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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다 읽고 양장 위에 덮여진 파아란 표지를 빼냈다. 4면으로 접혀져 있었던 표지가 하나로 이어지면서 푸른 체실비치 풍경이 길다랗게 펼쳐졌다. 아니, 푸르다는 표현으로 부족하다. 뭐랄까. 아득해지는 빛깔이랄까.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표지를 펼쳐 보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릴게 분명하다. 해가 거의 진 후, 바닷가에 홀로 서 있으면 이런 느낌일까. 서글프다는 말로도, 시리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아득하다는 말로도, 저리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저기 앞에 하늘하늘 걸어가는 여인. 플로렌스. 나는 에드워드 대신 그 뒷모습에 대고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고 단번에 달려가 말해주고 싶다. 당신 마음은 그게 아니잖아요. 에드워드 마음도 그게 아니예요. 이렇게 끝내고 평생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하지만 소설은 그렇게 끝났고, 훌륭한 결말이었다. 나는 또 이언 매큐언에게 빠져버렸다.

   1960년의 영국을 상상해보자. 보수와 해방이 넘실대며 물결치던 시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한 여자가 있다. 락앤롤에 빠져있는 한 남자가 있다. 둘은 자라온 환경도, 좋아하는 것들도 다르지만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여자의 바이올린 연주에 열중하는 모습에 남자는 넋을 놓고, 남자는 여자에게 역사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기록된 중요한 인물들에 관해 책을 쓰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다르기에 상대방이 가진 것에 더욱 매력을 느꼈던 두 사람은 결국 결혼에 골인한다. 그리고 첫날밤. 결혼식 전까지 두 사람은 정절을 지킨 그들이 첫날밤을 치루면서 틀어져 서로 등을 돌리고 걸어간다.

   지금까지 읽었던 이언 매큐언의 책들은 모두 그랬다. 심드렁하게 혹은 더디게 전개되다가 소설의 마지막 몇 장을 남겨두고 펑 터지는 거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뭔지 모르는 그것이 펑 터진다. 아, 라는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오고 아득해진다. 가슴이 시려온다. 나는 그 느낌이 좋아 몇 번을 반복해서 결말을 읽었다. 아프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드는 결말. 사는 게 이런 거랍니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 잃게 되는 것들이 많지요,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라고 말하는 듯한. 왠지 이언 매큐언은 결말을 위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거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그의 결말들은 서늘하고 아득하다. 그는 서늘하게 쓰고, 읽는 독자들은 아득해진다. 그래서 좋다.

   그의 심리 묘사는 지극히 사실적이다. 그래서 때론 치졸하고 이기적이고 이중적이다. 보기 싫다고 느껴지는 구석구석까지 훤히 내려다본다. 사랑이라 믿었던 일들이 순식간에 배신이란 감정들로 변모하는 어떤 순간. 그 전까진 모든 게 사랑이었지만, 그 이후론 모든 게 가식이 되어버리는 자기 합리. 그리고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래, 내 평생의 사랑은 그 때 그이뿐이였어, 라고 후회하는 자기 연민. 의도하지 않은 말을 무섭게 뱉어내어놓고는 마음이 말을 뱉어내는 게 아니라 말이 말을 뱉어내는 꼴이 되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자기 방어. 이 순간 그이를 잡지 않으려 영영 놓쳐버리고, 영영 후회하면 살 것을 알면서도 잡지 못하는 얕은 자존심. 평범한듯 평범하지 않게 일상의 심리들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덕분에 소설을 읽으며 여러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나도 이런 생각한 적 있었어. 비겁하고 치졸했지. 이런 식의 말 해서 엄청 후회했었지. 이기적이고 소심했지.

    5장을 읽어내려가며 체실 비치를 상상했다. 실제로 신혼여행지로 많이 택하는 곳이라는데. 표지와 같이 해가 거의 진 서늘하고 푸른 바닷가.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 있는 풍경. 여자의 위치에서는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남자의 위치에서는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파도가 쏴아, 해변가에 부딪치며 사라지는 소리. 여자가 소리치고, 남자가 발로 해변가의 돌을 걷어차고. 여자가 남자를 지나서 걸어가고, 남자가 그 뒷모습을 잡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는 풍경. 더 크게 부딪치는 쏴아쏴아, 파도 소리. 완전히 어둠이 깔린 체실 비치. 언젠가 체실 비치에 가게 된다면 이들을 꼭 기억하리라. 플로렌스, 에드워드. 여자가 걸어가고 남자가 그걸 보고 서 있는 모습을 나는 남자 뒤에서 보리라. 세번째 줄 중앙의 C9 자리일지도 모른다. 파도처럼 아스러져 버린 그들의 첫날밤을 밀려오는 푸른 파도를 보며 떠올려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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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시공사


   "매년 여름 쿵린은 수위와 이혼하기 위해 어춘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기다림>의 첫 문장이다. 하진의 <기다림>은 이 첫 문장으로 간단히 요약될 수 있다. 부모가 정해준 배필과 결혼해 도시에서 혼자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쿵린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고, 여름 휴가 때마다 이혼 하러 고향에 내려가지만 매번 실패하고 돌아오길 17년. 별거 생활을 한 지 18년이 되면 배우자 동의 없이도 이혼할 수도 있다는 그 기다림으로 버틴다. 영어로 소설을 쓰는 미국의 중국인 소설가 하진은 18년동안 지속된 어떤 기다긴 기다림을 간결한 문체로 덤덤하게 이어나간다. 지난 가을, 소설을 번역한 김연수 작가는 작가와의 만남 자리에서 <기다림>은 굉장히 '좋은' 소설이라고 말했다.
 
