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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은책 - 읽는 것은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서재를쌓다 2008. 6. 26. 15:26
    검은 책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민음사


       내가 가진 유일한 세계지도, 삼성지능업 세계지도에서 보자면 터키를 대표하는 건 성 소피아 성당이다. 포털 검색창에서 '터키 성 소피아 성당'이라고 치니 성 소피아 성당을 앞에 우뚝 세우고 가지각색의 하늘이 펼쳐진다. 사파이어 빛깔의 파아란 하늘, 금세 쏟아질 것 같은 회색빛 하늘, 노을을 품은 주홍빛 하늘, 야경만 환히 빛나는 까아만 하늘. 성당의 지붕, 돔 위에 하얗게 눈이 내려앉은 사진도 있다. 이 즈음이 <검은책>의 계절일테지. 이 곳에서 쓰여진 책을 읽었다. 언젠가 친구가 꼭 가보고 싶어했지만 결국 계획에서 빼버릴 수밖에 없다고 했던 나라, 터키.
     
       내겐 사람에게도 그렇듯 책에게도 첫인상이 있다. 물론 사람에게도 첫인상을 착각해 나랑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나쁜 사람으로 분류했다가 나랑 닮은 구석은 눈씻고 찾아볼래도 없지만 즐겁게 어울릴 수 있는 좋은 사람으로 재분류되는 경우도 있듯이 (그런 사람은 대개 사귀고 보면 닮은 구석이 꼭 한 군데 이상은 있는 경우긴 하다.) 책도 그렇다.  이건 도저히 내가 읽지 못할 딱딱하고 어렵고 재미없는 나쁜 책으로 분류해 몇 장 채 넘기지도 못하고 덮어버렸다가 시간이 지나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을 때 후다닥 끝까지 단숨에 읽어버리게 되는 딱딱하지만 촉촉하고 어렵지만 깊이 있으며 재미없는 부분과 재미있는 부분이 공존하는 좋은 책으로의 재분류. 노벨상 수상작가라고 하면 일단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어 <눈>인지 <내 이름은 빨강>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도서관에서 꺼내들었다가 다시 금세 꽂아두었던 기억을 뒤로하고 <검은 책>을 읽었다. 정혜윤의 <침대와 책>에 인용된 구절 때문에.  

       쉽지 않았다. 어려웠다. 길고 어지러운 미로같은 만연체의 홍수 속에서 헤매고 또 헤맸다. 출구를 찾아가는 내 앞으로 한 문장 안의 넘치고 넘치는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와 조사가 넘실거렸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발로 헤쳐내야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는데 그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코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도 익숙해지면 어느새 환해지는 것처럼 어느 정도의 미로를 지나니 나는 그것들을 손으로 발로 헤치내지 않고서도 미션 임파서블의 거미줄같은 보안선을 사뿐히 피해가는 주인공처럼 묘기를 부리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어떤 형용사와 명사는 쉽게 지나칠 수 없어 다시 돌아가 가슴팍에 단단히 쑤셔넣고 함께하기도 하면서. 딱딱하고 어렵긴 했지만 재밌고 좋은 책이었다. 내 첫인상이 반쯤은 틀린 셈이다.

       그러다 내게 마법같은 순간이 왔다. 2부를 읽어가고 있던 때. 이 부분이다. 174페이지.

      
       그 때 나는 집 앞 도서관에서 이 책을 읽고 있었는데 저녁시간이었다. 그날은 운 좋게도 늘 내가 호시탐탐 노렸던, 그러나 너무나 안락해 그누구도 쉽게 자리를 떠나지 않았던 창가의 쿠션의자를 차지했던 날이었다. (정말 그 의자에 앉으면 뭐든 잘 읽힐 것만 같았다. 창가의 나무의자들은 죄다 딱딱하기만 해서 허리가 금세 아파왔다.) 과연 그 의자는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안정감 있는 양 옆의 손잡이하며. 허리를 받쳐주는 믿음직스런 쿠션의 감촉하며. 그 창가의 쿠션의자에 허리를 기대고 <검은책>을 읽어나가고 있는 즈음(끊임없이 책은 말하고 있고. 나 자신이 되어야 해!) 창밖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앞 건물의 옥상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이는 환한 여름 저녁밤의 풍경이 점점 어두워졌다. 해가 완전히 지고 도서관 안 형광등을 더욱 빛을 발했다. 그러다 저 구절을 읽다 우연히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는데 그 너머에 지루한 얼굴의 내가 있었다. 믿을직한 쿠션의자에 앉아 <검은책>을 읽고 있는 글자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내가. 아, 나는 그 순간 이 책의 명사며 동사며 형용사며 조사들이 모조리 이해될 것 같았다. 제랄과 갈립도. 뤼야와 보스포루스 해협도. 알라딘 가게와 코낙 극장도. 지금까지 읽었던 이야기도, 앞으로 읽을 결말도 모조리.

       그리고 그 밤. 믿음직한 쿠션의자 위에 앉아 창 속의, 아니 창 바깥의, 아니 거울 속의 나를 보면서 책 속의 갈립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내가 사랑했었던 한 사람을 생각했다. 내가 사랑했던 그의 행동, 그의 표정을 생각했다. 눈과 입은 충만하나 코는 고독했던 얼굴. 그리고 <검은책>. 처음부터 끝까지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눈 앞이 번쩍였다. 뭔가 내 마음 한귀퉁이를 쓸고 나갔다. 역시 나는 나를 끔찍히도 사랑했던 거다. 그건 그의 행동, 표정이 아니라 그것들은 나의 행동, 나의 표정, 나의 마음이었다. 갈립은 점점 제랄이 되어갔지만 그건 제랄의 외투를 걸쳐입은 갈립일 뿐이었다. 갈립은 점점 이 세상의 오직 하나뿐인 깊고 깊은 갈립 자신이 되어갔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나 자신을 알기 위해, 온전한 나 자신이 되기위해 평생을 노력하지만 나 자신이 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기도 하고, 나 자신이 되는 순간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 자신이 된다는 건.

       아, 횡설수설. 나는 이 책을 살아가면서 스무번은 넘게 읽어야 온전한 작가의 뜻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스무번이 넘는 오독을 하면서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이해했노라고 만족할지도 모른다. 그 때마다 창가가 거울이 되는 마법같은 순간들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스무번이 넘는 나를, 스무번이 넘는 모습으로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멀고 먼 성 소피아 성당의 나라 한 쪽 구석, 쓸쓸한 오르한 파묵의 창가에 앉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다보면 언젠가 브라보를 외치며 온전한 나 자신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읽어나가며 제일 위안이 됐던 것은 소설의 형식에 있었다. 제랄의 시詩적인 칼럼이 끝나면, 여전히 나 자신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갈립의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라는. 그리고 갈립의 한 토막 분량의 미로가 끝나면 다시 제랄의 '마치 흐린 날 아침, 꿈에서 깨어나 맞이하게 되는 회색빛의 칼럼'이 시작될 것이라는. 이 두 이야기가 연결된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리며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는 걸. 결국 오르한 파묵의 <검은책>은 2권의 314페이지에서 끝이 났지만 여전히 온전한 내가 되지 못해 헤매고 있는 나의 검은책은 끝도 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정말.  



       덧, 제랄의 칼럼은 모두 좋았는데(갈립의 칼럼이기도 한) 특히 2장의 보스포루스 해협의 이야기(이건 마치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마지막 카메라의 시선을 연상시켰다)와 6장의 마네킹 이야기가 특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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