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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 - 스무살의 그 길
    서재를쌓다 2008. 7. 23. 18:39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
    이지민 지음/문학동네


       왜 형,에서 민,으로 바꿨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이지형,이라고 발음했을 때의 입 안의 울림이 작가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데. 어떤 이유가 있겠지만 이지민,은 너무 여성적인 느낌이다. 여리고 흔한. 그러고보니 우리 사촌동생 꼬맹이랑도 같은 이름이네.
     
       표지가 예쁜 문학동네 책. 이 소설집에서 마음에 들었던 단편들은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와 '오늘의 커피', '키티 부인' 정도. 소설을 읽고 난 후에 책 표지와 차례를 놓고 봤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오늘의 커피'에서는 번쩍거리는 카페에서 조명을 가장 많이 받는 빛나는 주인장 자리에 어떤 손님이 서서 카페의 주인이 되어 씨디를 고르고 커피를 내려 마시는 모습. '키티 부인'에서는 네모난 방 안 가득한 하얀색 헬로우 키티 얼굴에다 입을 그려놓는 주인공의 모습. '그 남자는...' 에서는 하얀 목련꽃이 핀 좁은 골목길을 돌고 돌아 여자가 남자를 매일 밤 바래다주는 풍경. 소설들이 이미지가 강해 꼭 아홉편의 영화 시놉시스같다. 적당히 기름지고, 적당히 부유해, 매일 밤 외롭고, 어느 날은 쓸쓸하다고 울부짖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p.31-32)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함께 길을 걸었던 사람. 오래 손을 잡고 그 길을 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사람과는 그 길을 딱 한 번밖에 걸어보질 못했다. 매일 술을 마시고, 매일 실연에 빠졌던 서로를 위로했던 스무살 시절의 일이다. 그래, 정말 그 때 나는 스무살이었다. 텅빈 운동장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가 저 멀리서 그 넓고 넓은 운동장을 비틀비틀 가로질러 내게로 왔다.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너에게로 다가가면 언제나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날 뿐이지. 때론 내게 말을 하지 사랑이라는 건 우정보다 유치하다고,로 시작하는 노래였다. 하늘에 별이 총총 떠 있고, 옆에는 얼굴만 봐도 심장이 벌컹거리는 사람이 달큰한 술냄새를 풍기던 스무살. 그 때는 술에 취하면 평소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스러워진다는 걸 잘 모르던 시절이었으니 나의 그의 노래를 카사노바의 세레나데쯤으로 받아들였었다.

       그는 그저 적당히 외로운 순간에 누군가가 필요했던 사람이었다. 때마침 내가 가까이 있어 내게 오고, 내게 와달라고 하고, 내 손을 잡아주었던 거다. 그러면서도 내게는 누구도 아닌 너이기 때문에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건 아주 나쁜 짓이었다. 내 마음은 진심이었는데, 그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도 나중에는 누군가에게 그런 나쁜 짓을 하는 못된 사람이 됐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때서야 스무살 딱 한 번 그 길을 손잡고 걸었던 그 아이의 심정을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내가 참 바보같았구나 깨달았다.


        '그 남자는...'를 읽으면서 갑자기 그 때 그 길이 떠올랐다. 운동장에서 시작해서 친구의 자취집까지 이어지던 정류장이 다섯군데는 될법한 그 길. 어렴풋한 그 밤의 공기. 이제 그 아이의 얼굴이며 이름은 가물가물한데도 그 운동장이며, 불러주었던 노래며, 손을 스르르 잡았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한 걸 보면 내가 스무살 쉬지않고 가슴을 벌렁거렸던 건 꼭 그 아이였기 때문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런 식이라면 그 아이만 내게 나쁜짓을 한 거라고 말할 수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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