   무려 18년이다. 실제로 소설의 결말은 그보다 더 나아가긴 하지만. 소설의 인물들은 하진의 문장들처럼 억세지 않다. 순하다. 휴가 때마다 고향에 내려가지만 이혼하자는 말을 못 꺼내거나, 꺼내고도 법원까지 가서야 이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는 부인 수위의 말에 화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오는 쿵린이나. 남편이 보내주는 돈을 아끼고 아껴가며 불평불만 한 마디없이 딸을 키우며 시부모 병치레를 도맡아 하고도 이혼을 하자는 남편의 말에 그러리라,고 수긍하고 마는 수위나. 휴가 때마다 이혼을 실패하고 돌아오는 린에게 잔뜩 화가 나지만 그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럴 수도 있겠다며, 이내 마음을 수그러뜨리며 내년에는 기필코 이혼하고 오리라 말하는 만나나 모두 바보스러울 정도로 둥글둥글하다. 긴 시간, 무언가를 기약없이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이란 질퍽해지고 탁해지기 마련이건만 18년을 기다리는 쿵린과 만나는 짧은 소설의 문장들처럼 간결하고 명료하게 그 날을 기다린다.

   소설은 그저 흘러간다. 복잡한 사건없이. 그저 이혼을 하려는 사람과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긴 기다림이 계속된다. 반복되는 1년, 1년을 함께 넘기며 나는 쿵린의 흰머리와 만나의 가슴앓이와 수위의 주름살을 마주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이 소설의 진가를 알아차렸다. 이런 거였구나. 기다림이란 이런 거였지. 긴 세월이 흐르고 그들은 늙어갔다. 어느새 열정적인 마음은 무뎌졌고, 강인했던 확신은 내리는 눈만으로도 스르르 무너졌다. 내리는 눈 너머로 화목한 수위와 딸의 모습을 마주하고 쿵린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뭘 그렇게 간절히 기다려왔던 거지. 그는 그 기다림의 끝에서 선뜩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지도, 절망하게 뒤로 물러나지도 못한다. 18년의 기다림 끝에는 원하는 삶은 없었다. 내가 뭘 원해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는 울었다. 술을 마시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미안하오. 나를 용서하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 되고 싶었소.
 
   매년 간절히 기다리는 날짜들이 있다. 그 날에 나는 무얼할까. 누구를 만날까. 어떤 일들로 행복해질까. 기다림은 즐겁다. 뭐든지 상상할 수 있다. 행복한 나, 즐거운 너, 아름다운 풍경. 하지만 늘 그렇듯 현실은 상상보다 비루해져 버린다. 그것은 상상할 때 가장 빛나는 것이다. 쿵린은 말한다. "그건 기다림을 위한 기다림이었을 뿐이야." 소설의 결말부분을 눈을 비비며 새벽시간에 읽다가 가슴 속으로 무언가가 쿵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만은 생명력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린은 알 수 있었다." <기다림>의 마지막 문장이다. 아니, 또다른 기다림의 첫 문장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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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에 중고샵이 생겼다. 어떤 종류의 것들을 사람들이 내어 놓는지 확인만 하다가 나도 한번 내어 보자는 생각이 들어 책장을 살폈다. 얼마 전에 읽은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에서처럼 혹시나 내 책이 전설의 고서가 되어 나의 메모를 시작으로 이리저리 이어나갈지도 모를 일이라는 엉뚱한 생각도 일조했다. 어떤 책을 내어 놓을까 책장을 둘러봤다. 책이 많지도 않는데, 내어 놓을 거라 생각하니 더 적게 느껴졌다. 내가 제일 아끼는 소설들은 밑으로 빼놨다. 내 책장 속에서 평생 한번 더 읽히지 않고 고이 꽂혀 있는다고해도 절대 내어놓을 수 없는 책들이 있다. 이 책은 이래서 안 되지, 이 책은 왠지 한번쯤은 더 읽을 것 같은데, 이 책은 내용이 왜 기억이 안 나는거지, 다시 읽어봐야지, 이런저런 이유로 한 권도 빼 놓을 수가 없었다. 모두 제각기 내 볼품 없는 책장에 남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내 조립식 책장은 저렴하게 구입한 것이라 시간이 조금 지나자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몇 번 방 구조를 옮긴다고 들었다 놓았다 했을 뿐인데도 나사가 몇 개 풀려 너덜너덜해졌다. 역시 비싼 게 장땡인거야?

   아무튼 1차 방출 책들을 모았다. 선물받은 책은 모두 뺐다. 거기엔 책 이야기뿐만 아니라 선물해준 이의 마음까지 담겨져 있다. 더욱 소중한 것. 그렇다고 방출하는 책들이 소중하지 않은 것들이 아니다. 한 권 한 권 빼어 놓으면서 이 책이 나에게 오기까지의 일들이 거짓말처럼 또렷하게 떠올랐다. 기억력이 별로 없는 내게 신기한 일이다. 한 번 읽은 것도 있고, 여러 번 읽은 것도 있다. 사실 한 번 읽지 않은 것들도 있다. 왜 읽지 않았노라고 한다면, 흠. . 그래, 그런 책도 있다. 아무튼 누군가에게 좋은 책이 되길 바라며 골라낸 것들이다.

   이걸 빼어내고 오랜 시간에 걸쳐 공들여 중고샵에 등록을 했다. 과연 팔릴까 싶었는데 바로 첫 주문이 들어왔다. <리버보이>와 <장국영이 죽었다고?> 두 권을 한 사람이 주문했다. <리버보이>는 독후감 써본다고 샀다가 독후감 공모에서 냉큼 떨어졌다. 의도가 좋지 않아서 그런건가. 이야기는 건강했다. <장국영이 죽었다고?>는 드라마 시티를 보고 산 책이다. 원작이 읽어보고 싶어서. 아주 오래 전에 구입한 책이다.

