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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주말의 일들
    서재를쌓다 2012. 7. 7. 20:01

     

        소설가 김연수는 언젠가 <폭풍의 언덕>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도입부의 목소리에 전율하지 못하고 이십대가 됐다면 그보다 슬픈 일은 없을 것"이라고 썼다. 그는 <폭풍의 언덕>을 "십대시절에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소설", "열병의 소설"로 설명하는 한편 "왜 숱한 대중적 멜로드라마는 고전이 되지 못했는데 <폭풍의 언덕>만은 고전이 되었느냐, 대학 시절부터 나는 이 질문의 해답을 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 문학이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는 생각도 털어놨다.

    - 씨네21 860호, '사랑은 어떻게 끝내 극렬하게 결렬되는가' 중에서

     

     

       지난 토요일, 하루종일 잠을 자다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자 보문역에 있는 친구집에 갔다. 친구는 회사에서 20여 분 거리의 집에 최근 이사를 했다. 집들이였다. 친구는 내 바램대로 하이네켄 생맥주통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소시지를 구워두고, 자두를 씻어뒀다. 나는 이번 여름 한정판 맥스와 튼튼한 맥주잔 두 개와 내가 사랑하는 연어와 파인애플을 가지고 갔다. 아, 와인도 있었는데 이건 결국 개봉도 못했다. 따개도 없었고, 그 밤 우리가 깨달은 건 우리가 생각만큼 술에 강하지 못하다는 것. 집에서 가져간 잠옷으로 갈아입고 친구와 마주보고 앉아 다시 시작된 우리의 서울생활에 건배했다. 어디선가 건배를 자주하면 행복해진다고 했는데. 처음에는 그냥 맥주만 따라 마시다가, 조금 있다 음악을 틀었다. 조금 있다 통닭을 배달시켰고, 조금 있다 노트북으로 <화양연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친구가 잠들고, 내가 잠들었다. 중간에 깨서 친구는 상을 치우고, 이불을 펴주고, 설겆이를 했다. 친구가 설거지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들었다. 친구는 설겆이를 끝내고, 노트북으로 다른 영화 한 편을 보다가 잠들었다고 했다. 

     

        다음 날, 내가 먼저 깼다. 늦잠을 자고 싶었는데 잠이 안 와서, 읽고 있던 책을 꺼내 읽었다. 권여선의 새 장편을 읽고 있었다. 제목은 <레가토>.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있어서 약간 흥분하면서 읽고 있던 책이었다. 누워서 책을 읽는데, 친구가 깼다. 눈을 반쯤 뜨더니 뭐 읽고 있냐고 물었다. 내가 소설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친구도 다시 잠들고, 나도 다시 잠들었다. 정오 즈음 일어나서 뭘 할까 고민하다가 하이네켄 생맥주통에 남은 맥주가 꽤 많아서, 낮술을 마시기로 했다. 어제 남긴 것들을 다 꺼내놓고 <코쿠리코 언덕에서>를 함께 봤다. 둘이서 남은 통닭 다리를 뜯으면서 <화양연화> 같은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지, 이렇게 술마시면서 보면 분명 끝까지 못 본다, 는 이야기를 했다. 어제 <화양연화>를 보기 시작한 건, 마지막에 캄보디아의 씨엠립이 나오는 부분을 보기 위함이었는데, 씨엠립까지 가기는 커녕. 읔. <코쿠리코 언덕에서>에서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싫어졌다면, 싫어졌다고 말해줘요." 내가 정말 좋은 대사라고 말하자,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친구가 다시 잠들었다. 나는 다시 <레가토>를 읽기 시작했다. 남은 맥주도 마셨다. 낮술이니까, 당연하게, 금새 취기가 올랐다. 8장이었다. '꽃 핀 오월의 목장'. 광주이야기이다. 주인공인 정연은 그 날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다시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날이 펼쳐지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광주에 갔다. 광주에 갔다 서울로 갈 참이었다. 인하 선배를 만날 작정이었다. 모든 것을 말할 작정이었다. 다시 학교에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정말 그 날 광주에서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8장을 읽으면서 조금 울었다. 낮술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낮술 때문이 아닐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정연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유인물을 돌리면서 무서웠던 것. 무섭다고 얘기한 것. 그 날, 그 방에서 나오지 '않은' 것도 왠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마지막 통닭집에서 친구들에게 했던 말들도. 그래서 8장에서 정연이 용기 내서 광주를 빠져나오지 않았을 때, 인하형이었으면, 오난이었으면, 재현이었으면, 진태였으면, 경애와 명식이었으면 도망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피 흘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자꾸 눈물이 나왔다. 에르베 교수와 동행했던 최씨도 무섭다고 했다. 무서워서 못하겠다고 했다. 정연도 대학에서 유인물을 돌리면서 무섭다고 했다. 무서워서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던 그들이 '그 날'의 광주에서 살 떨리게 무서웠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8장을 읽으면서 이 소설은 광주 이야기구나 생각했다. 권여선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구나 싶었다.

