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영상통화를 하다 끊으려고 하면 아빠는 지안이에게 항상 그러신다. "지안아, 엄마랑 놀고 있어라. 난중에 또 통화하자-" 어느 날은 지안이가 내게 와 노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시더니 그러신다. "어릴 때 저렇게 사랑받은 기억이 있어야 하는데. 지안이는 참 좋겠다. 엄마아빠가 저렇게 사랑해줘서-" 아빠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단다. 아빠는 어릴 적부터 가족과 떨어져 부산 작은 아버지 댁에서 학교를 다니셨다. 할아버지는 엄하셨고 할머니는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늙은 아빠는 어린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말씀하신다. 참 외로웠다고. 나의 어린 시절도 외롭긴 매한가지였는데 그래도 내게는 아빠의 사과가 있었다. 아빠는 어떤 경우에든 자신이 잘못을 했을 때엔 사과를 하셨다. 아직도 생생한, 정말 마음이 아팠던 밤이 있었는데 그 날 아빠만 내게 사과를 했다. 그런 모습을 보여 미안하다고. 울면서 사과를 하셨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다. 정작 그런 상황에 나를 끌고 간 엄마는 평생 그 일에 사과를 하지 않으셨다. 지금 얘기를 꺼내도 자신은 잘못 없다며 아빠 탓을 하실 거다. 지안이가 어떤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냐고 누군가 물어보면 내 자세를 꼿꼿이 세우게 된다. 마치 내가 어떤 사람을 꿈꾸냐고 물어본 것처럼.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들의 좋은 면들을 떠올려본다. 그러면서 내 자신에게 다짐을 하게 된다. 그래 좀 더 열심히, 그래 좀 더 용기있게, 좌절하지 말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요즘 마음공부를 매일 하고 있는 동생이 오늘 아침 보내준 누군가의 글의 제목은 이랬다. '당신은 진정성을 담고 있느냐.' 그 글은 말한다. 진정한 진정성이란 결국 나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진정성이라고. 우연히 검색된 글에는 자존감에 대한 오은영 선생님의 말이 담겨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좌절을 잘 이겨내고 누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땡큐도 잘하고 쏘리도 잘합니다." 진정성 있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 그리고 자주 행복한 사람. 지안이가 그런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럴려면 나부터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지. 어제 운전면허학원에 등록을 하고 왔다. 후아- 미루고 미뤘던,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일. 몇 번을 떨어지더라도 도전해보는 엄마가 되겠다. 아자아자아자!
아이가 어린이집에 갔다. 금요일부터 가지 못했으니 금, 월, 화, 수. 주말 이틀을 제외하면 4일을 단 둘이서 낮시간을 보냈다. 금요일은 다음 날이 주말이니 괜찮다 했고, 월요일에는 아이가 열이 다시 오를까 전전긍긍했다. 두 번째 낮잠은 내가 쓰러질 것 같아 부러 재웠다. 화요일은 내일은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힘이 났고, 수요일에는 아침잠을 너무 오래 자서 아무래도 오늘도 안되겠구나 했다. 힘이 많이 들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나름 괜찮았다. 아이 컨디션이 괜찮아 많이 보채지 않았다. 주말에는 셋 다 힘들었다. 아이 열이 39도를 넘었고 밤에 자주 깨서 울었다. 생전 처음 이렇게 몸이 아픈거니 많이 놀랬을 거다. 열이 계속 오르니 힘도 없고 입맛도 없고. 그래도 잘 지나갔다. 금요일에 아니 지금 코로나? 하며 병원에 갔는데 신속항원검사 하기도 전에 의사선생님이 돌발진 같아요 하셨다. 열이 나고 잘 먹던 애가 갑자기 밥을 안 먹는다고 하니. 열이 39도까지 올라가도 탈수만 되지 않으면 괜찮다며 콧물약과 해열제를 처방해주셨다. 주말 지나니 아이 컨디션이 괜찮아지며 얼굴과 몸에 열꽃이 피었다. 1년 전에 아이에게 두차례 돌발진이 왔던 남편 지인 부부가 열꽃이 피면 끝난 거라고 며칠 지나면 싹 없어진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갑자기 기침을 해서 병원을 한 번 더 갔는데 의사선생님도 열꽃이 피었어요? 그럼 이제 괜찮은 거예요, 하셨다.