   택배사에 배송 요청을 하고 밤에 이마트에 들렀다. 서류봉투를 사고 포장할 테이프를 샀다. 그리고 요즘 내가 좋아하는 작은 초도 샀다. 집에 와 노란색 종이를 찢어내 주문자의 이름을 쓰고 짧은 손메모를 남겼다. 당신에게 좋은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내 책장 속 책을 구입해줘서 고맙다고. 그냥 보내기 그래서 초를 보낸다고. 투명한 컵에 넣어 촛불을 켜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내가 좋아하는 토마스 쿡이 인터뷰에서 한 말도 적었다. 이 말을 생각하면 우울한 새벽에도 위로가 된다고. 그리고 집에 있는 뽁뽁이로 정성스럽게 포장했다. 정성스런 헌 책을 받아들고 그 사람이 아주 많이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계속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다. 내 마음도 하루에도 수십번 오락가락한다. 요즘은 뉴스를 열심히 본다. PD수첩, 100분 토론도 열심히 본다. 오늘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나중에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나 자신도 확실하지 않지만 언젠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따뜻하고 당당하고 확신있고 또렷하고 깊고 넓은 사람. 좀 더 많은 책을 내 놓아볼려고 한다. 책장 속에 썩어 머물고 있는 책들에게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어줘야지.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생각들을 만나보라고. 이 아이들을 보내고 나면 그 예치금을 모아 내 책장에 잠시 고이 모시고 싶은 것이 생겼다. 조금만 기다려. 우리 곧 보자. 거품이 자글자글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일이 점점 즐거워진다. 오늘도 롯데리아에 들러 동생이랑 한 잔을 시켜 리필해서 마셨다. 그 거품을 크레마라고 한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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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장 쪽으로
편혜영 지음/문학동네


   작년 겨울, 문학동네 가을호에 실렸다는 김애란 작가가 쓴 편혜영 작가에 관한 '작가의 초상 - 그녀에게 휘파람'의 일부분을 twinpix님 블로그에서 읽었다. 첫 책이 나온 편혜영 작가가 너댓번 만난 김애란 작가와 마주 앉아 이 책의 장점에 대해 열 가지씩 돌아가면서 말해보자는 글귀에서 피식 웃어버렸다. 이 글을 쓴 김애란 작가도, 그 말을 한 편혜영 작가도 귀여웠다. 두 사람이 돌아가며 책의 장점 하나씩을 이야기할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니 자꾸 웃음이 나왔다. 언젠가 편혜영 작가의 책을 읽어야지, 생각했다. 

   며칠 전 도서관에 들러서 한국소설 코너를 기웃거리는데 그 곳에 내가 언젠가 찜해두었던 소설들이 서로 멀지 않은 자리에 꽂혀 있었다. 천명관의 <고래>, 한유주의 <달로>, 그리고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 <사육장쪽으로>는 그녀의 두번째 소설집이다. 창가 자리에서 첫번째 단편을 읽었다. 마음에 쏙 들었다. 도서관 카드를 내밀고 세 권 모두 대출해서 나왔다.

   나도 귀여운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니 이제 내가 읽은 그녀의 두번째 책 <사육장 쪽으로>의 장점 열 가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돌려 말할 사람이 없으니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얼쑤, 그러니 따위의 추임새를 넣어주길.

   하나, 표지가 좋다. 요즘 문학동네 표지는 대부분 마음에 든다. 회색빛 배경에 표제작 <사육장 쪽으로> 내용을 함축한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다. 달려오는 개가 너무 귀엽게 그려져 있는 게 불만이라면 불만이다. 꼭 순한 돼지같잖아.

   둘, 작가 사진이 잘 나왔다. 짙은 연두빛 벽에 작가가 카메라를 향해 살짝 고개를 돌리고 있다. 시선은 카메라 정면을 향하지 않고. 각도를 아는 작가다. 예쁘다. 72년생이라는데 무척 어려보인다.
 
   셋, 잘 읽힌다. 책장이 잘 넘어간다. 좋은 뜻이다.

   넷, 처음에 배치된 소설들 '소풍'과 '사육장 쪽으로'는 특히 좋다. '동물원의 탄생'도. 뒤에 배치된 소설들은 집중도가 조금 떨어졌다. 앞의 소설들이 반복되어지는 느낌이었다. 이 소설집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동물과 놀이기구. 특히 동물이 곳곳에 등장한다. '사육장 쪽으로'의 아이를 물어뜯으러 달려오는 개의 모습이나 '동물원의 탄생'에서 도시를 배회하는 검은 늑대의 번득이는 누런 눈을 책을 읽으면서 분명히 마주쳤다. 섬뜩했다. 특히 늑대의 눈. 활자로 이루어진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정말 내 눈 앞에서 버티고 있는 늑대의 누렇고 반짝이는 눈과 마주했다. 늑대는 나를 보고 어슬렁 도심의 숲 속으로 사라졌다. 책을 놓치고 도망갈 뻔 했다.

   다섯, 이 소설집을 시작하면서 작가는 짙은 안개를 뿌려놓았다. 단편 '소풍'은 앞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 속에 길을 나서며 시작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실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두 치 앞이 가장 잘 보이는 것이 안개일 수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 소설집을 읽어내려가면서 나는 짙게 가라앉은 나를 본다. 아무 표정없이 닭을 튀기는 나, 그런 내게서 나는 기름냄새, 지하철 출근길에 낡은 서류 가방을 잃어버린 나, 하지만 잃어버렸다 말하지 못하는 나. '소풍'의 여자처럼 오줌을 누워 안개를 걷어치우고 싶지만, 내 오줌으로 걷히는 안개는 너무나 작다. 안개가 걷히면 사람들은 닭냄새가 나고, 서류가방을 잃어버린 나를 몰라볼지도 모른다. 그저 내 오줌은 솟아오르는 아파트 빌딩 기둥에 숨겨져 올라가고 올라갈 뿐.

   여섯, 이런 문장은 작가 본인의 직접적인 생각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여자는 원래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주어와 서술어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라면 싫었다. 푸른 하늘처럼 맑은 마음을 가지고 싶다고 쓰는 아이가 싫었다. 장래에 연예인이 되겠다고 쓰는 아이도 싫었고, 장래희망이 없으니 아무거나 써달라고 조르는 아이도 싫었다.' 16페이지다. 나는 내가 혹시 푸른 하늘을 좋아하는 맑은 마음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닌지 뜨끔했다.

   일곱, 더러운 것들이 출동한다. 코끼리의 똥, 쥐, 여자의 토사물. 이 단어들이 나오면 몸을 긁적거렸지만 소설을 끝내고 나면 그것들이 전혀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더럽다고 생각하는 내가 더 더럽게 느껴졌다.

   여덟, 옛날 하숙집 앞 닭집 아저씨가 생각났다. 아저씨가 바삭바삭하게 튀겨주었던 닭도, 물 하나도 안 탔던 탄산이 목에 탁 걸렸던 생맥주 500cc도. 늦은 밤, 군침이 꼴깍꼴깍 넘어갔지만 씩씩하게 참아냈다.

