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
이지민 지음/문학동네


   왜 형,에서 민,으로 바꿨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이지형,이라고 발음했을 때의 입 안의 울림이 작가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데. 어떤 이유가 있겠지만 이지민,은 너무 여성적인 느낌이다. 여리고 흔한. 그러고보니 우리 사촌동생 꼬맹이랑도 같은 이름이네.
 
   표지가 예쁜 문학동네 책. 이 소설집에서 마음에 들었던 단편들은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와 '오늘의 커피', '키티 부인' 정도. 소설을 읽고 난 후에 책 표지와 차례를 놓고 봤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오늘의 커피'에서는 번쩍거리는 카페에서 조명을 가장 많이 받는 빛나는 주인장 자리에 어떤 손님이 서서 카페의 주인이 되어 씨디를 고르고 커피를 내려 마시는 모습. '키티 부인'에서는 네모난 방 안 가득한 하얀색 헬로우 키티 얼굴에다 입을 그려놓는 주인공의 모습. '그 남자는...' 에서는 하얀 목련꽃이 핀 좁은 골목길을 돌고 돌아 여자가 남자를 매일 밤 바래다주는 풍경. 소설들이 이미지가 강해 꼭 아홉편의 영화 시놉시스같다. 적당히 기름지고, 적당히 부유해, 매일 밤 외롭고, 어느 날은 쓸쓸하다고 울부짖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p.31-32)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함께 길을 걸었던 사람. 오래 손을 잡고 그 길을 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사람과는 그 길을 딱 한 번밖에 걸어보질 못했다. 매일 술을 마시고, 매일 실연에 빠졌던 서로를 위로했던 스무살 시절의 일이다. 그래, 정말 그 때 나는 스무살이었다. 텅빈 운동장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가 저 멀리서 그 넓고 넓은 운동장을 비틀비틀 가로질러 내게로 왔다.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너에게로 다가가면 언제나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날 뿐이지. 때론 내게 말을 하지 사랑이라는 건 우정보다 유치하다고,로 시작하는 노래였다. 하늘에 별이 총총 떠 있고, 옆에는 얼굴만 봐도 심장이 벌컹거리는 사람이 달큰한 술냄새를 풍기던 스무살. 그 때는 술에 취하면 평소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스러워진다는 걸 잘 모르던 시절이었으니 나의 그의 노래를 카사노바의 세레나데쯤으로 받아들였었다.

   그는 그저 적당히 외로운 순간에 누군가가 필요했던 사람이었다. 때마침 내가 가까이 있어 내게 오고, 내게 와달라고 하고, 내 손을 잡아주었던 거다. 그러면서도 내게는 누구도 아닌 너이기 때문에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건 아주 나쁜 짓이었다. 내 마음은 진심이었는데, 그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도 나중에는 누군가에게 그런 나쁜 짓을 하는 못된 사람이 됐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때서야 스무살 딱 한 번 그 길을 손잡고 걸었던 그 아이의 심정을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내가 참 바보같았구나 깨달았다.


    '그 남자는...'를 읽으면서 갑자기 그 때 그 길이 떠올랐다. 운동장에서 시작해서 친구의 자취집까지 이어지던 정류장이 다섯군데는 될법한 그 길. 어렴풋한 그 밤의 공기. 이제 그 아이의 얼굴이며 이름은 가물가물한데도 그 운동장이며, 불러주었던 노래며, 손을 스르르 잡았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한 걸 보면 내가 스무살 쉬지않고 가슴을 벌렁거렸던 건 꼭 그 아이였기 때문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런 식이라면 그 아이만 내게 나쁜짓을 한 거라고 말할 수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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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민음사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 제1장 첫번째 이야기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8월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 그리고 첫번째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 "이렇게 하여 아무도 그가 실종된 진정한 이유를 모르는 채 7년이 지나, 민법 제30조에 의해 끝내 사망으로 인정되고 말았다."

   <모래의 여자>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 제1장 첫번째 이야기, 9페이지에서 11페이지에 걸쳐 짧게 요약되어있다. 아니, 나는 그렇다고 본다. 실종된 '진정한' 이유는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도 나는 잘 모르겠다. 어렴풋이 알 것 같지만, <모래의 여자>를 읽지 않은 누군가가 그래, 7년이 지나게 그 남자가 실종된 '진정한' 이유란 뭐요? 라고 묻는다면, 나는 글쎄요, 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제1장 첫번째 이야기에는 실종된 '진정한' 이유를 추측을 해 보는 문장들이 있다.

살인이나 사고로 실종됐다면 확실한 증거가 남아 있을 것이고, 납치 같은 경우라도 관계자에게는 일단 그 동기가 명시되는 법이다(p.9)  당연한 일이지만 처음에는 모두들 은밀한 남녀 관계 때문,이라고 상상하였다 (p.10)  세상살이에 넌더리가 나 자살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피력되었다. (p.10)

   <모래의 여자>를 읽지 않은 누군가가 내게 이 문장들을 이용해 질문한다고 생각해보자면, 이런 질문들이 되겠지. '그 남자는 살인이나 사고로 실종됐나요?' 나는 글쎄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요, 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럼 그 남자가 납치당한 건가요?' 글쎄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요. '역시 은밀한 남녀 관계 때문이었지요?' 글쎄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럼 혹시 자살인가요?' 그러면 나는 또 다시 1분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글쎄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한 남자가 있다. 8월의 어느 날, 그는 실종되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곤충채집. 그는 모래 위에서 살아가는 곤충에 관심이 많아 그 곳을 찾았다. 바다가 가까이 있는 모래로 뒤덮인 마을. 모래구멍이라고 해야 하나, 모래에 파묻혀 있는 집들이라고 해야하나. 여하튼 그 독특한 구조의 집에 단지 하룻밤 머물다 가려 했는데 믿을 수 없게도 갇혀 버렸다. 그는 이제 매일 모래의 여자와 함께 모래의 집에서 집 주위로 밀려드는 모래들을 파내야 하는 운명에 처해졌다. 그렇게 그는 실종되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는 어떻게든 이 모래의 집에서, 모래의 여자로부터, 모래의 마을로부터 탈출하려 애쓴다.

  대충의 줄거리다. 결론은 소설의 맨 처음에 제시되었으니 궁금해할 필요도 없다. 그는 7년동안 실종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7년동안 모래의 마을에서 탈출하지 못한 것이겠지. 그러니 이 소설을 읽는동안 궁금증은 과연 남자는 탈출했느냐, 실패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탈출 방법을 시도했으며, 왜 끝끝내 탈출에 성공하지 못했나, 에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이런 순서로 읽었다. 1장, 2장, 3장까지 한 권을 다 읽고, 마지막에 처음으로 다시 돌아와 제1장의 첫번째 이야기를 읽었다. 그렇게 읽으면 소설은 좀 더 명확하게 끝이 난다.

