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생각의나무


    5월에는 정기승차권을 다 썼다. 정기승차권은 한 달 동안 지하철만 60번 이용할 수 있다. 한 달이 지나면, 횟수가 남아도 소용이 없다. 다시 한 달을, 60번을 충전해야 한다. 몇 달을 정기승차권을 샀지만, 어느 달도 60번을 다 쓴 적은 없었는데, 5월에는 다 썼다. 이건 내가 5월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는 일. 발발거리면서 5월의 거리를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는 증거다. 나는 5월에 공연장에도 가고, 극장에도 가고, 술집에도 가고, 카페에도 가고, 서점에도 갔다.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아, 5월에는 친구에게서 예쁜 하얀색 운동화도 선물받았다. 6월에는 더 많이 걸어야지.

   그리고 이건 6월에 생긴 습관. 아침마다 7호선 건대입구에서 2호선 건대입구로 갈아탄다. 특별히 아침시간에 기분이 좋을 때가 있다. 7호선에서 좋은 음악을 들었을 때, 날씨가 잔뜩 흐릴 때, 좋은 책을 읽고 있을 때. 거기다가 조금 빨리 갈아타는 곳에 도착했을 때, 시간이 살짝 남을 때면 2호선 지상의 건대입구역 자판기에서 600원짜리 설탕없는 큰 컵 라떼를 뽑아 마신다. 맛나다. 그리고 나무벤치에 앉아, 그 라떼를 꿀꺽거리며 마시며, 읽고 있던 책 표지를 어루만져준다. 고맙다, 책아. 그리고 성수행 열차를 보내고, 다음에 오는 순환선 열차를 탄다. 이건 6월에 시작한 일이다.

    고맙다, 책아. 그러면서 자주 어루만져 준 책. 6월 초에 나는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읽었다. 그리고 아침에 자주 600원짜리 설탕 없는 라떼를 마셨다. 기분이 좋은 아침시간이 잦았다. 모두 이 책 덕분이다. 책을 읽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이건 시,로 그득한 문장들이라고 생각했다. 김훈의 산문을 칭송하는 내게 H씨는 로쟈가 김훈의 산문들에 대해 말한 문장들을 보여줬다. 그는 김훈의 에세이를 숭배한다고, 김훈의 산문들이 국어교과서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김훈의 문장은 고상하고 아름답다고 적어 놓았다. 물론 그는 그렇기에 김훈의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자전거 여행>의 문장들은 정말 아름답다. 풍경들도 아름답고,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아름답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아침시간이 아름다웠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여수 돌산도 향일암을 꼭 한 번 내 눈으로 보고 싶어졌다. 향일암의 벼랑 위의 절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싶어졌다. 쑥이 들어간 된장국 생각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군산의 옥구염전에서 '소금이 온다'고 중얼거리고 싶어졌고, 미천골 자작나무 숲 한 가운데 서서 'ㅅㅜㅍ'이라고 맑고 깊은 울림을 내고 싶어졌다. 산불이 났던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에 가서 불 타 버린 숲이 스스로 숲을 이루어 가는 풍경을 들여다보고 싶어졌고, 영일만 바닷가를 자전거로 달리면서 '아아아' 소리치고 싶어졌다.

    처음 60페이지 정도까지 포스트 잇을 덕지덕지 붙이다가, 60페이지를 넘어가면서 포스트 잇 붙이기를 관뒀다. 책이 300페이지 정도 되는데, 포스트잇이 100개 정도는 필요할 것 같았다. 나를 울리는 문장들이 그리 많았다. 어젯밤에는 맥주를 마시고 2권을 주문했다. 친구에게도 한 권 보내줬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하고 다녀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6월에는 모두들 아름다운 문장들을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생각들을 하고, 아름다운 아침을 보낼 수 있기를. 모두들에게 건대입구역 600백원짜리 설탕 없는 라떼를 한 잔씩 뽑아 건네주며,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면 어디선가 자작나무 나뭇잎들이 사르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거라고. 바닷물이 소금이 되는 묵직한 소리가 들릴 거라고. 언 땅을 제일 먼저 뚫고 나오는 쑥의 청록색 소리가 들릴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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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나좀 도와줘

from 서재를쌓다 2009. 6. 8. 00:51

 



여보, 나좀 도와줘

노무현 지음/새터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그가 이제 이 땅에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강했던 그가 스스로 바위산 위에서 몸을 던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이 땅 위엔 없고, 그 날 새벽 바위산 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

    
    책의 마지막, 238쪽에서 239쪽에는 지은이의 약력, 즉 노무현 대통령의 약력이 나와 있다. 경남 김해군 진영에서 출생한 1946년부터 1993년에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최연소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해까지 기록되어 있다. 책은 1994년에 발간되었다. 그 뒤로 2009년까지. 이 책의 기록은 93년에 멈췄지만 그는 2009년까지 쉼없이 달려왔다. 그 기록들은 아마도 240쪽을 넘어 241쪽을 넘어 242쪽 너머까지 이어졌겠지. 그리고 243쪽, 244쪽, 245쪽까지는 이어졌어야 했을텐데. 2009년에 멈춰 버렸다. 멈춰 버렸다. 지은이의 약력이 245쪽 너머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면, 6월에 내가 읽고, 옮겨 적은 저 문장들이 이리도 마음 아플 리는 없었을 거다. 쓰라리지도 않았을 거다. 표지 그림에서마저 울고 있는 당신. 그 곳에선 조금 편안하신 거죠? 그러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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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꿈
오정희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


    친구는 요시다 슈이치를 만나는 자리에서 이 책을 가지고 왔다. 나를 만나러 오다, 나를 기다리다 산 책이라 했다. 짧은 글들이 담긴 책인데, 내가 오는 동안 몇 편을 읽었다고 괜찮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 날도 비가 왔다. 우리는 요시다씨를 만나고, 우산을 펴고 우겹살을 먹으러 갔다. 그리고 언제였더라. 김동영 작가를 만나는 날이었던가. 친구는 또 한 번 이 책 이야기를 꺼냈었다. 다 읽었다고, 아주 좋았다고, 너도 읽으라고 했다. 그리고 책 속의 어떤 한 소설의 느낌을 이야기해줬는데, 나는 요시다씨를 만난 뒤 잠깐 들른 커피숍에서 읽었던 이 책 속 작은 은점이(작고 강한 아이다)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내 친구가 말해준 그 이야기 때문에 이 책이 빨리 읽고 싶어졌다. 그건 오정희 작가가 쓴 이야기였지만, 오정희 작가의 이야기이고, 우리들의 훗날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 책의 거의 모든 소설이 그렇다. 제목은 '아내의 30대'. 소설의 처음, 아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새벽녘 아내가 흐느끼는 소리를 듣는 화자인 남편. 이건 아내의 이야기인데, 남편이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더 서글펐고, 더 이해가 되었으며, 마지막에는 눈물이 핑 돌면서 웃음이 터질 수 밖에 없었다.