신기하게 아이는 앓는 동안 쑤욱 컸다. 오늘 어린이집 등원할 때 선생님도 그러셨다. 지안이가 왜 이렇게 컸지? 하시면서. 매일 부수고 던지는 놀이만 했는데 구멍 사이로 모형을 모양에 맞춰 넣어보려고 한다. 걸음마 보조기도 앞부분에 버튼만 눌러대며 놀았는데 이제 손잡이를 잡고 일어나 밀며 걷기 시작한다. 뽀로로와 친구들을 던지기만 해서 먼 곳에 치워뒀던, 자석판 위에서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돌아가는 장난감도 이제 뽀로로를 친구들을 세워 보려고 한다. 저녁밥 달라고 난리치던 표정도 달라졌고. 소파 위에 앉혀 놓으면 싱긋싱긋 웃는다. 조심조심 내려가야지 잡아주면 조심조심 내려간다. 나가고 싶을 때는 양말을 내민다. 자기가 양말을 신고 엄마가 마스크를 쓰고 찍찍이 소리를 내며 힙시트를 허리에 매면 나가는 줄 안다. 등원할 때 선생님 품에 안긴 아이에게 두 손을 있는 힘껏 아주아주 크게 힘들며 지안아, 재미나게 놀아. 재미나게 놀고 있어, 반복하니 선생님이 소리내어 웃으신다. 네, 선생님. 힘들었어요. 또르르; 지안이도 속으로 앗싸 어린이집이다! 집이랑 다른 장난감! 하며 환호성을 지르는지 품에 안겨 웃고 있다. 안심하고 어린이집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밭에 가서 수염이 나오기 시작하는 키카 큰 옥수수, 줄기 여기저기서 새잎이 돋기 시작하는 레몬나무, 제법 줄기가 올라온 모닝글로리, 궁채를 보고 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 좋아하는 카페에 들러 단디 단 흑임자 라떼를 주문했다. 음료가 만들어지는 동안 손님이 아무도 없는 카페에 앉아 바깥의 풍경을 가만히 보았다. 조용하고 고요했다. 집에 가서 반신욕 해야지. 향이 좋은 오일 풀고 오래 앉아 있어야지 생각했다.
그동안 오지은의 새 책을 읽었다. 이런 문장을 지나며 아이가 훌쩍 큰 것이다.
에세이는 삶을 직시하지 않으면 쓰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본인의 삶이든, 타인의 삶이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든, 괴로워도 바라봐야 한다. 도망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글로 만들려면 아주 오래 바라봐야 한다. 그래서 에세이는 용감한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시대에 따라 '생각이 가는 대로 써 내려간 글'을 뭐라고 부르든, 그것이 산문이든 수필이든 에세이든, 글에 담긴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나는 에세이라는 장르의 팬으로서 그렇게 생각한다.
- 10쪽
(...) 언제까지고 잘 지낼 순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 기간을 최대한 늘리고 싶다. 이것이 현재 나의 가장 큰 목표이자 소원이다.
- 84쪽
록 음악계에는 '27세 클럽'이라는 말이 있다.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재니스 조플린, 커트 코베인,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만 27세에 세상을 떠났다. 실제로 음악을 하는 친구들끼리 만 27세, 한국 나이 29세가 되었을 때 "어 우리 이제 만 27세 넘는 거네. 천재는 아닌가 봐?" 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나는 웃었지만 그때도, 지금도 27세 클럽이라는 말은 잔인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스물일곱에 죽었지?" 하고 눈을 빛내면서 얘기하는 사람을 보면 더욱 그렇다. 천재의 요절은 간단히 미화되고 소비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27세를 넘겼든 아니든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능한 한 행복하게.
