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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는 날마다 축제 - 헤밍웨이의 젊은 날
    서재를쌓다 2012. 5. 13. 15:10

    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주순애 옮김/이숲

     

     

       운 좋게 그날 작업이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줄줄이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글을 쓸 때면 언제나 한 대목을 완성하기 전에는 중간에 일을 멈추지 않았고, 또 다음번에 쓸 내용을 미리 생각해둔 다음에야 하루 일을 끝냈다. 그런 식으로 다음 날도 무난히 글쓰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때로 새로 시작한 글이 전혀 진척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벽난로 앞에 앉아 귤 껍질을 손가락으로 눌러 짜서 그 즙을 벌건 불덩이에 떨어뜨리며 타닥타닥 튀는 파란 불꽃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창가에서 파리의 지붕들을 내려다보며 마음 속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넌 전에도 늘 잘 썼으니, 이번에도 잘 쓸 수 있을거야. 네가 할 일은 진실한 문장을 딱 한 줄만 쓰는 거야.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 한 줄을 써봐.' 그렇게 한 줄의 진실한 문장을 찾으면,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계속 글을 써나갈 수 있었다.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면 언제나 내가 알고 있거나, 어디에선가 읽었거나, 혹은 누군가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몇몇 진실한 문장이 있게 마련이었으니까. (...) p.18

     

     

        헤밍웨이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헤밍웨이가 죽은 지 50년이 되는 해. 저작권 보호기한이 끝나서란다. 쏟아지는 책 중에 <노인과 바다>를 주문하고,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주문했다. 책이 도착한 지는 꽤 되었는데 고이 두었다가 5월이 되자 읽기 시작했다. 읽는 동안 행복했다. 좋은 글을 읽을 때 느끼는 충만함. 20세기 초반 예술가들이 득실되었던 파리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 속의 카페에서 글을 써나갔던 헤밍웨이를 상상하고, 가난한 그를 사랑한 한 여자를 상상했다. 그들은 파리에서 가난했지만, 행복했고, 서로를 존중했고, 사랑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얼마 가지 않았다. 헤밍웨이는 평생 네 번의 결혼을 했는데 파리의 그녀는 그의 첫번째 부인이었다. 이 책에는 그 시절 그가 사랑한 모든 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부인, 가난, 책, 카페, 음식, 맥주와 포도주, 그와 교류했던 작가들 (특히 피츠제럴드!), 파리의 풍경들.

     

     

       그곳은 따뜻하고 깨끗하고 친절하고 기분 좋은 카페였다. 나는 비에 젖은 내 낡은 외투를 말리려고 옷걸이에 걸어 놓고, 역시 비에 젖은 오래된 내 중절모를 긴 의자 위에 있는 모자걸이에 걸어 놓은 다음, 웨이터에게 카페오레 한 잔을 주문했다. 그리고 상의 주머니에서 공책과 연필을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

       나는 공책을 상의 안주머니에 넣고 나서 웨이터를 불러 생굴 한 접시와 달지 않은 백포도주 반병을 주문했다. 글을 끝내고 나면, 마치 사랑을 나누고 난 것처럼 언제나 공허하고, 슬프면서도 행복했다. 이번 글은 잘된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다음 날 다시 읽어 봐야 얼마나 좋은 글인지 알게 되겠지만.

       약한 금속 맛과 함께 바다 냄새가 물씬 풍기는 생굴을 먹으면서 금속 맛이 차가운 백포도주에 씻겨 나가고, 혀끝에 남는 바다 향기와 물기를 많이 머금은 굴의 질감이 주는 여운을 즐기는 동안, 그리고 굴 껍데기에 담긴 신선한 즙을 마시고 나서 상쾌한 백포도주로 입을 헹구는 동안, 나는 공허감을 털어 버리고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p.13-15

     

     

        책을 다 읽고 나서 알았는데, 이 책은 헤밍웨이가 파리에 있던 그 시절에 쓴 글이 아니라 30여 년이 지난 뒤에 쓴 글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살하기 세 달 전에도 파리에 관한 글을 썼다고 한다. 화양연화. 30년이 지나고 젊은 날을 추억하는 헤밍웨이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결코 돌아갈 수 없으므로 더 아름답게 기억되는 시절의 모습. 그는 이 글을 쓰면서 얼마나 행복했을까.

     

     

        "물론이지." 내가 대답했다. "내가 글 쓰는 걸 잊을 리가 있나."

       나는 전화를 걸려고 밖으로 나갔다. 물론이지, 하고 생각했다. 글 쓰는 걸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나는 글을 쓰려고 세상에 태어났고, 여태까지 글을 써왔으며, 앞으로도 다시 글을 쓸 거야. 장편이든 단편이든 내 글에 대해 사람들이 하는 말, 누가 쓴 글이냐는 등의 말에 나는 전혀 개의치 않을 거야. p.298

     

     

        이건 헤밍웨이가 자살하기 세 달 전에 썼던 글. 5월의 어느 날 밤, 이불 속에서 이 글을 읽고 뭉클했다. 이대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961년의 헤밍웨이에게서 위로를 받고, 랩핑되어 있던 <노인과 바다>를 뜯어 읽기 시작했다. 고맙습니다, 헤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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