    남편은 새벽녘 아내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아내는 이불을 덮어 쓰고 울고 있다. 남편은 아내에게 왜 울고 있느냐고 묻는다. 아내는 자신도 자기가 왜 우는지 모르겠다고 흐느끼며 말한다. 그리고 가끔 답답해서 미칠 것 같다고. 숨도 못 쉬겠다고.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고, 오늘과 똑같은 내일이 될 거라고. 외롭다고, 쓸쓸하다고, 인생이 뭔지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남편은 연애시절, 신혼 초의 여린 아내의 눈물을 생각한다. 그 때는 그 눈물에 자신이 항상 졌다고, 그건 여자의 무기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의 아내의 눈물에 대해서도 말한다. 결혼 생활이 길어지고 이제 싸우는 중에도 울지 않는 아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제 남편은 아내가 눈물을 흘린다고 항복하지 않는 것이다. 화해의 과정이 없어도 생활은 계속되는 것. 더이상 '이른바 눈물의 정화작용 화해 과정이 없'는 것. 남편에게 이제 아내의 눈물은 여자의 눈물이 아니다. 그저 이 상황을 어떻게 빨리 넘겨야 할지 궁리하는 위기상황일 뿐이다. 그렇게 아침이 밝아오고, 어디선가 빗소리가 들려온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거다. 그러자 아내는 눈물을 뚝 그친다. 아내는 빨래를 걷어야 한다. 이제 곧 아이들을 깨워 학교에 보내고, 아침밥도 해야 하고, 남편을 출근시켜야 한다. 다시 아내는 현실로 돌아오고, 더 이상 울지 않는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문장. '아내는 30대 중반인 것이다. 새로이 시작하기에도, 포기하기에도 어려운.'

     이 짧은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여자라면, 친구처럼 가정을 가졌거나, 나처럼 가정을 가지지 않은 여자라면. 그리고 우리처럼 30대로 접어들었다면. 그리고 나처럼 가끔씩 인생이, 아니 자주, 때때로, 이따금 허무할 때면, 쓸쓸할 때면, 외로울 때면. 친구와 나처럼, 엄마와 떨어져 있는 경우라면 읽어 볼 만한 이야기다. 아니, 읽어보았으면 하는 이야기다. '여자'의 경우를 '남자'로 바꿔도 마찬가지. 1분 1초의 쓸쓸함을 견뎌내고 있는 당신에게, 그리고 30대도, 여자도, 엄마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지만, 소나기가 쏴악- 하고 내리는 날에 커피를 내리고 있는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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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가장 예뻤을 때, 표지를 봤을 때 공선옥스러운 표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청보리밭에서 막걸리 한 잔 나누고 싶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공선옥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의 표지가 아니었다. 이건 너무 예쁘잖아, 색도, 일러스트도. 그렇게 생각했다. 작가가 가지고 있는 투박한 이미지에 비해서 너무 팬시적인 표지라고. 책을 다 읽고 다시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표지가 너무 예뻤다. 이건 공선옥이 '쓴' 이야기지만, 스무살 아주 예쁜 해금이와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표지 속 민들레를 예쁘게 후-하고 부는 볼이 발그레한 아이는 해금이. 해금이는 예쁜 아이다. 이야기를 다 읽고 나니, 이 표지가 이해가 되었다. 해금이에겐 아주 예쁜 표지가 필요하다. 예쁜 색이 필요하고, 예쁜 얼굴이 필요하다. 마해금이니까. 아주 예쁜 스무살이니까. 슬픈 나이이기도, 슬픈 시절이기도 하니까. 아, 마해금이 이쁘다. 분홍빛으로 물든 볼도 예쁘고, 살짝 감은 속눈썹도 예쁘고, 동그랗게 모은 토실토실한 입술도 예쁘다. 마해금이 참 예쁘다.

    그 분을 떠나보낸 뒤, 김연수는 이렇게 썼다. '삶과 죽음은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지만, 그 두 세계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 리뷰 기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다.' 어젯밤 뉴스에서 쌍용차 고공 농성자는 땅 위에 발을 디디고 있는 부인에게 바람이 많이 불어 굴뚝이 흔들려서 밥을 올려줘도 못 먹는다고, 자신은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자의 멘트, '내려오라고 할 수도, 그냥 있으라고 할 수도 없는 가족들은 그저 가슴만 타들어갑니다.' 다음 날, 천 명 넘는 쌍용차 직원들이 해고 통지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어제까지 서울광장은 32대의 전경버스에 촘촘히 가로막혀 있었다. 이건 2009년의 일인데, 마해금이 살았던 80년대의 일들과 달라진 게 없다. 마해금이는 80년대에 20대였으니, 지금은 50을 바라보는 40대 후반이 되었겠다. 이제 여사라 불릴 나이. 그럼 다시, 2009년을 살아가고 있을 마해금 여사는 여전히 변함없이, 바람에 휘청휘청 흔들리는 세상을 두고 뭐라고 이야기할까. 바람은 불고, 튼튼해 보이기만 하는 굴뚝은 자꾸만 바람에 흔들리고, 이렇게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세상에서 마해금이는 스무 살 때 그러했던 것처럼 씩씩하게 다시 봄밤길을 나설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80년에 스무 살이었던 해금이에게, 봄의 밤길을 다시 걷기 시작한 해금이에게, 2009년의 내가 줄 수 있는 건 2009년 6월 2일 내가 좋아하는 골목길을 찍은 사진 뿐이다. 해가 길어져 저녁인데도 날이 훤했다. 담장 너머 붉은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고, 그 꽃잎들이 담장 아래 가득 흩어져 있었다. 나는 그 붉은 꽃길을 따라 걸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마냥 기분이 좋았다. 그냥 피었다 진 꽃잎들일 뿐이었는데, 꼭 누군가가 나를 위해 뿌려놓은 꽃길 같았다. 그 날의 꽃길을 마해금이에게 바친다.




    그래요, 살다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요. 그 날, 해금이랑, 정신이랑, 승희랑, 진만이랑, 승규랑, 태용이랑, 수경이랑, 경애랑 그리고 그 분이랑 다 같이 만납시다. 좋은 날이 오면은요. 우리는 모두 만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각자 존재하고 있지만, 언젠가 좋은 날이 오면은, 다 같이 만날 수 있겠지요. 그럴 겁니다. 분명히 그럴 거예요. 좋은 날이 언제고 오기만 한다면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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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4일 거리
요시다 슈이치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요시다 슈이치의 <7월 24일 거리>는 작은 항구도시에 사는 주인공 사유리가 출근길 항구에서 나비의 시체를 보면서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표본이었던 호랑나비가 항구 제방에 떨어진 것을 본 것이다. 사유리는 조금 특별하다. 이를테면 일본의 작은 항구도시에서,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꿈꾸는 여자다. 사유리는 자신의 고향의 거리들을 리스본에 있는 거리로 바꿔 부르기를 좋아한다. 물론 혼자 있을 때의 일이다. 예를 들면, 늘 버스를 타는 '미루야마 신사 앞'이란 정거장을 '제로니모스 수도원 앞'이라고 부르고, 제방과 나란한 현도는 '7월 24일 거리'라고 부른다. 재개발 덕분에 항구에 조성된 '물가 공원'은 '코메르시오 광장'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이렇게 부르면, 사유미가 살고 있는 소박한 항구 도시가 리스본의 시가지와 완벽하게 겹쳐진다는 것이다.

