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나무>라는 제목의 책이 있어요. 지난 여름 즈음에 이벤트로 받은 책인데, 마음에 드는 책이에요. 일단 표지 전체가 나무 사진이예요. 튼튼해보이는 까만 나무 기둥과 싱싱한 초록잎이 그득한 사진이예요. 표지만 보고 있어도 이 나무들의 기운이 내게 전해지는 듯한 기분, 산림욕하는 듯한 기분이에요.

    어제는 아주 추운 날이었잖아요. 자판기 옆에 서서 화장실 간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창 밖을 내려다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그 책 생각이 나는 거예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책 속 어떤 나무 생각이었죠. 여름에 그 나무들을 한참 들여다보다 사진도, 짧은 글귀도 너무나 예뻐 노란 포스트잇을 붙여두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들여다보았던 나무가 있거든요. 그래서 화장실을 다녀온 누군가에게 말했죠. 오늘 집에 가면 그 나무를 찾아봐야겠어요.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요.

    저는 오늘 밤차로 할머니 댁에 내려가요. 게으른 탓에 버스 예매는 당연히 못 했고, 부랴부랴 뒤져보니 그 근처가는 차가 다행히 심야로 있어서 그걸 타고 내려갈 거예요. 아침에 도착할 거고, 그럼 바다가 있는 고향에서 달려온 엄마가 마중을 나와 있을 거예요. 작년 추석 때도 그랬거든요. 만나서 함께 김밥에 장국을 나눠 먹고 할머니댁으로 갔어요. 만일 엄마가 늦게 도착하면 우린 지친 몸을 이끌고 빨리 연 커피가게를 찾아 커피 한 잔 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숙모들과 함께 할머니의 땡땡이 바지를 입고 전을 부칠 거예요. 막내 숙모는 꼭 명절 음식 만들 때 냉동실에 살짝 얼려둔 콜라를 마셔줘야해요. 그 맛이 기가 막힌다고 매번 감탄하며 말씀하세요. 올해도 그 맛난 콜라를 마실테죠. 아. 이번 설날에는 밀가루를 빼먹지 않겠어요. 고구마 튀김을 하는데 작년에 밀가루를 버무리는 걸 깜빡한 거예요. 그래서 모양이 예쁘지 않게 되었어요. 할아버지가 드실 건데 말이예요.

    1시간 걸리는 곳에 성묘도 갈 거예요. 올해는 아주 추운 설날이 될테니까 그곳에서 밥을 못 먹을 것 같아요. 늘 한 가득 비빔밥을 싸 가서 할아버지 옆에서 밥을 먹었거든요. 그 곳에서 먹는 밥이 아주 꿀맛인데, 올해는 그러기엔 너무 추울 것 같애요. 눈이 잘 오지 않는 고향에서도 눈이 온다니까. 그리고 부르마블과 루미큐브를 해 주고, 편안하게 누워서 티비를 보면서 연휴를 보내겠죠. 지금 막 연휴 마지막날 오전 차로 예매해뒀으니깐, 10시쯤 할머니댁에서 나올 거고, 할머니는 또 어김없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셔서 고생해라, 그러시겠죠. 난 무뚝뚝한 손녀라 그런 할머니를 안아드리지 못하는데, 저번 추석 때는 둘째 동생이 그런 할머니를 따뜻하게 안아드리는 거예요. 정말 좋았어요. 

    아.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긴 <나무>라는 책에 있는 물푸레나무 이야기였는데, 또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네요. 그 나무가요 이름이 물푸레 나무예요. 이 책은 나무 사진이 월별로 있는데, 물푸레나무 사진은 3월 사진이예요. 봄이요. 아, 봄. 물푸레나무의 설명은 이래요.



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과



   이름의 느낌처럼 푸른 잎이 얼마나 푸르고 싱그러운지 눈이 부실 지경이지만, 정작 이름은 가지를 꺽어 물에 담그면 푸른 물이 우러난다고 해서 붙여졌다. 봄이 되면 새로 자란 어린 가지 끝에 작은 꽃이 피는데 워낙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갈색의 열매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아. 몇 번을 읽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글이예요. 사진도 그렇구요. 정말 그래요. 지금은 아주 추운 겨울이지만, 제가 30여 년을 지켜본 결과 시간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고, 어제보다 오늘이, 작년보다 올해가 더 빨리 가는 법이니까 곧 봄이 올 거예요. 눈이 오지 않고, 따듯해지고, 꽃이 피는 계절이 올 거예요. 전 그 눈부심을 한 때는 무척 싫어했지만, 이제는 좋으네요. 나이가 들수록 봄도 좋고, 가을도 좋고, 겨울은 더더욱 좋아요. 여름은 아직까지는 좋다고 말하긴 그렇고, 괜찮아지긴 했어요. 그래도 더운 건 너무 싫어요. 아무튼 봄이 오면 이 나무들을 길가에서 산에서 볼 수 있겠죠.

    이 책을 자꾸 들여다보는 이유는 나무의 푸른 잎에 머무는 햇살때문이에요. 사진에 햇살들이 잔뜩 머물러 있거든요. 그 느낌이 좋아요. 따스하고. 위로해주는 느낌이 들어요. 햇살과 나뭇잎이 정말 잘 어울리는 거죠. 봄이 오면, 인간극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남난희씨처럼 산에 올라가 커다란 나무 기둥을 붙잡고 물 흐르는 소릴 들을 거예요. 올해는 꼭 그렇게 해 볼래요. 그 기운을 받을래요. 그러니까요. 이렇게나 말이 길어졌지만, 제 말은 새해 복 많이많이, 아주 듬뿍, 넘치게 받으시라는 거예요. 아주 많이. 맛난 것도 많이 먹구요. 행복한 설날 보내세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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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민음사

 

   지난 주말에는 많이 아팠다. 목요일부터 몸이 심상치 않았는데, 금요일에는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씻고 바로 누웠다. 그 길로 주말내내 끙끙 앓았다. 누가 내가 아픈 걸 알아주지 못할까봐 일부러 소리내서 앓았다. 아야, 아야, 소리를 내면서. 쥬스를 마시고 자고, 죽을 먹고 자고, 약을 먹고 잤다. 주말내내 큰소리 내며 잠만 잤다. 그리고 마침내 감기가 나았을 때, 그럼에도 가만히 누워있었을 때 이 소설을 생각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2009년을 이 소설로 시작했다.

