괜히 화만 낸다고. 그 장면을 봤다. 영화는 1월에 읽은 소설 속 저 구절 '고통이란 모름지기 속으로 조용히 삭여야 한다고 믿었다.'가 절로 떠올랐다.

   한밤 중에 택시를 타고 서울의 다리를 건너면, 그래서 저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희미하게 보일 때면 2만원 남짓하는 택시비가 아깝지가 않다. 그럴 때면 항상 몇 년 전에 본 김민선과 김동완이 출연했던 베스트극장이 생각이 나고, 몇 년 전 한밤 중의 택시에서 들었던 라디오 방송이 생각이 난다. '원더풀 투 나잇'도. 에릭 클랩톤의 기타 선율도. 어제는 노래방에서 들국화의 '제발'을 들었는데, 참 좋았다. 특히 이 가사. '처음 만난 이 거리를 걸어봐. 나는 외로워.' 나는 패티김의 '이별'이란 노래가 정말 좋다. 그래서 어제도 불렀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은 잊을 수는 없을거야.'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았다. 외롭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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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궁리


   내게도 헬렌이 있다. 그녀도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우리의 경우는 메일이었다. 나는 채링크로스 84번지에 근무하지도, 희귀한 헌 책들을 뚝딱 구해올 능력도 없지만, 내게는 그녀에게 없는 책 한 권이 있었다. 그건 어디서도 더 이상 살 수 없는 책이었다. 출판사에서 아주 소량만 만들어 배포했던 거니까. 나는 그 책을 두 권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 책을 한 권 보냈다. 우리는 같은 작가를 좋아했고, 그 책은 그 작가의 블로그 모음집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내게 책을 보내왔다. 절판되어서 구하지 못하고 있던 책, 그 작가는 페루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게도 헬렌이 있다.

   그녀와 나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마크스 서점의 식구들과 헬렌이 그랬던 것처럼. 헬렌은 어느 날 평론지에 실린 마크스 서점의 광고를 보고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그녀는 원하는 책을 말했고, 마크스 서점 사람들은 그것을 구해서 그녀에게 보내주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들은 일종의 전표. 주문서와 영수증이었다. 헬렌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냈고, 마크스 서점 사람들은 그녀의 마음을 소중히 여겼다. 고마움은 또 다른 고마움을, 감사함은 또 다른 감사함을 낳았고,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 20여 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 서로의 일을 걱정해주고, 서로의 먹을거리를 걱정해주면서, 진짜 친구가 되었다.

   얼마 전 읽은 책도 역시 서간집이었다. 마종기 시인과 루시드 폴의 편지 모음집. 두 사람은 스위스와 미국에서 그 편지들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두 사람 다 고국을 떠나 있으니 외로웠고, 쓸쓸했고, 고독했다고 한다. 한 사람은 의사이고 시인이고, 한 사람은 과학을 연구하며 음악을 만들고 부르는 사람. 두 사람은 공통점을 찾았고,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했고, 서로의 메일을 기다렸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는 동안, 그리고 가을이 왔다, 겨울이 가는 동안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았고, 서로를 응원했다. 헬렌과 마크스 서점 식구들처럼. 그렇게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면 이제 영국의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찾아가도 마크스 서점은 없다고 한다. 단지 여기 언젠가, 마크스 서점이 있었다는 동판만 남겨져 있을 뿐. 조금은 엉뚱한 생각을 해 봤다. 만약 헬렌이 아주 유명한 작가였다면, 혹은 아주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면, 마크스 서점이 여전히 남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 그곳에는 사나운 표정의 헬렌 (표지를 넘기자마자 있는) 사진이 서점 어느 한 모퉁이에 걸려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그 모퉁이 책장에는 헬렌이 마크스 서점에서 구입한 책들만 꽂혀 있는 거다. 그러니까 버지니아 울프의 <일반 독자> 2권, 월턴의 <낚시의 명수> 같은 책.