    우선 사유리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가 태어난 곳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곳에도 바다가 있다. 강원도 고성에도 바다가 있지만, 경상남도 고성에도 바다가 있다. 나는 그 바닷가 근처에서 태어났다. 사유리와 같이 바닷가를 지나 등하교하진 않았지만, 늘 바다가 가까이 있었다. 자주 나들이가던 곳도 그 옛날 이순신 장군이 싸웠던 당항포였고, 집 근처 시장에는 갓 잡은 생선들이 그득했다. 나중에 서울에 올라와서 서해바다도 가보고, 동해바다도 가 본 뒤에 안 사실이지만, 남해바다는 정말 아름답다. 자갈밭에 앉아 오후 내내 잔잔한 바다만 바라보고 있어도 지겹지 않을 거다. 그 곳이 그립다는 것도, 아름답다는 것도 모두 떨어져 있은 후에 안 사실들이다. 그저 내가 그 시절 안 것이라고는 길을 가면 어디서든 아는 사람을 한,둘 만날 수 있는 좁은 동네라는 사실과, 바닷가 가까이 가면 언제나 굴껍질 더미가 그득했다는 사실 뿐.

    <7월 24일 거리>의 사유리의 생각도 비슷하다. 사유리도 자신이 살고 있는 항구도시를 그리 아름답다고, 근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리스본의 거리로 자신의 고향 지명을 바꿔 부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유리는 평범하고, 소심하고, 자신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멋진 남자에게서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와 닮은 사람이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에게 너는 근사한 아이라고 칭찬해줘도 그걸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다. 너같이 멋진 아이가 어찌하여 나같이 볼 것 없는 아이는 좋아한다는 말이니, 식의 작디 작은 아이. 

    나는 이 소설을 정말 사랑하게 되었는데, 가장 커다란 이유는 178쪽부터 펼쳐지는 풍경때문이다. 사유리는 '너의 색을 뭐하고 생각하니?'라고 묻는, 이 도시에서 낮에는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경비일을 하는, 그리고 서점에서 <포르투갈의 바다>라는 시집을 읽고 있던 한 남자를 몇 번 만나게 되는데, 소설의 후반부에 그 남자는 사유리를 자신이 경비를 서는 백화점 옥상으로 데려간다. 그 시간, 이 항구도시는 정전이었다. 영업하지 않는 백화점 내부는 어둡고 고요했다. 더듬더듬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가고, 찰그락거리며 어둠 속에서 옥상 문을 연다. 문이 열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사유리가 옥상으로 발을 내민다. 그 순간,

178쪽.

    그러니 사유리도 아름답다. 사유리도 멋진 남자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사유리도 정말 굉장한 사람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이 소설의 배경은 겨울인데, 책의 표지색도 그렇고 읽는 내내 여름을 떠올리게 된다. 여름의 강한 햇빛, 열기. 여름의 그것들이 연상되는 소설이다. 아,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 한 군데 더 있다. 나도 사유리처럼 밤의 버스를 좋아한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이번에 나온 김동률 콘서트 실황 중에서 '걱정'을 듣고 있었는데, 그 곡과 그 페이지의 분위기가 너무 잘 어울려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책을 읽으며 함께 한 번 들어보시기를. 126쪽에 있고, 소제목은 '밤의 버스를 좋아한다'이다.

    소심하고 조용한 사유미는 이 날 처음으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건다. 바로 '너의 색을 뭐하고 생각하니?'라고 묻는, 옥상으로 사유미를 데리고 올라가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알게 해 준 바로 그 남자에게. 그리고 밤의 버스는 7월 24일 거리를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간다. 김동률의 '걱정'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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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같은 신화
황경신 지음/아트북스



    5월 7일 목요일 저녁 7시 반에 나는 황경신 앞에 앉아 있었다. 그곳은 이리카페였고. 황경신은 크게 갈 지자를 그리며 걸어가면 세 걸음이면 닿을 만한 거리에 앉아 내게 신화 이야기를 들려줬다. 예쁘고, 슬프고, 아름다운 그림들도 보여줬다. 나는 황경신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 발랄해서 (옷차림도 발랄했다) 놀랬고, 우리 만남의 초반부가 생각보다 지루해서 놀랬고, 어느새 내가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푹 빠져 있는 것에 놀랬고, 살까말까 망설였던 책을 결국 사게 만들었던 그림 같은 신화 이야기에 놀랬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행복했다. 이 책은 12명의 신화 속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황경신이 그 인물들에 엮인 이야기들을 조근조근 들려주고, 그 신화 이야기를 그린 화가의 작품도 보여준다. 공부하기 위한 신화 이야기,라기 보다는 느끼기 위한 신화 이야기,라고 할까. 목요일의 만남의 마지막에 황경신이 한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이 책과 잘 어울린다. 자신의 책으로 인해서 신화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속 어느 인물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져서 다시 어떤 책을 뒤적거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아니면 어떤 화가의 작품이 좋아서 그의 작품들을 더 찾아보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자신은 만족한다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녀의 꽤 괜찮은 독자다. 나는 표지 그림을 그리기도 한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라는 화가의 작품을 더 많이 알고 싶어졌고, 언제나 사랑에 빠져 있어야 하는 새벽의 신, 에오스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으니까.


    이 책을 읽는 동안 여섯 개의 하늘색 포스트잇을 붙였다. 첫 번째 포스트 잇. 이 부분을 읽을 때의 상황은 확실히 기억한다. 지하철 안이었고, 5월 8일의 아침이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읽고 그 맑은 아침에 눈물이 고였었다. 아마도 그 부분에 딱 맞는 음악까지 듣고 있었으면, 그 맑은 아침부터 나는 울었을 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 사랑하게 될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에로스는 알고 있다. 이 부분. 신화의 거의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도 사랑이야기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를 이용하고 배신했다. 하지만 배신 당한 줄도 몰랐던 아리아드네. 저 글에서 언급된 워터하우스의 그림에는 평온한 표정의 아리아드네와 그 순간 그녀를 떠나가는 남자의 배가 저 멀리 보인다. 아니다, 다시 보니 그녀의 표정도 평온해보이지 만은 않구나. 혹시 그녀는 그 순간, 그가 그녀를 떠나버리는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사랑의 시작은 찬란하나, 사랑의 끝은 언제나 어느 한 사람이 지독하게 아픈 운명이므로, 슬프고, 아리고, 시리다.   