    오늘 아침 집을 나섰을 때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생각치도 못한 반가운 손님이었다. 아주 예쁜 눈이었다. 소리없이 펑펑 쏟아지는 아주 새하얀 눈이었다. 휴대폰 사진기로 사진을 찍었는데, 내가 보는 눈의 풍경이 사진에 그대로 드러나지 않아 지워버렸다. 그리고 따뜻한 지하철에 앉아 이 소설을 생각했다. 지하철이 뚝섬을 지나고 있을 때였을 거다. 새하얀 눈밭이 펼쳐졌다. 나는 머릿 속에 새하얀 눈밭을 하나 만들어냈다. 걸으면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아주 새하얀 눈밭. 그리고 조명을 낮췄다. 밤이다. 어릴 때 티비에서 자주 봤던 슥슥 뭐든지 순식간에 그려내던 화가 아저씨처럼 나는 조명을 낮춘 밤하늘에 은하수를 그렸다. 그 아래, 저 멀리 낡은 2층 창고도 그렸다. 그 곳에 새빨간 불도 그려 넣었다. 그리고 작은 점을 두 개 찍어 사람의 형상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이건 <설국>의 마지막 장면인 셈이다. 눈을 감으니 새하얀 눈밭 위로 은하수가 펼쳐졌다. 저 멀리선 믿기지 않는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 곳에 귀를 기울이니 딸랑딸랑 방울소리가 났다.

 p.64

    <설국>은 아주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어떤 페이지를 펼치든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대부분이 새하얀 눈밭이 펼쳐지는 겨울이었다. 여기저기서 노래소리가 들렸고, 한 겨울의 노천 온천에서 모락모락 솟아나는 물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건 눈의 온기이기도 했다. 그립고,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가엾고, 처량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꽃에 꽃말이 있든, 눈에도 눈말이라는 것이 있다면, <설국>의 눈말은 슬픔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새하얀 눈밭 가득 슬픔의 지지미가 촉촉히 널려 있는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제일 좋았던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119페이지에서부터 시작한다. 시마무라가 요코의 노래소리를 듣게 되는 장면. 시마무라는 남탕의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탕 안에 있다. 그 때 건너 여탕에서 요코 목소리가 들리는 거다. 그녀는 아이를 씻겨주러 들어왔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탕 안에 울려퍼지는 맑은 요코의 목소리. 그 소리는 남탕과 여탕의 천장을 치고, 바닥을 치고, 벽을 치고, 사마무라의 몸을 친다. 사마무라는 따뜻한 물 속에 편안히 앉아 가만히 그 노래소리를 듣고 있는 거다. 온 몸의 기운이 스르르 풀리는 순간. '숲속의 여치는 무슨 노래 부르나' 요코가 아이를 씻겨주고 나가고 탕 안에는 여전히 벽과 몸 사이를 튕기며 여운을 남기는 요코의 노래소리가 울린다. 

p.120

   아픈 내내 요코가 떠난 후 울려 퍼지는 그녀의 노래소리를 듣는 시마무라를 생각했다. 아주 따뜻한 느낌이었다. 눈 속에서 실을 만들어 눈 속에서 짜고 눈으로 씻어 눈 위에서 바랜다는 삼 지지미를 생각했다. 겨울이 되면 새하얀 눈밭 바로 위에 새하얀 삼 지지미 수백개가 널리는 상상을 했다. 그걸 내가 하늘 꼭대기에서 내려다 보는 생각. 생각만 해도 목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날, 시마무라가 올라다 본 밤하늘의 은하수도. 아름다워서 너무나 비현실적이었을 그 은하수. 주말내 약에 취해 잠들기 전에 그런 풍경들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소설. 아름다운 문장. 아름다운 풍경. 아름다운 고장. 나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그 속으로 풍덩 빠질 수 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겨울이 아니더라도, 땀이 뻘뻘나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한여름일지라도, 언제든 한겨울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떠날 수 있다. 내게 이 문장이 있기 때문에. 

 p.7

    아. 이 문장은 내게만 있는 게 아니다. 당신에게도 있다. 이건 우리가 가진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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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들렀어요. 긴 머리보다는 짧은 머리를 좋아해서, 조금만 길어지면 싹둑싹둑 잘라네요. 퇴근길의 지하철에서였죠. 장한평즈음이었나. 갑자기 사가정에서 내려서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자르고 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 거예요. 그렇게 저는 몽실이가 되었답니다. 그세사의 송혜교 머리를 늘 탐내왔었는데, 정말 누구말대로 송혜교가 하니깐 예쁘지, 저의 경우는 완전 몽실이에요. 흠. 이게 아닌데. 아무튼 전 머리를 잘라야겠다고 결심한 장한평 즈음의 지하철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읽고 있었지요. 그리고 월요일에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보고 있었구요. 한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전에, 소설도 읽기 전에 이 이야기가 가진 설정 자체가 너무나 흥미로운 거예요. 신비스럽구요. 80세의 노인으로 태어나 갓난아기가 되어서 죽는 한 남자. 다들 늙어가는데 혼자서만 젊어지는 가여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죽고, 늙어가는 중간에 꼿꼿이 서서 자신만 푸르른 슬픈 청춘인 사람. 그래서 영화가 보고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를 보고 나니 원작소설을 읽고 싶단 생각이 들었구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의 경우에는 영화가 더 좋았네요. 먼저 보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무려 브래드 피트 주연이니까요.), 짧은 소설에 비해 살이 많이 붙여진 긴 이야기여서 그럴 수도 있지만. 영화는 거의 소설의 설정만 가져온 셈이에요. 그리고 소설보다 질이나 양적으로 더 풍성해요. 로맨스를 뺀다고 하더라두요. 

   소설에 보면 벤자민은 80대 노인의 몸으로 태어나요. 그야말로 노인의 몸이죠. 커다란 노인의 몸이요. 태어나자마자 말도 하지요. "당신이 내 아버지요?"라고. 영화는 갓난아기의 크기에 노인의 얼굴, 노인의 체력을 가진 아이가 벤자민의 첫 등장모습이에요. 그리고 아이의 그런 모습에 깜짝 놀란 아버지는 그 아이를 어느 집 앞에 버려두는데, 벤자민은 그 곳에서 자라게 되요. 노인들의 요양원같은 곳인데,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난 벤자민에서 정말 어울리는 곳이죠. 그 곳에서 벤자민은 많은 것을 배워요. 엄마의 사랑을, 피아노를, 즐거움을, 슬픔을, 행복을, 외로움을, 살아간다는 것을,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사람이 7번의 번개를 맞고도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등을. 그리고 첫 눈에 반한, 그래서 평생을 사랑하게 되는 여자아이도 그 곳에서 만나죠. 제겐 그 곳에서의 벤자민의 모습이 제일 눈부셨어요. 노인의 외형을 가졌을 뿐인 귀여운 아이의 본성을 지닌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벤자민은 10살이 되고, 30살이 되고, 50살이 되요. 그렇지만 몸은 70살의 모습이 되었다가, 50살의 모습이 되었다가, 30살의 모습이 되죠. 그러는 사이 술도 마셔보고, 첫 경험도 하고, 집도 떠나보죠. 배 위에서 일을 하고, 배 위에서 일출을 보고, 배 위에서 일몰을 봐요. 전쟁에 나가고, 한 여자를 만나서 밤새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해요.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이별도 하죠. 그건 벤자민의 첫 번째 이별이었어요. 평생에 걸쳐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살기도 하고, 딸 아이의 아빠가 되기도 해요. 하지만 청춘은 너무 찰나인지라, 그래서 무척이나 눈부신 것인지라, 그래서 자꾸 생각하면 눈물나는 것인지라. 벤자민은 60살이 되고, 65살이 되고, 70살이 될테니까요. 겉보기에는 20살의 모습이 되고, 15살의 모습이 되었다가 10살의 모습이 될테니까요. 65살의 여자는 10살의 남자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곁에 두기엔 너무나 힘든 일이니까요. 25살의 딸과 10살의 아빠가 함께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괴로운 일일테니까요. 그러니까요. 이 영화의 결말은요. 마음이 조금 아파요. 