   헬렌과 마크스 서점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만나지 못했지만, 나와 나의 헬렌 곡예사와는 벌써 한 번 만났다. 우리는 대학로에서 연극을 한 편 봤고, 고기를 먹고 술을 마셨다. 우리가 읽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며, 우리가 열렬히 좋아하는 작가 이야기도 했다. 지나간 사랑에 대해서도, 앞으로 무얼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 날 우리는 취했고, 나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같은 작가를 좋아하게 된 것을, 같은 연극을 볼 수 있음을. 그래서 많이도 건배, 건배했다. 헬렌과 마크스 서점 사람들도 만났더라면 그랬을 텐데. 두 말 할 것도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텐데. 그게 조금 안타깝다. 그러면 이 책은 훨씬 두껍고, 풍요로워졌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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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

from 서재를쌓다 2009. 12. 24. 00:12
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그책



    읽을 때보다, 읽은 후에 더 많이 생각났던 소설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 한 남자의 하루를 그린 소설이라는 소개에 끌려 읽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자의 슬픔, 그 남자의 하루, 그 남자의 그리움과 아픔, 그런 감정들을 예상했었는데, 소설은 언젠가 한 남자에게 다가올 온전한 죽음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한다. 소설의 처음은 남자가 잠에서 깨어날 때이고, 시간은 아침이다. 남자는 잠에서 깨어나자 마자, 자신이 '여기' '지금' '있음'을 깨닫고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은 남자가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잠이 들 때다. 시간은 밤(혹은 새벽). 역시 남자는 죽음을 생각한다. 남자는 늙었고, 사랑하는 사람은 먼저 떠났고, 그에게도 곧 그 날이 올 것이다. 말끔하게 차려입고 대학에 나가 강의를 하고, 외로운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고, 매력적인 제자를 유혹해 보기도 하지만, 그에게 매일매일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다. 내게 십이월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듯이 그의 어떤 시절도 그렇게 순식간에 지나갔겠지. 그리고, 가겠지. 그렇게 매일 아침에 깨어날 때 죽음을 떠올리고, 매일 밤 잠에 들 때 죽음을 느끼는 남자. 콜린 퍼스가 그 남자를 연기했다고 한다. 상도 받았다지.

    마음에 남는 구절이 몇몇 있었는데,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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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퓨터 시계가 21시가 되자마자 메일을 보내고, 엑셀 파일을 열어서 오늘의 숫자를 입력하고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왔다. 서대문까지 걸어와서는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 안에서는 스페이스 공감에 나왔던 박지윤 공연 영상을 봤다. 그걸 보느라고 군자에서 한 정거장 더 가버렸다. 아차산에서 다시 군자로 되돌아와서, 7호선으로 갈아탔다. 역에서 나오기 전에 지하철 안 쎄븐일레븐에서 씨네를 살까말까 망설이다가 샀다. 은행에 들러 돈도 뽑았다. 맥주를 한 캔 살까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들어왔다. 엠비씨 수목드라마, 정말 할 말이 없구나. 저게 뮝미? 으아. 9월이 가고 있다. 추석, 10월. 제발 시간이 늦게 갔으면.


          
         

  9월에 이런 책들을 읽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단편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읽는 동안 마음이 시큰거렸던 소설. 문예지에 이 단편이 공개되었을 때, 사보진 않았지만 이 제목 때문에 읽지도 않고 마음이 들떴던 바로 그 소설이었다. 이 책에는 내가 좋아하는 '모두에게 복된 새해'도 있어서, 이제 도서관을 가지 않아도 언제든 펼쳐볼 수 있게 됐다. '케이케이를 불러봤어', '달로 간 코미디언'은 두 번, 세 번 읽는 거였는데 처음보다 더 좋았다. 신형철의 해설도 좋았고.