   일단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잘 읽힌다. 읽어갈수록 좋은 책이라는 확신이 드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모래, 라는 물질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늘 고여있는, 정지되어 있는 물질이라고 생각했는데 소설을 읽는동안 머릿속에 그려진 노오란 모래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명체였다. 물결처럼, 바람처럼 흐르는. 그러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모래가 담겨져 있는 이미지들을 기억속에서 죄다 불러내보았다. 그 이미지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과연 모래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보이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바람에 날리고 물에 깍이며 작고 강한 생명체처럼 떼지어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조금 코믹한 상상이라 이 소설과는 어울리지 않긴 하지만, 움직이는 모래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다가 영화 <미이라>까지 갔다. 그건 확실히 역동적이고 거대하고 사악한 모래의 이미지니까. 모래 입에서 검은 벌레들이 막 나오고! 흐흠.)

   마지막에 딱 한번 실종 신고 최고장에서만 이름이 밝혀지는 남자는 처음 모래마을을 찾았을 때 이런 생각을 한다. 모래땅에 사는 새로운 종을 발견해서 곤충도감에 이름을 올리자. 그렇게 곤충이란 형태를 빌려서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자. 그에겐 반영구적인 삶에 대한 바람이 있었다. 결국 모래의 마을에서 그는 정반대의 결과와 마주한다. 이 책의 끝이 남자의 나머지 생의 모습의 반복이라면 말이다. 남자의 이름은 니키 준페이였다. 하지만 모래 위의 주인공은 이름도 없이 그냥 한 남자였다. 모래 위에 새겨진 글자처럼 니키 준페이라는 이름도, 나이도, 선생이라는 직업도 어디선가 스르르 바람이 불면 금방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삶. 소설은 그렇게 끝을 맺는다. 우리들의 대부분의 삶이 그렇듯이.

   니키 준페이가, 아니 남자가 모래 위에 사는 곤충을 채집하려 왔을 때, 그가 열심히 찾았던 곤충을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길앞잡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녀석이다. 등껍질에서 에메랄드빛이 나는 화려한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다면) 이 길앞잡이의 설명 중에 이런 부분이 있었다.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먼저 수직으로 땅에 구멍을 파기 시작한다. 이곳에 살면서 구멍에 빠지는 곤충을 기다려 잡아먹는다." 찾았다. 바로 이 두 문장이다. 이 두 문장으로 길앞잡이의 습성도,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 소설도 모두 설명되어질 수 있겠다. 딱이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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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검색창에 '김연수'라고 치면 오른쪽 연관검색어에 김중혁, 박민규, 김현수, 미스코리아(미스코리아 김연수가 있는 모양이지?)가 뜬다. '김중혁'이라고 치면 간단하게 딱 한 사람과 연관된다. 김연수. (문태준 시인은 연관검색이 아예 없구나) 그러니까 김연수와 김중혁은 연관검색의 관계. 김중혁 작가의 <악기들의 도서관>과 <펭귄뉴스>를 읽었다. 역시 김천. 1970년의(1971년까지, 김중혁 작가는 71년생이니깐) 김천에는 어떤 문학적 태동의 기운이 넘실거렸던 게 틀림없다. 얼마 전,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를 읽고 마음이 먹먹해져 검색창에 문태준만 다섯 번 쳐대며 그의 인터뷰 기사들을 읽었다.

   '자동피아노'를 시작으로 '펭귄뉴스'까지 김중혁 작가를 만난 동안에 느낀 점이란 이런 거다. 한 문장만 쓸 수 있는 작가의 말이 있었다면 그는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나는 쓰는동안 굉장히 재밌었으니, 당신도 재미있게 읽어주길 바랄뿐. 땡.' <펭귄뉴스>의 뒷부분에 수록된 작품은 (특히 '펭귄뉴스') 지루했으나, 대부분의 소설들을 나는 신나게, 그의 상상력에 감탄하며, 재미나게 야금야금 읽었다. <펭귄뉴스>가 발표된 역순으로 수록된 것이라니 그는 '점점 잘 쓰고 있는 작가'라는 것. 그러니 지금 쓰고 있다는 장편도, 발표되어질 다른 소설들도 무척이나 기대된다는 것.


   <악기들의 도서관>을 읽고 이런 메모를 했다. '만약 메뉴얼 잡지가 있다면? 만약 악기소리 대여점이라는 게 있다면? 재밌게 면접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10년을 같은 노선을 다닌 버스가 어느 날 노선을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다면?' 그런 생각을 한 거다. 만약 무엇무엇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은 더 흥미로워지지 않을까, 는 작가의 상상력이 이렇게 신나는 소설들을 만들어낸 거라고. 같은 방법으로 <펭귄뉴스>를 읽고는 이런 메모를 할 수 있겠다. '시각장애인에게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세상의 물건들을 묘사해주는 라디오 방송이 있다면? 개념발명가가 있다면? 나무로 만든 에스키모 지도가 있대매? 자전거 바퀴 회전수로 표시된 지도가 있다면?' 이런 식. 작가의 상상력에 이야기의 살이 붙여져 발명되어진 소설들.

   두 권의 책 중에서 마지막 장이 끝난 뒤에도 다음 장에 쉽게 침을 묻히지 못했던 소설은 '무용지물 박물관'이었다. 나는 정말 이런 라디오 방송이 있었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일밤 잠들기 전, 10분쯤은 눈을 감고 라디오를 듣는 거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사물의 기억따위는 말끔하게 지워버리고 DJ가 들려주는 잠수함과 에펠탑, 암스테르담의 쉬폴 공항을 머릿 속에서 선을 하나씩 그어가며 쓱삭쓱삭 그려내는 거다. 어떤 날은 정말 내가 한번도 보지 못한, 가보지 못한, 사진으로조차 본 적도 없는 사물이 방송되어질수도 있겠지. 그러면 정말 이건 시각장애인용 라디오 방송이 아니라, 언제나 눈을 감고 무언가를 꿈꾸는 사람들의 방송이 되는 거다. 세상엔 눈을 뜨고 볼 수 있는 것보다 눈을 감아야지 볼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일러주는 방송. 그러다 스르르 잠이 들어 노랗고 노란 잠수함이 깊고 깊은 바닷속을 매끄럽게 유영하는 꿈을 기분 좋게 꿀 수도 있는 일. 물론 DJ는 목소리 좋은 김중혁 작가였음 좋겠다. '오늘도 돌아온 이 시간, 김중혁의 무용지물 박물관입니다'로 시작하는. 아, 언젠가 내 사진을 신청사연으로 보내 무용지물 박물관에서 소개시켜달라고 해 보는 상상을 해 봤다. 그는 어떻게 나를 표현해줄까. 뚜렷하고 아름다운 말들이면 좋겠는데. '면목동에 사는 골드소울님은 돌고래의 매끈한 피부를 가지셨군요. 눈은 고등어 눈알처럼 빛나고...' 이런 식이랄까.  

   흠. 결론이란 건 없지만, 굳이 이 글을 마무리하는 결론을 써 보자면, 뭐 그거다. 당신은 계속 신나게 쓰시길, 다음 작품도 나는 신나게 읽어주는 독자가 기꺼이 되어드릴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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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봐요. 이 노래는 흔한 사랑노래, 로 시작하는 20세기 소년의 '사랑노래'를 듣다가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고, 하루종일 엉엉 소리내어 울었던 그날들이 생각났다. 아주 오랜만에. 밤새 잠을 한 톨도 자지 못하고 친구의 꼭대기 삼각형 방으로 올라가 꾸역꾸역 울음을 삼키며 이야기를 시작했던 아침. 그 때 친구의 표정. 이불을 덮고 엉엉 울고 있는 내 방 문을 친구가 열어보곤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닫았던 밤. 그 날의 실루엣. 이상하다. 이건 들어봐요. 이 노래는 흔한 사랑노래, 로 시작하는 아주 예쁜 멜로디의 예쁜 가사인데. 나는 이제 그 날을 예쁘게 추억하게 된 걸까.