   '함께' 늙어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혼자'만 젊어지는 벤자민은 세상에서 얼마나 슬픈 존재인지. 생각만 해봐도 알 수 있어요. 브래드 피트랑 케이트 블란쳇의 얼굴이 나란히 놓여 있는 포스터를 보는 거예요. 그리고 주문을 거는 거죠. 브래드 피트 쪽은 주름투성이 노인의 모습이었다가, 20대의 아주 아름다운 청춘의 순간으로 서서히 바뀌는 주문을. 케이트 블란쳇의 모습은 그 반대로요. 봐봐요. 아주아주 슬픈 일이죠? 더군다나 두 사람은 정말 사랑하는 사이. 더 아픈 일이죠? 그렇죠? 뭐 결국에는 다들 갓난아이의 모습이든 100살의 노인의 모습이든 혼자이게 되고, 외롭고 쓸쓸해지는 건 마찬가지지만요.

    이건 소설의 마지막 문단이에요. "당신이 내 아버지요?" 하던 노인의 마지막 모습이죠.

   그리고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하얀 아기 침대와 그의 위에서 움직이던 흐릿한 얼굴들, 우유의 따뜻하고 달콤한 내음,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그의 마음에서 점점 희미해지다 사라졌다.

    우리가 늙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벤자민의 마지막이 뭐가 다르겠어요. 겉모습만 다를 뿐이지. 그런 생각도 드네요. 아무튼, 영화가 괜찮았어요. 브래드 피트가 빛나는 영화였어요. 아, 단점은 있어요. 길-어요. 영화가 좀. 중간에 조금 지루하다는. 그러니까 내가 처음에 미용실 얘길 했었죠? 몽실이가 되었다는 얘기요. 머리는 또 기를거니까 놔 두고. 그 미용실의 거울 앞에서 제가 이십여 분동안 가만히 있었던 거예요. 미용실 조명도 밝으니 제가 아주 또렷하게 잘 보였죠. 점점 나이들어가는 내 모습이요. 눈가의 주름도 많아지고, 얼굴에 점이 부쩍 늘었어요. 나이가 든다는 건 점이 늘어난다는 건가요? 왜 이렇게 얼굴이며 목에 점이 많이 생기는 지 모르겠어요. 머리숱도 적어지고 있어요. 안 그래도 적은데. 스무살 때요. 자주 미용실에서 머리를 바꿨거든요. 기분이 울적할 때면 가서 잘라댔으니까요. 그 때 그 2층 미용실 거울 앞에서의 내가 떠올랐죠. 그리고 지금의 나. 그래, 이게 정상이라는 거지, 라는 생각두요. 벤자민처럼 젊어질 미래에 대한 걱정없이 충분히 사랑할 수 있으니 좋다, 해 버렸죠.(하지만 늙어갈 미래에 대한 걱정은 어쩌죠? 흑.) 그러니 름도 지저분한 점들도 괜찮다.(이것보다 훨씬 더 많이 늘어날텐데요. 흑흑.) 이런 구잡이식의 생각들 끝에 저는 몽실이가 되었답니다. 

   뭐 그런 이야기에요. 이 이야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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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여름이었나보다. 맙소사, 벌써 작년이 되어버렸다. 도서관에서 <2007 올해의 좋은 소설>을 읽었다. 책상이 부족해 벽에 나란히 여분의 나무 의자를 붙여 놓은 그 의자 위에서였다. 공선옥의 '폐경전야'도 읽었고, 김애란의 '도도한 생활'도 읽었지만, 역시 내가 좋아한 소설은 김연수의 '모두에게 복된 새해를'이었다. 나는 그 소설의 마지막 문단을 곱씹으며 올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 날, 이 소설을 꼭 한번 다시 읽어야지, 생각했다. 따뜻한 새해를 맞이하고 싶었기 때문에.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2007 
이청준 외 지음/현대문학


    지난 주말에 오래간만에 도서관에 들러 이 책을 대출했다. 그리고 주말내내 이 짧은 소설을 음미해가며 읽었다. 그야말로 '당신에게 복된 새해를'이었다. 소설을 읽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몇년 전 동네에서 만난, 동남아시아 어디즈음에서 돈을 벌기 위해 날아온 것이 분명한 여자는 내게 자기가 문자쓰는 법이 서툴러서 그렇다면서 문자 하나를 부탁했다. 언니, 내가 잘못했어. 술 한 잔 어때, 식의 문자였다. 그리고 내가 작년에 만난 사람들. 만나고 싶었지만 만나지 못한 사람들. 만나지 않았어도 만난 것만 같은 사람들.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 모두모두 떠올랐다. 그들에게 복된 새해를.

    소설을 읽다 어떤 문장은 작은 포스트잇을 붙여두고, 다시 읽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소설의 마지막 문단을 반복해서 읽었다. 내가 새해에 이 소설을 읽기로 한 이유이기도 하니까. 따뜻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생각한다.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내의 '말하자면 친구'의 뒤로 눈이 솔솔솔 내리고 있는 풍경을. 그런 창가를 배경으로 두 사람이 캔맥주를 맞대고 짠,하는 모습을. 그 캔맥주를 마시고 주인공이 냉장고에서 맥주를 두 개 더 꺼내오고, 다시 두 사람이 손을 뻗어 서로의 캔을 맞부딪히는 소리를. 말하자면 나는 나의 복된 새해를 스스로 빌어주기 위해 이 소설을 읽은 것이다. 어제를 용서할 수 있는 오늘이기를. 비로소 조율되어지는 완전한 소리이기를. 그럴듯한 음악을 연주해낼 수 있는 사람이기를. 나에게 복된 새해가 찾아오기를.


    아. 오늘 김연수의 이상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다. 아주아주 기뻐서 나는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어졌다. 마치 내 일처럼 기뻤다. 정말 그랬다. 축하해요. 김연수와 이상이라니. 말하면 입이 아플정도로 잘 어울리잖아. 그 소설에 코끼리가 등장하는 것 같았는데. 빨리 읽어보고 싶다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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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304-305