    두 번째 포스트 잇. 이런 에로스의 화살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너와 내가 만나게 된 것이 둘도 없는 운명,이라 믿는 사람들의 코 앞에 대고 사랑에 대해 스물 네살 이후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내가 들려주고 싶은 구절.

    세 번째 포스트 잇.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는 사랑했고, 그래서 결혼을 했다. 신혼의 단꿈에 빠진 것도 잠시, 들판에서 길을 걷다 뱀에서 물린 에우리디케는 죽고,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지하세계로 향한다. 오르페우스가 연주하는 리라 소리는 지하세계를 감동시켰고, 결국 그는 그녀를 지상으로 데려온다. 하지만 결국 지상으로 완전히 나가기 전까지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명을 어기는 순간, 그에게서 그녀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이별의 순간은 언제나 그러하다. 한 사람이 먼저 연기처럼 사라지고, 한 사람의 마음만이 온전히 남는 법. 오르페우스는 연기처럼 사라진 그녀를 더욱 사랑했고, 하늘이 이에 감동하여 어쩌고 저쩌고. 해피엔딩이니깐. 더 말하고 싶지 않다. 난 어쩌면 비극을 사랑하는 사람인가봐.

   이제 네 번째 포스트 잇. 

    메두사는 괴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척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겉모습에만 눈독을 들인 남자는 그녀를 범했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겉모습만을 질투한 또 다른 여자는 그녀의 미모가 자신보다 빛나지 않도록 마법을 걸었고, 아주 먼 곳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어느 날,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고 있던 그녀에게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는 남자가 찾아와 눈을 감고, 그녀의 아름다운 눈조차 바라보지 않고 그녀를 죽였다. 그리고 그는 영웅이 되었다. 메두사는 괴물이 아니었다. 그녀를 사랑하고, 질투하고, 죽였던 사람에게만 그녀는 괴물이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여섯 번째 포스트 잇. 두 포스트 잇은 메아리에 대한 이야기다. 에코라도 불리는 수다쟁이 님프에 관한 이야기다. 에코는 헤라로부터 '다른 사람이 한 말의 마지막 말만 되풀이해야 하는' 벌을 받았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아이였으므로, 질투의 여신 헤라는 바람피는 제우스의 행방을 알려주는 대신 지가 하고 싶은 말만을 끝없이 늘어놓아 결국 제우스의 현장을 덮치는 것에 실패한 분풀이를 에코에게 한 것이다. 역시 헤라는 현명한 여자가 아니야. 그리하여 에코는 남이 한 마지막 말만 되풀이 하는 벌을 받은 것이다. 그녀는 나르키소스를 사랑했고,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달콤한 사랑의 말로써 나르키소스에게 전할 수 없었기에, 어느 날 연기처럼 사라졌다. 자신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열기로 인해 팔이 녹고, 다리가 놓고, 머리카락이 녹고, 두 눈까지 녹아버렸다. 그리고 남은 단 하나. 에코에겐 목소리뿐이었다. 

   정확히 다섯 번째 포스트 잇이 붙여져 있는 곳. 에코가 말한다 "우리가 그를 사랑했듯이, 그 역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해주세요. 하지만 그 사랑을 이룰 수 없게 해주세요. 그가 사랑의 아픔을 알도록 해주세요." 전할 수 없는 사랑을 간직한 이는 이렇게 집착한다. 그런 사랑을 해 본 사람만이 에코의 진심을 알 수 있다. 나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신 그러진 않을 거다. 응.

   여섯 번째 포스트 잇. 마지막이다. 에코도 마지막이란다. 

    사실, 내가 이 책에 반한 건 여섯 개의 포스트 잇이 붙여진 구절이기 보다는, 처음에 있는 황경신의 프롤로그였다. 제목은 '안녕하세요?'이다. 프롤로그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 난 신화를 읽어야겠어.' 어느 가을, 길을 걷는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봄이었을지도 모른다. 거리에는 투명하고 건조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 조금 외로웠던 것 같다. 단지 심심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네 번째 문단에 이런 문장들이 적혀져 있다. "신화를 읽고 났더니 겨울이 되어 있었다. 여름이었는지도 모른다. 신화를 읽은 후의 나는 신화를 읽기 전의 나와비슷했다. 나의 생활도 그랬다. 나는 늘 그랬듯이 밥을 지어먹고 사람을 만나고 또 다른 책을 읽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에 귀를 기울이고 밤이면 오래된 토끼 인형과 함께 꿈 많은 잠을 잤다." 그리고 신화를 읽은 후, 아주 작은 무언가가 바뀌었구나, 느끼는 그녀. 여덟 번째 문단과 아홉 번째 문단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 살아 있구나,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에 연결되어.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밥을 지어먹고 사람을 만나고 또 다른 책을 읽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에 귀를 기울이고 밤이면 토끼 인형과 함께 꿈이 많은 잠을 잤다. 토끼 인형은 아주 오래되었지만 우리가 함께 꿈은 매일 달랐다. (...) 나는 가끔 울었고 자주 웃었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문장들이 꽤 많아 이런 생각을 했다. 5월 7일 수요일 7시 반의 이리카페에서 곧 내가 좋아하게 될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그림을 배경으로 그 문장들을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음악에 맞춰 황경신이 읽어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 그러면 난 그 시간을 한껏 더 사랑했을 거다. 그녀에게 언젠가 편지를 쓰게 된다면 말해줘야지. 다음번에는 그런 만남을 기대한다고. 아, 그 날 그녀는 책의 앞 날개에 있는 작가 사진과 똑같은 옷을 입고 우리를 만나러 와주었다. 앞 날개의 사진에는 그녀의 얼굴이 안 보이지만, 난 그 날 앞 날개의 옷 위 밝고, 생각보다 활달한 그녀의 얼굴을 두 시간동안 마주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녀는 내 이름 밑에 연필로 사각사각거리며, '가장 아름다운 신화는 살아 있는 우리라고'라고 써 주었다. 연필인가요?, 라고 내가 물었고, 그녀는 생각보다 활달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연필을 좋아해요,라고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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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
하성란.권여선.윤성희.편혜영.김애란 외 지음/강

    이 소설집에는 모두 9편의 소설이 들어 있다. 이혜경, 하성란, 권여선, 김숨, 강경숙, 이신조, 윤성희, 편혜영, 김애란의 소설이다. 모두 서울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다. 서울에 머물고 있거나, 서울에 입성하려 하는. 각 소설의 앞에는 작가의 작은 사진과 함께 서울이란 공간에 대한, 서울이란 공간에 대해 쓴 이 소설에 대한 짧은 '작가의 말'이 있는데.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강이 없었더라면 당신과 나는 어떻게 만났을까', '나는 자주 서울에 간다. 영화를 보러 서울에 가고, 술을 마시러 서울에 가고, 어슬렁거리기 위해 서울에 가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서울에 간다', '올해로 서울에 산 지 십 년이 됐다. 그사이 다섯 번의 이사를 다녔다'와 같은 글들이다. 그들을 흉내되어 나도 한토막. 
 