   아홉, 작가의 말이 좋다. 자신의 생시(生時)를 이야기 한 부분, 그리고 이 소설들의 생시를 이야기 한 부분.

   열, 작가가 좋아졌다. 첫번째 소설집을 찾아서 읽을 거고, 다음 그녀의 소설들도 나오는 즉시 읽을 테다. 읽으면서 무시무시한 소설을 쓰는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무시무시한 건 그녀의 소설이 아니라 그녀와 내가 함께 살고 있는 세상이였다. 뉴스를 틀면 소설 속보다 영화 속보다 더 무시무시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요즘 공포 영화를 보는 대신 뉴스를 본다. 그게 훨씬 더 무시무시하다. 그녀의 소설에는 살인범이나 사기꾼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침을 흘리고 살점을 뜯어내는 사육장의 개와 도시의 밤을 배회하는 검은 털의 번쩍이는 누런 눈을 가진 늑대가 등장할 뿐. 오히려 그게 낫다. 적어도 소설 속에는 늑대가 늑대모양을 하고 늑대같은 짓을 하니까.

   그래, 다시 한번 되뇌인다. 우리 사람은 되기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맙시다. 김상경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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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Media2.0


   그런 식의 이야기다. 대학교 세미나 시간. 일주일에 한 권씩 읽어가야만 하는 과제가 벅찼다. 과제로 읽어야 하는 책들은 늘 어렵고 따분했다. 학기 내내 거의 절반 이상의 책을 끝까지 읽지도 않았을 거다. 그 날도 세미나 시간에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말이라도 한 마디씩 하라고 하셨다. 무슨 책이였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데,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던 것 같다. 다 읽진 못했지만 읽은 부분까지의 느낌은 커다란 도서관 안에 나 혼자 덩그라니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고. 교수님은 책들처럼 꽉 찬 느낌이였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그 반대라고 했다. 그 많은 책들 속에서 나 혼자만 덩그라니 놓여져 외롭고 쓸쓸한 느낌이였다고.

   책을 사면 꼭 맨 앞 장에 무어라고 적어놓던 때가 있었다. 뭐든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걸까. 힘들었던 시기였다. 늘 책을 시작하면서 이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이 아픈 마음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리기를. 이 책이 나를 위로해주기를. 다시는 울지 않게, 다시는 생각나지 않게 만들어 주기를 바랬다. 늘 실패했지만. 상처는 그렇게 빨리 잊혀지는게 아니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천천히 씻겨져 갔다. 내가 읽은 책에, 내가 본 영화에, 친구들과의 수다에,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떤 책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괴로워 군대에 있는 후배에게 무작정 보내버리려는 결심까지 했다. 결국 보내지 못했다. 대신 작가의 싸인을 받았다. 작가님은 좋은 일 많으시라고 써 주셨다.
 
   집 앞 도서관에 정해 놓은 책 없이 어떤 책이든 빌리러 가는 날이 있다. 딱히 생각나는 책은 없는데 뭐든 읽어야 할 때. 한국 소설, 일본 소설, 외국 소설 코너를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제목과 작가, 표지와 간략한 줄거리만 보고서 선택하는 거다. 때론 월척을 낚기도 하고, 때론 피라미를 낚기도 하는 그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책들이 나를 보고 있는 거다. 눈동자를 굴리면서. 나를 읽어달라고. 내가 재밌다고. 나를 데려가 달라고. 신기했다. 한 권의 책에 한 가지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 아니, 한 가지 이상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 이렇게 수다스러운 이야기들이 이렇게 조용한 도서관에 꽂혀져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어떻게 하든 지금 내가 당장 읽을 수 있는 건 이 수많은 이야기 중 단 한가지 이야기일뿐이라는 것도.

   그러니까 어느 날 이 책이 내게도 왔다. 도서관 새책 코너로 번듯하게 뽑혀져 있던 이 책. 언젠가 인터넷에서 어떤 리뷰를 보고는 꼭 읽어야지 찜해뒀다가 이제서야 만난 이 책.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봄이 되고 가벼운 책이 읽고 싶어 꺼내 들었는데, 의외로 많은 추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각기 다른 9가지의 책에 대한 사연이 존재하는 책이다. 어떤 책은 팔고 팔아도 내게 돌아오고, 어떤 책 속에 꽂혀져 있던 편지가 꼭 지금의 내 얘기같기도 한 이야기. 해외로 떠난 여행에서 나는 돌아오지만 책은 돌아가기 싫은 마음과 함께 그 곳에 두고 오고, 책장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이야기. 불행의 씨앗이라고 믿게 되는 책을 옛날 남자친구에게 보내고, 어떤 순간들이 기록되어 있을 전설의 고서를 헌책방에서 찾아 헤매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 어릴 때 훔친 책값을 작가가 된 뒤 돌려주려 가는 주인공이 있고, 할머니의 마지막 유언을 지키려 책을 찾아다니는 주인공도 있는 이야기. 그리고 발렌타인 데이때 자신의 운명을 바꾼 책을 선물하는 것이 고리타분해보이지 않을까 고민하는 주인공도.

   이야기들은 단순하다. 짧고 간략하다. 이 책이 사랑스러운 이유는 순전히 그 사이에서 '나의 책'에 관한 '나의 기억들'이 마구마구 떠올라서였다. 상상해봤다. 그와 나의 책장. 나는 책장이 닮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그 남자와 나는 책장을 늘리며 이사를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같은 책을 동시에 읽어나가면서 깔깔거릴 수 있을까. 정말 내 책장과 비슷한 사람이 가까운 곳에 있을까, 생각하며 내 책장을 살폈다. 많진 않지만 오손도손 모여있는 책장 속의 책들을 보며 이런저런 추억들이 떠올랐다. 이 책은 서점에서 직접 샀지. 그 날 스파게티를 먹었어. 이 책을 읽고 마음이 너무 아팠어. 어떤 책은 꺼내서 넘겨봤다. 친구가 선물한 책도 있었다. 그리고 메모도. '갖고 싶은 책이라 내꺼 하나 샀다가, 니 생각나서 다시 돌아가서 한 권 더 샀다.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이 책을 꼼꼼하게 읽어나갔었다. 그리고 어떤 책에 나는 이런 메모를 남겼다. 이 책은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이 너무 좋아 다시 읽고 싶어질 때도 꾹 참았었다.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이 묻혀버릴까봐. '유키로 가득한 책 한권을 끝내고 잠바를 주섬주섬 챙겨입고 집 앞 슈퍼에 들린다. 카스 맥주 2캔, 김, 소세지, 초콜릿, 아폴로, 꿀맛 쫀드기, 마셔야지.' 좋은 소설을 읽고 나면 꼭 맥주가 땡겼다.