 이 앨범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강(江)'. 특히 이 부분. 저 강물은 흘러가네. 그댄 잊혀지네. 미운 그리운 마음은 덧없이 사라지네. 이 부분이다. 듣고 있으면 오전의 강가에 앉아 조용히 흘러가는 강물 위에 손바닥을 슬쩍 대어보고 있는 풍경이 가만히 떠오른다. 하회마을에는 우물이 없대. 하회마을이 한 눈에 보이는 지도 앞에서 누군가 말해줬다. 하회마을이 이렇게 보면 뱃머리처럼 생겼잖아. 배에 구멍을 뚫으면 어떻게 되겠어. 가라앉아버릴까봐 하회마을에는 우물이 없대. 확실하다. 나는 그 날을 아주 예쁘게 추억하게 된 거다.

이 노래들. 20세기 소년. 만화는 아직 못 봤지만, 왜 나는 20세기 소년하면 우주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20세기라는데도. 하루종일 듣고 있는데. 좋다. 정말. 모래가 있는 강가에 내가 앉아 있는 듯. 강물 흘러가는 소리만 낮게 들리는 듯. 따스한 태양의 기운으로 강물이 끝도 없이 반짝이는 듯. 그 풍경 속에서 이 노래들과 함께 자꾸 모래 속으로 가라 앉는 듯. 기분 좋은 그 날의 기억을 자꾸 들춰낸다. 분명 예뻤던 날.




도서관에서 하진의 '벚나무 뒤의 집'을 읽고 이런 시를 읽었다.


초원의 빛
송찬호


정한아의 '휴일의 음악'을 읽고 다시 한번 시를 읽었다.
복사기로 가서 1540원이 남은 복사카드를 넣고 164페이지를 복사하고 도서관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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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만찬
공선옥 지음/달


   사실 저는 아무 것도 한 게 없어요. 공선옥 작가가 다 차려놓은 행복한 밥상에 숟가락 하나 들고 열심히 떠 먹은 것밖에, 라며 배를 두드리기라도 해야할 것만 같은 이 기분 좋은 포만감. 공선옥 작가의 행복한 산문집을 읽었다. 읽는 내내 나는 따땃한 아랫목에 자리잡고 앉아 작가의 흙내나는 밥상을 염치없게 내어주는대로 받아 맛나게 먹었다. 됐다고, 배부르다고, 이제 더이상 못 먹겠노라고 손사래 치는 일 없이 나는 그녀가 내어주는 음식을 그릇소리가 나도록 싹싹 긁어가며 맛나게 비웠다. 그러면 그녀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아, 이것도 있다며 구수한 냄새 그득한 오래된 부엌으로 달려가 금세 무치고 부쳐 땅내 고스란히 담긴 음식을 뚝딱 만들어왔다.
 
   그녀의 음식들은 값비싼 재료로 만든 것도 아니고, (아니다. 요즘은 웰빙웰빙해서 이런 농약도 없는 땅내나는 재료들이 더 귀하다) 화려한 장식을 해서 먹기 부담스러울 정도도 아니다. 그저 이 땅 어딘가에 뿌려놓은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난 뒤 열매를 맺은 재료들. 봄의 공기와 여름의 태양과 가을의 바람을 양분삼아 건강하게 자란 우리 땅의 먹거리들을 내 새끼 생각하며 정성스레 만들어 내어 놓은 어미의 소박하지만 무엇보다 풍성한,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들이다. 아, 또 침 넘어간다.  

   엄마의 정성어린 집밥이 생각나면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스르르 넘겨 읽으면 좋을 책. 집에 먹을 것도 없고, 사 먹는 음식은 싫고, 엄마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행복한' 만찬이 아니라 오히려 '괴로운' 만찬이 되기 십상이지만 혹시나 모를 일이다. 기적처럼 누군가 멀리 떨어져 있는 엄마를 대신해 맛난 밥상 차려놨으니 당장 달려 오라고 말해 줄지도. 내게는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 행복한 만찬을 맛나게 읽고 있던 중에 외할머니가 멀리서 커다란 택배를 보내셨다. 명절때나 먹을 수 있는(나는 절대해도 이 맛이 안나는) 밥도둑 할머니표 찌짐, 딱 먹기좋게 익은 묵은지, 싱싱하게 손질되어 있는 장어, 먹기 좋게 한번 쪄서 보내 주신 남쪽 바다의 맛난 생선들, 옥수수에 멸치에 직접 기르신 튼실한 깻잎에, 참기름내 솔솔 나는 명란젓, 짭짤한 나물, 맛나게 양념된 새우와 꽁치와 마늘, 아침에 직접 볶으셨다는 깨에다가 고춧가루, 사탕에 초콜렛까지. 이 택배를 받아들고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찔끔 나올뻔 했다. 당장 장어를 구워 깻잎에 싸서 마늘도 넣고 양념을 듬뿍 묻혀 입 안으로 쉴새없이 집어 넣었다. 정말 눈물 날 정도로 맛있었다. 그러니 공선옥 작가의 <행복한 만찬>을 펼치면 정말 마법같은 '행복한 만찬'이 당신에게도 짜잔, 배달될지도 모르니 당장 요 흙내나는 책을 집어드시길.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게 마법의 책이다.

   나는 요즘 입에 착착 달라붙는, 틀에 박힌 식상한 표현보다 뭔가 발음되어졌을 때 입안이 가득 차 오르는 풍성한 말들을 하고 싶어 책을 읽다 생소한 우리말을 만나면 수첩에 적어두고 사전을 찾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때처럼. 고등학교 때 국어사전을 모조리 외우고 학교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자자한 국어선생님이 계셨다. 아나운서 외모에 단 한번도 똑같은 옷을 입는 걸 본 적이 없는 그 선생님께서 어찌나 사전, 사전을 입에 달고 다니셨는지 그 때 우리 모두 국어사전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다. 사전없이는 수업도 들을 수 없어 복도로 나가야했고, 국어책에 생소한 단어라도 나오면 무조건 그 날의 번호들을 불러 일으켜 세워 그 뜻을 물었다. 물론 정확한 국어사전식 대답을 해야만 앉을 수 있었다. 그 선생님만 아니였으면 나는 일찍부터 국어사전을 사랑하였을터인데. 아무튼 자판을 두드리는 컴퓨터 사전말고 책장 구석, 먼지에 쌓여있던 두꺼운 종이사전에 꺼내 침을 묻혀가면서 찾고 있다. <행복한 만찬>에서는 이런 말들을 찾았다. 도도록하다. 설핏하다. 톱톱하다. 바특하다. 톡톡하다. 역시 공선옥 책의 어떤 구절들은 직접 소리내어 읽으면 더 좋은 것처럼 이 표현들도 그렇다. 톱톱하다. 바특하다. 톡톡하다. 아, 그리고 여기 <행복한 만찬>에서 소리내어 읽었던 좋은 구절. 다이어리에 적어뒀다. 