   올해로 서울에 산 지 십 년이 됐다. 이건 김애란과 내가 같구나. 그 사이 세 번의 이사를 다녔다. 처음 서울에 와서 나는 반지하의 하숙방에서 살았다. 아직도 기억 나는 건, 그 겨울 룸메이트 없이 혼자 그 방에서 겨울을 났고, 나는 언제나처럼 가난했지만 내겐 하얀색 오래된 어학전문용 라디오가 있었다. 나는 겨울방학동안 서울에 있는 내내 그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그 라디오를 들으며 가끔 걸레질을 할 때면 뭔가 충만한 기분이 들곤 했다. 외로웠지만, 외롭지 않았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맞는 겨울이었다. 친구는 서울의 겨울은 끔찍하게 추워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라고 그 겨울 내게 말했다.

   두 번째 이사는 같은 하숙집 2층의 방으로였다. 친구와 나는 그 때 함께 살았다. 우리는 거의 매일 밤 술을 마셨고, 그 술병을 내다 버리지 않고 커다란 창문 뒤 쇠창 앞 공간에 차곡차곡 쌓아뒀었다. 둘이 아니라, 셋이 마실 때도 있었고, 넷이 마실 때도 있었다. 그런 밤이면 창가의 병 수가 더 늘어났다. 우리는 낮에 바깥에서 그 창문의 반짝거리는 술병들을 올려다보며 뿌듯해 했었다. 하숙집 할머니가 그 병들을 당장 치우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세 번째는 같은 동네의 작고 깔끔한 하숙집이었다. 그 곳에 친구들이 살았다. 다른 층, 다른 방에서. 그 하숙집에 살 동안 나는 실연을 당했고, 친구도 실연을 당했다. 집 앞 포장마차에 자주 들러서 여름비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술을 마셨고, 처갓집 통닭집 아저씨는 둘이 오면 닭 반마리도 흔쾌히 튀겨 주셨다. 곧 동생이 올라왔고, 티비랑 앉은뱅이 책상, 작은 수압공간을 빼고 둘이 누으면 꽉 차는 그 방에서 몇 년을 살았다. 그 집에서는 빨래를 넣어놓으면 옷이 없어졌고, 신발장의 구두가 없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가끔있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둘이서 그 좁은 방에서 어떻게 살았나 싶지만, 그 시절 나름대로 따뜻했고 행복했다. 친구들이 아침이며 밤이며 같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의 집이다. 처음으로 가지게 된 자취집. 세 자매가 함께 살고 있다. 오래되고 낡은 주택의 2층이지만, 나는 이 집이, 이 동네가 좋다. 햇볕도 잘 들어오고, 외지지 않고, 재래시장도 가까이 있고, 마트도 가까이 있고, 술집도 많고, 공원도 있고, 조금만 걸으면 중랑천이다. 걸어서 30분 거리에 약수터도 있고, 자그마한 산도 있다. 이 동네에서 산 지가 벌써 몇 년이지? 나는 그동안 이 동네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어느 집 맥주가 맛있고, 어느 집 채소가 싱싱하고, 어느 집이 친절하고, 어느 길이 빠른지. 어느 길이 한적하고, 어느 길이 아름다운지, 어느 길의 바람이 시원한지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이 동네를 산책할 때 행복하다. 그렇게 서울에서 산 지 십 년이 되어간다. 나는 그 십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많은 커피와 술을 마셨다. 어떤 사랑도 경험했고, 어떤 이별도 치뤘다. 행복했고, 부끄러웠으며, 아팠고, 비로소 편안해졌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서울에서 걸어온 길들을 생각했다. 내가 살았던 동네들도. 아빠는 아직도 총각시절 잠시 살았던 서울의 어느 곳의 이야기를 곧잘 하신다. 그 곳에서 먹었던 자장면, 그 곳의 사람들. 명절 때마다 삼촌은 자신이 발을 디뎠던 서울의 그 곳이 잘 있느냐고 물으신다. 그 우리들의 서울이, 소설이 되어 이 팬시한 표지의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북촌, 남산, 재개발 구역, 강이 보이는 오피스텔 등등. 내가 걸었던, 혹은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창 밖으로 보았던 곳의 풍경들이 책 속에 담겨 있다. 그 풍경들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마지막 장을 덮고서도 기억에 남았던 소설은 권여선과 윤성희, 편혜영의 소설. 권여선의 소설을 읽으면서는 왠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누군가 마음 한 구석이 쿡쿡 찔리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묘하게, 아주 얄밉게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이) 줄다리기를 하는 사람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윤성희의 소설은 위독하신 친구 할머니를 위해 옛날 학창시절 때 흔적을 찾아 캠코더로 이런 저런 영상을 찍는 중년들의 이야기다. 지하철에서 키득키득 웃다가 마지막에 숙연해졌다. 꼭 서울이 아니더라도, 중년이 된다는 거, 나이가 들어 먹고 산다는 거, 그런 친구들을 바라본다는 거, 그건 가슴 한 구석이 뜨끈해지는 일 같다. 새벽두시 삼십칠분에 육만사 천원을 계산하는 일과 같은. 편혜영의 소설은 또렷하게 이미지가 남는 작품. 서울이 코 앞인 도로 위에서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고, 마침내 칠흑같이 깜깜해졌을 때 찾아오는 공포. 서늘함. 두려움. 희망으로 가득찼던 낮의 활기찬 기운이 저녁이 되면 서늘해질 때. 그 모습의 이미지. 