   아, 그리고 전설의 고서 속 한 문장. 내게 전설의 고서가 도착한다면 어떤 문장을 써 넣어야만 기가 막히다고 소문이 날까. 이건 쉽게 떠오르지가 않는다. 고민해봐야겠다. 전설의 고서가 당도하기 전에. 힘든 마음으로 책을 읽어내려갔던 그 시절, 내가 썼던 메모들을 책장에서 찾는데 없다. 어디로 간걸까. 나는 그 때 많은 주문을 담아 메모를 남겼었는데. 어떤 책은 읽고 친구에게 선물했다. 그 메모를 가지고 있는 것이 힘들어서. 그 메모 앞 장에 다시 메모를 남겼다. 나는 씩씩해지고 있다면서. 깜쪽같다. 그 메모들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걸까. 힘든 마음이 사라졌듯 메모들도 그렇게 시간을 따라 스르르 사라져 버린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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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피부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지음, 유혜경 옮김/들녘(코기토)

   챕터의 첫 문단들이 띄어지지 않은 채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책이 17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17개의 문단들이 문법을 무시한 채 한 칸씩 앞당겨져 있다. 출판사의 오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규칙적이다. 이야기와 이야기는 이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1 챕터 전에도 이미 이 일들은 시작되고 있었고, 17 챕터 뒤에도 이 일들이 계속 될 거라는.

   <차가운 피부>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재밌었다. 땀이 났다. 무서웠다. 오싹했다. 화가 났다. 따끔거렸다. 슬펐다. 외로웠다. 마지막 장이 다가오는 게 두려웠다.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가 결국 끝나버린다 말이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놓치지 말라고, 꼭 읽어보라고 손에 쥐어주고 싶었다. 곡예사님도 그런 이유로 내게 이 책을 추천해준 거겠지? 곡예사님, 정말 감사드려요.

   이 책을 보게 될 어떤 사람들에게 스포일러 따위를 제공해서 책의 재미를 반감시키고 싶지 않다. 그저 책 제목만 알고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찾아내서 첫장부터 차근차근 읽다보면 차가운 피부의 물컹한 무엇인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들인줄 알았으나 그들이 아닌 아득한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쓸쓸한 남극의 섬을 거닐다 고독한 등대 안에 갇히게 되는 슬픈 어떤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책 뒤의 추천글에서처럼 정말 이 책에서 '공포, 스릴러, B급 영화'를 느낄 수 있다. 주인공을 따라 뛰고 총을 난사하고 괴상한 모습의 괴물들을 마주하면서 헥헥대고 있으면 어느새 가슴이 아파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였구나. 결국 우리였구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의 그런 면이 마음에 들었다. B급 공포 스릴러를 닮은 이 이야기가 촉촉한 감성의 바다에 둘러쌓여 있다는 것. 그 바다에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순간, 정말 내가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읽고 있었던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눈가가 촉촉해져버리는 거다. 그러니까 이 놀라운 차가운 피부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잊고 있는 것들, 잊어 버린 것들, 잊고 싶은 것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일러준다.        

   아, 이렇게 너무 많이 말해버리다니. 그저 당장 읽어 보세요,라고 말하고 말면 좋을 것을. 책을 읽고 작가 인터뷰와 자료들을 찾아봤다. 소설 속 이야기를 닮은 카탈루냐에 사는 인류학자이기도 한 작가가 5월에 서울에 온단다. 나는 어떻게든 그를 만나보고 싶어졌다.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는 카탈루냐어로 그가 낭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 낭독을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몇 페이지의 어떤 부분인지 왠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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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A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강주헌 옮김/문학동네


   하룻밤만에 다 읽은 책이다. 세계 곳곳에서 다들 이렇게 멋진 소설을 쓰고 있으니... 언젠가 비행기에서 본 발리우드 영화를 연상시키는 소설이다. 이런 소설은 새해맞이 기념으로 다들 그냥 읽어주시길.

   김연수 작가님이 이런 식으로 추천한 책이다. 어찌 읽어보지 않을 수 있으랴. 제목도 괴상한 <Q&A>는 이렇게 내게 다가왔다.
 
   대학교 2학년즈음이였나보다. 친구랑 대학로를 걷다 영화를 보자 했다. 그때 우리가 발견한 극장이 하이퍼텍 나다였다. 발리우드 영화가 상영 중이였다. 좀 특이한 영화를 보고 싶었던 우리는 그 작은 극장에 처음 발을 내밀었다. 예쁜 인도 여자 주인공이 나왔다. 대사를 하다 갑자기 허리를 비틀며 춤을 추어댔고 경쾌한 리듬이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어디선가 떼거지로 허리를 비트는 여인들이 등장했고 다같이 춤을 추며 빙긋 웃어댔다. 내용은 잘은 기억나진 않지만 신분상승하는 예쁜 인도 여자의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 뒤로 발리우드 영화를 두, 세번은 더 보았다. 하나같이 예쁜 여자가 등장하고 흥겨운 노래를 하고 허리를 비틀며 춤을 춰댔다.

   정말 이 책은 발리우드 영화같다. 경쾌하고 발랄하다. 등장인물들은 신분상승을 꿈꾼다. 그리고 우리가 잘 모르는 인도 내부를 파고든다. 그저 학교 담벼락에 붙여져 있던 한달에 100만원이 안 되는 돈으로 한 달 여행 충분히 가능하다고 붙여져 있던 벽보과  카스트 제도밖에 알지 못했던 내게 좀 더 인도의 어떤 깊숙한 곳을 안내해 주었다. 뭐. 우리 사회와 별반 다를 바 없지만.