- 91쪽
(...) 여럿이 모이면 마음이 강해진다. 어쩌면 팀 스포츠여서 용기를 내기 조금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테니스는 개인 종목이기에 오사카 나오미는 코트 위에서 철저히 혼자였다. 그는 출전한 경기에서 전부 이겼다. 그래서 준비했던 일곱 개의, 각각 다른 희생자의 이름이 적힌 마스크를 전부 쓸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21세기의 영웅의 모습은 이렇다. 흔들리고, 고민하고, 때때로 무너져도, 계속 달려가는 사람.
- 142~143쪽
창문을 다 열어놓고 장마 전 바람을 맞으며 정밀아 음악을 듣고 있다. 아이 방으로 만드려고 서재 방 책상을 빼 안방에 두었다. 그저 구석에 큰 스피커가 있는 긴 티비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안방에서 티비 볼 일은 없다) 의자를 가져와 앉으니 노트북 책상이 되었다. 이것대로 좋네. (늘 결심 뿐이지만, 정말로) 일기를 자주 쓰고 싶다.
평이 그리 좋지 않던데, 나는 꽤 울었다. 결말이 좋았다. 꿈 같은 결말이었다. 아이를 위해 모두가 힘을 합치고 마음을 쓰는.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아이를 키우는데 필요한 사람이 부모만은 아니라는 걸 1년 동안 아이를 키워보니 확실히 알겠다. 부모의 노력과 힘과 마음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여러 이모삼촌도 필요하고 여러 할머니할아버지도 필요하고 여러 선생님도 필요하고 여러 친구도 필요하고 여러 언니누나동생도 필요하다. 어린이집을 보내고 노심초사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의 나는 그곳에서 아이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온다고 믿는다. 매번 그렇지 않을 수 있겠지만 많은 시간 그럴 거라고 믿는다. 매일 등원 때마다 수식어를 달리하며 아이를 맞이해주는 선생님을 보면 선생님도 최선을 다해 아이와 함께 해 줄 거라 믿는다. 힘든 날들도 있겠지만 보람된 날들이 많으실 거라고. 복직을 앞두고 하원도우미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어린이집에 늦게까지 있을 생각이었는데 아이에게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하고 여러 상황 상 그러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일단 신청을 했고 좋은 선생님이 구해지기를, 좋은 인연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영화의 결말이 내게 보여진 거다. 아이를 위해 부모 외의 다른 사람들이 힘을 합치고 마음을 쓰는 결말. 아이가 잘 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 꿈 같은 결말이었지만 안심이 됐다. 극장문을 나서며 우리 지안이에게 좋은 분이 오실 거다, 와서 좋은 시간을 함께 해주실 거다, 우리에게도 큰 힘이 되어주실 거다, 그럴 거다, 고 생각했다.
친구가 그랬다. 돌 즈음부터 무척 행복했던 것 같다고. 그 전까지는 육아가 참 고되었는데 돌이 지나면서부터 아이가 너무너무 예뻐지더라고. 너도 그럴 거라고. 아직 걷지는 못하는데 다리 힘이 꽤 생겼다. 어린이집에서는 곧 걸을 것 같다며 매일매일 걷기 연습을 한다는데 집에서는 그냥 놀게 둔다. 어제는 미끄럼틀을 혼자 힘으로 탔다. 계단이 두 개 있는 낮은 미끄럼틀이긴 한데 한번 타니 계속 탄다. 기특한 녀석- 요새 많이 웃고 짜증도 곧잘 낸다. 책을 끊임없이 읽어달라고 하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페이지를 찾아 그 부분만 읽어달라고 한다. 여전히 공놀이를 좋아하고. 남편은 새로운 장난감을 당근 거래를 해서 들여오곤 한다.
