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검색창에 '김연수'라고 치면 오른쪽 연관검색어에 김중혁, 박민규, 김현수, 미스코리아(미스코리아 김연수가 있는 모양이지?)가 뜬다. '김중혁'이라고 치면 간단하게 딱 한 사람과 연관된다. 김연수. (문태준 시인은 연관검색이 아예 없구나) 그러니까 김연수와 김중혁은 연관검색의 관계. 김중혁 작가의 <악기들의 도서관>과 <펭귄뉴스>를 읽었다. 역시 김천. 1970년의(1971년까지, 김중혁 작가는 71년생이니깐) 김천에는 어떤 문학적 태동의 기운이 넘실거렸던 게 틀림없다. 얼마 전,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를 읽고 마음이 먹먹해져 검색창에 문태준만 다섯 번 쳐대며 그의 인터뷰 기사들을 읽었다.

   '자동피아노'를 시작으로 '펭귄뉴스'까지 김중혁 작가를 만난 동안에 느낀 점이란 이런 거다. 한 문장만 쓸 수 있는 작가의 말이 있었다면 그는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나는 쓰는동안 굉장히 재밌었으니, 당신도 재미있게 읽어주길 바랄뿐. 땡.' <펭귄뉴스>의 뒷부분에 수록된 작품은 (특히 '펭귄뉴스') 지루했으나, 대부분의 소설들을 나는 신나게, 그의 상상력에 감탄하며, 재미나게 야금야금 읽었다. <펭귄뉴스>가 발표된 역순으로 수록된 것이라니 그는 '점점 잘 쓰고 있는 작가'라는 것. 그러니 지금 쓰고 있다는 장편도, 발표되어질 다른 소설들도 무척이나 기대된다는 것.


   <악기들의 도서관>을 읽고 이런 메모를 했다. '만약 메뉴얼 잡지가 있다면? 만약 악기소리 대여점이라는 게 있다면? 재밌게 면접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10년을 같은 노선을 다닌 버스가 어느 날 노선을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다면?' 그런 생각을 한 거다. 만약 무엇무엇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은 더 흥미로워지지 않을까, 는 작가의 상상력이 이렇게 신나는 소설들을 만들어낸 거라고. 같은 방법으로 <펭귄뉴스>를 읽고는 이런 메모를 할 수 있겠다. '시각장애인에게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세상의 물건들을 묘사해주는 라디오 방송이 있다면? 개념발명가가 있다면? 나무로 만든 에스키모 지도가 있대매? 자전거 바퀴 회전수로 표시된 지도가 있다면?' 이런 식. 작가의 상상력에 이야기의 살이 붙여져 발명되어진 소설들.

   두 권의 책 중에서 마지막 장이 끝난 뒤에도 다음 장에 쉽게 침을 묻히지 못했던 소설은 '무용지물 박물관'이었다. 나는 정말 이런 라디오 방송이 있었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일밤 잠들기 전, 10분쯤은 눈을 감고 라디오를 듣는 거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사물의 기억따위는 말끔하게 지워버리고 DJ가 들려주는 잠수함과 에펠탑, 암스테르담의 쉬폴 공항을 머릿 속에서 선을 하나씩 그어가며 쓱삭쓱삭 그려내는 거다. 어떤 날은 정말 내가 한번도 보지 못한, 가보지 못한, 사진으로조차 본 적도 없는 사물이 방송되어질수도 있겠지. 그러면 정말 이건 시각장애인용 라디오 방송이 아니라, 언제나 눈을 감고 무언가를 꿈꾸는 사람들의 방송이 되는 거다. 세상엔 눈을 뜨고 볼 수 있는 것보다 눈을 감아야지 볼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일러주는 방송. 그러다 스르르 잠이 들어 노랗고 노란 잠수함이 깊고 깊은 바닷속을 매끄럽게 유영하는 꿈을 기분 좋게 꿀 수도 있는 일. 물론 DJ는 목소리 좋은 김중혁 작가였음 좋겠다. '오늘도 돌아온 이 시간, 김중혁의 무용지물 박물관입니다'로 시작하는. 아, 언젠가 내 사진을 신청사연으로 보내 무용지물 박물관에서 소개시켜달라고 해 보는 상상을 해 봤다. 그는 어떻게 나를 표현해줄까. 뚜렷하고 아름다운 말들이면 좋겠는데. '면목동에 사는 골드소울님은 돌고래의 매끈한 피부를 가지셨군요. 눈은 고등어 눈알처럼 빛나고...' 이런 식이랄까.  

   흠. 결론이란 건 없지만, 굳이 이 글을 마무리하는 결론을 써 보자면, 뭐 그거다. 당신은 계속 신나게 쓰시길, 다음 작품도 나는 신나게 읽어주는 독자가 기꺼이 되어드릴테니.