     

        친구가 일어났다. 친구가 씻는 동안 내가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집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이대역에서 내려 모모로 갔다. <폭풍의 언덕> 표를 두 장 샀다. 화장실에 들렀다 극장에 들어갔다. 낮술 기운 때문인지 영화의 처음 조금 잤다. 영화는 내내 어두웠다. 배경도 그렇고, 이야기도 그렇고. 여기가 세상의 끝,이라고 해도 믿어질 축축함이 그 곳, 폭풍의 언덕에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생수를 사서 한 통을 다 마셨다. 어지럽고, 답답하고 해서 일찍 헤어졌다. 나는 2호선을 타고 건대까지 쭉 왔고, 친구는 중간에 6호선으로 갈아탔다. 일요일에는 이런 어두운 영화 보지 말자고 둘이서 다짐했다. 집에 돌아와 씻고, 옷 갈아입고 그대로 누웠다. 그리고 그때부터 계속 잤다. 동생이 <신사의 품격>한다고 깨웠는데, 기운이 없어서 보는 둥 마는 둥 실눈을 뜨고 약간 보다가, 계속 잤다.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네.

     

        아, 맞다. 건배 이야기는 이번주에 본 <해피해피 브레드>에 나오는 대사였다. 네이버에 나쁜 평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건 거짓말이었다. <안경>이나 <카모메 식당>을 기대하고 간 내게는, 정말 '아닌' 영화였다. 내내 예쁜 풍경에, 예쁜 생각에, 예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들이 나오는, 안 예쁜 영화였다. 오늘은 <미드 나잇 인 파리>를 보러 가려고 기다리고 있다. 동네 극장에서 이 영화가 하루에 딱 두 번 하는데, 밤 9시대가 첫 상영이다. 고걸 보고 걸어서 집에 오면 딱일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준환은 수첩을 넘기며 예전에 적어놓은 문장들을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에 '술 마실 때와 죽을 때'라고 적혀 있었다. 죽는 순간의 고통은 어떤 것일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게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 그는 끝까지 참아낼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생각하면 이 세상에 감당 못할 고통은 없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인가. 그의 얼굴을 보면 누구나 금방이라도 발작을 일으킬 줄 알고 황황히 임종의 자리를 뜰 것이다. 그와 꼭 닮은 그의 할아버지가 죽을 때도 그랬다. 눈만 조금 부릅뜨고 콧김만 세게 내뿜어도 일가 친척들은 할아버지가 곧 경련을 일으키거나 괴성을 지를 줄 알고 공포에 떨었다. 그는 '혼자'라는 부사를 첨가했다.

       '혼자 술 마실 때와 혼자 죽을 때.'

       한결 안정감 있는 문구가 되었다. '혼자'라는 글자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들끓던 분노가 서서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열어놓은 차창으로 인하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준환은 수첩과 펜을 주머니에 넣었다. 자신이 바라는 게 어쩌면 평생 인하 곁에서 이렇게 혼자 비밀을 간직한 채 무익한 기다림만 반복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p.37-38

     

       "다녀올게."

       "재밌게 놀다 와."

       언니는 은수가 누릴 몇시간의 유흥에 대한 질투와 혐오를 조금도 감추지 않은 채 메마르게 말했다. 현관문을 닫는 순간 은수는 언니의 어깨는 탁 풀리고 뜨개질감이 손에서 툭 떨어지리라는 걸 알았다. 이혼하기 전의 용호도 그랬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루어지는 법이니, 혼자 남겨지는 걸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국 혼자 남겨진다. 그럼 난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나, 하고 은수는 자문했다.

    p. 279

     

       은수는 경애를 일으켜 발목에 걸린 팬티를 올려주고 벽에 붙들어 세워놓고 휴지로 치마를 닦아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경애는 계속 흐느끼고 있었다. 사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는 모든 시간이 첫 시간이기 때문이라고 은수는 생각했다. 이십대도 처음이었지만 오십대도 처음인 것이다. 인생에 두번째란 없다. 그래도 만약 두번째의 이십대가 온다면 링에 모인 이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p.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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