   소설을 읽고 5월에는 경복궁에 가야지, 생각했다. 북촌에도 가야지, 생각했다. 어린이 대공원에도 가야지, 생각했다. 봄의 서울은 활기차다. 지난 목요일에는 시청 잔디밭에 앉아 징거버거랑 커다란 캔맥주를 마셨다. 금요일에는 친구 집에 가는데 늘 가던 2호선 시청 방향이 아닌, 2호선 잠실 방향의 전철을 탔다. 낮이었고 햇살이 밝았다. 자리도 있었다. 그 가운데서 책을 읽었다. 음악도 들었다. 그 길이 따스했다. 지난 주에는 누군가 내게 물었다. 좋은 일 없을까요? 나는 없어요, 라고 단번에 말해버리곤, 아, 라고 말을 이었다. 남산에 걸어 올라가서 캔맥주를 마시면 좋아요. 그 사람이 그랬다. 그건 좋겠네요. 또 있어요. 뚝섬에서 돗자리 깔고 맥주를 마셔도 좋아요. 그리고 내가 말했다. 그런 것들 뿐이예요. 그 사람이 말했다. 그 말 좋네요. 그런 것들 뿐이예요, 라는 말. 남산도, 한강도, 서울에서 가능한 일. 서울이 징글징글할 때도 있지만, 이런 일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런 두서없는 글을 이렇게 길게도 쓰고 있구나.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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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달게 늦잠을 잤고, 꿈도 꿨다. 한옥집으로 이사하는 꿈이었는데, 그 한옥집이 근사했다. 국민학교 친구들도 만났다. 그 한옥집은 지금 사는 곳보다 꽤 먼 곳에 있었고, 친구들은 먼저 떠나는 바람에 나는 지리로 모르는 그 곳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면서 서성거렸지만, 깨어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뭐 괜찮았던 꿈이었던 것 같다. 꿈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이야기를 해버리거나, 어딘가에 끄적이고 나면 이상해 보이는 이야기니까. 고 느낌이 중요한 거니까. 괜찮은 꿈이었다. 최근에 내 주위에 꿈을 꾸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그 중 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해줬다. 꿈을 꾸면 좀 더 즐거울텐데요. 꿈을 꾸면 꿈꿀 수 있으니까. 내 생각은 그렇다.

    지난 책과 영화 이야기들. 그냥 보고 흘려버린 것들이 많아서, 간단하게 남겨두려고. 일요일 밤이고 하고. 반짝이 옷을 입고 찰랑거리는 파마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김연아가 이쁘기도 하고. 내일은 월요일이기도 하고. ㅠ 그래도 다음주는 4일이기도 하고.


숏컷
레이몬드 카버 지음, 안종설 옮김/집사재

4월 초의 일. 갑자기 카버의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조금 쓸쓸한 이야기들이 읽고 싶어졌다. 읽고 난 뒤에는 센 술 한 잔을 단숨에 들이킨 것처럼 몸 속 어느 구석이 따스해지는. 그래서 책장에서 아직 다 읽지 못한 카버의 책 중에서 골라냈다. 난 분명히 이 책을 읽다 말았었는데, 그래서 앞 부분의 단편들의 내용들만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신기했다. 다 읽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지난 번에도 이런 기분으로 이 책을 끝까지 읽었다는 걸. 소설을 읽는 내내 알코올 중독 소설가 카버가 따라주는 독한 술을 한 잔, 두 잔 받아마셔서 그런가. 또 몇 년 뒤에 이 책을 읽다 만 것마냥 집어들게 될까. 신기하게도 읽은 지 한 달이 지나지도 않은 지금. 책의 앞 부분 주인공들밖에 기억이 안 난다. 그 내용들만 또렷하게 기억나는 거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작품들에 대해 코멘트한 내용들도 고 앞 부분만 또렷하다. 신기한 일이지.



3월의 일. 원작소설보다 극적인 면을 '헐리웃스럽게' 부각시킨 영화. 뭐. 나는 재밌었다. 나중에 'W'에서 이 영화에 나온 아역배우들의 실생활을 취재해 보여줬는데, 그 때 좀 그랬다. 영화가 허상인 줄은 진작에 알았지만. 씁쓸했다.


3월의 일. 이 영화에선 브래드 피트랑 프랜시스 맥도먼드만 생각났다. 세상에 존 말코비치도 생각 안 난다니까. 둘의 콤비가 어찌나 웃기던지. 브래드 피트는 이 영화에서 귀여워 죽겠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또 펼쳐놓아주시니. 그런데 또 끝나고 보면 이게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지. 아, 자꾸 브래드 피트가 귀에 이어폰 꼽고 웨이브 추던 장면이 생각난다. 귀여워, 귀여워!


화차
미야베 미유키 지음, 박영난 옮김/시아출판사

친절한 J씨는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 갔지만 없었다,는 글을 보고 이 책을 가져다 주었다. 게다가 나더러 이 책을 가져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아, 친절한 J씨.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나는 미야베 미유키에 푹 빠졌다. 흠. 그리고 그 관심이 고스란히 일본 추리소설에 옮겨갔다. <화차>는 슬프고도 따스한 소설이었다. 꽤 오래전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소설인데, 지금의 우리 사회에 대입해봐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설정이다. 결국 개인의 파산은 개인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책임이 크다는 이야기. 책장을 펼치면 단숨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가서 읽는 재미가 있다. 지하철에서 잠깐 읽었는데 새끼 손가락 손톱 길이만큼 읽어버릴 정도. 이 책은 정말 강추다. 엔딩이 인상적이다. 이야기는 끝났는데도, 현실에서 이 이야기가 계속되는 것같은 느낌이 드는 엔딩이다. 예전에 신경숙이 말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서울 땅, 한국 땅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 같다고 말한. 그러니까 힘을 내어서,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씩씩하고, 행복하게 살아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딱 고 느낌. '좋은' 소설이다.


쓸쓸한 사냥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북스피어

그리하여 시작된 나의 미야베 여사를 향한 팬심. 도서관에 가서 골라온 책이다. 원래 친절한 J씨가 골라준 세 가지 책이 있었는데, 도서관에 그 책들이 다 없어서, 이 책으로. 단편집인데, <화차>만 못하지만, 재밌다. 헌책방 주인 할아버지와 그의 손자가 등장하는 연작단편집이다. 역시 따스하고, 재밌다. 할아버지 손자 콤비 덕분에. 마지막 단편 '쓸쓸한 사냥꾼' 실종된 미스터리 작가의 미완성 소설을 누군가 현실에서 재현하겠다는 메시지가 오면서 시작된다. 예상대로 미완의 소설 내용은 연쇄 살인 사건. 이 단편이 <모방범>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방범>을 찾아 도서관에 갔지만, 역시 인기있는 미야베 여사의 책은 대출 중이시다. 대신 <이유>를 빌려왔다. 아, 여름까지는 미야베 여사에 빠질 수 있을 듯하다. 게다가 아는 동생에게서 <백야행>이 굉장히 재밌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미야베 여사 소설 읽다 슬쩍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로 빠져보아야지. 근데 정말 침대 위에서 그 자세 그대로 저녁에서 새벽까지 <백야행> 읽은 거야? 그 정도로 재밌었던 거야?


3월의 일. 시사회로 본 영화. 그냥 예쁜 영화 본다는 생각으로 갔다. 아무 생각없이 보면 좋은 영화. 앤 해세웨이가 예쁘게 나온다. 케이블에서 마주치면 딱 좋을 영화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빔 벤더스

4월의 일.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극장에서 보면서 이 영화를 집에서 음 봤던 때가 떠올랐다. 여름이었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니다, 시원한 여름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는 말끔하게 샤워를 마치고창문을 활짝 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이 영화를 봤다. 어떤 노래는 너무 슬퍼 눈물이 절로 났다. 극장에서는 내가 못 본 부분들이 마지막에 이어 나왔다. 카네기 홀에서 공연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그리고 왠지 모르게 제천에서의 밤이 생각났다. 언니와 함께 묶었던 모텔, 아름다웠던 선율의 사노바, 밤까지 이어졌던 후끈했던 더위, 그리고 부채질을 하며 봤던 호수가의 영화, 샤워하고 걸어가서 본 3편의 심야 영화. 결국 3편 다 못 봤지만. 그 날이 그리웠다.



