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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피톤과 서머셋 몸, 그리고 여름
    서재를쌓다 2012. 6. 17. 20:43

     

        이번 주 내내 에피톤 새 앨범을 듣고 있다. 그리고 이번 주 내내 이 소설을 생각했다. 서머셋 몸의 '레드'. 결국 금요일 퇴근길, 교보에 들러 이 책을 샀다. 토요일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이 소설을 읽었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이 세번째인가. 네번째인가. 대학교 때 처음 읽고, 몇 년의 시간을 두고 다시 읽고 있다. 또 몇 년 뒤에 생각이 날 테고, 그러면 나는 네번째인가, 다섯번째로 이 소설을 읽게 되겠지. 내게 몇 년의 시간을 두고 결혼식장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이 있다. 이번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사람 생각을 했다.

     

        나이들고 뚱뚱한 선장이 있다. 선장의 배는 사업차 원주민 마을에 정박하게 된다. 일요일이었다. 선장은 그 마을을 거닐다 야자수를 이어 만든 다리를 건너게 된다. 그 다리 너머 한 백인의 집을 발견한다. 그 집에 닐슨이라는 백인이 있었다. 닐슨은 선장을 집으로 들이고 위스키를 대접한다. 닐슨의 집에는 책이 아주 많았다. 선장은 이 책을 다 읽었냐고 물어본다. 닐슨은 거의 다 읽은 책이라고 말한다. 선장은 말한다. 조금 외로울 것 같군요. 닐슨은 익숙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닐슨은 선장에게 오래된 전설과도 같은 사랑이야기를 들려준다. '레드'라는 이름의 백인과 '샐리'라고 불리던 한 원주민 여자의 이야기. 30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고, 사랑했고, 이곳에서 함께 살았고, 행복했지만 어떤 사건으로 인해 남자가 마을을 떠나게 된다. 그 뒤 남자는 돌아오지 못했고 (혹은 않았고) 여자는 그리움의 정도야 옅어졌겠지만 아직도 그 남자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 뒤에 이어진 이야기는 처음 읽었을 당시에는 아주 충격적이었다. 이십대 초반에 내가 생각했던 '사랑'은 이런 게 아니었거든. 그런데 삼십대가 되고 보니 이 소설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게 우리들의 '사랑'이라는 것도. 그 뒤 서머셋 몸을 좋아하게 된 나는 몇 편의 소설을 더 읽었는데, 그가 이야기하는 사랑은 죄다 이런 종류의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어느새 그들에게 남은 것은 늙은 모습뿐이었다."

       -p.264

     

      

        에피톤의 새 앨범을 들으면서, 예전 노래들도 찾아 듣고 있다. 하루에 다섯번 이상씩 듣고 있는 노래들. 심규선이 부른 '부디'와 에피톤의 '눈을 뜨면'.

     

     

     

     

        내게도 '샐리'처럼 그 정도야 옅어졌지만 오랫동안 그리워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사람을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결혼식장에서 몇 년에 한번씩 만나게 되는 사람은 있지만, 그 아이는 없다. 내가 그때의 내가 아니듯, 그 사람도 그때의 그 아이가 아니다. 그래서 에피톤의 '눈을 뜨면'을 들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눈을 감으면' 그때의 나와 그때의 그 아이가 있다. 지금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그 두 사람이 웃고 있고, 행복해하고 있다. 그때, 참 좋았지 저 두 사람,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저때로 돌아갈 수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늙어버려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때는 참 좋았어, 라고 다시 한번 생각한다.

     

     

        모든 것이 희미한 옛꿈이 되어버린 지금도 나는 그 젊고 아름답고 순수한 두 사람과 그들이 꽃피운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껴요. 마치 가끔씩 구름도 없는 밤에 보름달이 산호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볼 때처럼 내 마음은 찢어지는 것만 같소. 완전한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것은 항상 고통스러운 일이거든요.

      - p.244

     

        "그 레드와 샐리의 슬프고 열렬한 사랑을 이제 와서 돌이켜보며 나는 생각한다오. 사랑의 눈금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두 사람을 영원히 헤어지게 한 잔인한 운명에 대해 그들은 오히려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요. 그들은 고뇌에 찬 삶을 보냈을 거요.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고통이었소. 사랑의 진정한 비극이 뭔지 알지 못한채 헤어졌으니 말이오."

       "무슨 뜻인지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선장이 말했다.

       "사랑의 비극은 결국 죽음도 이별도 아니란 말이오. 그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이 상대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날이 언젠가 오리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을까요? 지난날에는 하루만 만나지 않아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랑했던 여자를 지금은 다시 만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면 그야말로 그보다 무서운 비극은 없소. 사랑에 있어 진짜 비극은 무관심입니다."

    - p.260-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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