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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의 내력 - 고독한 주문을 외자
    서재를쌓다 2008. 6. 27. 14:00
    돌의 내력
    오쿠이즈미 히카루 지음, 박태규 옮김/문학동네

      
        나는 이 책을 '돌의 내력'을 담은 장편소설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144페이지에서 뚝 끊겼다. 그래서 큰 챕터가 나눠진 것이라 생각하고 '세눈박이 메기'를 읽었다.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돌의 내력'은 144페이지가 마지막이었다.

       그러니까 <돌의 내력>은 '돌의 내력'과 '세눈박이 메기' 두 중편소설을 담은 책이다. '돌의 내력'을 읽다 가슴이 시릴대로 서늘해진 나는 갑자기 밝아진 분위기의 '세눈박이 메기'를 그냥 덮어버리고 읽지 않으려 했다. 이건 순전히 '돌의 내력'의 서늘함 때문이었다. 그러다 '돌의 내력'을 쓴 작가라는 생각에 끝까지 읽어냈다. 그러다 이 문장을 발견했다. 279페이지. "세계는 그야말로 웅대하고 산뜻했다." 이 짧은 문장을 반복해서 읽었다. "세계는 그야말로 웅대하고 산뜻했다." 세계는 그야말로.

       '세눈박이 메기'는 일본의 민간신앙과 종교의 마찰을 한 평범한 가족 속에서 이야기한다. 내가 반복해서 읽었던 문장의 앞에는 소나기가 한동안 시원하게 쏟아진다. 주인공과 그의 삼촌은 낚시를 하던 중이었고, 그 날은 민간신앙에 따르면 절대 낚시를 해서는 안되는 날이었다. 그들은 같이, 혹은 따로 가문이냐, 신앙이냐를 두고 갈림길에 서 있었다.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무료한 낚시 중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고, 그들은 흠뻑 젖은채 비를 피했다. 구약성서에서 신은 대부분 폭풍우과 함께 나타나,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소나기가 그쳤다. 세상이 10미터쯤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다시 낚시를 시작했고 조그만 메기 한 마리를 낚았다. 처음부터 낚시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 별들과 은하수가 보이기 시작하는 밤하늘 아래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던 그 때, 이 문장이 (내게) 반복되었던 것이다. 세계는 그야말로 웅대하고 산뜻했다. 세계는 그야말로.

       세눈박이 메기의 세계가 그야말로 웅대하고 산뜻하기는 해도 이 책의 압권은 단연 '돌의 내력'이다. '돌의 내력'을 읽다 '세눈박이 메기'가 시시해졌을 정도니까. 강가의 돌 하나에도 우주의 전 과정이 새겨져 있다, 고 시작하는 소설은 마치 우물 안쪽의 서늘한 돌을 만지는 느낌이다. 우연히 들른 마을에 아직도 남아 있는 우물이랄까. 발끝을 있는대로 바짝 들어올리고 허리를 바짝 꺽어 캄캄한 우물 속 서늘한 바람의 기운을 마주하고선 손바닥을 뻗어 서늘한 돌의 감촉과 그 속에 끼여있는 이끼의 눅눅함을 쓰다듬는 느낌. 내 눈 아래 캄캄한 어둠의 끝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이 있고, 그 물 속에 어떤 것이 담겨져 있을지 모르는 상황. 우물에 빠져 죽어 귀신이 되어 이승의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의 실체와 마주할 수도 있고, 지금 이렇게 떨어져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고독하게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안에서 아무런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늙어갈지도 모르는 내 두려움이 깊게 가라앉아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읽은 '돌의 내력'은. 결말이 서늘하고 따뜻하다. 결말이 좋아 마지막 몇 페이지만 두 번을 읽었다. 처음에는 서늘했다. 6월이었는데도 피부 끝으로 한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두번째는 따뜻했다. 나는 내가 처음에 결말을 잘못 읽어냈구나, 생각했다. 이건 직접 읽어봐야 안다. 

      각섬석반려암, 석영섬록암, 구과휘록암, 감람석현무암......
       

       고독할 때,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고 느껴질 때, 내 어떤 과거가 끔찍해질 때 주문을 외우자. 각섬석반려암, 석영섬록암, 구과휘록암, 감람석현무암. 그저 평범한 돌멩이 하나에도 지구라는 한 천체의 역사가 아주 선명하게 새겨져 있으니, 나보다 더 오래 전에 이 세상에서 태어나, 수도 없이 깍이고 깍이고 깍여나갔으니. 이 주문은 분명 효과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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