 
,

들어봐요. 이 노래는 흔한 사랑노래, 로 시작하는 20세기 소년의 '사랑노래'를 듣다가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고, 하루종일 엉엉 소리내어 울었던 그날들이 생각났다. 아주 오랜만에. 밤새 잠을 한 톨도 자지 못하고 친구의 꼭대기 삼각형 방으로 올라가 꾸역꾸역 울음을 삼키며 이야기를 시작했던 아침. 그 때 친구의 표정. 이불을 덮고 엉엉 울고 있는 내 방 문을 친구가 열어보곤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닫았던 밤. 그 날의 실루엣. 이상하다. 이건 들어봐요. 이 노래는 흔한 사랑노래, 로 시작하는 아주 예쁜 멜로디의 예쁜 가사인데. 나는 이제 그 날을 예쁘게 추억하게 된 걸까.

 이 앨범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강(江)'. 특히 이 부분. 저 강물은 흘러가네. 그댄 잊혀지네. 미운 그리운 마음은 덧없이 사라지네. 이 부분이다. 듣고 있으면 오전의 강가에 앉아 조용히 흘러가는 강물 위에 손바닥을 슬쩍 대어보고 있는 풍경이 가만히 떠오른다. 하회마을에는 우물이 없대. 하회마을이 한 눈에 보이는 지도 앞에서 누군가 말해줬다. 하회마을이 이렇게 보면 뱃머리처럼 생겼잖아. 배에 구멍을 뚫으면 어떻게 되겠어. 가라앉아버릴까봐 하회마을에는 우물이 없대. 확실하다. 나는 그 날을 아주 예쁘게 추억하게 된 거다.

이 노래들. 20세기 소년. 만화는 아직 못 봤지만, 왜 나는 20세기 소년하면 우주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20세기라는데도. 하루종일 듣고 있는데. 좋다. 정말. 모래가 있는 강가에 내가 앉아 있는 듯. 강물 흘러가는 소리만 낮게 들리는 듯. 따스한 태양의 기운으로 강물이 끝도 없이 반짝이는 듯. 그 풍경 속에서 이 노래들과 함께 자꾸 모래 속으로 가라 앉는 듯. 기분 좋은 그 날의 기억을 자꾸 들춰낸다. 분명 예뻤던 날.




도서관에서 하진의 '벚나무 뒤의 집'을 읽고 이런 시를 읽었다.


초원의 빛
송찬호


정한아의 '휴일의 음악'을 읽고 다시 한번 시를 읽었다.
복사기로 가서 1540원이 남은 복사카드를 넣고 164페이지를 복사하고 도서관을 나왔다.


,
열네 살 1
다니구치 지로 지음/샘터사


   꽃이 지기 전 열네 살의 몸으로 돌아간 <열네 살>의 2권, 127페이지에는 내가 이 책을 보면서 제일 좋아한 그림이 있다. 48살에 일과 일상에 지친 중년의 남자가 어느 날 잘못 탄 기차를 타고 돌아간 열네 살이라는 역. 그 역에 발을 내딛는 순간, 48살의 술과 스트레스에 찌든 지친 몸의 주인공 나카하라는 14살의 가볍고 젊고 부드러운 몸이 된다. 타임리프. 열넷의 몸은 어색하고,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젊은 모습도 낯설고, 어느 날 실종되어버린 아버지의 변함없는 모습에 눈물이 핑 도는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시간 이동. 그리고 127페이지. 어느새 열넷, 싱그런 자신의 몸에 익숙해진 나카하라가 한 여름의 바다에 뛰어들어 흥분한 몸을 식히고, 바다 위에 둥둥 몸을 띄워 자신에게 쏟아지는 햇볕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하는 생각. 예전의 내게는 이런 14세의 여름은 없었다.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타임리프가 소재인 일본영화나 소설을 볼 때마다 항상 궁금했던 건 그렇다면 '현재'의 시간은 어떻게 되는가, 였다. 현재의 내가 과거로 돌아가 버리면 현재의 나는 어떻게 되는가. 현재의 나는 현재에서 없어져 버리는가. 그럼 미래의 나도 없을 터. 과거의 나만 존재하게 되는 건가. 과거의 나도 현재가 될테고, 미래가 될텐데. 만약 현재의 내가 과거로 돌아간 나와 상관없이, 변함없는 현재를 살아나간다면 과거로부터 다가올 현재와 미래, 현재로부터 다가올 미래는 어떻게 구성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과거로 돌아간 나도, 현재의 나도 주어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저항없이 살아간다면 현재의 내가 우연히 미래의 나와 스쳐 지나가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그를 아니, 또 다른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항상 그런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이 계속되는 동안 영화와 소설은 끝나곤 했다. 모든 결론은 결국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현재로, 혹은 미래로. 과거로 다시 돌아간 기억을 가지고. 그렇다면 과거로 돌아간 기억을 가지고 현재를, 미래를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슬플까. 늘 그 시간들을 그리워할테니깐.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는 평범한 우리가 느끼는 그리움이란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다행스럽게도 아름답지만, 그들의 그리움은 좀 다르지 않을까. 결국 타임리프의 영화나 소설은 모두 같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돌아갈 수 있었으나, 그리하여 과거의 사건들이 조금씩 달라지긴 했었으나, 큰 축은 바뀔 수 없다. 달라질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을 거스를 순 없다.

