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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번 국도 - 2000년의 너와 마주하는 일
    서재를쌓다 2008. 7. 1. 11:40
    7번 국도
    김연수 지음/문학동네


       <7번 국도>까지 마쳤다. <7번 국도> 속 나와 재현이 포항에서 속초까지 7번 국도를 거슬러 올라갔듯이 나도 김연수의 책들을 거슬러 읽었다. 절판된 <스무살>과 <7번 국도>는 조금 멀리 떨어진 도서관까지 땡볕에 걸어가 빌려왔다. 처음 가는 길이라 무작정 버스 노선을 따라 걸어 빙 둘러가 도착해보니 늘 가던 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던 곳이었다. 바보같이. '2001년 문학 활성화를 위해 문예진흥원이 뽑은 좋은책'이란 동그란 스티커가 붙여져 있는 <7번 국도>를 펼치니 놀랍도록 어린 김연수가 불테안경에 주황색 스웨터를 입은 채 이 보다 더 활짝 웃을 순 없다는 듯 아주 방긋 웃고 있었다. 초판의 인쇄가 1997년 11월 17일. 그러니 그는 1997년의 김연수. 무려 십여년 전.
     
      김연수를 거슬러 읽으며 감탄했던 책은 <꾿빠이 이상>과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설레여했던 책은 <스무살>과 <7번 국도>. 그러니까 어떤 식이냐면 내가 김연수를 배우 좋아하듯이 선망하게 된 것이다. 일단 작품을 모조리 찾아 읽고, 기사를 찾아 읽고, 인터넷을 떠도는 만나봤는데 -더라, 식의 잡담들에 혼자 깔깔거리고, 그의 소소한 사생활이 궁금해 미치겠으며, 그를 볼 수 있고 내가 참석할 수 있는 행사면 무조건 신청하고 당첨되어 가게 되었다는 것. 최근에는 창비의 북콘서트에 참석했는데 <꾿빠이 이상>을 가져가 사인을 받았다.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내밀고 그가 내 이름을 그 탐스런 파아란 만년필로 새겨넣는 순간의 어색한 공기를 뚫고 내가 어떤 말을 건넸더니, 그가 내 이름이 기억난다고 말해주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콩당거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야밤의 남산을 순식간에 폴짝폴짝 뛰어서 내려왔다는 사실. 배우 좋아하듯 김연수를 좋아하게된 나는 <스무살>과 <7번 국도>의 주인공들은 분명 주황색 스웨터를 입은 그 시절에 그가 겪었던 어떤 진실한 순간의 모음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 이 책들이 사랑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소제목 자체가 곧 기억의 편린이 되는 <7번 국도>를 한밤중에 읽다가 잠도 오지 않는데 책을 덮고 제발 이런 꿈을 꾸게 해 달라며 잠을 재촉했던 페이지가 있었다. 118페이지.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7번 국도'의 기억이다. 

       그건 1991년의 서연이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재현의 기억 속으로 영원히 들어간 1991년의 서연.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그래서 잊을 수 없는 사람이 평생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그래서 잊을 수 없는 그 모습 그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일도 있다는 사실. 내가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그래서 잊을 수 없는 행동 그대로, 세월 때문에 주름이 생기지도 않고, 술을 많이 마셔 살이 찌지도 않고, 머리카락이 자꾸 빠져 탈모를 걱정하지 않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 없이, 나를 바라봐 주었던 모습 그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나가고 있는 거다. 그래서 언젠가 2008년의 나와 1991년의 서연이 마주칠 수도 있고, 2008년의 너와 이야기로만 들었던 1991년의 서연이 마주칠 수가 있는 거다.

       나는 그 밤, 그런 꿈을 꾸고 싶었다. 1991년의 나와 1991년의 서연이 만나는 모습을 2008년의 내가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꿈. 2008년의 나와 1991년의 서연은 안된다. 2008년의 서연과 1991년의 나도 안 된다. 그건 생각만 해도 너무 슬플 것 같다. 그건 마치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먼저 마음이 떠나 헤어지는 것과 같다. 그건 너무 아프다. 그건 너무 아파서 장마비가 우두둑 떨어지는 포장마차에서 6만 7천원치의 술을 쉬지않고 퍼 마셔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만나려면 1991년의 나와 1991년의 서연이여야 한다. 쓸쓸하겠지만 꼭 2008년이어야 한다면 2008년의 나와 2008년의 서연이 만나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 밤, 원하는 꿈은 꾸지 못했다. 다음날 일어나 <7번 국도>를 다시 읽어 나갔고, 더 이상 책을 덮고 꿈을 꾸고 싶은 부분은 없었다. 속초에서 그들의 7번 국도는 끝났다. 진짜 정동진의 일출을 보자고 책 속의 나는 덧붙였지만 그들이 그 일출을 결국 보았는지, 보지 못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쨌든 이야기는 1996년 8월 7일로 끝나 있었다.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 내 기억 속에 담아둔 2000년의 그. 절대 2008년의 그가 아니다. 2000년의 그다. 복잡한 지하철역에서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고 마음이 쿵 주저 앉게 되는 때는 그런 순간이다. 2000년의 그를 발견하게 되는 때. 어떤 날은 그럴리가 없다며 쓱 앞으로 지나가 그가 아님을 확인하기도 했지만, 마음이 쿵 떨어지는 순간, 고개를 바로 돌려 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하는 날들이 더 많았다. <7번 국도>를 읽으면서 그 순간들을 위로받았다. 그 순간들을 이해받았다. 그래, 내 기억속 2000년의 그도 어떤 날의 내 그리움을 양분삼아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테지. 어쩌면 2000년 그 곳으로 가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럼 너무 슬퍼질 것 같아. 나는 2008년의 사람이니까. 그냥 언젠가 과거의 너와 현재의 내가 마주하는 날이 없기를, 마주하게 된다면 과거의 너와 과거의 나이기를. 이건 너무 꿈만 같은 일 같아. 꿈만 같은 일.

        이제 <가면을 가리키면 걷기>만 남았다. 아, 읽는 내내 갖고 싶었던 파스텔 톤의 <스무살>은 중고샵에서 발견했다. 도서관 책을 훔칠 필요는 없어졌다. 흐흐- 이런 상상을 해봤다. <스무살>을 읽는 동안. 어떤 소설가의 첫사랑이 되는 것에 대해. 소설가와는 헤어졌지만 수년이 지나보니 본래 소설가는 아니었던 소설가는 소설가가 되어있고, 소설가의 첫사랑이었던 그 시절의 이야기가 오래된 어떤 책에 담겨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에 대해. 그 책 속에 그려진 자신의 아름답게 빛나는 젊은 시절에 대해. 소설가의 첫사랑은 늙어가지만, 오래된 책 속 주인공은 영원히 늙어가지 않게 되는, 주름이 생기지도, 살이 축축 늘어지지도, 삶이 지긋지긋해지지 않는 소설 속 삶에 대해. 그러면서 배우처럼 한 작가를 좋아하게 된 나는 생각했다. 책 속에 존재하는 그 시절의 나를 가진 이는 얼마나 행복할까. 나도 소설가와 사랑했어야 했다. 꼭 한 명, 누군가와 첫번째 사랑을 해야 했다면, 그건 훗날 소설가가 될 운명을 지닌 사람이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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