    오늘 이 문장들을 다시 읽었다.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따뜻해졌다. 12월에 나는 윤대녕의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를 읽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야 내가 윤대녕을 읽은 계절이 거의 겨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겨울과 윤대녕. 이건 정말 나무랄 데 없는 조합이다. 소설은 겨울이 한창일 때 시작되었다가, 봄이 오기 직전, 그러니까 겨울이 가기 직전에 끝이 났다. 아주 깜깜한 어둠이 아니라 파랗게 어스름이 깔려오는 새벽녘이라는 뜻이다. 요즘 브로콜리 너마저의 '유자차'라는 노래를 듣고 있는데, '유자차' 노래가사에 비유하자면, 과거를 유자 사이에 켜켜이 넣고 뜨거운 눈물을 부어 마시는 거다. 그리고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소설을 읽으면서 언젠가 잡지에서 본 적이 있는 윤대녕의 작업실을 생각했다. 복층 구조의 깔끔한 작업실. 복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한 구석에 책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던 풍경. 작가는 그 계단을 내려오는 중이었다. <옛날 영화를...>의 남자가 사는 집이 작가의 작업실과 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소설에는 외로운 사람들이 등장한다. 남자, 남자의 옛 친구 E, 남자의 부인, 남자의 장인, 레코드 가게의 여자, 그리고 그 여자. 외로워서 약을 먹고, 쓸쓸해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소설을 읽으면서 평행선을 생각했다. 소설에는 삼각형이 언급된다. 남자와 E, 누에고치의 여자는 삼각형이다. 지하철 2호선의 순환선이기도 하다. 세 사람은 삼각형 각각의 꼭지점에 서 있다. 그리고 2호선 어딘가의 역에 떨어져 있다. 그러니까 만날 수도 있고, 결코 만나지 못할 수도 있는 관계다. 삼각형 중심을 향해 같은 시간에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 한 삼각형의 세 사람은 만날 수 없다. 도착했다 떠나고 도착했다 금세 떠나고 마는 초록색의 2호선을 올라타지 않는 한, 혹은 내리지 않는 한 타원형의 세 사람은 결코 만날 수 없다.

   내게는 평행선의 남자가 있다. 점을 봐 주던 할아버지가 내게 너와 그 남자는 평행선이라고 했다. 영영 만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엉엉 울었다. 그 어떤 단언의 말보다 아프고도 확실한 말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니 그와 나는 삼각형도 타원형도 아닌 평행선일 뿐이므로,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이제 평생 만나는 일 따위는 없을 거다. 바라볼 수는 있겠다. 내가 그를. 그가 나를. 아주 멀리서. 아니다. 이건 아주 가까운 평행선일 수도 있다.

   주드 로가 나오는 <태양은 가득히>가 아닌 알랭 드롱이 나오는 <태양은 가득히>를 챙겨봐야겠다. 소피아 로렌 주연의 <해바라기>도 봐야지. 옛날 영화를 간간히 틀어주었던 경사도 낮은 코아아트홀에서 눈 오는 날 혼자 보러 가면 좋겠지만, 이제 코아아트홀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니. '블루문'도, 벌레구멍 입구도. 어느 쓸쓸한 주말 저녁에 불을 다 꺼 놓고 집에서 혼자 보아도 좋겠다.

   연락이 없던 친구는 책 4권을 보내줬다. 보고 싶은 언니는 새벽 2시에 문자를 보내왔다. 이건 내가 평행선이 아닌, 삼각형 꼭지점에 서 있다는 거다. 멈추지 않는 타원형 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 겨울은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갑자기, 불현듯 엄마가 보고 싶어지는 계절임이 분명하다. 내가 얼마나 외로움을 잘 타고, 여리고 약한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는 계절. 그래서 겨울에는 술을 더 많이 마시는 수밖에 없다.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나는 수밖에 없다. 윤대녕을 읽을 수밖에 없다. 정말 그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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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금요일에는 영화를 봤다. <오스트레일리아>라고 니콜 키드먼과 휴 잭맨이 나오는 영화다.  호주 출신의 바즈 루어만 감독 영화다. 당연하게도 호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사실 내가 관심있었던 건 영화보다는 와인이었다. 영화 상영 1시간 전에 와인 파티를 한다는 거였는데, 안타깝게도 압구정 지리에 깜깜한 친구와 나는 길을 잃고 상영 전에 겨우 극장에 도착했다. 그래도 와인 한 잔은 마셨다.

    그리고 영화를 봤다. 오랜만에 극장에서 보는 영화. 벌써 일주일 전 이야기다. 나는 요즘 책도 잘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고, 영화도 보지 않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데,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이 이렇게도 살아지는구나,였다. 이렇게도 살아지는구나. 무미건조하게. 이야기도 읽지 않고, 이야기도 보지 않고. 밥 먹고, 잠만 자고.

   <오스트레일리아>에는 한 아이가 등장한다. 이야기는 이 아이로부터 시작된다. 아이의 이름은 눌라. 호주 원주민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아이. 이 아이는 마법을 부린 줄 안다. 이 말은 그 아이가 바람의 소리를 내며 한 말이지만, 나는 정말 이 아이의 마법을 믿었다. 지금도 믿는다. 이 아이는 이야기라면 엄마가 죽은 슬픔도 폴짝 잊어 버리는 아이다.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말한다. 네,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아이는 노래를 사랑하는 아이. 노래를 잘 부르는 것 같은데 못 부르는 척 하는게 분명한 니콜 키드먼의 '오버더레인보우'를 들으며 머리털을 바짝 세운다. 계속 해요. 계속 불러요. 빨리요. 그 때의 이 아이의 모습이 직접 봐야 한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손을 뻗어 스크린을 쓰다듬고 싶을 정도였다. 이야기와 꿈과 노래를 믿는 아이. 그게 바로 눌라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그야말로 호주영환데, 나는 호주를 가본 적 없지만 그 곳이 꽤 넓다는 건 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호주를 닮았다. 어찌나 긴지. 상영시간을 확인하지 못하고 들어간 탓에 이제 끝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한 두 번쯤 한 것 같다. 커다란 사건이 하나 해결되면, 다른 큰 사건이 또 터지고, 또 터지고 그런 식이다. 어찌나 많은 걸 영화 속에 담았던지, 감독의 욕심이 확실히 과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크게 소몰이 사건, 니콜 키드먼과 휴 잭맨의 애정행각,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눠지는데, 사실 애정행각 정도에서 끝났어야 했다. 아, 아. 안다. 그러면 갈등이 너무 없고, 감동도 너무 없고. 그렇다면 소몰이 이야기를 좀 더 길게 했어야 했다. 거기서 니콜 키드먼과 휴 잭맨의 '폴링인러브' 버전보다는 '나의' 눌라와 니콜 키드먼의 모정에 더 집중해서 감동을 이끌어 내었어야 했다. 소몰이 이야기에선 니콜 키드먼도 휴 잭맨도 눌라도, 호주의 땅과 하늘까지도 아름다워 보였으니까. 몇 백 마리의 소떼들이 정말 쿵쿵거리며 뛰어가는데 내 마음이 다 쿵쾅거렸으니까. 극장 음향이 좋아서 그런지 정말 심장도, 바닥도 쿵쾅거렸다. 그 크고 높고 깊은 호주땅을 담은 스크린에 가슴이 뻥 뚫릴 지경이었다니까.

   아무튼 나는 오늘 별로 나쁜 이야긴 하고 싶지 않으니까 (맥주를 마시고 있는 중이다) 눌라에 대해 더 말해야겠다. 이 아인 노래 듣는 것도 좋아하고, 노래를 꽤 잘 부른다. 이야기를 좋아하고, 당연하게도 꿈꾸는 걸 좋아한다. 별도 좋아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영화도 좋아한다. 본 영화라곤 흑인 분장을 하고 야외 극장에서 본 <오즈의 마법사>가 전부지만.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순수하다. 꿈을 믿는 아이는 말이 많다. 노래를 하는 아이는 눈이 맑다. 눌라는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닌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만, 맑고 밝은 아이라서 바람소리를 내며 마법을 부려 제 주위 세상을 후리지아 꽃처럼 환하게 만들 줄 아는 아이다. 