   아. 어둠과 비와 바람과 달과 별빛을 먹는 우리들. 단순한 채소가 아니다. 봄의 바람과 여름의 비, 가을의 달, 겨울의 별빛. 배 불러 터져도 좋을 행복한 만찬. 외할머니는 택배를 보내시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오신다. 오늘은 뭐 해 먹었노? 장어는 맛있드제? 깻잎은 먹었나? 할머니가 직접 기른거다. 하모. 서울에서 파는 거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새우는 먹었나? 물 좀 더 넣고 끓여 먹지 그랬나? 그랬나? 잘했다. 옥수수는 쪄 먹었고? 달달하드제? 한참 먹겄제? 그래. 맛있게 묵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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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 국도
김연수 지음/문학동네


   <7번 국도>까지 마쳤다. <7번 국도> 속 나와 재현이 포항에서 속초까지 7번 국도를 거슬러 올라갔듯이 나도 김연수의 책들을 거슬러 읽었다. 절판된 <스무살>과 <7번 국도>는 조금 멀리 떨어진 도서관까지 땡볕에 걸어가 빌려왔다. 처음 가는 길이라 무작정 버스 노선을 따라 걸어 빙 둘러가 도착해보니 늘 가던 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던 곳이었다. 바보같이. '2001년 문학 활성화를 위해 문예진흥원이 뽑은 좋은책'이란 동그란 스티커가 붙여져 있는 <7번 국도>를 펼치니 놀랍도록 어린 김연수가 불테안경에 주황색 스웨터를 입은 채 이 보다 더 활짝 웃을 순 없다는 듯 아주 방긋 웃고 있었다. 초판의 인쇄가 1997년 11월 17일. 그러니 그는 1997년의 김연수. 무려 십여년 전.
 
  김연수를 거슬러 읽으며 감탄했던 책은 <꾿빠이 이상>과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설레여했던 책은 <스무살>과 <7번 국도>. 그러니까 어떤 식이냐면 내가 김연수를 배우 좋아하듯이 선망하게 된 것이다. 일단 작품을 모조리 찾아 읽고, 기사를 찾아 읽고, 인터넷을 떠도는 만나봤는데 -더라, 식의 잡담들에 혼자 깔깔거리고, 그의 소소한 사생활이 궁금해 미치겠으며, 그를 볼 수 있고 내가 참석할 수 있는 행사면 무조건 신청하고 당첨되어 가게 되었다는 것. 최근에는 창비의 북콘서트에 참석했는데 <꾿빠이 이상>을 가져가 사인을 받았다.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내밀고 그가 내 이름을 그 탐스런 파아란 만년필로 새겨넣는 순간의 어색한 공기를 뚫고 내가 어떤 말을 건넸더니, 그가 내 이름이 기억난다고 말해주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콩당거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야밤의 남산을 순식간에 폴짝폴짝 뛰어서 내려왔다는 사실. 배우 좋아하듯 김연수를 좋아하게된 나는 <스무살>과 <7번 국도>의 주인공들은 분명 주황색 스웨터를 입은 그 시절에 그가 겪었던 어떤 진실한 순간의 모음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 이 책들이 사랑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소제목 자체가 곧 기억의 편린이 되는 <7번 국도>를 한밤중에 읽다가 잠도 오지 않는데 책을 덮고 제발 이런 꿈을 꾸게 해 달라며 잠을 재촉했던 페이지가 있었다. 118페이지.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7번 국도'의 기억이다. 

   그건 1991년의 서연이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재현의 기억 속으로 영원히 들어간 1991년의 서연.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그래서 잊을 수 없는 사람이 평생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그래서 잊을 수 없는 그 모습 그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일도 있다는 사실. 내가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그래서 잊을 수 없는 행동 그대로, 세월 때문에 주름이 생기지도 않고, 술을 많이 마셔 살이 찌지도 않고, 머리카락이 자꾸 빠져 탈모를 걱정하지 않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 없이, 나를 바라봐 주었던 모습 그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나가고 있는 거다. 그래서 언젠가 2008년의 나와 1991년의 서연이 마주칠 수도 있고, 2008년의 너와 이야기로만 들었던 1991년의 서연이 마주칠 수가 있는 거다.

   나는 그 밤, 그런 꿈을 꾸고 싶었다. 1991년의 나와 1991년의 서연이 만나는 모습을 2008년의 내가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꿈. 2008년의 나와 1991년의 서연은 안된다. 2008년의 서연과 1991년의 나도 안 된다. 그건 생각만 해도 너무 슬플 것 같다. 그건 마치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먼저 마음이 떠나 헤어지는 것과 같다. 그건 너무 아프다. 그건 너무 아파서 장마비가 우두둑 떨어지는 포장마차에서 6만 7천원치의 술을 쉬지않고 퍼 마셔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만나려면 1991년의 나와 1991년의 서연이여야 한다. 쓸쓸하겠지만 꼭 2008년이어야 한다면 2008년의 나와 2008년의 서연이 만나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 밤, 원하는 꿈은 꾸지 못했다. 다음날 일어나 <7번 국도>를 다시 읽어 나갔고, 더 이상 책을 덮고 꿈을 꾸고 싶은 부분은 없었다. 속초에서 그들의 7번 국도는 끝났다. 진짜 정동진의 일출을 보자고 책 속의 나는 덧붙였지만 그들이 그 일출을 결국 보았는지, 보지 못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쨌든 이야기는 1996년 8월 7일로 끝나 있었다.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 내 기억 속에 담아둔 2000년의 그. 절대 2008년의 그가 아니다. 2000년의 그다. 복잡한 지하철역에서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고 마음이 쿵 주저 앉게 되는 때는 그런 순간이다. 2000년의 그를 발견하게 되는 때. 어떤 날은 그럴리가 없다며 쓱 앞으로 지나가 그가 아님을 확인하기도 했지만, 마음이 쿵 떨어지는 순간, 고개를 바로 돌려 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하는 날들이 더 많았다. <7번 국도>를 읽으면서 그 순간들을 위로받았다. 그 순간들을 이해받았다. 그래, 내 기억속 2000년의 그도 어떤 날의 내 그리움을 양분삼아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테지. 어쩌면 2000년 그 곳으로 가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럼 너무 슬퍼질 것 같아. 나는 2008년의 사람이니까. 그냥 언젠가 과거의 너와 현재의 내가 마주하는 날이 없기를, 마주하게 된다면 과거의 너와 과거의 나이기를. 이건 너무 꿈만 같은 일 같아. 꿈만 같은 일.