  <무더운 여름>은 내가 좋아하는 위화 단편집. 위화의 소설 중 제일 좋아하는 <허삼관 매혈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이게 위화 소설 맞나 싶을 정도로 웃음기가 거의 없다. 처음엔 어리둥절했는데 몇 편 읽다보니 마음이 역시 시큰거렸다. 가장 마음에 남았던 단편은 '다리에서'. 아주 짧은 이야기다. 남편은 여자의 생리를 기다리고, 지금은 아이를 가질 때가 아니라고 여자를 설득한다. 여자는 생리가 늦어지는 것도, 그래서 혹시 아이가 생겼을 지도 모르는 것도 무덤덤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데, 남편은 그렇지가 않다. 빨리 친구(여자의 생리를 그는 그렇게 표현한다)가 와 달라고, 병원에 가서 혹시 아이가 생긴 거라면 지우자고 재촉한다. 여자와 남편이 병원에 가는 날, 진료를 받기 전에 여자의 몸 속에 뜨겁고 끈적거리는 그것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걸 느끼고, 여자는 어떤 말을 남편에게 전해듣는다. 그렇게 소설은 끝나는데, 그 여운이 엄청나서 아침 지하철역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인도 출신의 미국 작가인데, 이 소설집의 첫 단편을 읽고 완전히 그녀의 팬이 되었다. 한국에 출간된 그녀의 책은 현재 세 권. 이제 두 권이 남았다. 그래서 기대 중. 금방 그 두 권을 읽고 싶지만, 다 읽고 나면 그녀의 다음 책이 없어지는 거니까 그 달콤한 기다림을 위해 조금 늦게, 천천히 주문할 거다. 정말 별 다섯 개. 이 가을에 읽기 딱 좋은 소설. 한 편 한 편이 끝날 때마다 마음이 서늘해지고, 충만해진다. 소설은 끝났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이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드는 소설들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또 읽고 싶은 느낌이다. 그리고 그들이 잘, 살고 있었으면 하는 느낌. 정말 좋은 소설집이다. 강추. 내가 1억 정도의 여유가 있는 엄청난 부자라면, 약속이 생길 때마다 상대방에게 사서 선물해 주고 싶은 소설이다. 흠. 아, 마지막 이야기는 세 편의 연작인데, 여자의 이야기 한 편, 남자의 이야기 한 편, 그리고 여자와 남자가 성인이 되어 만나게 되는 이야기 한 편이다. 그 마지막 남자와 여자가 만나게 되는 이야기는 그저 그랬다.



   아, 짧게 쓰고 자려고 했는데. 오늘부터 서머싯 몸의 <면도날>을 읽는다. 좋아하는 작가니까, 아껴서 차분하게 음미해가면서 읽어야지. 뭐든지 따라하기 좋아하는 나는 영화 <선샤인 클리닝>을 보고 지난주 내내 징하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아주 사소한, 그냥 지나가는 대사였는데, 난 이런 거에 확 꽂히는 이상한 여자다. 아버지에게 아들을 맡기고 일을 하러 가려는 에이미 아담스.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한다. 엄마와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하는 중간에,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샌드위치 만들어 먹어도 되요?" 할아버지가 대답한다. "재료 다 있다. 들어가서 만들어 먹으렴." 그때부터 샌드위치가 머릿 속을 떠나지 않는 거다. 특히 모든 재료가 냉장고 안에 갖춰져 있고, 언제든 먹고 싶으면 빵에 이것저것 넣어 후다닥 만들어 먹는 고 장면. 맛있는 빵을 샀다. 하얀 빵 말고 건강에 좋은 색깔 있는 빵. 빵 위에 슬라이드 햄과 치즈를 얹고, 양상추를 잔뜩 넣고 아일랜드 소스를 뿌리고 빵을 또 얹어 반으로 잘라 먹었다. 반으로 자를 때 칼 끝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들렸다. 커피랑 같이 먹고, 우유랑도 먹었다. 토마토를 썰어 넣으면 씹는 순간, 내가 막 건강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아주 신선한 느낌. 아, 배고프다. 빨리 자야지.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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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구
김이환 지음/예담



    약속 없는 일요일 오전에 내가 하는 짓. 일어나자마자 MBC에서 하는 프로그램 섭렵하기. 해피타임-환상의 짝꿍-서프라이즈-출발비디오여행, 까지 보고나면 일요일이 벌써 다 가버린 것만 같다. 월요일의 공포가 스멀스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고. 일요일에는 늦잠을 자는 경우가 많아서 거의 환상의 짝꿍 후반부나 서프라이즈부터 시작할 때도 많다. 저번 일요일에도 환상의 짝꿍 후반부에서 시작했다. 하고 싶은 얘기는 서프라이즈에 나왔던 2012년 종말론. 서프라이즈에 따르면 2012년의 종말론은 마야 문명(난 요것만 알고 있었는데)뿐만 아니라, 중국의 주역에서도 2012년에 지구가 종말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 노스트라무스의 예언도 1999년이 아니라 2012년이란다. 2012년에 한 행성과의 충돌이 있을 것이고, 나사도 이걸 알면서 쉬쉬하고 있고 등등. 그 이야기를 잠에 취한 채로 보고 있는데, 이 책이 생각이 났다지. <절망의 구>.

