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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중혁, 바질
    서재를쌓다 2012. 12. 13. 22:55

    1F/B1 일층, 지하 일층
    김중혁 지음/문학동네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일곱 편의 단편을 모두 다 읽고도 계속 생각이 났다. 소설은 이별 이야기로 시작한다. 박상훈과 지윤서가 헤어졌다. 첫 문단은 이렇다.

     

        "이별은 육체적인 단어다. 헤어진다는 것이고, 그래서 다시는 가까워질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멀어진다는 것이다. 이별이라는 단어의 물리적인 실체가, 거리에 대한 실감이, 박상훈을 괴롭게 했다. 사흘이 지나자 어딘가 아파왔다. 아프긴 했지만 상처를 집어낼 수는 없었다. 살을 파고 뼈를 헤집어 상처를 들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상처는 계속 이동했다. 때로는 무릎이 아팠고, 때로는 등이 아팠고, 때로는 발뒤꿈치가 아팠다. 모든 고통은 이별로부터 왔다. 닷새가 지나자 모든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걷고 있다는 게 기적 같았고,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고통은 산발적이지만 끊임없었다."

     

        제목은 '바질'. 박상훈은 지윤서와 헤어지고 아팠다. 아프고 아팠다. 아팠지만, 늘 다니던 길로 퇴근을 하고 지윤서 생각을 했다. 박상훈의 퇴근길에 지윤서의 집이 있었다. 박상훈의 이별은 그랬다. 지윤서는 아픈 줄도 몰랐다. 박상훈과 헤어진 지 사흘만에 네덜란드로 세계단추박람회 출장을 갔다. 바빴다. 바쁜 게 다행이었다. 지윤서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열심히 일을 했다. 성공적으로 일을 끝내고 남은 시간동안 네덜란드 이곳저곳을 구경 하고 있던 중, 한 할머니로부터 바질 씨앗을 사게 된다. 아무 때나 심어도, 아무 곳에나 심어도 우리 바질은 잘 자란다는 할머니의 말에 지윤서는 생각한다.

     

        "지윤서는 할머니의 말을 믿지 않았다. 바질이 얼마나 키우기 힘든 허브인지 알고 있었다. 따뜻해야 했고, 환기가 중요하며, 물조절을 잘 해야 했다. 지윤서는 바질을 키워본 적이 있었다. 매번 이 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시들시들해져버렸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윤서는 바질을 화분에 심는다. 할머니의 말대로 바질은 금새 싹을 틔웠다. 진한 향을 풍겼다. 지윤서는 바빴다. 회사일로 바빴다. 회사에서 돌아오면 바로 쓰러져 잤다. 바질을 돌볼 틈이 없었다. 물을 줄 시간도 없었다. 그러자 바질은 금새 시들었다. 금새 싹을 틔우고, 금새 진한 향을 풍겼지만, 금새 시들었다. 그게 바질이었다. 지윤서는 시든 바질을 창 밖으로 던져 버린다. 박상훈은 어느 날 퇴근길에 지윤서의 집을 보다가 점점 커지는 어느 덤불을 발견한다. 아무래도 이상해 덤불을 없애려고 하다, 지윤서가 오늘 출근을 하지 않았고 갑자기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지윤서는 커다란 미로 같은 덤불 속에 있었다. 덤불은 거대한 생명체였다. 지윤서를 집어 삼킬 것만 같았다. 덤불 생명체는 박상훈에게도 접근한다. 박상훈은, 박상훈은 칼을 집어든다.

     

        "박상훈은 칼을 꼭 쥐었다. 덤불을 자세히 살폈다. 덤불의 뿌리는 많지 않았다. 뿌리를 공격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뿌리에 접근하는 게 쉽지 않았다. 덤불의 뿌리가 두꺼워 칼로 잘라내기도 힘들 것 같았다. 박상훈은 어떻게든 나가고 싶었다. 박상훈은 덤불 가까이에 앉아서 빈틈을 찾고 있었다. 덤불 뒤에 숨어 있던 덩굴이 박상훈을 향해 달려들었다. 박상훈은 일어서면서 덩굴을 향해 정확히 칼을 휘둘렀다. 줄기가 두 동강 나고 이파리가 흔들리면서 박상훈의 코로 바질 향이 훅 풍겼다."

     

        김중혁은 자신의 작품에서 숨겨진 의미 따위는 없다며, 그냥 그대로 읽어주면 된다고 했지만, 나는 계속 이 '바질'이 생각났다. 쓸쓸하게 시작했다가, SF로 끝나는, 이 미묘한 소설이 계속 마음에 남아서 한 번 더 읽었다. 술을 마시고 지하철에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다 생각했다. 바질이 사랑인 가봐. 그래, 바질이 사랑이었어. 덤불도 사랑이었어. 사랑이었어. 그때 지하철에서 조제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쿠루리의 '別れ'. 이별. 박상훈이 바질 덤불에 칼을 휘둘렀을 때, 줄기는 두 동강 나고 이파리가 흔들렸다. 그리고 바질 향이 훅 풍겼다. 그렇게 사랑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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