   열네 살로 돌아간 나카하라. 나카하라의 열네 살은 좀 특별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날들이었지만, 어느날 바람처럼 아버지가 사라졌다. 실종되었다. 그리고 48살이 된 현재까지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카하라는 그 시절로 타임리프된 것이다. 아버지가 실종되던 해. 그걸 막아야 하는 해. 나카하라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48살의 나이에 14살의 과거로 돌아가 14살의 몸을 하고 48살의 자신을 되돌아본다. 14살의 몸으로 14살의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과, 14살의 몸을 하고 48살의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일. 그건 분명 다른 일이다. 48살에 보는 젊은 어머니, 아버지. 그건 미래를 정확하게 예언하는 점술가들이 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은 아니다. 슬프고, 그립고, 후회스럽고, 미안한. 그래서 아쉽고, 서글프고, 눈물나는 그런 종류의 일이다.

   결국 열네 살로 돌아간 나카하라는 바람처럼 사라진 아버지를 잡을 수 있었나. 그리하여 다시 돌아온 마흔 여덟의 나카하라의 삶은 달라졌나.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이 두 질문 중 하나만 그렇다,이다. <열네 살>을 보면서 내 열네 살을 생각했다. 기억력이 안 좋아 추억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그 시절로 나카하라가 아닌 나의 타임리프를 생각해봤다. 어느날 전철을 잘못 탔고, 내리려고 보니 그건 나의 열네 살 정거장이였다는 상상. 그 시절, 내가 막아야 했던 건 무엇이였나. 결국 막을 수 없겠지만, 다시 돌아간다면 실패할 걸 뻔히 알면서도 막아보고 싶은 그것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집엔 아주 오래된 검고 큰 플레이어가 있다. 테이프도 되고, 라디오도 되고, 씨디도 재생되는 플레이어다. 처음 이 플레이어를 샀을 때는 씨디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여서 주로 여기에 테이프로 음악을 많이 들었다. 엄마가 좋아했던 김수희 테이프도, 내가 들었던 오성식 아저씨의 팝스잉글리쉬 테이프도, 동생과 내가 열광했던 서태지 테이프도 모두 이 플레이어에서 재생되었다. 나는 잘 기억나질 않는데, 동생은 이 커다란 플레이어를 아빠가 사들고 왔던 그날 밤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아빠가 이 무거운 걸 한쪽 어깨에 떡하니 올린채 집에 돌아왔던, 우리 세 자매가 좋아서 방방 뛰던 그날 밤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한다. 씨디 플레이어는 진작에 망가져 버렸고, 안테나도 부러져 98.1 쿨 FM밖에 들리지 않고, 테이프 따위는 아무도 듣지 않지만 테이프만이 온전히 재생되는 이 고물 플레이어를 버리지 못하고 서울까지 들고와서 하루종일 틀어놓고 있는 이유는 그 날 밤에 있다. 여기에 나의 열네 살, 동생의 열한 살과 젊은 아빠가 있고, 젊은 엄마가 있다.

   내게 꼭 한번 타임리프할 기회가 찾아온다면 나는 이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안다. 결론은. 시간은 결코 거스를수 없다는 걸. 그 시절로 돌아간 나는 후회스러운 과거 중 어떤 하나도 바꾸지 못하고 현재로 돌아오겠지만, 그래서 나카하라처럼 돌아가 너는 나중에 소설가가 될거야, 너는 나중에 해외에 나가 살게 될거야, 식의 현재의 시간들을 내뱉지 못하고 꿀꺽꿀꺽 삼키기만 하겠지만, 그 시절엔 수줍어서,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하지 못했던 소소한 말들을 남기고 오고 싶다. 지금은 없는 내 소중한 이들에게. 놀러오지 않는 손녀들이 보고싶어 우리집에 오신 외할아버지 앞에서 재롱을 부리며, 할아버지 술 많이 잡수시지 마세요. 그러면 나중에 많이 아파요, 라고. 맑은 옥소리,라고 내 이름을 예쁘게 지어주신 할아버지의 마산 합정동 집 마루에 누워선, 할아버지 나는 이 집이 제일 좋아요. 이 집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 안 갔으면 좋겠어요, 식의 말들을. 젊고 아름다운 엄마에게는 편지에 쓰기만 했지 한번도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은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할 테고, 젊고 건강한 아빠와는 내가 생각하고, 꿈꾸고, 바라는 것들을 더 많이, 더 오래 이야기할 거다. 종달새처럼. 그리고 아빠가 싫어했던 심은하, 서태지와 아이들 브로마이드를 떼내고 그렇게 노래부르셨던 가족사진을 벽에 예쁘게 붙여 놓을테다.

