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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먼 북소리, 투스카니의 태양, 신사의 품격
    서재를쌓다 2012. 6. 24. 00:08

     

     

       금요일, 홍대의 한적한 커피집에서 이 책을 끝냈다. 저녁이었고 해가 지고 있었다. 일이 끝나지 않은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고,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한참을 가만히 밖을 내다봤다. 이 책은 좋아서, 정말 좋아서 빨리 읽어버리고 싶기도 했고, 아껴 읽고 싶기도 했다. 마음에 드는 구절들이 많아 자주 멈췄다. 책이 두꺼워서 정말 다행이었다.

     

        하루키가 아내와 함께 3년 여동안 유럽에서 지낸 이야기이다. 그는 그리스와 이탈리아 등지에 집을 빌려 그곳에서 단기, 혹은 장기적으로 '생활'했다. 장을 봐 와서 음식을 해 먹기도 하고, (싱싱한 연어를 사와 회로도 먹고, 초밥으로도 만들어 먹고 머리쪽은 국으로 끓여 먹는다는 이야기에서 침이 꿀꺽) 주변의 마음에 드는 레스토랑과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해결하기도 하며 (아주 자주 유럽의 맛있는 포도주를 마셨다!) 그 곳에서 여행을 한 게 아니라, 살았다. 매일 동네 주변을 뛰고, 집에서 소설을 쓰고, 번역을 하고, 에세이를 쓰며 지냈다. 이 책은 그 3년 동안의 기록이다. (<상실의 시대>도 유럽에 있는 동안 쓴 소설이었다.) 하루키는 계속 투덜거린다. 그 곳의 못 말리는 날씨에 대해, 그 곳의 천하태평인 사람들에 대해, 그 곳의 이해할 수 없는 체계에 대해. 그런데 이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그게 행복한 투덜거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아, 이 사람. 이 때 행복했구나, 그렇게 행복하게 이때를 추억하고 있구나, 하고.

     

       오늘은 갑자기 생각이 나서 <투스카니의 태양> DVD를 꺼냈다. 이 영화의 배경도 이탈리아. 영화의 주인공 또한 토스카나를 잠깐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300년도 더 된 오래된 저택을 '운명의 계시를 받은 것마냥' 무언가에 이끌려 구입하고 그 집을 수리해가며 살아간다. 내가 아끼는 영화다. 이 영화에 다이안 레인도 예쁘고, 이탈리아 토스카나도 예쁘다. 정말 이탈리아는 축복받은 땅이라는 걸 이 영화에 나오는 풍경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게 토요일을 보냈다.

     

     

        <먼 북소리>에서 밑줄 그은 구절들. 아주 아주 많다.

     

    ...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어느 한 시기에 달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달성하지 않은 채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그것도 내가 외국으로 나가려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일본에 그대로 있다가는 일상생활에 얽매여서 그냥 속절없이 나이만 먹어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하자면 정말로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지만, 그런 생활은 일본에서는 불가능할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p.15-16

     

       그렇다. 나는 어느 날 문득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여행을 떠날 이유로는 이상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간단하면서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어떤 일도 일반화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먼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목소리는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p.17

     

    .... 어디를 가든 마찬가지야, 하고 그들은 내게 말한다. 아무리 멀리 가도 소용없어, 붕붕붕붕. 어디로 가든 우리는 끝까지 따라갈 거야. 그러니까 당신은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마흔을 맞이하게 될 거야. 그리고 그렇게 나이만 먹어갈 거야. 아무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테고, 그건 날이 가면 갈수록 더 심해질 거야 ...

    p.35

     

    ... 추운 밤에는 난로에 불을 지핀다. 난롯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은 시간은 조용히, 그리고 기분 좋게 지나간다. 전화도 걸려오지 않고 마감 날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눈앞에서 타닥타닥하고 불꽃이 튈 뿐이다. 기분 좋은 침묵이 사방에 가득하다. 포도주를 한 병 비우고 위스키를 한 잔 스트레이트로 마시면 슬슬 잠이 온다. 시계를 보니 이제 10시다. 그대로 포근하게 잠 속으로 빠져든다. 뭔가를 열심히 했던 하루 같기도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하루 같기도 하다.

    p.125

     

       여행지에서 그 동네의 길을 달리는 일은 즐겁다. 주변 풍경을 보며 달리기에는 시속 10킬러미터 전후가 이상적인 속도이다. 자동차는 너무 빨라서 작은 것을 놓치기 쉽고 걷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동네마다 각기 다른 공기가 있고 달릴 때의 기분도 각각 다르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길모퉁이의 모습, 발자국 소리, 보도의 폭, 쓰레기 버리는 습관 등도 모두 다르다. 정말 재미있을 정도로 다르다. 나는 동네의 그런 정경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마라톤을 완주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이렇게 달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도 살아 있고 다른 사람들도 살아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자주 잊어버린 채 살고 있지만.

    p.207-208

     

    ... 그 조깅화는 아무도 잊어주는 사람이 없는 과거의 작은 실수처럼 나를 집요하게 따라다닌다. 할 수 없이 나는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그 종이꾸러미를 받아 든다.

    p.274

     

      누군가가 우리를 그려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향을 멀리 떠나온 서른여덟 살의 작가와 그의 아내. 테이블 위의 맥주, 그저 그런 인생, 그리고 때로는 오후의 양지바른 곳을.

    p.304

     

       내게는 지금도 간혹 먼 북소리가 들린다. 조용한 오후에 귀를 기울이며 그 울림이 귀에서 느껴질 때가 있다. 막무가내로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문득 이렇게도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나 자신이, 그리고 나의 행위 자체가, 말하자면 여행이라는 행위가 아닐까 하고.

       그리고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갈 수 없는 것이다.

    p.502

     

     

     

     

     

       오늘 <신사의 품격>에서 김정란이 다른 거는 필요없고, 자기가 잠들 때까지 토닥토닥 해 달라고 했다. 자기가 바라는 것은 이런 사소한 것들이라고. 팔베개를 해주는 것 (이건 좀 힘들듯), 토닥토닥해주는 것, 아침에 잠든 얼굴을 보이는 것. 그러면서 그랬다. "당신 미워하다 한 계절이 다 갔네." 김하늘은 이제서야 자신이 장동건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장동건의 친구들 앞에서 장동건에게 한 행동은 정말 잘못된 거였지만, 어쩌면 나도 그렇게 행동했을 것만 같다. 김하늘의 행동은 분명 이기적이었지만, 그걸 장동건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나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거 같다. 그런데 장동건은 차가워진 얼굴로 짝사랑의 종결을 선언했다. 그러자 김하늘은 불현듯 깨닫는다. 벚꽃비 내리는 길에서 키스를 하고 돌아와 반신욕을 하며 물방울이 방울방울졌던 그 로맨틱했던 욕실 안에서 김하늘은 엉엉 운다. 내가 그 사람을 많이 좋아하는 거였어. 이제 어떻게 해. 그 장면, 너무 슬퍼서 나도 같이 울 뻔 했다. 이상하다, 이 드라마. 뭔가 무지 사치스럽고 무지 과잉되어 있는데, 이런 감정들은 사치스럽지 않고 과잉되어 있지 않다. 백퍼센트 그대로 공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는 내게 좋은 드라마. 케이블에서 <연애의 목적> 해준다. 이거 보고 자야지. 오늘은 토요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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