요즘 아이는 여덟시 부근에 잔다. 시간이 얼추 되면 얼굴을 씻기고 로션을 바르고 밤기저귀로 바꿔준다. 요즘 콧물이 심해 자기 전에 코뻥을 꼭 해주고 마지막 우유를 먹인다. 어린이집에서, 하원하고는 집에서 1초도 쉬지 않고 신나게 논 아이는 우유를 빨면서 눈을 스르르 감는다. 싫다고 힘껏 짜증을 내지만 구강티슈로 입 안을 닦아주고 방으로 데려간다. 내 (한때는 우리였다) 침대 옆에 아이의 낮은 범퍼 침대가 있다. 3센치 낮은 범퍼 가드를 넘어가지 못하게 한 면에 울타리를 쳐뒀다. 아이를 눕히면 신기하게 얼마 전부터 가만히 누워있다. 원래는 자기 싫어 벌떡 일어나 앉곤 했는데 요즘은 가만 누워 있다. 새와 비소리가 동시에 들리는 백색소음을 켜고 수면등도 약하게 켜고 바깥바람이 들어오게 창문이 열려있나 보고 아침에 일찍 깨지 않게 커튼이 제대로 쳐져 있나 보고 마지막으로 가습기를 켠다. 그렇게 울타리를 넘어 아이의 범퍼 침대로 들어와 한 켠에 누우면 아이가 누운 채로 나를 보며 배시시 웃는다. 나를 기다려주는 거다. 어두운데 웃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그리고 내 쪽을 향해 돌아누워 잠잘 자세를 취한다. 핸드폰으로 켜둔 자장가를 반복해서 같이 듣거나 자장가를 직접 불러주며 엉덩이를 토닥이고 등을 쓸어내려주면 아이가 거짓말처럼 스르르 잔다.
오늘은 바로 자질 않아 자장가를 꽤 여러 번 불러줬다. 계속 내가 있는 구석으로 몸을 움직이길래 넓게 편히 자라고 반대쪽으로 옮겨 누웠다. 그러니 아이가 벌떡 앉더니 방향을 틀어 내가 옮긴 쪽으로 따라 눕더라. 등을 쓰다듬어 주니 내 상체에 몸을 바짝 붙이고 한쪽 팔을 내 어깨 위로 올리고 또 배시시 웃더라. 이런 자세는 처음인데 하며 아이 등을 쓰다듬어 주는데 갑자기 울컥했다. 바짝 달라붙어 아이의 심장소리까지 들리는 지금이 탯줄로 서로 연결되어 있던 임신 때 우리 둘 같아서. 1년 조금 더 된 기억인데 벌써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는 그때가 불현듯 생각나서. 늙은 애미 때문에 무슨 일이 날까 매번 노심초사 했었는데. 아무 일 없이 건강하게 태어나 이렇게 튼튼하게 자라주고 있는 것이 꿈만 같아서. 지난 오월 마지막날 아이의 생일이었다. 아이는 무사히 건강하게 일년을 보냈다. 너도 대견하고, 그렇게 엄마아빠가 된 우리도 대견하고, 그동안 고생한 날들도 대견하고. 친구 말대로 앞으로 행복한 일만 그득할 거라고 생각해본다. :)
오늘은 은경이가 동네로 왔다.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선물을 바리바리 들고. 작년에는 둘 다 모유수유 중이었고 두 아이 다 아주아주 작았고 24시간 아이와 함께였는데, 오늘은 두 아이 다 어린이집 가 있는 시간에 평소 가고 싶었던 화덕피자집에 마주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새 1년이다. 2주 차이 나는 아이들은 쑥쑥 커서 얼마 전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마당에 작은 수영장이 있는 서울의 풀빌라 숙소였는데 함께 수영도 했다. 처음 어린이집 보낼 때 노심초사했었는데 그 걱정들은 사라진지 오래다. 시간이 촉박해 지안이 하원할 때 은경이도 함께 갔다. 지안이는 엄마와 이모를 보고 활짝 웃었고 이모는 하원하는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줬다. 이모는 반가워 한번 안아보려 했지만 요즘 심하게 엄마 껌딱지인 지안이는 발버둥을 치며 거부했다. 조이의 고급수건 답례품과 지안이의 냄비받침 답례품을 나누고 헤어지기 전 이모가 팔을 위로 쭉 뻗어 놀아주자 지안이가 꺄르르 꺄르르 웃었다. 은경이는 내 임신 소식을 이 곳 블로그에서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자신도 비슷한 주수로 임신 중이어서. 어쩜, 이런 마음이었단다. 아이가 밤낮으로 울고 나도 울고 싶고 앞으로의 일이 막막할 때 멀리 있지만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다. 지금도 대충 말해도 머릿속에 바로 상황을 그리며 이해하고 공감해주고 응원해주는 친구가 있어 참 고맙다. 언젠가 나도 조이가 하원할 때 따라가게 되면 조이와 은경이 사진을 찍어줘야지. 조이가 엄마를 보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엄마와 함께 집에 가는 모습이 얼마나 행복해보이는지.