   오늘 이런 책을 발견했다. <내일은 맑음>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케냐 지라니어린이합창단의 이야기다. 세계 3대 빈민가 중 하나의 고로고초 마을의 아이들로 구성된 합창단. 가난해서 밥도 못 먹는 아이들이 노래를 부른단다. 나는 이 책을 한 부분을 읽는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노래를 배우는 모습을 상상했다. 음계도 모르는 아이들이 배고픈 것도 잊고, 집에 가는 것도 잊은 채 노래에 빠지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낮은 도음과 높은 라음을 떠올려 봤다. 아이들의 노래가 든 CD가 책과 함께 제공된다니 사야 할까, 싶다. 그러니까 이 아이들은 눌라같은 아이들일 거다. 꿈과 이야기와 노래를 사랑하는 아이. 이 아이들도 분명 영화 <오즈의 마법사>와 '오버더레인보우' 노래를 좋아할 거다. 그리고 이 아이들의 입에서 바람소리가 날 거다. 쉿쉿. 이건 마법이예요,로 시작하는.



 아. 오늘 대한민국영화대상에서 공효진이 여우주연상을 탔다. 만세. 어찌나 기뻤는지 그녀다운 수상소감을 내뱉는 내내 함께 울었다. (물론 그때도 나는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축하해요. 정말 받을만했다니까요. 욕심낼만 했어. 그 영화에서 그녀는 정말 멋.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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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랜덤
J.R.R 톨킨 지음, 크리스티나 스컬 & 웨인 G. 해몬드 엮음, 박주영 옮김/씨앗을뿌리는사람

    이 책을 읽게 된 건 순전히 톨킨이 이 이야기를 만들게 된 동기때문이었다. 톨킨의 둘째 아들 마이클에게는 굉장히 좋아한 나머지 밥 먹을 때도, 손 씻을 때도 놓지 않는 바둑이 인형이 있었는데, 어느날 바닷가에서 물수제비를 뜬다고 잠시 자갈밭에 놓아두고는 잃어버렸다. (이걸 보면 마이클은 인형보다는 물수제비가 더 좋아한 건데) 이 인형은 하얀색과 검은색이 섞인 납인형이었는데 자갈밭에 놓아두었으니 찾기는 다 글렀다. 며칠을 울며 바둑이 인형을 그리워하는 아들을 위해 톨킨은 이 이야기를 만들었다. 

   로버, 라는 이름의 강아지가 있었는데, 요 장난꾸러기가 마법사의 바지를 물어뜯은 거야. 마법사는 화가 났겠지. 그래서 로버를 아주 작은 인형으로 만들어 버렸어. 그리고 인형가게에 전시해 놓았는데, 그걸 마이클 니 또래의 아이 엄마가 사 가서, 그 아이의 인형이 되어버린 거지. 그 아이는 간청하는 자세로 앞발을 내밀고 있는 그 인형을 너무 좋아해서 밥 먹을 때도, 손 씻을 때도 놓지 않았어. 하지만 물수제비를 인형보다 더 좋아했던 아이는 아주 잠깐 그 인형을 자갈밭에 내려놓았지. 그러곤 잃어버린거야.

   로버 강아지, 아니 지금은 인형이지. 그 인형은 얼마나 답답하겠어. 자기는 원래 강아지였잖아. 크기도 컸고, 마음대로 뛰어다니고. 인형의 모습으로는 간청하는 자세밖에 못 취한다고. 그래서 다른 마법사를 찾아가 간청을 하지. 간청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니까. 로버의 사정을 들은 마법사는 로버를 그냥 달나라로 보내. 자기는 그만큼 능력이 없다는 거지. 아무튼 달나라에서 강아지로 되돌아가서 달 사나이와 달 강아지와 신나게 뛰어 놀아. 거기엔 달의 뒷면이라고 꿈의 세계가 있는데, 어린이들이 꿈을 꿀 때 거기로 오는 거야. 그러니깐 로버는 거기서 자신의 주인(물수제비 좋아하는 애 있잖아)을 만나게 되는 거지. 그러다 아이들은 잠에서 깨어나고 달의 뒷면에서 뽕-하고 사라지고 나니깐 로버는 그 아이가 그립고, 지구도 그리워진 거지. 그래서 또 간청하는 자세를 취해.

   그러니까 마법사는 이번엔 바닷속으로 보내. 처음에 바지 뜯어서 인형으로 만든 그 마법사가 예쁜 인어 아가씨랑 결혼을 해서 바닷속에서 사는 거야. 가서 직접 용서를 빌라는 거지. 그래야 인형에서 강아지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또 바닷속 여행을 시작하는 거야. 복도 많은 놈. 달이며 바닷속이며 말이 되냔 말이지. 아무튼 이번에도 로버는 신나게 즐겨. 바닷속에서도 친구를 금방 사귀고. 사교성이 뛰어난 녀석이야. 마법사는 너무 바빠서 로버를 강아지로 만들어주는 걸 자꾸 잊어버리다가 어느 날 잘려서 쫓겨나고 한가해지니깐 그때서야 로버의 간청을 들어주는 거지. 그러니까 이야기의 결론은 결국 간청 인형 로버는 쾌발랄한 강아지 로버로 다시 돌아온다는 얘기야. 그런데 달도 여행하고 바닷속도 여행한 주제에 그대로겠어? 어른스러워 진거지. 생각도 깊어지고, 더이상 말썽꾸러기 로버가 아닌 거야. 

    뭐 대충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책 속 이야기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유쾌한 한 편의 동화지만, 이 이야기가 만들어진 배경이 너무 예뻐서, 너무 따스해서 나는 이 책이 좋아졌다. 그런 아빠는, 아이의 슬픔을 위해서 이야기를 만들어 위로해주는 아빠는 너무 근사하다. 나는 우리 아빠가 지금 충분히 좋으니까, 그런 아빠가 되어줄 수 있는 남편을 꼭 만났으면 좋겠다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 봤다. 

    이 책에는 동화니까, 싶을 정도로 예쁜 표현들이 세 군데 있었다. 나는 노오한 표지에 맞춰 노오란 포스트잇을 그 페이지들에 붙여놓았다. 첫 번째 페이지는 51쪽, 아침의 해를 묘사한 부분이다. 

   아,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어릴 적에 스케치북에 그려 넣었던 새빨간 동그라미에 직선의 햇살을 그린 해가 눈, 코, 입을 가지고 방긋 웃는 그림을 생각해 냈다. 귀여워, 귀여워.