4월의 일. 이 영화는 감독 때문에 본 영화였는데. 그리고 그 날은 좀 가볍고 즐거운 영화가 보고 싶었기에. 망했지. 뭐. 보다가 간만에 극장에서 잤다.



4월의 일.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보고 잔뜩 기대했다가 (난 숫자에 관련된 영화면 일단 좋다!), 쓰레기같은 영화라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별 기대없이 본 영화. 재밌었다. 제일 인상깊었던 장면은 마지막 장면. 이걸 말하면 스포일러가 될 거니깐. 도미노마냥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이란. 영화는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안 들었던 여자 캐릭터. 왜 맨날 그런 고집쟁이 보조적인 여자 캐릭터의 몫이란 말인가.      



4월의 일. 이 제목 짓는 센스하고는. 원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제목을 요딴 식으로 바꾼거야. 쯧쯧쯧. 일단 아름다운 풍광. 아름다운 배우들. 페넬로페 크루즈의 표독스런 연기. 스칼렛 요한슨의 나들이 옷은 정말 눈부셨다는. 비키 역의 레베카 홀에게도 반했다. 그리고 감미로운 음악들. 바르셀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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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리더>를 본 건 3월의 일이다. 김연수의 <더 리더>에 관한 칼럼은 읽은 건 4월의 일. 시간이 빨리가고 있다. 그동안 영화잡지를 꾸준히 사(얻어) 보면서 <더 리더>에 관한 글을 많이 읽었다. 좋다는 글도 있었고, 좋지 않다는 글도 있었다. 어떤 부분은 거듭 읽으면서 맞아, 맞아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부분은 말도 안돼,라며 혼자서 열을 내며 흥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주에 읽은 김연수의 <더 리더> 칼럼. 첫 줄 '본디 이 칼럼이 고향친구를 떠올리며 영화에 대해 떠들어댄다는 취지로 마련됐다는 걸 알지만, 오늘만큼은 그 정다운 얼굴이 좀 빠져주셨으면 한다.'로 시작해 마지막 줄 '<센스, 센서빌리티>부터 볼 테니까 아예 칼럼제목을 '나의 친구 그녀의 영화'로 하면 안될까?'를 읽는 동안 내가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을까. 

   같이 영화를 봤던 H씨는 (내게 거의 매주 영화잡지를 '그냥' 주는 고마운 사람) 이번 주 씨네21을 지난 토요일에 사서, 김연수 칼럼을 읽고나서 (H씨는 거의 이 칼럼과 Must See 기사만 읽는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주 사서, 깨끗하게 보고 나 보라고 준다) 문자를 보냈다. 이번 칼럼은 내가 정말 좋아할 것 같다고. 친구 이야긴 안 하고 책과 윈슬렛 이야기만 한다고. 응. 정말 그랬다. 좋았다. 이런 칼럼. 꼭 내 마음을 적어놓은 것 같은 기분. 정말 나도 영화를 볼 때 이런 느낌이었다. 이미 책은 읽었고, 그녀의 비밀을 알아버린 상태였다. 책을 읽을 땐 미하엘의 감정에 팔십프로 이상 이입되었고, 영화를 볼 땐 그 반대였다. 한나. 영화는 한나의 이야기다. 거기선 한나의 행동, 눈동자, 표정만 따라가게 된다. 책을 읽고 난 후라 더더욱. 나도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그걸 순전히 한나 때문이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미하엘이 얼마나 외로운 사람인지를 생각하며 마음 아팠는데, 영화에서는 한나가 그런 사람이었다. (결국 두 사람 다 외로운 사람이다) 강해보이지만, 평생동안 철저하게 혼자였던 사람. 교도소 안에서 이제는 늙어버린 꼬마를 만났을 때 그녀의 표정을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그녀가 고독했고, 고독하고, 고독할 거란 걸.

    내가 산 책에는 케이트 윈슬렛이 표지에 있다. 그녀는 목욕 중이다. 역시 고독한 얼굴을 하고서 욕조 안에 앉아 있다. 얼핏 보면 미소 짓고 있는 듯도 하지만, 확실히 이건 고독한 표정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뒷 표지에 미하엘이 있을 줄 알았다. 표지의 케이트 윈슬렛의 시선을 쭉 따라가서 뒷 표지에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는 남자, 미하엘이 있을 것만 같았다. 욕조 안에서 함께 목욕을 하고, 책을 읽고, 사랑을 나눴던 미하엘이.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난 뒤엔 그 곳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겠더라. 뒷표지를 넘겨봐도, 뒷 표지의 책 날개까지 따라가도 거기엔 아무도 없다. 이 욕조 안에는, 이 어둠 안에는 온전히 한나, 케이트 윈슬렛 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든 생각은 역시 케이트 윈슬렛의 팬이 되길 잘했다는 것. 그녀는 이 영화 안에서 진정 '아름답다'. 김연수의 표현대로 그녀의 답장을 받는다면 기꺼이, 아주 기쁜 마음으로 김중혁의 칼럼은 포기할 수 있다. (미안요) 그리고 체홉의 <강아지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읽어봐야 되겠다는 생각. 누군가 내게도 책을 읽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어른이 된 꼬마, 랄프 파인즈의 목소리를 듣는 케이트 윈슬렛의 표정이 어찌나 행복해보이던지. 꾹꾹 눌러 쓴 꼬마같은 손 글씨에 눈물이 막 쏟아졌다. 그리고, 그리고 언젠가 이 소설을 다시 읽어야지. 