   주인공의 이름이 '람 모하마드 토마스'다. 그의 이름에서부터 복잡하게 얽혀있는 그 곳을 느낄 수 있다. '람'은 힌두교식 이름이고 '모하마드'는 이슬람교식이고 '토마스'는 기독교식이다. 단지 술집 웨이터일 뿐이였던 '람'이 어느 날 퀴즈쇼에 출전하게 된다. 열 두 문제를 모두 맞추게 되면 거금 십억 루피를 획득하게 된다. '모하마드'는 결국 이 열 두 문제, 아니 열 세 문제를 모두 맞추게 된다. 하지만 십억 루피를 온전히 가져오지 못하게 된다. 이유는 퀴즈를 내는 측에서는 당연히 열 두 문제를 어떤 누구도 풀 수 없을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적어도 엄청난 광고 효과를 내려면 지금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토마스'가 여러 분야에 걸친 각양각색의 문제를 모조리 풀어버린 것이다. <Q&A>는 일개 웨이터인 '람 모하마드 토마스'가 어떻게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도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막힘없이 다 풀어냈냐는 궁금증에서 출발하는 소설이다.

   뭐. 미리 그 답을 말해도 이 책을 재밌게 읽을 수 있을거라 확신한다. '람 모하마드 토마스'가 열 두 문제, 아니 열 세 문제의 정답을 모조리 맞춘 이유는 바로 인생의 모든 물음의 정답은 삶 속에 있다는 진리때문이었다. 내가 살아가면서 얻는 진실이 바로 가장 올바른 정답이니까.

   이 소설을 읽기로 결심했다면 '람 모하마드 토마스'를 따라서 열 두 문제를 풀게 될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열 세 문제다. 1단계엔 천 루피, 2단계엔 이천 루피, 3단계엔 오천 루피, 마지막엔 십억 루피. 그러면서 토마스의 굴곡많은 인생을 조금씩 알게 될 것이다. 어떤 부분에서는 김연수 작가님처럼 박수를 치게 될지도 모르고, 어떤 부분에서는 나처럼 빌어먹을,이라며 욕을 할지도 모른다. 그저 몇 년 전, 한 달에 100만원으로 한 달 여행이 가능했고, 카스트 제도가 존재하고, 그래, 갠지스 강도 아는구나, 갠지스 강을 아는 내가 인도의 외교관이 정규 업무를 하면서 2개월만에 쓴 인도의 Q&A를 정말 열심히 뒤쫓았다. 처음 보았던 발리우드 영화처럼 흥겹고 재밌지만 어딘가 모르게 씁쓸하다. 마치 자신의 치부를 들춰낸 것처럼. 책 뒤의 문구처럼 정말 돈 주고 사 봐야 할 책에 동감. 대니 보일 감독이 영화로도 만들고 있다니 소설이 흥행해서 국내에서도 꼭 개봉했으면 좋겠다.    

   얼마 전 불현듯 생각이 나서 연락해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더니 그 아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인도에 있다고. 언제 인도까지 날라간거야?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연락을 안 했던거야? 그 아이의 연락은 짧았지만 그만큼 건강해 보였다. 빨리 돌아와서 <Q&A>의 인도 이야기를 들려줘. 람같이 행운을 동전을 지닌 인도 아이를 만난거야? 모하마드가 사랑한 변덕스러운 타지마할을 본거야? 나와 그 아이는 같은 시기에 커트 머리로 잘랐다. 우리는 서로를 소년이라고 불렀고. 토마스같이 발랄한 그 아이가 보고 싶다. 빨랑 돌아와. 니가 말한 것처럼 이제 바람을 안주삼아 맥주를 잔뜩 마시고 취할 수 있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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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문학동네


   영화가 개봉한 뒤에 붙여진 띠지일 거다. 영화를 보고 급히 주문한 <속죄>의 띠지에는 <어톤먼트>의 포스터가 새겨져 있었다. 보통 책을 읽는 데 걸리적거려서 띠지는 책꽂이로 사용하거나 그냥 버려 버린다. <속죄>의 띠지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유명한 소설가와 어느 신문사의 극찬 문구와 함께 있었던 한 독자의 문구. '통곡하듯 울렸던 10월의 어느 가을 아침 9시', '문자 그대로 걸핏하면 울었다'. 이 문장들 그대로 <속죄>를 읽어 내려가고 싶었다. 책 표지에는 얼룩진 컵받침같은 무늬가 나뭇잎 사이로 새겨져 있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후회했다. 영화를 먼저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영화를 상당히 '좋게' 먼저 봐버린 내 머릿속에는 이미 등장인물의 체형과 얼굴, 옷들까지도 생생하게 그려진 채 나란히 서 있었다. 어린 브라오니의 얼굴의 점, 그 꾹 다문 입술. 착한 스무살 즈음의 브라오니, 그녀의 망설임 가득했던 어깨의 곡선. 세실리아의 등뼈가 고스란히 보이는 아름다운 녹색 드레스, 담배를 물고 있던 포즈. 로비의 수염, 분노에 가득찬 그의 팔뚝. 내 머릿 속에 배우들 모습을 그대로 한 등장인물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자신의 배역명이 호명되면 언제라도 벌떡 일어나 연기를 했다. 이미 내 눈 앞엔 <속죄>의 글귀가 아니라 <어톤먼트>의 영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물론 영화도 좋았고, 소설도 좋았다. 하지만 글을 먼저 읽었다면 그것을 고스란히 아름답고도 고통스럽게 재현한 영상들에 감동하며 볼 수 있었으리라. 그래, 내가 생각한 장면들이 바로 이런 거였어, 라며. 


