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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춘의 문장들 - 판매자 김영하가 건네준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
    서재를쌓다 2008. 5. 23. 15:50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마음산책

       알라딘 중고샵에서 '김영하'라는 판매자 이름을 발견했다. 김영하? 그 김영하? 정말? 판매자 김영하가 내어놓은 중고책 리스트를 봤다. 책의 권수도 많았고, 그 중에 한국소설도 많았다. 아, 이 책을 왜 파는거지? 소장하시지 않고? 나는 판매자 김영하를 그 김영하로 확신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책은 출판사에서도 보내주고 직접 구입도 하고 그러그러해서 두 권이 생긴 걸거야. 그래서 알라딘 중고샵도 오픈했다, 재밌겠다 그런 생각으로 이렇게 대방출하는 거겠지. 언젠가 책이 너무 많아 둘 곳이 없어서 한번씩 헌책방에 판다는 이야기를 읽은 것도 같다. 아, 그래도 이 책은 가지고 계시는 게 좋을텐데. 그러다 상품상태에 구입날짜와 서명이 적혀져 있다는 책들을 발견했다. 오호라, 그럼 그 김영하가 직접 쓴 날짜와 서명이 적힌 책이란 말이지? 생각해보고 말 것도 없었다. 그 중에서 읽고 싶은 책 3권을 추려내 주문했다. 김훈의 <칼의 노래>, 신경숙의 <딸기밭>, 그리고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

       판매자 김영하가 그 김영하가 아니라는 사실은 금방 알았다. 알라딘 중고샵 배송 느리기로 소문 났는데, 이 칼을 품고 딸기밭에 앉은 청춘의 문장은 엄청나게 빨리 도착했다. 일단 택배상자의 보내는 이의 이름이 김영하가 아니었다. 주소도 내가 아는 그 김영하가 살고 있는 서울이 아니었다. 왜 판매자 김영하는 김영하라는 닉네임을 쓴 걸까? 김영하의 김자도 써져 있지 않은 판매자 김영하의 자필서명을 보며 생각했다. 나처럼 그 김영하인 줄 알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봐? 판매수익을 올리기 위해? 설마. 그럴리 없어. 그래,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김영하를 너무나 좋아해 닉네임을 김영하라고 지은 거라고. 아니면 가족 중에 진짜 이름이 김영하인 사람이 있을 지도 몰라. 하지만 판매자 김영하는 김씨가 아닌걸? 그럼 엄마나 아이들 중에 김영하가 있나 보지.

       그렇게 구입하게 된 <청춘의 문장들>. (그래도 판매자 김영하가 보내준 세 권의 책은 모두 새 책처럼 깨끗했다) <여행할 권리>를 읽고 그의 산문을 연달아 읽고 싶어 꺼내들었다. 예전에 동생이 정말 좋다,며 도서관에서 빌려왔을 적에 다 읽지 못하고 골라 읽고는 반납기간에 쫓겨 반납했는데 이번에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읽었다. 그리곤 또 아, 김연수, 모드로 전환해버렸다. 그야말로 아, 김연수다.

       <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나는 김연수의 소설도 좋아 하지만, 산문을 더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뭐라해야하나. 그의 산문들은 나를 위로해준다. 자기 자신이 치유되기 위해 소설을 쓴다는 소설가처럼, 나는 그의 문장에서 치유받는 거다. 자신의 소설이 위안이 된다는 독자의 말이 위안이 된다던 김애란처럼, 그의 문장이 내게 위안이 된다. 진심으로.

       읽다보니 동생이 도서관에서 빌려왔을 때 읽었던 글들이 다 김광석에 관한 글이었다. 이번에 <청춘의 문장들>을 읽겠다고 하니 정말 좋았어, 라며 김연수는 김광석을 들으며 청춘을 보냈어, 그리고 김광석도 실제로 한번 봤대, 라고 하는 걸 보니 그 때 동생이 김광석 이야기를 하며 목록의 어떤 제목들을 몇 개 집어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 다른 글들은 처음으로, 김연수의 청춘에 얽힌 김광석에 대한 글들은 두 번씩 읽었다. 정릉의 한 자취집 마루에서 퇴근 후 모여앉은 그녀들과 술을 마시며 김광석을 듣던 이야기. 모두들 처음엔 가만히 듣기만 하다가, 어느 한 사람이 먼저 낮게 따라부르기 시작하다가, 결국에는 목청 터지게 합창하게 되는 김광석을 품은 밤. 복학생 시절 도서관에서 오후를 보내고 유리문을 여는 순간 마주한 김광석의 목소리. 5월의 푸른 밤 아래 통기타를 든 키가 작은 김광석과 마주한 이야기. 이 글을 읽곤 엠피쓰리에 김광석의 '그날들'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당장 이어폰을 꼽고 들었다. 언젠가 설경구가 러브레터에 나와서 박자 무시하고 마음대로 '그날들'을 불렀는데, 이렇게 근사한 노래가 있나, 하곤 찾아보고 수도 없이 따라불렀던 그 노래. (최근에 그 때 설경구가 노래한 파일을 우연히  들었는데, 정말 완전 박자 무시하고 불렀더라. 그럼에도 설경구이기에 어떤 진심이 느껴졌었던 거지. 그 때 나는 윤도현이 껄껄거리며 웃으며 정말 니멋대로 부르시네요, 식의 멘트를 날렸을 때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정말 잘 불렀는데. 눈물이 찔끔 나왔는데.)