   이건 두 번째 페이지. 달빛을 귀찮게 하고, 이 구절을 읽고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다. 달 사나이는 로버에게 달에서 꼭 하지 말아야 할 몇가지를 일러준다. 달빛을 귀찮게 하지 말고, 흰 토끼들을 절대로 죽이면 안 된다. 그리고 배가 고프면 집으로 와라. 지붕 창문은 언제든 열려 있으니까. 한참을 웃었다. 그래, 토끼 죽이면 절대 안 되지. 너무나 예쁜 상상력. 

    기억해야 한다. 꿈을 꾸는 사람들은 달의 반대쪽에 있다. 달 사나이가 있다면, 그래서 그가 꿈을 만드는 일을 한다면, 꿈을 꾸면 달의 반대쪽으로 단숨에 날라갈 수 있다면, 그 곳에서 꿈에도 그리던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꿈에서 깨어나면 그 사람과 다시 헤어지는 거라면, 나도 꿈 속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나는 <반지의 제왕>도 영화로밖에 보지 않았지만, 그래서 톨킨의 글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톨킨이 다정다감하고, 감상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하며, 모험을 즐기는 따뜻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겠다. <로버랜덤>은 어떻게 보면 어른들이 읽기에는 좀 시시한 동화다. <반지의 제왕>을 생각하고 읽기 시작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를 것 같다. 읽으면서 점점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 있긴 했다. 그런데 마음. 이 이야기를 만든 톨킨의 마음을 생각하면 이 동화는 한없이 따스해진다. (실제로 내 친구는 아이를 위해 동화 몇 십 편을 직접 만들었다는 지인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 아, 그런데 이 이야기는 톨킨의 둘째 아들 마이클보다는 첫째 아들 존이 더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었단다. 마이클은 초반부 이야기에 만족하고 흥미를 잃었다나. 하여튼 부모 마음 알아주는 건 첫째가 최고라니까.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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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주 오래 이 책을 기다려왔다. 1년도 더 된 것 같은데. <달의 바다>라는 소설이 있는데 아주 따뜻하다더라, 는 말을 듣고 도서관에서 기다리기를 몇 달. 인기 있는 이 소설은 늘 대출중이었고, 심지어 예약까지 되어있어서 그저 반납되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날은 집에서 검색해봤을 때 '대출가능'으로 되어 있어서 룰루랄라 뛰어갔는데, 서가에 없어 한참을 찾다가 다시 검색을 해 보면 '대출중'이라는 문구가 떴다. 그러니까 <달의 바다>는 우리우리 도서관에서 아주아주 인기 있는 책. 그리고 돌고돌아 드디어 내게도 도착해주었다는 말씀. 나는 몇일을 품에 안고 다니며 이 푸른책을 아껴 읽었다.
 
   지난 금요일에는 친구가 쌀국수를 사준다고 오라고 했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내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왔는데, 바로 서쪽 하늘이 주황빛으로 환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 빛깔이 너무 예뻐서 나는 그 자리에서 1분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노을이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는데, 말할 필요도 없이 형편 없었다. 저 빛깔을 내 형편없는 핸드폰 카메라가 담을리가 없지. 우리는 쌀국수를 먹고, 커피도 마시고, 빨대를 꽂은 캔맥주를 또 두 캔 마시고 맥도날드 아이스크림 콘을 하나씩 들고 버스를 탔다. 행복한 밤이었다. 지하철로 갈아타면서 친구와 헤어졌다. 나는 7호선, 친구는 2호선. 7호선 안에서 푸른책을 꺼냈다. 그리고 이런 문장을 읽었다. 이건 고무줄에 관한 얘기다.

 (p.41)

   아. 나는 그 날 지하철 7호선 안에서 나도 모르게 또 한번 탄성을 내뿜었다. 세상에. 눈물이 찔끔 나올 것도 같았다. 어느 시의 제목처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그러니까 7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그 때 당시 내 곁에 나를 떠나려는 사람이 있었고, 나는 그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 잡고 싶었다. 나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읽고 있었다. 그 책에서는 남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두 가지 이론이 나온다. 고무줄 이론과 동굴 이론. 남자는 가끔 동굴 속 깊이 들어가는 시간이 있다. 그럴 때 끄집어 내려 하지마라. 끄집어 낼수록 남자는 더 깊숙히 들어간다. 내버려두면 아무렇지도 않게 저절로 나온다. 이게 동굴 이론이다. 고무줄 이론도 비슷한데, 남자는 때론 끝까지 잡아당겨진 고무줄처럼 멀어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동굴 이론과 마찬가지로 평생 고무줄에 힘주고 있을 순 없으니깐 언제고 놓을 거고 그러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나는 그 때 그 책을 맹신했었다. 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나는 동굴 이론과 고무줄 이론을 고스란히 그 사람에게 대입시켰다. 나는 동굴로 이 책을 보냈다. 몇 페이지를 읽어봐, 라는 메모도 남겼다. 뭐 결과는, 흠, 이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같은 책 따위 읽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고무줄 이론. 나는 착각했었다. 그 때 나는 고무줄도 있는 힘껏 잡아당기면 다시 원상태 그대로는 회복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돌아오겠지만 처음보다 훨씬 헐거워질 것을. 그건 처음의 고무줄이 아닌 것을. 1.5배쯤 늘어난 고무줄이 되어 있을 것을 알지 못했다. 그 밤, 7호선 안에서 저 문장들을 읽고는 더는 저 명랑한 푸른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책을 덮고 아주 오래 전 그 고무줄에 대해 생각했다.

   
    흠. 다시. 그러니까 <달의 바다>를 다 읽었다. 1년치를 기대한 탓에 조금 싱거운 기운도 있었다. 모두가 얘기한 것처럼 고모의 편지가 좋더라. 따듯한 편지들이었다. <달의 바다>를 읽기 전에 올해의 좋은 소설에서 정한아의 '마떼의 맛'을 읽었는데 이유를 콕 집어 설명할 순 없지만 그 소설을 읽는동안 따스한 기운이 온 몸에 돌았다. 다 읽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꼭 올 여름이 가기 전에 <달의 바다>를 읽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잽싸게 낚아챈 거다.

   소설을 읽으면서 여러 번 우주를 생각했다. 과학적인 우주가 아니라 감성적인 우주를 생각했다. 짙은남색의 우주. 헤엄치듯 유영하는 우주비행사. 저기 멀리 보이는 알사탕같은 지구. 무채색의 달. 그 곳에서 무거운 우주복 없이, 우주선을 빠져나와 헤엄치듯 유유히 우주를 떠다니는 나를 생각했다. 외롭지만 고독하진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우주에 있다! 로 힘껏 소리쳐도 아무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을 것같은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 물개처럼 손을 휘젓고, 돌고래처럼 다리를 흐느적거리는 상상을 했다. 아, 우주는 따스한 곳이었다.

