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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앤드루 포터!
    서재를쌓다 2012. 1. 14. 14:15

        여기는 아득한 청춘의 그림자들이 고요히 스며들던 한 생애의 뒷골목, 저녁이면 녹색의 별들이 뜨는 리스본 7월 24일 거리

        나는 7월 23일의 거리를 걸어 한없이 그대에게로 가고 있었는데 그대는 여전히 7월 24일 거리에서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테지

        우리의 청춘은 늘 시차가 다르던 생의 거리

    - 리스본 7월 24일 거리 중에서


        이번 주 내내 장소들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이야기들이 시작되고, 성장하고, 끝을 맺게 되는 장소들을 찾아 헤맸다. 여전히 찾고 있지만. 어제는 조금 늦게 회사에서 나와 Y씨랑 사람들이 꽉 찬 이천이백번을 타고 합정으로 왔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 아쉬워 산책길을 걸어 떡볶이와 맥주를 먹으러 갔다. 가는 길에 누군가를 본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본 것 같아요. Y씨에게 말하니, 아 K요? 라며 그럼 따라가 보자고 했다. 우리는 조심조심 그의 뒤를 쫓았는데 아무래도 뒤태가 그가 아닌 것 같았다. 그라고 하기엔 너무 살이 쪘다. 그를 못 본지 1년은 넘은 거 같으니 살이 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옆의 여자랑 너무 다정했다. 부인일까요? Y씨가 말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들으니 너무 굵었다. 아무래도 그가 아닌 것 같았다. K가 맞다면 아무래도 패션이 마음에 들지 않네요. Y씨가 말했다.

        오늘 아침에는 Y언니가 보라고 한 장진과 장항준 감독이 나오는 놀러와를 틀어놓고 컵라면을 먹었다. 장항준이 그런다. 내가 장진보다 하루 더 살 거예요. 이번 생에서는 절대 장진을 이길 수가 없을 거 같으니까, 하루 더 살아서 씹을 거예요. 장진을. 장항준은 장진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는 문자를 받을 때 술자리에 함께 있었다고 한다. 술을 마시다 장진이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는데 상기된 얼굴로 들어와서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 장항준은 젠장, 이런 심정이었겠지. 왠지 그 장면이 눈에 그려지는데, 재밌고 슬프고 그렇다. 누군가 또 그랬는데, 장진이 군대 가기 전엔 바보였는데 군대 갔다 오니 천재가 되어서 돌아왔다고. 내가 본 장진 영화들이 모두 좋진 않았지만, 내가 본 장진 연극은 좋았다. 너무 웃겨서 배꼽을 잡고 웃다보면, 어느새 슬퍼지는 그런 연극이었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책상 주변 정리를 하고, 계속 앉아만 있다.



        작년 12월에 이 책을 읽었다. 어떤 글에서 '좋은 소설이지만 주목받지 못한 2011년의 책 베스트 10'을 꼽았는데, 거기에 이 책이 있었다.

    "누구에게든 하나쯤 있기 마련인 '지워지지 않는 어떤 순간'을 회상하고,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그 기억에 아파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들을 편안한 언어로 그려냈다. 작가는 우리 주위에 흔히 있을 법한 친근한 인물들을 통해 상처나 아픔으로 남은 기억이라고 해도 그 역시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소중한 과거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 문득 떠올라 잠을 이룰 수 없게 하는 기억들이 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잊으려고 노력해도 자꾸만 되살아나서 가슴 한구석을 간질이는 삶의 어떤 순간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젊지만 과거의 그런 순간들을 잊지 못하고, 또 그것을 마주 보지도 못하며 살아간다."

       책소개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바로 주문했다. 좋았다. 좋은 소설들이 가득했다. 표제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두 번 읽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다. 두번째 읽을 때는, 순전히 이 장면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로버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콜린이 수련의 생활을 시작하고 2년째, 그러니까 수련의 생활이 끝나가던 해였다. 사실 콜린의 동료를 따라간 저녁 파티 자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 일을 모르고 지날 수도 있었다. 콜린의 동료는 젊었을 적 물리학자였다. 그는 우리에게 로버트가 림프종으로 죽었다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먹고 있을 때 말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나의 표정이 어땠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충격과 슬픔을 숨기지 못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콜린이 잠시 뒤 양해를 구하더니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콜린이 아직도 그날 밤 바에서의 일 - 로버트와 내가 손을 잡고 있던 모습 - 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 안의 침묵 속에서 나는 거리감을, 몇 년에 걸쳐 서서히 우리집의 어둠 속에서, 우리 사이에서 자라고 있던 거리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뜰로 나가 통곡했다. 나는 지금도, 콜린이 내 통곡 소리를 들었는지 알지 못한다." p.126

        이 소설집에서 내가 아끼는 인물들은 누군가를 질투하고, 어떤 감정에 절망하며, 그것을 애써 숨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구멍'의 아버지, '아술'의 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헤더, '폭풍'의 누나. '폭풍'도 내가 아끼는 소설. '폭풍'에서 진짜 폭풍이 지나간 뒤, 저녁을 먹자는 '나'의 말에 누나는 술을 마시자고 한다. 취해보자고. 둘은 폭풍이 물러간 저녁 시원한 테라스에 나가 술을 마신다. 서로 잔을 채워주면서 취할 때까지 마신다. 그리고 행복했던 어린 날들을 추억해 나간다. 누나가 자기 잔에 술을 채우고, 담뱃불을 붙이고 말한다. "내가 그이를 버린 게 아니야. 그이가 나를 버렸어." 이 장면. 내가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된다면, 이 장면 때문이다. 내가 그이를 버린 게 아니야. 그이가 나를 버렸어. 이 대사에 정말 마음이 철커덩했다. 폭풍은 물러갔다. 이제 한동안 평온한 여름날이 계속될 거다. 그리고 가을이, 겨울이, 봄이, 또 여름이 올 거다. 다른 이름을 가진 폭풍이 몰려 올 거다. "더 나쁜 일이야 있겠어?" 고요한 폭풍 뒤, 여름 밤바람이 불어온다. 남매는 테라스에 서로의 몸을 기대고 앉아 있다. '나'는 어린시절 불빛을 생각한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올 때의 불빛. 저 멀리 사랑하는 이가 내게 오고 있다는 불빛.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면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취한 거 같은 기분이 든다.


        몇 년 전, 어떤 면접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인가요? 나는 K라고 말했다. 왜 K를 좋아해요? 나는 그의 소설을 읽으면 위로받고 있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는다고. 그건 K의 소설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가 아닌가요? 그 분이 그렇게 정리해줬다. 이 책은 2011년 나의 베스트에 꼽히는 소설이다. 힘든 때가 올 때마다 이 소설들이, 이 소설 속 인물들이 생각날 거다. 그런데 어제의 그는 K가 아니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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