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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에 만난 좋은 건축가들
    서재를쌓다 2012. 7. 4. 22:08

     

     

     

       비가 오는 날이었다. 연차를 썼는데, 병원에 가야지 싶었다. 일주일 전쯤 술을 마시고 크게 넘어졌는데 계속 팔이 욱신거려서 혹시 이상이 있는 건가 싶어서. 원래 조바심 내는 스타일이 아닌데, 나이를 먹으니 이것저것 걱정되는 것들이 많아졌다. 비오는 날이라 디스크에, 깁스에 동네에 있는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병원에 죄다 모였다. 그 날 세 시간 넘게 기다리고 엑스레이 찍고 진료를 받았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결론. 불친절한 의사의 고 진단이 필요했던 거지. 다음날 욱신거렸던 증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날, 병원에서 할머니들 사이에 앉아 읽었던 책이다. 책장이 빨리 넘어가 금새 다 읽었다. 사고 싶은 책들을 고르다, 어젯밤에 이 책을 중고로 올려놨다. 이상하게 한번 더 읽지 않을 것 같아도, 팔려고 하면 아쉽고 아쉬워서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지난 봄에 내가 만난 건축가가 둘 있었는데, 둘다 '좋은' 건축가였다. 이 책 <집을, 짓다>의 나카무라 요시후미가 그 중 한 사람이다. 이 책의 부제는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돌아가고 싶은, 낭비 없고 간소한 나만의 집을 짓는 것에 대하여.' 이 부제에 이끌려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여러 집들 중에 '파인하우스'라고 있다. 이 집을 의뢰한 사람은 결혼을 앞두고 있는 미혼의 편집자 마쓰야 씨. 두 사람은 의뢰하는 집의 구체적인 요구상황들, 진행되어 가는 과정들을 메일로 주고 받는데 이 메일들이 굉장히 따듯하다. 이를테면,

     

    "저희 집이 부근의 한적한 거리를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하는데 보탬이 되도록 해주세요. 사생활은 보호되는 게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폐쇄적이진 않았으면 합니다. 10년 후엔 푸른 나무가 집을 가득 감싸면 좋겠구요. (...) 키가 185센티미터(저는 179센티미터입니다만.)인 사람도 머리를 부딪치지 않게 만들어 주세요. "

     

    "저는 따뜻한 물에 장시간 몸을 담그고 목욕하는 타입입니다. 더불어 자연광이 적당히 들어오는 파우더룸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산 내에서는 어렵더라도 앞으로 방음실이 될 수 있는 방이 필요합니다. 이미지 상으로는 이 집에서 유일하게 살짝 어두운 반지하 같은 공간으로, 소음을 걱정하지 않고 마음 놓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방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식의 요구사항. 나카무라 요시후미 씨는 이 요구사항을 하나하나 다 들어주고, 진행상황을 메일로 다정하게 알려주고, 그렇게 완성된 집에 어느 날 초대받는다. 자신이 설계한 집을 방문한 후, 마쓰야 씨에게 보낸 메일.

     

    "자신이 설계한 집이 아름답게 정돈되어 그곳에서 사는 사람이 즐겁게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설계자로서 더없이 행복한 일입니다. 집 전체에 고요한 생활의 질서가 숨 쉬고 있어 따듯한 <생활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건축에 인간이라는 생명이 깃들면 이렇게도 달라지는구나!" 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또 한 사람은, 영화 <말하는 건축가>의 정기용. 그는 이제 세상에 없다. <말하는 건축가>는 그의 마지막 모습들을 담은 영화. 나카무하 요시후미는 개인의 건축물을 주로 설계하고, 정기용은 공공건축물을 주로 설계했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축물은 무주의 등나무 운동장. 행사때 마다 땡볕에 앉아 있어야 했던 주민들을 배려해 등나무가 자리잡을 수 있는 건축물을 운동장 관중석을 따라 쭉 설치했다. 건축물을 설치 하고 몇 년 뒤 등나무들이 성큼성큼 자라 관중석에 시원한 등나무 그늘이 자연스레 만들어졌다. 영화 속에서는 보랏빛 등꽃이 흐트러지게 늘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었고, 등꽃들이 샤르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등꽃향을 한번도 맡아본 적은 없지만, 어쩐지 등꽃향을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그 장면. 봄, 이었다. 이 두 건축가를 만난 건. 그리고 내게 '좋은' 건축가가 한 명 더 있다. 삼십 삼 년 째. 그 분은 '남향'에 있다. 내일도 비가 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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