   나는 다시 지하철 7호선 안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는데, 그 때 내 엠피쓰리 플레이어에선 존 마크의 'Signal Hill'이 흘러나왔다. 어디선가 듣곤 좋아서 저장해두었던 노래다. 사람이 많은 퇴근길의 지하철 안이었는데 이 노래와 소설의 마지막이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그래서 나는 버튼을 한 번 더 눌러 노래를 다시 들었고,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한번 더 읽었다. 고모가 할머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p.160)

   우리가 오해 속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진짜라는 걸. 조경란의 말처럼 순정만화에 나올 뻔한 인물들이지만, '나'의 이야기가 힘이 없지만, 이 소설은 충분히 따뜻한 소설이다. 우주를 꿈꾸게 만들고, 사랑을 꿈꾸게 만들고, 오해를 꿈꾸게 만드는. 그녀의 다음다음다음다음다음다음다음번 소설이 기대된다. 그러니까 난 그녀의 조그만 팬이 될테다. 다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이야기. 남자에게 고무줄과 동굴 이론이 있다면, 여자에겐 파도 이론이 있다. 결국 같은 얘기다. 살아가다보면 좋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다는 이야기. 그건 여자, 남자 구분이 따로 필요 없다는 이야기.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진짜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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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문학사상사


   하루키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실로 간단하다. 갑자기 무언가가 쓰고 싶어졌다. 그뿐이다. 정말 불현듯 쓰고 싶어졌다." 아니. 이건 이를테면 프롤로그고, 실제 시작하는 문장은 이렇다.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학교 1학년 때 내게 꽤 나이 차이가 나는 남자를 소개시켜준 선배가 있었다. 나는 그 남자의 나이가 부담스러워 만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러면 선배는 메일이라도 주고받아보라고 했다. 선배는 내게 그 남자가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라고 소개했다.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는 내게 종종 메일과 함께 사진을 보내왔다. 이건 어젯밤 야경이 아름다운 남산 꼭대기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이건 어제 새벽 안개로 뒤덮인 논가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나는 그 남자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내 성년의 날에 만났다. 남자는 점퍼를 입고 차를 끌고 나왔고 나는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남자와 나는 서로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내 기억으론 그 남자와는 딱 한 번 그렇게 만났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뒤로 문자 연락은 간혹 했었다. 남자는 하루키 커뮤니티의 운영진이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하루키를 읽어 볼 생각을 했는데, 어느 날 내가 도서관에서 <노르웨이의 숲>을 빌리고 문자를 보냈더니 당장 전화가 왔다. 하루키는 그렇게 무턱대고 <노르웨이의 숲>부터 읽으면 안 돼. 당장 <상실의 시대>를 반납하고 자기가 말하는 책을 빌리라고 했다. 그 책을 다 읽고 남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 책을 다 읽었어요. 그러면 남자에게 전화가 왔다. 어땠니, 나는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감상을 주절거렸다. 그러면 남자는 다음 책을 추천해줬다. 나는 그 책을 다 읽고 또 문자를 보냈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을 더 연락을 했었는데, 아마도 내 기억으론 <노르웨이의 숲>까지 못 가고 연락이 끊겼던 것 같다. 아니면 <노르웨이의 숲>까지 딱 갔을 수도 있고. 그 뒤로 나는 하루키를 혼자 읽었다. 혼자 읽고 혼자 곱씹고 혼자 다음 책을 골랐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남자의 하루키 추천 순서는 발간 순서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제일 처음 읽은 하루키의 책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일 것이다. 일기라도 써 뒀었더라면 기억해낼 수 있었을텐데. 아무튼 오래간만에 하루키의 초창기 소설을 읽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지난 주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읽고 싶어졌다. 읽으면서 내내 읊조렸다.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무슨 까닭이였는지 몰라도 나는 이 책에서 위안 받고 싶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잘 될 거야. 스무살 그 때처럼 용기낼 수 있을 거야. 마치 처음 읽는 책처럼 꼼꼼히 읽어나갔다. 한창 내가 하루키에 빠져있을 때의 문장들이 펼쳐졌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 항상 샤워를 하고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시고 싶어졌다. 쓸쓸했지만 외롭진 않았다. 공허했지만 절망스럽진 않았다. 세상의 끝을 생각하고, 일각수의 두개골을 상상했었다. 스파게티 같은 이국의 음식을 만들어 먹고 깊이 잠들고 싶었다. 그 때, 하루키를 읽을 때마다 그랬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는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와 맥주를 마시고 바닷가 도로를 운전하는 '나'와 어느새 친구가 된 술집에서 책을 읽는 돈이 많은 부잣집 아들 '쥐'와 새끼 손가락이 없는 여자 아이가 등장한다. 딸국질을 하는 라디오 DJ와 감자튀김을 열심히 만드는 술집 주인 제이도 간간이 등장한다. '나'와 잠을 잔 과거의 여자친구들 이야기도 있다. '나'가 레코드를 빌리고 돌려주지 않은 여학생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우리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나'와 쥐, 새끼 손가락이 없는 여자 아이의 세계에는 존재하는 작가 데릭 하트필드도 있다. 줄거리를 말해 보라고 한다면 내가 이렇게 문장을 나열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다. 그저 '나'가 있었고, '쥐'가 있었고, 바람이 있었다. 어느 날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래, 작가의 말이었다. 내가 이 공허하고 쓸쓸한 이야기를 읽으며 잘 될거야, 다소 터무니 없는 주문을 외웠던 이유가 바로 책의 뒤, 작가의 말에 나왔다. 이 책의 작가의 말에는 언제 하루키가 처음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는지가 나온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어느 야구팀이 승리한 걸 보고 모두들 열심이군, 나도 열심히 해야지, 라고 생각하고 소설을 써 내려갔단다. 그렇게 써 내려간 소설이 바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다. 하루키는 이 작품으로 군조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작가의 말을 읽고 너무 좋아서 몇 번을 다시 읽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기에 이 책이 다시 내게로 온 거구나, 생각했다. 올림픽을 보면서, 유도 경기를 보면서, 핸드볼 경기를 보면서, 야구 경기를 보면서 나도 생각했다. 모두들 저렇게 땀 흘리며 열심히 하는데, 나도 열심히 해야지. 가을이 올테고 바람의 방향이 바뀔테니까. 스물 아홉의 나는 스물 아홉의 하루키에게 정말 감사했다. 이건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마음을 다잡은 사람들을 위한 작가의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스무 살 하루키를 좋아했던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는 지금쯤 잘 지내고 있을까. 벌써 오래 전에 결혼을 했을테고, 아이도 있을테지. 그는 여전히 남산 꼭대기 위에서, 새벽 안개가 몽글몽글 피어나는 논가에서 사진을 찍을까. 그 때 남자와 나는 꽤 긴 길을 드라이브 해서 스파게티를 먹으러 갔다. 창을 5센티만 살짝 내려놓고 크게 음악을 들었다. 나는 그 당시 낯선 사람을 만나면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아이였는데, 그래서 말 없이 음악을 들으며 도로 위를 달리는 시간이 좋았다. 여전히 그는 하루키를 읽을까. 이젠 하루키를 읽지 않는 일상에 찌든 가장이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아, 책을 읽는데 자꾸 김연수 작가의 <7번 국도>가 떠오르기도 했다. 어쩐지 비슷한 구석이 많다고 생각했다. 김연수 작가가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했으니 영 엉뚱한 생각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생각. 용기를 얻고 싶으면 이제는 꽤 유명해진 작가의 데뷔작을 읽자. 미숙한 면들이 여기저기 보이지만 열정만은 그득한 첫 작품. 그는 꾸준히 썼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괜찮은 작가가 되었으니. 어떤 사람에게도 위태로운 처음은 존재하는 것이니. 나도, 당신도 노력하면 좋아질 수 있을테니. 아자아자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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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릿파크
존 치버 지음, 황보석 옮김/문학동네