    이제 <가면을 가리키면 걷기>만 남았다. 아, 읽는 내내 갖고 싶었던 파스텔 톤의 <스무살>은 중고샵에서 발견했다. 도서관 책을 훔칠 필요는 없어졌다. 흐흐- 이런 상상을 해봤다. <스무살>을 읽는 동안. 어떤 소설가의 첫사랑이 되는 것에 대해. 소설가와는 헤어졌지만 수년이 지나보니 본래 소설가는 아니었던 소설가는 소설가가 되어있고, 소설가의 첫사랑이었던 그 시절의 이야기가 오래된 어떤 책에 담겨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에 대해. 그 책 속에 그려진 자신의 아름답게 빛나는 젊은 시절에 대해. 소설가의 첫사랑은 늙어가지만, 오래된 책 속 주인공은 영원히 늙어가지 않게 되는, 주름이 생기지도, 살이 축축 늘어지지도, 삶이 지긋지긋해지지 않는 소설 속 삶에 대해. 그러면서 배우처럼 한 작가를 좋아하게 된 나는 생각했다. 책 속에 존재하는 그 시절의 나를 가진 이는 얼마나 행복할까. 나도 소설가와 사랑했어야 했다. 꼭 한 명, 누군가와 첫번째 사랑을 해야 했다면, 그건 훗날 소설가가 될 운명을 지닌 사람이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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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내력
오쿠이즈미 히카루 지음, 박태규 옮김/문학동네

  
    나는 이 책을 '돌의 내력'을 담은 장편소설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144페이지에서 뚝 끊겼다. 그래서 큰 챕터가 나눠진 것이라 생각하고 '세눈박이 메기'를 읽었다.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돌의 내력'은 144페이지가 마지막이었다.

   그러니까 <돌의 내력>은 '돌의 내력'과 '세눈박이 메기' 두 중편소설을 담은 책이다. '돌의 내력'을 읽다 가슴이 시릴대로 서늘해진 나는 갑자기 밝아진 분위기의 '세눈박이 메기'를 그냥 덮어버리고 읽지 않으려 했다. 이건 순전히 '돌의 내력'의 서늘함 때문이었다. 그러다 '돌의 내력'을 쓴 작가라는 생각에 끝까지 읽어냈다. 그러다 이 문장을 발견했다. 279페이지. "세계는 그야말로 웅대하고 산뜻했다." 이 짧은 문장을 반복해서 읽었다. "세계는 그야말로 웅대하고 산뜻했다." 세계는 그야말로.

   '세눈박이 메기'는 일본의 민간신앙과 종교의 마찰을 한 평범한 가족 속에서 이야기한다. 내가 반복해서 읽었던 문장의 앞에는 소나기가 한동안 시원하게 쏟아진다. 주인공과 그의 삼촌은 낚시를 하던 중이었고, 그 날은 민간신앙에 따르면 절대 낚시를 해서는 안되는 날이었다. 그들은 같이, 혹은 따로 가문이냐, 신앙이냐를 두고 갈림길에 서 있었다.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무료한 낚시 중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고, 그들은 흠뻑 젖은채 비를 피했다. 구약성서에서 신은 대부분 폭풍우과 함께 나타나,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소나기가 그쳤다. 세상이 10미터쯤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다시 낚시를 시작했고 조그만 메기 한 마리를 낚았다. 처음부터 낚시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 별들과 은하수가 보이기 시작하는 밤하늘 아래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던 그 때, 이 문장이 (내게) 반복되었던 것이다. 세계는 그야말로 웅대하고 산뜻했다. 세계는 그야말로.

   세눈박이 메기의 세계가 그야말로 웅대하고 산뜻하기는 해도 이 책의 압권은 단연 '돌의 내력'이다. '돌의 내력'을 읽다 '세눈박이 메기'가 시시해졌을 정도니까. 강가의 돌 하나에도 우주의 전 과정이 새겨져 있다, 고 시작하는 소설은 마치 우물 안쪽의 서늘한 돌을 만지는 느낌이다. 우연히 들른 마을에 아직도 남아 있는 우물이랄까. 발끝을 있는대로 바짝 들어올리고 허리를 바짝 꺽어 캄캄한 우물 속 서늘한 바람의 기운을 마주하고선 손바닥을 뻗어 서늘한 돌의 감촉과 그 속에 끼여있는 이끼의 눅눅함을 쓰다듬는 느낌. 내 눈 아래 캄캄한 어둠의 끝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이 있고, 그 물 속에 어떤 것이 담겨져 있을지 모르는 상황. 우물에 빠져 죽어 귀신이 되어 이승의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의 실체와 마주할 수도 있고, 지금 이렇게 떨어져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고독하게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안에서 아무런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늙어갈지도 모르는 내 두려움이 깊게 가라앉아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읽은 '돌의 내력'은. 결말이 서늘하고 따뜻하다. 결말이 좋아 마지막 몇 페이지만 두 번을 읽었다. 처음에는 서늘했다. 6월이었는데도 피부 끝으로 한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두번째는 따뜻했다. 나는 내가 처음에 결말을 잘못 읽어냈구나, 생각했다. 이건 직접 읽어봐야 안다. 

  각섬석반려암, 석영섬록암, 구과휘록암, 감람석현무암......
   

   고독할 때,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고 느껴질 때, 내 어떤 과거가 끔찍해질 때 주문을 외우자. 각섬석반려암, 석영섬록암, 구과휘록암, 감람석현무암. 그저 평범한 돌멩이 하나에도 지구라는 한 천체의 역사가 아주 선명하게 새겨져 있으니, 나보다 더 오래 전에 이 세상에서 태어나, 수도 없이 깍이고 깍이고 깍여나갔으니. 이 주문은 분명 효과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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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책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민음사


   내가 가진 유일한 세계지도, 삼성지능업 세계지도에서 보자면 터키를 대표하는 건 성 소피아 성당이다. 포털 검색창에서 '터키 성 소피아 성당'이라고 치니 성 소피아 성당을 앞에 우뚝 세우고 가지각색의 하늘이 펼쳐진다. 사파이어 빛깔의 파아란 하늘, 금세 쏟아질 것 같은 회색빛 하늘, 노을을 품은 주홍빛 하늘, 야경만 환히 빛나는 까아만 하늘. 성당의 지붕, 돔 위에 하얗게 눈이 내려앉은 사진도 있다. 이 즈음이 <검은책>의 계절일테지. 이 곳에서 쓰여진 책을 읽었다. 언젠가 친구가 꼭 가보고 싶어했지만 결국 계획에서 빼버릴 수밖에 없다고 했던 나라, 터키.
 
   내겐 사람에게도 그렇듯 책에게도 첫인상이 있다. 물론 사람에게도 첫인상을 착각해 나랑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나쁜 사람으로 분류했다가 나랑 닮은 구석은 눈씻고 찾아볼래도 없지만 즐겁게 어울릴 수 있는 좋은 사람으로 재분류되는 경우도 있듯이 (그런 사람은 대개 사귀고 보면 닮은 구석이 꼭 한 군데 이상은 있는 경우긴 하다.) 책도 그렇다.  이건 도저히 내가 읽지 못할 딱딱하고 어렵고 재미없는 나쁜 책으로 분류해 몇 장 채 넘기지도 못하고 덮어버렸다가 시간이 지나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을 때 후다닥 끝까지 단숨에 읽어버리게 되는 딱딱하지만 촉촉하고 어렵지만 깊이 있으며 재미없는 부분과 재미있는 부분이 공존하는 좋은 책으로의 재분류. 노벨상 수상작가라고 하면 일단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어 <눈>인지 <내 이름은 빨강>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도서관에서 꺼내들었다가 다시 금세 꽂아두었던 기억을 뒤로하고 <검은 책>을 읽었다. 정혜윤의 <침대와 책>에 인용된 구절 때문에.  

