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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낮잠 - 말뿐인 봄인가요
    무대를보다 2010. 3. 3. 22:52


       아직 읽지 못한 소설인 줄 알았다. 허진호 감독이 박민규의 '낮잠'이라는 제목의 단편으로 연극을 만들었다고 했을 때, 내가 아직 안 읽은 소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연극이 시작되니까 알겠더라. 이건 내가 읽은 소설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연극의 결말을 알았다. 해피엔딩. 내가 기억하는 소설의 결말이었다. 내가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고 깨달은 순간은, 노년의 영진이 고향에 돌아와 열아홉 시절을 회상할 때. 무대 위에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또 하나의 무대가 보였다. 어디선가 빗소리가 들려왔다. 그 무대, 아니 그 길 위에 코스모스가 그득했다. 남자아이가 뛰어오더니 멈춰섰다. 여자아이도 뛰어왔다. 멈칫멈칫. 결국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에게 우산을 건네지 못했다. 이 장면이 소설에 나왔나.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도, 이 무대가 펼쳐진 순간 내가 소설을 읽었다는 걸 깨달았다.

       김창완 캐스팅으로 보고 싶었는데, 그 날은 이영하였다. 물론 김창완 아저씨가 좋을 거라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이영하 아저씨도 꽤 좋았다. 소년 이주승도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극은 딱 허진호스러웠다. 나는 허진호 빠순이니까, 이 연극이 무척 좋았다. 천장까지 솟은 길쭉길쭉한 나무들하며,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길하며, 쏴아쏴아 쏟아지는 빗소리하며. 후반부에 노년의 영진과 이선이 객석을 등지고 나란히 서 있는 뒷모습을 보이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은 영락없이 <봄날은 간다>다. 우리도 저렇게 같이 묻힐 수 있을까, 속삭이던 상우와 은수의 뒷모습 그대로, 바로 그 자리에 영진과 이선이 서 있다.

        연극 <낮잠>에서는 노년의 영진과 소년의 영진이 함께 한다. 둘은 나란히 침대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노년의 영진을 거울에 비추면, 소년의 영진이 보인다. 노년의 영진이 내게 봄이 왔어, 봄, 이라고 외치면 두 팔을 멀리 뻗으면, 거울 너머 소년 영진도 봄, 이라고 외치며 두 팔을 활짝 뻗는다. 노년의 영진이 소심하게 주춤거리고 있으면, 소년의 영진이 말한다. 말뿐인 봄인거냐. 어느 날은 그런다. 너처럼 늙을까봐 겁난다. 노년의 영진이 화가 나서, 내가 바로 너야, 그러면 내가 니가 아니였음 좋겠다, 그런다. 그리고 어떤 날은 이렇게도 말한다. 고마워, 멋지게 늙어줘서.

        어른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 연극을 또 놓쳐버리기 전에 얼른 보자고 결심한 건 저번주 무비위크 때문. (루시드 폴에다 김창완, 허진호 감독 인터뷰 기사까지 있었다) 그 인터뷰 기사에도 저런 비슷한 질문이 있었다. 기자의 질문은 모래알같이 많은 나날들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였다. 김창완 아저씨가 이렇게 답했다. "사람은 다 똑같다. 여섯 살짜리도, 열여덟 살짜리도, 일흔두 살도 유치하다. 몇 살부터 몇 살까지를 청춘이라고 규정지을 필요가 없다. 사람은 존재 자체가 늙어 죽을 때까지 유치하니까. 우리 스스로 청춘을 ‘청춘’이라고 부를 뿐인 거다. 청춘이 불안한 건 언제나 마찬가지다." 나 이 연극 보면서 연애하고 싶단 생각했잖아. 소년 영진이가 말한 것처럼, 말뿐인 봄은 싫으니까. 그 대상이 남자가 됐든, 뭐가 됐든. 이번 봄에는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해보고 싶단 생각이 든, 그리고 이번 봄에는 벚꽃이 만연할 때 조용한 벤치 위에서 낮잠 한 번 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딱 봄같은 무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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