   아. 나의 경우는 그런 단점이 있었다. 내가 책을 읽은 시기는 케이트 윈슬렛이 아카데미에서 이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뒤였다. 랄프 파인즈가 출연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 상태였고. (꼬마 미하엘 역의 배우는 이름을 들어도 잘 몰랐으니까) 그러니깐 영화 뿐만이 아니라, 내 안에서도 캐스팅이 완료된 거다. 그래서 소설 속 인물들의 외형들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첫 장을 펼치기 전부터 내 머릿 속엔 온전한 케이트 윈슬렛과 랄프 파인즈이 연기할 준비를 하고 몸을 풀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하면 랄프 파인즈가 문장을 따라 행동했다. 케이트 윈슬렛은 내가 아는 그녀의 목소리 그대로 미하엘에게 말했다. 책을 읽어달라고. 그 전에, 영화 캐스팅 소식을 알기 전에 읽었으면 더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 봤다. 어쨌든 영화도, 소설도 둘 다 좋았다. 아, 하나만 먼저 본 상태라면 나머지 하나도 늦기 전에 보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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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어요)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두 번 봤다. 한 번은 왕십리 CGV에서, 한 번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아트하우스 모모는 처음 가봤는데, 그 곳의 분위기에 반해버렸다. 근데 좌석이 좀 불편하긴 했다. 앞뒤 좌석의 간격이 좁고, 앞자리에서 보면 목 아프겠다는 느낌이. 아무튼.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본 건, 예매권이 생겨서 한 번 더 본 거였는데, 보길 잘했다 싶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말이다. 두 번째 보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다. 이건 정말 특이한 경험이었는데, 두 번째로 볼 때 그 마지막 장면에서의 해석이 달라지면서 뭔가 가슴이 벅차왔다. 다시 시작할 수 있겠구나, 희망을 가져도 되겠구나,는 생각이 드는 거다. 윈슬렛 언니는 실패했지만, 우리는 꽤 괜찮게 살아갈 수 있겠구나,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 날 오후 내게 '다괜찮아질까요?'라고 문자를 보낸 그이에게 '괜찮아질거예요,분명히'라고 답했다. 괜찮아질 거예요. 정말.

    두 번째 영화를 본 건 소설을 읽고 난 뒤였다. 나는 이 소설을 한 달 가까이 들고 다녔다. 요즘 책이 잘 안 읽히고 있는 탓이기도 하지만, 진도가 쉽게 나가는 종류의 소설도 아니였다. 분량의 반 정도가 지나면서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지막 장면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영화를 봤을 때 나는 케이트 윈슬렛, 에이프릴이 마지막에 행한 그 행위가 거의 자살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파리의 꿈이 날아갔다. 이제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일상이 계속 될 거고. 허무하고 희망이 없는 미래가 펼쳐질 거다. 무언가를 절실히 꿈꾸는 날도 없을 거다. 이건 그녀에게 절망적이다. 살아갈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에이프릴이 술집에서 셰프에게 한 말, 굳이 파리로 가고 싶었던 건 아니였어요. 이제 떠날 수도, 머무를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 날' 완벽한 아침식사는 마치 집 나가는 엄마가 그 사실을 애써 숨기며 차려주는 마지막 만찬처럼 서글프기만 했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영화는 소설을 거의 그대로 따랐다. 소설의 압축본이라 해도 되겠다. 영화를 본 뒤, 소설을 읽으면 영화에서 보여지지 않았던 디테일한 묘사들을 읽을 수 있다. 그 중, 가장 마음에 남았던 부분은 243페이지. 이 부분은 에이프릴도 프랭크도 아닌 기빙스 부인에 대한 묘사다. 기빙스 부인, 헬렌이 에이프릴에게 정신병원에 있는 아들을 한 번 만나봐달라고 부탁을 하고 돌아온 뒤, 남편에게 그 일을 이야기하다 잠시 옷을 갈아입는다고 2층으로 올라와서 그녀가 느끼는 감정. 

 
   그 날 기빙스 부인은 에이프릴에게 기빙스 부부의 아들 존을 기꺼이 만나겠다는 말도 듣고, 훨러 부부가 곧 유럽으로 떠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예정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2층에 올라와 옷을 갈아 입기 시작할 때만 해도 그녀의 마음은 안정적이었다. 오히려 조금 흥분되어 있는 상태였다. '시설이 좋은 집에 사는 날렵하고 유연하 소녀'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와서 차를 대접하는 오후의 무도회에 가려고 분주하고 드레스로 갈아 입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벗어놓은 옷과 자신의 벗은 몸을 보니 거기에 '두 마리의 두꺼비'같은 발이 있었다.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울지 않으려 애썼지만, 5분 후 그녀는 침대 기둥을 잡고 울기 시작한다. 영화에는 기빙스 부인에 대한 이런 묘사가 없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의 밀리의 반응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에도 밀리가 훨러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침실에서 울기 시작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었던가? 예쁜 옷을 차려입고 기품있고 우아하게 앉아  우린 유럽으로 갈 거예요, 파리로. 거기 가서 꿈을 찾을 거예요, 라고 말하던 순간의 밀리의 표정(영화에서의)은 한동안 잊지 못할 거다. 나는 그 순간 밀리의 표정을 백퍼센트,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다시,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이야기. 소설을 보면 마지막 장면에서 에이프릴이 자살을 한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에이프릴은 혹시나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그래서 만약,을 대비해서 프랭크에게 메모까지 남겨 놓았다. "친애하는 프랭크,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제발 당신 자신을 탓하지 마요." 이 메모는 원래 몇 장의 긴 편지였지만, 결국 이 짧은 메모 하나로 남았다. 에이프릴은 '다시' 잘 해보기 위해서, 여기에서의 '제대로' 된 새 삶을 시작해보기 위해서 그 일을 거행한 거다. 혹시나 잘못될 수도 있지만, 여기 머물 수도 떠날 수도 없기에, 그 일을 행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실패해도 어쩔 수 없지만, 그 일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상태였던 거다. 하지만 아무 일 없이 성공하기를 바랬던 일인 거다. 그랬던 거다. 두 번째 영화를 보는 데 그게 보였다. 완벽한 아침 식사에서 에이프릴은 그런 표정을 여러 번 지어보인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이제 정말 나를 미워하지 않는 거지?'라고 묻는 프랭크에게 '그럼요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라고 답한다. 

   소설에는 영화에 없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에이프릴을 잃은 프랭크는 셰프와 밀리 몰래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거기서 에이프릴의 핏자국을 본다. 자신을 끊임없이 자책하고 있었던 그는 에이프릴의 메모를 본다. 그로 인해 나중에 그는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났을 거다. 메모를 보기 전, 프랭크는 에이프릴의 핏자국을 지운다. 순간 에이프릴의 목소리로 환청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세제를 묻혀서 닦아요. (아, 그런데 지금, 이 부분을 찾아보기 위해서 책을 뒤적거렸는데 에이프릴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난 '당신이' 저 타월을 신문지에 둘둘 말아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면 된다고, 그러고는 욕조를 깨끗이 씻어 내리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괜찮죠?' 이 '당신이' 부분에 갑자기 혼란스러워지지만, 이건 프랭크의 환청이니까. 그녀는 분명 '새로' '잘' '다시' 살아보고 싶었다고,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본 영화에서 에이프릴이 그 일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왔을 때 커다란 창 밖을 내려다보며 지었던 평온한 표정은 그걸 의미하는 거라고. 그리고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보여줬던, 에이프릴이 내려다보고 있었던 그 초록의 물결들이 그걸 의미하는 거라고. 그런데 지금 이 글을 끄적거리면서, 또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정말 에이프릴은 어떤 마음이었나? 끝을 생각했나? 새로운 시작을 바랬던 건가? 아무래도 소설을 한 번 더 읽어야 겠다. 아니면, 소설을 읽지 않아도 어느 날 우연히 떠오르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러는 편이 더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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