     1억원 고료 멀티 문학상 수상작이다. 검은 구와 한 남자의 이야기다. 어느 날, 남자는 검은 구를 발견한다. 이 구는 아주 천천히, 사람이 아주 천천히 걷는 속도와 비슷하게 움직이는데, 남자가 멀찍이 떨어져서 보니 이 구가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거다. 구에 닿기만 하면 사람들이 구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이 남자가 제일 먼저 목격한다. 남자는 구를 피해서 도망가기 시작한다. 이게 소설의 시작이고, 남자와 구의 절망적인 운명의 시작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스토리는 '구가 쫓아오고, 남자가 도망친다' 이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상황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도 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구는 그저 구다. 책 속의 사람들은 그 구를 '절망의 구'라고 부른다. 구에 흡수되는 순간 사람들은 절망을 느끼기 때문에. 그게 구의 내부에 대한 정보의 전부다. 

    서프라이즈를 보면서 생각났던 이 소설의 어떤 장면. 제일 기억에 남는 부분이었다. 마트 안에서 남자와 남자와 마지막을 함께한 청년이 티비가 진열되어 있는 매장에서 함께 본 파란 바탕 위에 선명한 하얀 글자. '세계는 멸망했습니다.' 그 티비 화면을 배경으로 어떻게든 살아 '남아'보기 위해 두 사람은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신다. 그런 그들의 뒤로 계속해서, 변함없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하얀 '세계는 멸망했습니다.'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이 장면이 제일 보고 싶다. 대여섯 개의 티비 화면에 불이 들어와 있고, 변함없이 세계는 멸망했다지만, 언젠가 저 글자가 마술을 부린듯 세계는 멸망'하지않았'습니다,로 바뀔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멸망한 세계를 살아가는 남자의 모습.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이 장면은 아주 쓸쓸하고 쓸쓸하고 쓸쓸했으면 좋겠다.

    소설은 빨리 읽힌다. 분량이 제법 되지만, 손에 잡으면 금방 읽을 수 있다. 열심히 읽다가 마지막 결론에 다다르면, 뭔가가 다시 시작된다. 결국 끝도 없이 이어지는 거다. 남자의 도망도, 구도, 절망도. 그러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구라는 생명체라고 해야 하나, 괴물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검은 구는 작가의 상상 속에서 존재하고 키워져서 동그란 구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졌지만, 그건 진작부터 우리가 하나씩 가지고 있던 '그 무엇'이 아닌가 하는.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나를 뒤쫓고 있는 수많은 '그 무엇'이 어느 날 절망의 구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내게 아주 천천히 다가온다면, 나도 남자처럼 도망쳐야 하나. 사실, 나는 그냥 그 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남자가 그냥 빨려 들어갔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왠지 그 안에 뭔가 특별한 세상이 존재할 것만 같았거든. 결국 그런 건 없고, 절망 뿐이라지만. 결말이 좀 흐지부지하게 끝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엔딩 공모전을 하는 건지. 그나저나 2012년에 종말이 올까. 그래서 우리의 파란 세계도 하얗게 멸망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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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예담


그래도, 날, 사랑해 줄 당신에게 

    소설을 읽어내려가던 나는, 그 순간 이 소설이 판타지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못 생긴 여자라니요. 너무나 못 생겨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쳐다보게 되는 여자라니요. 그래서 그 옆에 있는 남자까지 쳐다보게 되는 여자라니요. 이 세상에 그런 여자가 있나, 생각을 했었어요. 그러니까 이건 너무 과장이 심하잖아, 생각을 하고, 그러니까 이 소설은 판타지야, 라고 생각을 했지요. 소설을 마지막 장을 덮고 일주일이 지났어요. 그동안 나는 이 소설과 여러 사람들을 떠올렸어요. 그동안 나와 테이블을 마주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던 많은 사람들 중에, 그래요, 그런 사람들이 꽤 많았더군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래요. 거의 모두가 그랬죠. 그제서야 이 소설은 판타지가 아니구나, 생각했지요. 내 곁에 많은 사람들이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고, 그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외모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를 하니까요. 심지어 나도 그런 사람이지요. 잘난 것도 없으면서. 그러다 또 다시 박민규의 소설 중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지요. 소설집 <카스테라>에 있던 문장이었어요. "이십대엔 누구나 이름과 외모만으로 세상을 판단하며,"