   쉽지 않았다. 어려웠다. 길고 어지러운 미로같은 만연체의 홍수 속에서 헤매고 또 헤맸다. 출구를 찾아가는 내 앞으로 한 문장 안의 넘치고 넘치는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와 조사가 넘실거렸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발로 헤쳐내야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는데 그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코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도 익숙해지면 어느새 환해지는 것처럼 어느 정도의 미로를 지나니 나는 그것들을 손으로 발로 헤치내지 않고서도 미션 임파서블의 거미줄같은 보안선을 사뿐히 피해가는 주인공처럼 묘기를 부리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어떤 형용사와 명사는 쉽게 지나칠 수 없어 다시 돌아가 가슴팍에 단단히 쑤셔넣고 함께하기도 하면서. 딱딱하고 어렵긴 했지만 재밌고 좋은 책이었다. 내 첫인상이 반쯤은 틀린 셈이다.

   그러다 내게 마법같은 순간이 왔다. 2부를 읽어가고 있던 때. 이 부분이다. 174페이지.

  
   그 때 나는 집 앞 도서관에서 이 책을 읽고 있었는데 저녁시간이었다. 그날은 운 좋게도 늘 내가 호시탐탐 노렸던, 그러나 너무나 안락해 그누구도 쉽게 자리를 떠나지 않았던 창가의 쿠션의자를 차지했던 날이었다. (정말 그 의자에 앉으면 뭐든 잘 읽힐 것만 같았다. 창가의 나무의자들은 죄다 딱딱하기만 해서 허리가 금세 아파왔다.) 과연 그 의자는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안정감 있는 양 옆의 손잡이하며. 허리를 받쳐주는 믿음직스런 쿠션의 감촉하며. 그 창가의 쿠션의자에 허리를 기대고 <검은책>을 읽어나가고 있는 즈음(끊임없이 책은 말하고 있고. 나 자신이 되어야 해!) 창밖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앞 건물의 옥상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이는 환한 여름 저녁밤의 풍경이 점점 어두워졌다. 해가 완전히 지고 도서관 안 형광등을 더욱 빛을 발했다. 그러다 저 구절을 읽다 우연히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는데 그 너머에 지루한 얼굴의 내가 있었다. 믿을직한 쿠션의자에 앉아 <검은책>을 읽고 있는 글자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내가. 아, 나는 그 순간 이 책의 명사며 동사며 형용사며 조사들이 모조리 이해될 것 같았다. 제랄과 갈립도. 뤼야와 보스포루스 해협도. 알라딘 가게와 코낙 극장도. 지금까지 읽었던 이야기도, 앞으로 읽을 결말도 모조리.

   그리고 그 밤. 믿음직한 쿠션의자 위에 앉아 창 속의, 아니 창 바깥의, 아니 거울 속의 나를 보면서 책 속의 갈립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내가 사랑했었던 한 사람을 생각했다. 내가 사랑했던 그의 행동, 그의 표정을 생각했다. 눈과 입은 충만하나 코는 고독했던 얼굴. 그리고 <검은책>. 처음부터 끝까지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눈 앞이 번쩍였다. 뭔가 내 마음 한귀퉁이를 쓸고 나갔다. 역시 나는 나를 끔찍히도 사랑했던 거다. 그건 그의 행동, 표정이 아니라 그것들은 나의 행동, 나의 표정, 나의 마음이었다. 갈립은 점점 제랄이 되어갔지만 그건 제랄의 외투를 걸쳐입은 갈립일 뿐이었다. 갈립은 점점 이 세상의 오직 하나뿐인 깊고 깊은 갈립 자신이 되어갔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나 자신을 알기 위해, 온전한 나 자신이 되기위해 평생을 노력하지만 나 자신이 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기도 하고, 나 자신이 되는 순간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 자신이 된다는 건.

   아, 횡설수설. 나는 이 책을 살아가면서 스무번은 넘게 읽어야 온전한 작가의 뜻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스무번이 넘는 오독을 하면서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이해했노라고 만족할지도 모른다. 그 때마다 창가가 거울이 되는 마법같은 순간들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스무번이 넘는 나를, 스무번이 넘는 모습으로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멀고 먼 성 소피아 성당의 나라 한 쪽 구석, 쓸쓸한 오르한 파묵의 창가에 앉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다보면 언젠가 브라보를 외치며 온전한 나 자신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읽어나가며 제일 위안이 됐던 것은 소설의 형식에 있었다. 제랄의 시詩적인 칼럼이 끝나면, 여전히 나 자신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갈립의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라는. 그리고 갈립의 한 토막 분량의 미로가 끝나면 다시 제랄의 '마치 흐린 날 아침, 꿈에서 깨어나 맞이하게 되는 회색빛의 칼럼'이 시작될 것이라는. 이 두 이야기가 연결된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리며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는 걸. 결국 오르한 파묵의 <검은책>은 2권의 314페이지에서 끝이 났지만 여전히 온전한 내가 되지 못해 헤매고 있는 나의 검은책은 끝도 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정말.  



   덧, 제랄의 칼럼은 모두 좋았는데(갈립의 칼럼이기도 한) 특히 2장의 보스포루스 해협의 이야기(이건 마치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마지막 카메라의 시선을 연상시켰다)와 6장의 마네킹 이야기가 특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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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김연수 지음/작가정신


   영화 <섹스앤더시티>를 보러 가는 내
가방 안에 김연수의 <사랑이라니, 선영아>가 들어있었다. 나는 작가 김연수에 빠져들고 있는 중이였고, 그건 내가 읽은 그의 네번째 책이었다. <사랑이라니, 선영아>은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건 팔레노프시스 때문이었다고 광수는 생각했다.' 소설의 주인공인 광수는 자신의 결혼식날 신부의 부케 속 줄기가 부러진 팔레노프시스를 보곤 마음이 복잡해진다. 왜 멀쩡한 팔레노프시스가 꺾여졌는가. 왜 하필 내 아리따운 신부가 예전에 끔찍히도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의 친구인가.