   영화를 먼저 봐 버린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샌 뒤 '통곡하듯' 봄날의 아침을 맞이할 수 없었다. '걸핏하면' 울 수조차 없었다. 그저 마음이 스물스물 아파왔을 뿐. <어톤먼트>는 <속죄>를 멋지게 재현해냈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고 좋았다면 소설을 굳이 볼 필요가 없고, 소설을 보고 좋았다면 영화를 굳이 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아니면 꽤 긴 시간을 두고 보는 방법이 좋겠다. 영화와 소설의 결말은 다르다. 속죄의 마음으로 마지막 소설을 펴낸 브라오니의 기본 뼈대는 같지만, 굳이 따지자면 <속죄>의 결말을 지나 <어톤먼트>의 결말에 도달한다고 볼 수 있겠다. 책에서는 영화에서처럼 출간 후 인터뷰를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생일을 맞은 브라오니가 예전의 자신의 저택이였지만 지금은 호텔이 되어버린 추억의 장소에서 친지들과 파티를 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예전의 그 서재에서 브라오니는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된다. 소설의 처음에 무산된 연극을 아이들이 그녀 앞에서 공연한 것이다. '이것은 즉흥적인 성격을 가진 아라벨라라는 아가씨의 이야기'라고 시작하는 바로 그 연극 말이다. '사랑하는 맏딸이 사랑에 빠져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였다'는 그 연극. 그래. 이 부분에서 분명 내 마음이 스물스물 아파왔다. 


   어떤 기억은 오래 기억되어 무언가를 버티게 만들어 주고, 어떤 기억은 오래 기억되어 누군가를 파멸시킨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이다. 하루도 안 되는, 한 나절도 안 되는, 한 시간도 안 되는 아주 짧은 기억. 브라오니는 자신이 진술을 한 그 짧은 순간 때문에 평생 죄책감에 시달린다. 반면 세실리아와 로비는 서재에서의 아주 짧은 순간들을 기억하며 어려운 시기들을 버텨낸다. 그리고 결국 브라오니는 그 짧은 기억들 때문에, 혹은 그 짧은 기억들을 모아 <속죄>라는 긴 소설을 발표한다. 

   
   이 소설은 브라오니의 한 권의 속죄이다. 어떤 기억은 실제로 일어났고, 어떤 기억은 그녀가 속죄하기 위해서 만들어 냈다. 어떤 기억은 전쟁박물관의 자료들을 찾아 기록했고, 어떤 기억들은 로비의 동료에게서 받은 편지로 창조해냈다. 책을 읽고 난 후, 처음 든 생각은 정말 그녀가 평생을 '속죄'했는가였다. 결국 한 권의 책으로, 실명이 등장하는 한 권의 책 만으로, 자원한 간호일로, 머리가 터지고 다리가 달아나버린 전쟁터의 병사들을 돌보는 일을 꾸역꾸역 참는 것만으로 속죄하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 그렇다면 결국 속죄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였다. 내가 나 자신에게서 용서받기 위해서, 내 죄를 내가 용서하기 위한 것이였다. 아니, 꼭 그녀만의 책임인가? 묵인하고 눈 감아버린 다른 사람들은?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하고, 누가 누구에게 속죄해야 할까. 이것은 이언 매큐언의 소설인가, 브라오니의 소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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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 보이
팀 보울러 지음, 정해영 옮김/다산책방


   노무현 전대통령도 퇴임을 앞둔 고별만찬에서 이렇게 말하셨다지. "어떤 강도 좌우로 물길을 바꿔가며 흐른다. 그러나 어떤 강도 바다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여정을 강으로 비유한다. 한 줄기로 시작해서 드넓은 바다를 이루는 것. 멀리서 보기에 강은 그저 물길을 따라 흘러갈 뿐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보면 흘러나가기위해 열심히 바위와 모래를 깍아내리고, 강약을 조절하며 힘겹게 전진하고 있는지.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태생에서부터 그리워한 그곳에 이르기 위해서 강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작은 물줄기에 불과했던 강은 그렇게 드넓은 바다를 맞이한다.

   어린 시절에 도시와 도시 사이에서 죽음을 생각했다. 늦은 밤, 도시와 도시 사이의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뒷 좌석에서 볼 수 있는 건 암흑같은 어둠 뿐이었다. 나는 달리면서 어둠의 저편에 자리잡은 수많은 무덤들을 마주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답답한 관 속에 혼자 누워있으면 외롭지 않을까. 답답하지 않을까. 엄마, 아빠가 돌아가시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왜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걸까.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에 우리는 가장 철학적인 고민에 빠져드는 것 같다. 나는 혼자 묻고 혼자 고민했다. 그래서 그 때 나는 그 답을 얻었던가.

   <리버보이>를 읽으면서 그 암흑의 자동차 뒷 좌석을 생각했다. 내가 어린 시절 생각한 죽음은 항상 무서운 무덤과 연결이 되었던 것이고, 어둡고 암울했다. 얼마 전 읽었던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의 어떤 표현처럼 그 때의 나는 수 많은 돌멩이로 이루어진 피라미드의 제일 윗 돌을 빼내는 것이 한 사람의 죽음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무한히 슬프고, 서러운 것이라는 생각에 외롭고 무서웠다. 이제는 알지. 우리는 수 많은 돌멩이들 중의 하나고, 하나의 거대한 피라미드를 이루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 중 한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며 사라지는 것은 제일 윗 돌이 아니라 제일 아랫돌이 빼어내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무너진 피라미드를 사라진 아랫돌을 추억하며 다시 단단하게 만들어 나가면 된다는 것을.

   제스가 부러웠다. 누군가 어린 시절 나에게 <리버보이>의 제스가 강을 헤엄치는 법으로 인생을 가르쳐 주었다면, 짭짤하고 드넓은 바다로 이르는 것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가르쳐 주었다면 어쩌면 나는 암흑의 뒷좌석에서 혼자 죽음을 읊조리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제스처럼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건강한 죽음의 인식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나는 어린 시절 어떤 죽음에 관한 책을 읽었나.

   <리버보이>는 건강한 성장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누구든 자라면서 맞이하게 되는 인생의 고난들을 제스처럼 건강하고 따스하게 맞이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강물처럼 아름답게 반짝거리지 않을까. 강물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물길을 닮은 인생의 여정에 우리는 잘 헤엄쳐나가고 있는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려다 기진맥진하고 있는 거 아닌가. 누구보다 빠르게 바다에 도착하려고 힘을 빼고 있는 건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 그만 힘을 빼어보자고.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고. 흐르는 물의 내음새를 맡아보자고.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자고. 누가 함께 헤엄치고 있는지 손 내밀어 둘러보자고.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둥둥 천천히 강물 위를 떠내려가보자고 말하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랄까.