    나는 나이듦에 대해서 말하겠어요. 이 소설을 읽던 중에 작가와의 만남에 다녀왔지요. 박민규 작가는 예의 독특한 선글라스를 낀 채, 앉아서 이야기를 하니 정말 '마흔 둘'이 된 거 같다면서 일어서서 질문을 받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지요. 그 날의 여러 말들 중에 가장 잊지 못한 말은 이거예요. "믿기지 않겠지만, 언젠가 마흔 두 살의 나이가 됩니다." 이런 말도 있었어요. 자신의 팬이 되라는. 누군가의 팬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의' 팬이 되어야 한다고. 잘난 척 해도, 모두들 별 볼 일 없으니까요. 마흔 두 살이구요.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은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 소설을 쓴다고 했어요. '믿음'이 있기 때문에요. 소설을 선물해주고 싶은 그와 같은 수만 명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요. 사랑한다는 표현을 자주 하라고 하셨지요. 늦기 전에.

     그러니까, 나이듦에 대한 이야기요. 어릴 적에 생각했던 외모의 아름다움과 지금의 아름다움이 다르다고 이야길 하셨지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난 마흔 두 살이 되려면 아직 십 년이 넘게 남았지만, 내게도 스무 살에 생각했던 사람의 아름다움과 지금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달라요. 이게 바로 나이드는 게 행복한 이유예요. 난 성숙한 인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스무 살때보다는 현명해졌지요. 스무 살때보다는 상처를 덜 받는 인간이 되었지요. 난 그때 상처투성이었거든요. 사람에게 100의 상처가 매년 주어진다면, 열 아홉살과 스무 살의 나는 100의 상처 중에 100을 고스란히 상처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스무 다섯 살의 나는 조금 달라졌지요. 서른 살, 지금의 나는 75정도만 상처받는 사람이 되었어요. 25는 그냥 흘러보낼 수 있어요. 마음에 담아두지 않을 수 있어요. 난 75의 튼튼한 인간이 되었지요. 그게 눈가의 주름살이 늘어도, 체력이 떨어져 밤새 술을 마실 수 없어도, 행복한 서른 살의 나예요. 난 25를 버릴 수 있으니까요.

    소설은 못 생긴 여자와 (세상 사람들이 못 생겼다고 생각하는 여자와)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예요. 그 때의 그들은 켄터키 치킨을 먹으며, 맥주를 마시며, 호프Hope를 꿈꾸죠. 라디오에 어떤 음악을 신청하고, 어떤 음악을 함께 듣죠. 테이블 밑에서 손을 마주잡고 쪼물딱거리며 행복하다, 생각하죠. 야채를 듬뿍 넣은 안주를 만들고, 중국집에 요리를 시켜놓고, 술을 마시죠. 서로를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해주고, 서로가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해주고. 눈이 내리는 길을 함께 걷기도 하고, 컴컴한 밤 거리를 걷으며 잊지 못할 밤을 만들기도 하죠. 내가 예전에 읽었던 박민규 소설과는 다른 소설이지만, 결말의 갑작스런 신파가 당황스러웠지만, 서른의 여름, 이 소설을 읽은 건 다행이예요. 마흔 두 살의 박민규는 몇 년이 지나서야 이 소설을 쓸 수 있었고, 서른의 나는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고보니 같이 들어있던 씨디를 듣지 못했네요. 이건 다음 번에 읽게 될 때 함께 들을래요.

    아, 그 때 작가와의 대화 때 독자들이 낭독을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때 하얗고 예쁜 원피스를 입고 온 커트머리의 귀여운 여자분이 '세상 사람들이 못 생겼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한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죠. 난 그 여자분의 목소리가 너무 고와서, 그 떨리는 음성이 무척 사랑스러워서, 그 시간이 정말 좋았어요. 그 여자분은 박민규 작가님에게 이 소설이 자신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었다고, 감사하다고 얘길 했죠. 난 그 귀여운 여자분에게 감사를. 작가님께 고맙다고 이야기를 하는 그 여자분의 떨리는 음성이 내겐 위로가 되었거든요. 정말이예요. 우린 모두 달의 뒷면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누군가 보이지 않는 그 달의 어두운 뒷면을 다독거려주면, 나도 모르게 따뜻한 눈물이 솟아지니까요. 그러니까, 우리, 모두, 못 생긴 외모보다 잘 생긴 마음을 첫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해요. '행복하세요.' 이건 작가님이 우리들에게 해 준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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