   영화를 보면서 내내 그 문장을 생각했다. '모든 건 팔레노프시스 때문이었다고 광수는 생각했다.' 왜 티비에서는 꽤 근사해보였던 40대 섹스앤더시티 언니들의 과도한 메이크업이 커다란 스크린 위에서는 그리 거북했는지를 1시간 넘게 골몰했던 극장 안 내 머릿속에서 그 문장이 끊이지 않고 떠올랐는가. 캐리가 언제나 그렇듯 덩치에 안 어울리게 비겁한 빅에게 팔레노프시스는 아니더라도 화려한 부케를 휘둘러 산산이 부서진 꽃잎을 아스팔트 위에 흩뿌릴 때도 나는 그래, 팔레노프시스 = 부케 때문이야, 라고 생각했다. 그건 내게 생소한 꽃의 이름, 팔레노프시스라는 단어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에 깨달았다. 그건 단어 '팔레노프시스' 때문이 아니라 '모든 건 A 때문이었다고 B는 생각했다' 라는 문장 전체 때문이었다는 걸.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결국 결혼에 실패한 건 (아니, 화려한 결혼'식'에 실패한 건) 전날 파티에서의 일을 제대로 말해주지 않은 미란다때문이라고 캐리는 생각한 거다. 뭐. 그런 식으로 이어지자면 진작에 솔직하게 말하려고 했던 미란다에게 그건 옳지 않는 방법이라며 저지했던 샬롯때문에 미란다는 그렇게 행동한 거다. 돈도 많고 기름기 넘치게 여유롭지만 늘 캐리 앞에서는 비겁하기 일쑤였던 빅에게도 할 말은 있을 거다. 이 모든 건 덩치에 맞지 않게 떨리는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던 결혼식 아침 캐리가 전화를 받아 괜찮아, 우리 완벽해, 라고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고 빅은 생각할 거다. 뭐든지 그런 식이다. 캐리네 사람들은. 그리고 그건 스크린 바깥 우리네 사람들도 마찬가지. 늘 그건 그 사람, 그것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원인은, 문제는, 극복해야 할 대상은 내 안에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는 거다. 그걸 발견하고 도려내고 미련없이 버려내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서른이 된다고 해서 누구나 다 어른이 되는 건 아니듯. 어른이 되는 건 정말 심장(아니 신장 정도)을 도려내는 아픔을 견뎌내야만 하는 거다. 고개를 숙여 속을 들여다보면서 내 안에 이렇게 많은 '때문에'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언니들이 돌아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언니들은 내게 실망감만 그득히 안겨주었다. 오직 사랑, 엘.오.브이.이만을 외치는 언니들은 정말이지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개봉날, 전석이 꽉찬 극장 좌석의 맨 뒤에 앉아서 캐리네 언니들을 올려다보며, 언니들을 보려온 수많은 여성들을 내려다보며 의심했다. 내가 그렇게 열광했던 브라운관의 섹스앤더시티는 어디갔느뇨. 브라운관의 언니들도 늘 이렇게 사랑만을 외쳤던가. 근사한 철학사상을 찾았던 건 아니었지만, 언니들은 늘 내게 30분을 넘기면 어떤 사소한 깨달음을 던져주었다. 늘 오르가즘을 느끼는 친구도 어머니를 잃은 친구에게 진정한 위로의 말을 건네기 전까지는 절대, 어떤 탄탄한 근육의 상대와도, 어떤 기묘한 자세로도 오르가즘을 느낄 수 없다는 걸. 포스트잇으로 이별의 메세지를 전하는 남자와 끝낸 후엔 거리에서 대마초를 피워도 눈 감아줄 경찰이 있다는 걸. 정말로 사랑했던 그 사람은 나와 기필코 결혼하려 했지만 그 사람은 결국 결혼이라는 안정적인 제도를 원했던 것이지 나를 원했던게 아니었다는 걸. 스크린 위의 언니들은 너무 늙어보였고, 너무 지쳐보였다. 사랑, 만을 정열적으로 외쳐대기엔 너무 많은 나이였다. 그 나이에는 사랑따위는 가뿐히 즈려밟는 여유가 돋보이는 건데 말이다.

   그리고 전혀 상관없는 영화 <섹스앤더시티>를 보는 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사랑이라니, 선영아>에서 두 번 읽었던 구절.

   하지만 사랑이 끝나면 이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다. 사랑의 종말이 죽음으로 비유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사랑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원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데, 그러면서 무한히 확장됐던 '나'는 죽어버린다. 진우의 말처럼 한 번 끝이 난 사랑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죽음은 비가역적인 과정이다. 사랑의 종말도 그와 마찬가지다. 확장이 끝난 뒤에는 수축이 이어지게 된다. 사랑이 끝나게 되면 우주 전체를 품을 수 있을 만큼 확장했던 '나'는 원래의 협소한 '나'로 수축하게 된다. 실연이란 그 크나큰 '나'를 잃어버린 상실감이기도 하다.

    56페이지에서 57페이지에 걸쳐진 이야기. 2003년의 김연수의 말이다. 소설에도 빅같이 비겁한 주인공이 등장하긴 한다. 아내의 예전 남자친구, 즉 자신의 친구와 아내가 잤느냐에 골몰하는 사내가. 결국 모든 건 꺽여진 팔레노프시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내가. 여전히 너무 아픈 이유로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나도 그대들도. 사랑의 기쁨도, 사랑의 아픔도 초월하는 근사한 어른이 되는 길은 너무 멀고 험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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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마음산책

   알라딘 중고샵에서 '김영하'라는 판매자 이름을 발견했다. 김영하? 그 김영하? 정말? 판매자 김영하가 내어놓은 중고책 리스트를 봤다. 책의 권수도 많았고, 그 중에 한국소설도 많았다. 아, 이 책을 왜 파는거지? 소장하시지 않고? 나는 판매자 김영하를 그 김영하로 확신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책은 출판사에서도 보내주고 직접 구입도 하고 그러그러해서 두 권이 생긴 걸거야. 그래서 알라딘 중고샵도 오픈했다, 재밌겠다 그런 생각으로 이렇게 대방출하는 거겠지. 언젠가 책이 너무 많아 둘 곳이 없어서 한번씩 헌책방에 판다는 이야기를 읽은 것도 같다. 아, 그래도 이 책은 가지고 계시는 게 좋을텐데. 그러다 상품상태에 구입날짜와 서명이 적혀져 있다는 책들을 발견했다. 오호라, 그럼 그 김영하가 직접 쓴 날짜와 서명이 적힌 책이란 말이지? 생각해보고 말 것도 없었다. 그 중에서 읽고 싶은 책 3권을 추려내 주문했다. 김훈의 <칼의 노래>, 신경숙의 <딸기밭>, 그리고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

   판매자 김영하가 그 김영하가 아니라는 사실은 금방 알았다. 알라딘 중고샵 배송 느리기로 소문 났는데, 이 칼을 품고 딸기밭에 앉은 청춘의 문장은 엄청나게 빨리 도착했다. 일단 택배상자의 보내는 이의 이름이 김영하가 아니었다. 주소도 내가 아는 그 김영하가 살고 있는 서울이 아니었다. 왜 판매자 김영하는 김영하라는 닉네임을 쓴 걸까? 김영하의 김자도 써져 있지 않은 판매자 김영하의 자필서명을 보며 생각했다. 나처럼 그 김영하인 줄 알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봐? 판매수익을 올리기 위해? 설마. 그럴리 없어. 그래,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김영하를 너무나 좋아해 닉네임을 김영하라고 지은 거라고. 아니면 가족 중에 진짜 이름이 김영하인 사람이 있을 지도 몰라. 하지만 판매자 김영하는 김씨가 아닌걸? 그럼 엄마나 아이들 중에 김영하가 있나 보지.