   아,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 새벽, 꿈을 꿨다. 짙은 쌍꺼풀을 빛내며 노무현 대통령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물론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어떤 말인지 모조리 까먹어버렸지만. 잘한다고 칭찬하는 말도 있었고 못한다고 나무라는 말도 있었던 것 같다. 깨어나서 멍하니 생각했다. 뉴스를 반복해서 너무 많이 본 게야. 그래, MBC 스폐셜 방송에서 뒷모습을 보고 마음이 이상했던 것이 꿈에서 나타난 거겠지. 순간 돼지, 똥, 대통령 꿈을 꾸면 복권을 사야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시점이 참. 사야하는 것인가, 말아야 하는 것인가 고민하다 결국 그냥 말았다. 복권운이 나를 따라준 적은 한번도 없으니. 아무튼 노무현 대통령은 내 꿈에서 안녕을 고했다. 설마 그 날 국민들 모두 꿈에 나타나 인사를 하신건 아닐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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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은행나무



. . . 지금 당장 거짓말을 죽이지 않으면 진실이 죽임을 당할 것 같아 두려웠다.
p.347

    惡人. 요시다 슈이치가 악한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니,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요시다 슈이치 이름으로 국내에 발간된 책 제목들을 쭉 훓어보니 나는 그의 책을 반쯤은 읽었다. 그의 소설들이 좋은 이유는 그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일요일들'의 느낌 때문이다. 그의 책에는 항상 여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는 그 한 명 한 명의 평범한 일상을 엇갈리듯, 무심하게, 스쳐가듯 이야기한다. 마치 어젯밤 건대입구역에서 탄 7호선의 4-1에서 지하철에 올라탄 나와 4-1에서 내린 어떤 사람을 이야기하듯이. 우리는 한번도 인사를 나눈 적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세상이라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는 듯이. 마치 영화 <접속>에서 좁은 계단 통로를 스쳐지나갔던 여인2와 해피엔드처럼. 그저 일상을 보여줄 뿐, 더 깊이있게 파고들지 않는 면도 좋았다. 그는 보여주고, 그것을 읽는 내가 깊이있게 파고들는 것. 심드렁하게 인물 한 명, 한 명의 풍경화를 그려나가다 보면 어느새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느낌. 잡아두고 싶지만 늘 그렇게 흘러가버리는 평온한 일요일 오후같은 느낌. 그것이 요시다 슈이치의 이름의 이야기를 마주할 때마다 내가 기대하는 느낌이다.

   그래. 왠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 이 제목. 악인. 그리고 그 악인에 대한 이야기. 나는 마지막 장을 넘기고는 그래, 이건 요시다 슈이치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요일 오후의 느낌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느 요일의 어느 시간을 꼬집어서 말할 수도 없는 느낌. 책을 받아든 순간, 너무 두껍다고 생각했다. 그래, 분량부터 잘못된 거다. 요시다 슈이치는 이렇게 두껍지 않아. 얇은 이야기. 무심한듯 방관자적인 시선. 단지 흘러가는 장소와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이건 너무 두꺼웠다. 그리고 요시다 슈이치 치고는 너무 극단적이였다. 그리고 너무 따뜻했다.

   <악인>은 어쩌다 사람을 죽이게 된 악인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요시다 슈이치는 500여 페이지에 걸쳐 '악인'을 이야기하는데, 중반을 넘어선 어느 순간이 되면 이 '악인'이라는, 악한 사람이라는 것이 처음에 당신들이 생각했던 인물이 과연 맞는가, 라고 우리에게 물어온다. 분명 사회에서 바라 본 '악인'이라는 사람은 이 사람인데, 그 '악인'이 정말 악한 사람이 맞느냐고. 아니다. 물어온다기보다는 그렇지 않다,고 요시다 슈이치는 말한다. 누가 사회가 정의한 '악인'을 악한 사람으로 만드는 거냐고. 결국'악인'은 사회라고. 사회의 환경이 어떤 사람을 '악인'으로 규정짓고 있다고. 사회의 그릇된 시선들이 악한 행동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거로구나 하는.
p.439

   그러니까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해주지 않았으면 했다. <악인>에서 요시다 슈이치를 느낄 수 있었던 건 여러 인물들이 엇갈려서 등장하는 소설의 구성뿐이었다. 늘 엉성하게 연결되어있어 그것이 맞물려지는 순간 아,라는 쾌감이 느껴졌었던 전작들이 아니다. <악인>의 인물들은 처음부터 서로 깍지를 낀 듯 단단하게 연결되어져있어 맞물려지는 어떤 순간의 쾌감이 없었다. 소설의 말미에는 챕터들의 연결이 너무 인위적인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지고, 하나의 동작으로 이어지는. 실제 일본에서 신문 연재되었던 것이라는데, 연재 형식으로 읽었으면 느낌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인물들은 처음부터 선과 악이 너무나 분명해 그것도 요시다 슈이치스럽지 않았다. 처음부터 너무나 분명했다. 소설에서 강조하는 이야기가. 공기는 시간을 따라 장소를 따라 흘러 나가지 않고, 자주 머물렀다. 어떤 장소와 어떤 시간과 어떤 사람에게.

   긴 분량을 끊기지 않고 빠르게 읽었다. 재미도 있었다. 너무 신파적이라는 생각도 들긴했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아쉬움이 밀려왔다. 변화가 없어서 그 사람의 작품이 싫어졌다는 사람 있지 않나. 영화든 책이든. 예전에는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는데, 요즘은 아니다. 변하는 걸 보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것을 읽으면 되지 않나. 내가 그 사람의 창작물을 여전히 찾는 건 내가 기대하는 그 사람의 느낌 때문이다. 전작들을 통해서 느껴졌던 고 좋은 느낌. 이야기가 달라지고, 인물들이 달라져도 여전히 느껴지는 그 느낌. 요시다 슈이치에게서 무라카미 류를 기대하지 않는 것. <악인>에서는 요시다 슈이치 특유의 그 느낌이 느껴지지 않아 별로였다.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책이 또 나오면 나는 요시다 슈이치라는 이름을 기대하며 열심히 읽을거다.

    내일은 <일요일들>이나 한번 더 읽어야겠다. 일요일이니까. 요시다 슈이치를 제대로 느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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