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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리스마스에는, 루시드 폴
    무대를보다 2009. 12. 27. 17:29


        눈이 내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친구는 분홍색 향기가 솔솔 나는 목욕물을 받아주고는 샤워를 하고 들어가 반신욕을 하라고 했다. 아침에는 김치찌개를 끓여주고, 점심에는 고추장에 밥을 비벼줬다. 함께 쿠키를 만들었고, 달달한 다방커피도 마셨다. 친구 집을 나서는데, 눈발이 날렸다. 물고기 마음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매진되었으나, 기계적 오류로 인해 남은 좌석을 현장에서 판매한다고 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연대로 가보기로. 이건 내가 나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그렇게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혼자, 루시드 폴을 만났다. 그리고 다음에도 폴의 공연에는 혼자 와야지, 생각했다. 

        배를 탄 것 같았다. 무대 위의 하얀 장식에 불이 들어오자 한번도 본 적 없지만 밤의 바다에 떠 있는 오징어 배 불빛 같았다. 나무로 된 배 위. 나는 이 쪽 끝에 앉아 있고, 폴은 저 쪽 끝에 앉아 있다. 폴은 기타 하나를 안고 앉아 내가 이어폰으로만 들어왔던 노래들을 직접 들려줬다. 삼청동, 오, 사랑,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그건 사랑이었지. 주위가 환하게 밝아지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러면 드럼소리가, 기타소리가, 베이스 소리가, 건반 소리가 들려왔고, 밤의 바다가 환해졌다. 폴의 말대로 소프라노 색스폰에는 하얀 눈발이 날리는 것 같았다. 손 끝에 힘을 주고 1분동안 흔들면 마술처럼 짜잔하고 눈이 내리는 스노우볼처럼. 눈을 머금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처럼. 눈 끝에서 색스폰 소리가 났다.

        배가 출렁이기도 했다. 국경의 밤 전주가 시작되었을 때. 그 땐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재작년 겨울이 생각났다. 중랑천을 걸으면서 반복해서 들었던 2007년 겨울의 노래. 그 해 겨울의 내가 생각나서. 이렇게 폴의 노래에 나의 사연이 합해져서 나의 노래가 되어버린. 국경의 밤은 힘든 일을 겪은 친구가 폴을 찾아왔을 때, 국경을 넘으며 함께 했던 그 밤에 대한 노래라고 했는데. 그 날, 그 밤 별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의 그 날, 그 밤 별의 기운도 느껴졌다. 2009년 국경의 밤이 울려퍼지는 내내 2007년의 나는 걷고 있었다. 어떤 날은 눈이 오기도 했고, 어떤 날은 바람이 많이 불기도 했다. 나는 걸었고, 폴은 노래하고. 그 밤, 그 해의 기억들.

        그리고 이번 4집의 노래들. 평범한 사람. 걸어가자. 레미제라블. 벼꽃. 고등어. 그대 슬픔이 보일 때면. 외톨이. 그대는 나즈막히. 알고 있어요. 유리정원. 봄눈. 폴의 공연은 들은대로 조용하고, 고요하고, 엄숙하여 따라 부를 수도 없고, 그저 듣고 박수치는 일밖에 할 수 없었지만 (내 옆의 분은 잠깐 졸기도 하셨다능) 혼자 크리스마스 밤을 보내는 내게는 최고였다. 눈을 맞고 들어와서, 노래가 끝나면 박수를 치고, 눈을 맞으며 버스를 탔다. 차가 밀려서 집까지 1시간 30분만에 도착했고, 나의 남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사람들을 만나 맥주를 마셨다. 이승철 공연이 얼마나 신나고 짧았는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폴의 스위스 개그가 얼마나 허무하고 짜증나고 웃겼는지 이야기했다. 문수의 비밀을 개사해서 부를 때 얼마나 웃겼는지. 

       그 얘기는 못했구나. 단 한 곡, 다 같이 부른 노래. 사람들은 즐겁다. 그 노래를 나즈막히 함께 부를 때 정말 크리스마스 같았다고. 정말 거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즈막히 그 노래를 함께 따라 불렀다. 무심하게도 그대 눈빛은 / 언제나 나를 향하지 않아. 나를 둘러싼 나를 제외한 / 모든 사람들은 즐겁다. / 모든 사람들은 즐겁다. 일요일 오후 4시 55분. 크리스마스 연휴가 끝났다. 지금 밖에서는 눈 쓰는 빗자루 소리가 들리고. 나는 폴 노래를 틀어놓고 일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다. 함박눈이 소리없이 예쁘게 내려주는 일요일. 늦었지만,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아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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