   그렇게 구입하게 된 <청춘의 문장들>. (그래도 판매자 김영하가 보내준 세 권의 책은 모두 새 책처럼 깨끗했다) <여행할 권리>를 읽고 그의 산문을 연달아 읽고 싶어 꺼내들었다. 예전에 동생이 정말 좋다,며 도서관에서 빌려왔을 적에 다 읽지 못하고 골라 읽고는 반납기간에 쫓겨 반납했는데 이번에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읽었다. 그리곤 또 아, 김연수, 모드로 전환해버렸다. 그야말로 아, 김연수다.

   <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나는 김연수의 소설도 좋아 하지만, 산문을 더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뭐라해야하나. 그의 산문들은 나를 위로해준다. 자기 자신이 치유되기 위해 소설을 쓴다는 소설가처럼, 나는 그의 문장에서 치유받는 거다. 자신의 소설이 위안이 된다는 독자의 말이 위안이 된다던 김애란처럼, 그의 문장이 내게 위안이 된다. 진심으로.

   읽다보니 동생이 도서관에서 빌려왔을 때 읽었던 글들이 다 김광석에 관한 글이었다. 이번에 <청춘의 문장들>을 읽겠다고 하니 정말 좋았어, 라며 김연수는 김광석을 들으며 청춘을 보냈어, 그리고 김광석도 실제로 한번 봤대, 라고 하는 걸 보니 그 때 동생이 김광석 이야기를 하며 목록의 어떤 제목들을 몇 개 집어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 다른 글들은 처음으로, 김연수의 청춘에 얽힌 김광석에 대한 글들은 두 번씩 읽었다. 정릉의 한 자취집 마루에서 퇴근 후 모여앉은 그녀들과 술을 마시며 김광석을 듣던 이야기. 모두들 처음엔 가만히 듣기만 하다가, 어느 한 사람이 먼저 낮게 따라부르기 시작하다가, 결국에는 목청 터지게 합창하게 되는 김광석을 품은 밤. 복학생 시절 도서관에서 오후를 보내고 유리문을 여는 순간 마주한 김광석의 목소리. 5월의 푸른 밤 아래 통기타를 든 키가 작은 김광석과 마주한 이야기. 이 글을 읽곤 엠피쓰리에 김광석의 '그날들'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당장 이어폰을 꼽고 들었다. 언젠가 설경구가 러브레터에 나와서 박자 무시하고 마음대로 '그날들'을 불렀는데, 이렇게 근사한 노래가 있나, 하곤 찾아보고 수도 없이 따라불렀던 그 노래. (최근에 그 때 설경구가 노래한 파일을 우연히  들었는데, 정말 완전 박자 무시하고 불렀더라. 그럼에도 설경구이기에 어떤 진심이 느껴졌었던 거지. 그 때 나는 윤도현이 껄껄거리며 웃으며 정말 니멋대로 부르시네요, 식의 멘트를 날렸을 때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정말 잘 불렀는데. 눈물이 찔끔 나왔는데.)

   산문은 소설 마감 후의 회복훈련으로 쓴다는 김연수. 영서를 번역하고 한시를 즐겨 읽고 하이쿠를 좋아하는 김연수. 아, 정말 이 사람은 작가가 되기 위해 태어난 거구나. 정말. <청춘의 문장들>을 읽고 정보의 바다를 떠돌다가 같은 김천출신 김중혁 작가가 쓴 한 때 '김연수와 함께 불법 일본 만화 번안도 했다우' 식 의 칼럼을 발견했다. 한참을 웃었다. 이 글에는 밤을 새워 작업을 하리라 결심했던 김연수 작가가 타이밍을 먹고 단숨에 잠들어버려 김중혁 작가가 김연수 작가의 몫까지 해치웠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좀 더 정보의 바다를 넘실거리니 김연수 작가가 황순원 문학상을 받은 시상식에서 문태준 시인이 한 축사 녹음파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한참을 웃었다. 거기엔 시인의 꿈을 끝내 포기한 김연수의 이야기가 있었다. 옮겨보면 이렇다.

  시를 막 쓰겠다고 마음을 다잡아먹은 열렬한 문학 청년 시절이였습니다. 찾아가서 방바닥 곳곳에 있던 고양이 오줌을 제가 내려다 보고 있었는데, 김연수 작가가 저에게 한마디 아낌없는 충고를 해 줬습니다. "이대로 쓰면 등단하겠네." 어쨌거나 전 김연수 시인의 그 점검 덕택에 아주 간단한 그 말 한마디, 이대로 쓰면 등단하겠네, 라는 그 말 한마디 덕택에 시로 등단까지 하게 되서 시인이 되었습니다. 김연수 작가는 저를 만나면 은근히 자기도 시인 출신이라는 사실을, 그것도 등단연도가 저보다 1년 빠른 선배 시인이라는 행세를 합니다. 오늘 김연수 작가가 소설을 잘 써서 이런 큰 상을 받습니다만, 김연수 작가는 시인이기를 더러는 꽤 고집을 합니다. 김연수 작가는 종종 저한테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도 시집 한 권 묶을 분량의 원고가 있는데. 이렇게 말하면서 말 끝을 흘립니다. 물론 저는 김연수 작가의 이 말에 묵묵부답 별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한 잡지에서 시인 출신 소설가들에게 시 원고 청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김연수 작가도 물론 시 원고 청탁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어느날 그가 나에게 발표할 시 원고를 보여줬습니다. 발표를 해도 되는 그런 수준인가를 그는 내심 은근슬쩍 저에게 묻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1994년 그 정릉집의 상황을 우연찮게 떠올렸습니다. 1994년에는 제가 그에게 시를 점검받았지만 이제 역전이 되서 그가 저에게 점검을 받게 된 것입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그게 좀 그렇다이."  그 이후로 김연수 작가는 시 쓰는 일을 본격적으로 피압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를 자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김연수 작가가 황순원 문학상을 받게 되었다고 보도가 나간 후에 그에게 몇 개의 축하화분이 집으로 도착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화분 가운데 하나의 화분이 문제였습니다. 다른 화분에는 모두 '축 황순원 문학상 수상'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만, 그 문제의 화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축 미당 문학상 수상'. 이제 이런 일은 김연수 작가에게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소설만 쓰기로 겨우 김연수 작가가 마음을 다 잡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정말 이 파일을 듣다가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어대다가 녹음을 한 뒤, 엠피쓰리에 넣었다. 언제고 이 이야기를 문득 다시 듣고 싶어지는 순간이 올 것만 같아서. 그러면 조금 울적한 마음도, 그냥 포기해버릴까 하는 마음도 모두 깔깔거리면서 날려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청춘의 문장들>을 읽고 김연수 작가의 모든 것이 부러워졌다. 그가 지나온 청춘, 그의 딸이 가진 이름 열무, 그의 문장, 그의 친구들까지. 오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주문했다. 어떤 독자의 글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김연수의 책, 이라는 문구를 보고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요즘 인터넷 서점은 총알배송이라 오늘 늦게 도착한단다. 신난다. 더불어 판매자 김영하님께도 감사의 말을. 김연수 작가가 쓴 연두빛 청춘을 이렇게나 착한 가격에 깨끗하게 소장할 수 있게 해 주어서. 감사. 언제고 문을 닫아두고 혼자 울고 싶은 날 당장이라도 꺼내 읽을 수 있는 시같은 문장을 내게 주신 김연수 작가에게도 감사, 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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