지난밤에 일기를 꼭 쓰자 다짐했었다. 언제였냐면 일요일 밤. 텃밭에서 상추와 치커리 고수를 따와 삼겹살을 구으려 하는데 남편의 소주가 없었다. 같이 맥주를 마시자고 하니 나가서 소주를 사오겠단다. 남편이 설거지 중이어서 그럼 내가 후딱 다녀온다고 했다. 슬리퍼를 신고 나왔는데 갑자기 비가 우두두 쏟아졌다. 태풍같은 바람도 불었다. 나무들이 바람에 휘청거렸다. 다시 우산을 가지러 올라가기는 귀찮아 시작되는 비를 맞으며 편의점에 다녀왔다.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 생각이 났다. 영국에서 LA로 집을 바꿔 여행 온 케이트 윈슬렛이 맞은 태풍의 바람 같았다. 그녀는 낯선 여행지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따듯한 시간들을 보냈다. 소주와 맥주를 넉넉하게 사고 돌아오는 길, 내일은 꼭 블로그에 일기를 남기자고 다짐했다.
어제는 갑자기 체온이 38도까지 올라갔다. 우리집 알람시계 지안이는 어김없이 7시 기상을 했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항상 무거운 몸이었지만 어제는 더 무거운 거다. 손목을 비롯한 온몸의 관절이 욱신거렸다. 체온을 재보니 심상치 않았다.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지금껏 만나는 사람들 코로나만 걱정했지 내가 걸릴 줄이야. 남편은 걸릴 리가 없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장담했지만 (낙관주의자) 나는 온갖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비관주의자) 해열제를 한 알 먹고 지안이가 낮잠 1을 잘 때 한 숨 잤는데 체온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리 사둔 자가키트를 꺼냈다. 일회용 장갑을 끼고 면봉으로 코 두 곳을 모두 쑤셔 돌리고 용액에 휘젓고 검사판에 3-4 방울 뿌렸다. (결과 사진을 남편에게 보냈더니 3-4 방울 뿌린 게 맞냐고 들이 부은 게 아니냐고;) 결과는 한 줄. 음성. 오후에 이유식을 먹고 놀다 낮잠 2를 자는 아이를 따라 해열제 한 알 더 삼키고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전날 야채를 썰어 이유식 채수를 만들었다. 세끼 밥솥 이유식도 처음 만들어봤다. 보통 이유식 만드는 날은 어른밥은 안 만드는데 요즘 너무 많이 시켜먹는다는 생각에 어른밥까지 만들었다. 오뎅탕에 냉삼팽이말이... 그렇게 밤이 되자 그야말로 녹초. 몸이 말하는 듯 했다, 정말정말 피곤하잖아. 또 다른 생각은 생리 3일 전이라는 알림. 임신 출산 모유수유 후 두 번째 생리다. 몸이 그동안 쉬던 걸 하려고 하니 열이 좀 나나 하는 생각. 아무튼 피로가 누적되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꼭 칼퇴해달라고 하고 마스크를 쓰고 최대한 아이 곁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감기라도 옮기면 안되니까. 요즘 떼쟁이 울보가 된 아이는 계속 음-마음-마 하며 잡아달라고 손을 내밀고, 놀아달라고 소파에 앉은 나를 올려다봤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한 번 더 하려는 나를 칼퇴한 남편이 말렸다. 자가키트 해봤으니 내일까지 증상이 있으면 그때 가보라고. 그럼 이제 아무 것도 안하고 쉬겠다고 하니 그러라고 했다. 일단 안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저녁에 안방 침대에 눕다니 얼마만인가! 남편을 불러 몇 달 동안 켜진 적 없는 티비를 켜달라고 했다. 달달한 믹스커피 한 잔과 과자도 주문했다. 남편은 모두 해주고 문을 닫고 나갔다. 밖에서 떼쟁이 울보가 악을 쓰며 아빠와 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욕을 하자고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목욕을 다했다는 소리도 들려왔다. 