    이 소설을 읽고 기억에 남은, 아니 마음에 남은 두 가지. 마법과 노란방. 이 몇 페이지를 읽는 동안 마음이 벅차 올랐다. 아, 이건 내가 찾아 헤맨 마법, 그리고 노란방이야. 미국 교외 중산층에 대한 반어적인 풍자와 코미디 이런 해석은 이미 멀리 보내 버렸다. 토니의 마법, 해머의 노란방. 어제 술자리에서 동생은 인생이란 살얼음판이야, 라고 중얼거렸다. 튼튼해보여도 언제 내 밑의 얼음이 깨져 풍덩 차가운 물 속으로 빠져버릴지 몰라. 동생은 일주일 전만 해도 다닌지 한 달이 채 안 된 회사에서 돌아와 매일 울었다. 나와 동생의 남자친구는 멀지 않은 곳에서 내내 따라가겠다고, 그러다 니가 빠지면 재빠르게 밧줄을 휘둘러 구해주겠다고 안심하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소주잔을 채우고 살얼음판을 위하여, 라고 외친 뒤에 원샷했다.

   이 소설을 설명하자면 <위기의 주부들>을 떠올려봐, 라고 하면 될까. 언젠가 EBS에서 해 주는 걸 넋 놓고 보다가 울어버렸던 로버트 레드포드의 <보통 사람들>을 생각해봐, 라고 하면 될까. 진주에 처음 올라온 여름 방학에 집 앞 비디오 가게에서 매일 테잎을 빌려봤던 그 때, 우리 자매가 세네번이나 빌려 꼭 병에 든 코카콜라에 빨대를 꽂아두고 보았던 <나우앤덴>을 생각해봐, 라고 하면 될까. 배경은 그런 미국의 교외, 똑같이 생긴 2층집(잘 가꾸어진 잔디밭이 있는) 거리를 떠올리면 된다. 풍요로워 보이는 삶. 넘칠 것도 부족할 것도 없을 것 같은 가정들이 양 옆으로 가지런히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듯한 그런 동네. 그 곳이 불릿파크다. 탄환저장소. 모두들 괜찮은 삶을 살아가는 듯이 물질적으로는 꽤 풍요롭지만 언제 튀어나갈지 모를 위험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 그곳에 살아가는 탄환들, 네일즈와 해머(못과 망치), 그리고 네일즈의 아들 토니. <불릿파크>는 이 세 사람의 이야기다.

   
   나는 이 소설에 네 개의 노오란 포스트잇을 붙여놓았다. 첫 번째 포스트잇에서 네일즈는 어느 흐린날 아침 타임스를 읽으며 자기 자신에게 묻는다. (p.99)  그는 어느 날 출근길의 기차역에 우두커니 혼자 서 있는다. 어느 날은 두 정거장도 채 가지 못하고 기차에서 자꾸만 내린다. 도심으로 가는 출근길의 기차역. 모두들 바쁘게 기차에 뛰어오르는데 혼자 절망적인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중년의 남자의 모습을 생각하자 가슴이 저려왔다. 외롭다는 건 그런 풍경이니까.


   두 번째 포스트잇에는 내가 이 책에서 무척이나 좋아했던 마법이 등장한다. 네일즈의 아들 토니는 어느 날 아무 이유도 없이 침대에서 한 발짝도 내려오지 못하는 병에 걸린다. 네일즈 부부는 하루, 이틀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했지만 그 병은 한 달이 넘게 지속됐다. 그런 토니에게 두 명의 의사가 다녀가지만 그들 누구도 토니의 병을 고치지 못한다. 그리고 마법. '힌두교 도사랄까 신앙요법사'라고 소개받은 스와미 루투올라가 마법의 집행자다. 그는 침대에 누워있는 토니 방에 들어가 인사를 하고 향을 피워도 될까 동의를 구하고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볼티모어에서 태어났어,로 시작하는 이야기다. 그는 또 토니의 이야기를 듣고 이제 그들이 함께 하게 될 기도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마법의 주문, 마법의 기도를 외기 시작한다. 그건 아주 간단한 주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행복해, 나는 괜찮아, 나는 행복해질 거야, 나는 괜찮아질 거야를 반복해서 외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나는 이 페이지를 읽으며 토니와 함께 스와미의 기도를 함께 외었는데, 하마터면 눈물이 쏟아질 뻔 했다. 때론 서로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나누며, 너는 잘 될 거야를 열 번 진심으로 외쳐주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침대에서 박차고 나가 우울증을 떨칠 수 있는 일이다.

(p.209-210)


   세 번째 포스트잇은 해머의 어머니 이야기다. 그녀는 미국의 끔찍한 자본주의를 증오했다. 결국 그녀의 어떤 생각은 아들 해머로 하여금 소설의 말미에 끔찍한 살인을 계획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떠도는 호텔 생활을 했는데, 자신이 쓰기 전에 침대를 사용했던 사람의 특징들을 꿈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녀는 이런 말을 적어 아들에게 보냈다.

(p.236)


   내 네 번째 노란 포스트잇은 노란방 위에 붙였다. 해머는 술로 이 빌어먹을 삶을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었다. 잠도 잘 자지 못했다. 지끈거리는 두통과 술이 그의 하루의 전부였다. 그러다 어느 날 운명처럼 노란방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첫 눈에 그 방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노란방의 따스한 기운. 그 안에 있으면 두통없이, 술 없이 꽤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머물게 된 노란방에서의 밤. 

(p.278-279)

 
    소설의 마지막은 비극으로 끝나는 듯 했다. 아니, 비극으로 끝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했다. 결국 자신의 마법, 자신의 노란방을 잘 찾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노란 삶이라고. 그건 분명 남을 해치지 않는 마법이고 노란방이여야 한다. 다 아무 문제 없이 잘 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위기의 주부들>에서처럼, <보통 사람들>에서처럼, <나우앤댄>에서처럼 외롭고 힘들고 어려운 부분들이 분명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 어느 단 한 사람도 외롭고 힘들고 어렵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라는 위로를 나는 <불릿파크>에서 받았다. 퍼즐처럼 맞춰진다고 해야 하나. 지금 나는 우울증에 관한 아주 두꺼운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불릿파크>의 토니와 해머와 네일즈를 자주 떠올린다. 나도 토니도 해머와 네일즈도 모두 크고 작은 우울증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살얼음판. 내가 딛고 있는 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살얼음판 위에서 이런 책을 만나는 일 또한 언젠가 만나게 될 나의 마법과 노란방에 좀더 가까워지는 일이니. (아니, 이건 나의 조그마한 마법이며, 노란방이다) 내게는 풍덩 빠져도 밧줄을 금세 던져줄 사람들이 있으니. 외로운 사람들이여, 우리 모두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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