       산문은 소설 마감 후의 회복훈련으로 쓴다는 김연수. 영서를 번역하고 한시를 즐겨 읽고 하이쿠를 좋아하는 김연수. 아, 정말 이 사람은 작가가 되기 위해 태어난 거구나. 정말. <청춘의 문장들>을 읽고 정보의 바다를 떠돌다가 같은 김천출신 김중혁 작가가 쓴 한 때 '김연수와 함께 불법 일본 만화 번안도 했다우' 식 의 칼럼을 발견했다. 한참을 웃었다. 이 글에는 밤을 새워 작업을 하리라 결심했던 김연수 작가가 타이밍을 먹고 단숨에 잠들어버려 김중혁 작가가 김연수 작가의 몫까지 해치웠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좀 더 정보의 바다를 넘실거리니 김연수 작가가 황순원 문학상을 받은 시상식에서 문태준 시인이 한 축사 녹음파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한참을 웃었다. 거기엔 시인의 꿈을 끝내 포기한 김연수의 이야기가 있었다. 옮겨보면 이렇다.

      시를 막 쓰겠다고 마음을 다잡아먹은 열렬한 문학 청년 시절이였습니다. 찾아가서 방바닥 곳곳에 있던 고양이 오줌을 제가 내려다 보고 있었는데, 김연수 작가가 저에게 한마디 아낌없는 충고를 해 줬습니다. "이대로 쓰면 등단하겠네." 어쨌거나 전 김연수 시인의 그 점검 덕택에 아주 간단한 그 말 한마디, 이대로 쓰면 등단하겠네, 라는 그 말 한마디 덕택에 시로 등단까지 하게 되서 시인이 되었습니다. 김연수 작가는 저를 만나면 은근히 자기도 시인 출신이라는 사실을, 그것도 등단연도가 저보다 1년 빠른 선배 시인이라는 행세를 합니다. 오늘 김연수 작가가 소설을 잘 써서 이런 큰 상을 받습니다만, 김연수 작가는 시인이기를 더러는 꽤 고집을 합니다. 김연수 작가는 종종 저한테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도 시집 한 권 묶을 분량의 원고가 있는데. 이렇게 말하면서 말 끝을 흘립니다. 물론 저는 김연수 작가의 이 말에 묵묵부답 별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한 잡지에서 시인 출신 소설가들에게 시 원고 청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김연수 작가도 물론 시 원고 청탁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어느날 그가 나에게 발표할 시 원고를 보여줬습니다. 발표를 해도 되는 그런 수준인가를 그는 내심 은근슬쩍 저에게 묻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1994년 그 정릉집의 상황을 우연찮게 떠올렸습니다. 1994년에는 제가 그에게 시를 점검받았지만 이제 역전이 되서 그가 저에게 점검을 받게 된 것입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그게 좀 그렇다이."  그 이후로 김연수 작가는 시 쓰는 일을 본격적으로 피압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를 자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김연수 작가가 황순원 문학상을 받게 되었다고 보도가 나간 후에 그에게 몇 개의 축하화분이 집으로 도착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화분 가운데 하나의 화분이 문제였습니다. 다른 화분에는 모두 '축 황순원 문학상 수상'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만, 그 문제의 화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축 미당 문학상 수상'. 이제 이런 일은 김연수 작가에게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소설만 쓰기로 겨우 김연수 작가가 마음을 다 잡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정말 이 파일을 듣다가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어대다가 녹음을 한 뒤, 엠피쓰리에 넣었다. 언제고 이 이야기를 문득 다시 듣고 싶어지는 순간이 올 것만 같아서. 그러면 조금 울적한 마음도, 그냥 포기해버릴까 하는 마음도 모두 깔깔거리면서 날려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청춘의 문장들>을 읽고 김연수 작가의 모든 것이 부러워졌다. 그가 지나온 청춘, 그의 딸이 가진 이름 열무, 그의 문장, 그의 친구들까지. 오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주문했다. 어떤 독자의 글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김연수의 책, 이라는 문구를 보고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요즘 인터넷 서점은 총알배송이라 오늘 늦게 도착한단다. 신난다. 더불어 판매자 김영하님께도 감사의 말을. 김연수 작가가 쓴 연두빛 청춘을 이렇게나 착한 가격에 깨끗하게 소장할 수 있게 해 주어서. 감사. 언제고 문을 닫아두고 혼자 울고 싶은 날 당장이라도 꺼내 읽을 수 있는 시같은 문장을 내게 주신 김연수 작가에게도 감사, 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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