몸을 닦고 로션을 바르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리고 마지막 분유를 먹이러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티비를 끄고 남편이 분유를 먹이는 모습을 침대에 누워 지켜봤다. 남편은 트림을 시키고 거즈 손수건으로 아이 잇몸을 닦아주고 얼굴에 로션을 한번 더 발라주고 수면조끼를 입히고 아이를 재우려 했다. 나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그 모습을 지켜봤다. 마침 삼겹살이 도착했다. 삼삼데이라 삼겹살을 시켰단다. 왠지 몸이 괜찮아진 것 같았다. 남편이 방에 들어가 아이를 재우는 동안 설거지를 간단히 했다. 그리고 육퇴한 우리는 늦은 저녁을 먹었다. 냉장실에 있는 당귀를 추가해 누가 구워서 배달해준 삼겹살에 쌈무를 깔고 누가 썰어준 편마늘에 쌈장을 찍어 누가 무쳐준 파무침도 얹어 입안이 터질 듯 쌈을 싸 먹었다. 김치냉장고에서 시-원해진 콜라도 벌컥벌컥 마시면서.
<어쩌다 사장>을 보며 이제 좀 살 것 같다며 푸념을 하다 평소보다 온도를 낮춰 샤워를 했다. 드라이기로 머리도 잘 말리고 나왔다. 윗니가 나기 시작하는 아이는 요즘 새벽에 자주 깨서 짧은 악을 쓰는데 그것도 남편이 일어나 진정시켜줬다. 그렇게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몸이 어제보다 조금 가벼워졌다. 체온도 37도 밑으로 내려가 있었다. 휴- 다행이다. 채수 내는데 쓰고 남은 야채는 다음번 채수 만드는데 쓰려고 햇볕에 말리고 있는데 잘 쪼그라들고 있다. 지안이 비타민 D야 많이 생겨라 하며 오늘 아침에 한번씩 뒤집어줬다.
어제는 남편이 저녁약속을 잡았다고 해 뭔가를 시켜먹어야지 했다. 내가 내린 커피 말고 남이 내린 커피와 달달한 간식이 땡겨 좋아하는 샌드위치 가게에 아예 2-3인 세트메뉴를 시켰다. 음료가 두 잔 포함되어 있고 샌드위치 하나, 샐러드 하나, 식빵에 카야잼 바르고 버터를 끼운 디저트가 있는 메뉴이다. 늦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세트 하나로 해결하면 될 것 같았다. 음료 두 개는 뭘 고를까 고민하다 당장 마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두고 먹을 에스프레소 한 잔을 시켰다. 언제든 뜨거운 물이나 차가운 얼음을 채워 마시면 되니까. 남편이 어제 통닭을 사들고 귀가해주시는 바람에 (많이 컸다. 빈손으로 들어와 나를 화나게 하기 일쑤였는데) 샐러드와 샌드위치 반쪽, 에스프레소가 남았다. 지안이 낮잠1 재우기에 어렵사리 성공하고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어제 받아놓은 에스프레소 종이컵에 부었다. 아, 진하고 따뜻한 남이 내려준 커피다. 좋네- 오늘은 금요일이고, 지안이의 새 장난감이 배송이 된다. 남편의 사촌 집에 갔을 때 사촌이 지안이 가지고 놀라고 뽀로로 장난감을 꺼내주었는데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에 반해 단번에 손을 냅다 뻗어 입으로 가져가길래 기겁을 하고 내내 안고 있었더랬다. (너무너무 깨끗한 집이어서 조심스러웠다) 너무 좋아해서 사주고 싶었는데 남편이 지금은 안 가지고 노는 게 좋겠다고 해서 마음을 접었더랬다. 이모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빙글빙글 돌아가는 에듀볼을 꼭 끌어안고 못 돌아가게 잡고 있기를 수 일. 어제 결국 고장을 내는 걸 보고 술 마시는 남편에게 동영상을 보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걸 너무 좋아해. 사주자. 그러자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진 아빠는 뭣 때문에 사주지 말자고 한 지도 모르고 단번에 오케이. 지안아, 엄마 덕분에 오늘 빙글빙글 새 장난감이 온다. 낮잠 달게 자고 일어나자, 아가.
요즘 지안이는 낮잠을 두 번 잔다. 오전 아홉시에서 열시 즈음에 한 번, 오후 두 시에서 세 시 사이에 한 번. 짧으면 사십분 길면 두시간까지. 두 번을 합하면 낮잠시간이 세 시간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옆으로 눕혀 토닥토닥해주면 잘 자기도 했는데 혼자 앉을 수 있게 되면서 시도때도 없이 앉는다. 코-오 자보자 눕히면 얼굴 가득 웃음기가 돌면서 앉고, 새벽에 잠에서 깼을 때도 가만히 앉아 어둠 속에서 뭔가 잡을거리를 찾아 혼자 사부작사부작 한다. 그러다 자기 깬 걸 엄마가 계속 모르면 칭얼대는 소리를 내며 이제 그만 일어나라 하고.
오늘은 옆 아파트 경은씨가 유모분만을 하는 날이라 했다. 내 수술날 생각이 났다. 수술 앞뒤로 받은 격려의 문자들과 그날 아침 사촌동생의 부재중 전화. 사촌동생은 그 날 전화를 했다 내가 받지 않자 잘 수도 있을 것 같아 후다닥 끊었다며 톡을 남겼다. 시간을 보면 출근을 갓 하고 한 것 같다. 언니 자나? 잘 것 같아서 후다닥 끊었네. 오늘 디데이네. 무섭기도 할 것 같은데 이 세상 엄마들도 다 하니까라고 생각하니 용기가 나더라고. 언니도 잘 할 수 있을거야. 화이팅! 애기 잘 만나. 하트. 그 때 받은 메시지가 병원에 가기 전 정말 큰 힘이 되어서 나도 경은씨에게 아침 일찍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무척 힘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예요. 동시에 무척 행복한. 그러니 힘내요, 라고.
오늘 휴가인 동생과 영상통화를 마치고 눈을 비비기 시작한 지안이를 재운다. 내 왼쪽 어깨에 지안이 머리를 올리고 등을 토닥토닥해준다. 무릎으로 반동을 주며 쉬쉬- 소리도 내고 한낮의 자장가도 불러주며 이제 조금 자고 일어나자 한다. 새삼 지안이의 무게가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잰 무게가 9.2키로. 태어났을 때 무게는 3.04키로. 아이 몸무게가 쑥쑥 늘 때는 하루가 다르게 무거워진다, 이제 오래 못 안아주겠다 했는데 아이의 무게에 나도 적응이 되고 있나 보다. 그리 무겁지가 않다. 언제 이렇게 컸나 싶은 목요일 오전. 오늘은 아빠가 늦게 온다 했으니 (흑흑) 두 번 낮잠도 한 번의 긴 밤잠도 엄마랑 잘 해보자. 이제 곧 일어날 시간이네. 아이의 낮잠 시간이 엄마에게는 참으로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