   그런 '시간을 거스르는 흐름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소하고 소소한 일들을 마음에 가득 담고 현재로 돌아와선 지금의 그들에게 더 잘해줘야지. 그러고보니 난 벌써 타임리프를 한 셈이네. 그러네. 이제 더 잘하는 일만 남았구나. 우리가 그 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이야기하며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그리워하는 일만 남았네. 그렇네.



   덧, 곡예사님, 고마워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건 곡예사님이 내게 선물한 타임리프였어요. :)


,
행복한 만찬
공선옥 지음/달


   사실 저는 아무 것도 한 게 없어요. 공선옥 작가가 다 차려놓은 행복한 밥상에 숟가락 하나 들고 열심히 떠 먹은 것밖에, 라며 배를 두드리기라도 해야할 것만 같은 이 기분 좋은 포만감. 공선옥 작가의 행복한 산문집을 읽었다. 읽는 내내 나는 따땃한 아랫목에 자리잡고 앉아 작가의 흙내나는 밥상을 염치없게 내어주는대로 받아 맛나게 먹었다. 됐다고, 배부르다고, 이제 더이상 못 먹겠노라고 손사래 치는 일 없이 나는 그녀가 내어주는 음식을 그릇소리가 나도록 싹싹 긁어가며 맛나게 비웠다. 그러면 그녀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아, 이것도 있다며 구수한 냄새 그득한 오래된 부엌으로 달려가 금세 무치고 부쳐 땅내 고스란히 담긴 음식을 뚝딱 만들어왔다.
 
   그녀의 음식들은 값비싼 재료로 만든 것도 아니고, (아니다. 요즘은 웰빙웰빙해서 이런 농약도 없는 땅내나는 재료들이 더 귀하다) 화려한 장식을 해서 먹기 부담스러울 정도도 아니다. 그저 이 땅 어딘가에 뿌려놓은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난 뒤 열매를 맺은 재료들. 봄의 공기와 여름의 태양과 가을의 바람을 양분삼아 건강하게 자란 우리 땅의 먹거리들을 내 새끼 생각하며 정성스레 만들어 내어 놓은 어미의 소박하지만 무엇보다 풍성한,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들이다. 아, 또 침 넘어간다.  

   엄마의 정성어린 집밥이 생각나면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스르르 넘겨 읽으면 좋을 책. 집에 먹을 것도 없고, 사 먹는 음식은 싫고, 엄마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행복한' 만찬이 아니라 오히려 '괴로운' 만찬이 되기 십상이지만 혹시나 모를 일이다. 기적처럼 누군가 멀리 떨어져 있는 엄마를 대신해 맛난 밥상 차려놨으니 당장 달려 오라고 말해 줄지도. 내게는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 행복한 만찬을 맛나게 읽고 있던 중에 외할머니가 멀리서 커다란 택배를 보내셨다. 명절때나 먹을 수 있는(나는 절대해도 이 맛이 안나는) 밥도둑 할머니표 찌짐, 딱 먹기좋게 익은 묵은지, 싱싱하게 손질되어 있는 장어, 먹기 좋게 한번 쪄서 보내 주신 남쪽 바다의 맛난 생선들, 옥수수에 멸치에 직접 기르신 튼실한 깻잎에, 참기름내 솔솔 나는 명란젓, 짭짤한 나물, 맛나게 양념된 새우와 꽁치와 마늘, 아침에 직접 볶으셨다는 깨에다가 고춧가루, 사탕에 초콜렛까지. 이 택배를 받아들고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찔끔 나올뻔 했다. 당장 장어를 구워 깻잎에 싸서 마늘도 넣고 양념을 듬뿍 묻혀 입 안으로 쉴새없이 집어 넣었다. 정말 눈물 날 정도로 맛있었다. 그러니 공선옥 작가의 <행복한 만찬>을 펼치면 정말 마법같은 '행복한 만찬'이 당신에게도 짜잔, 배달될지도 모르니 당장 요 흙내나는 책을 집어드시길.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게 마법의 책이다.

   나는 요즘 입에 착착 달라붙는, 틀에 박힌 식상한 표현보다 뭔가 발음되어졌을 때 입안이 가득 차 오르는 풍성한 말들을 하고 싶어 책을 읽다 생소한 우리말을 만나면 수첩에 적어두고 사전을 찾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때처럼. 고등학교 때 국어사전을 모조리 외우고 학교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자자한 국어선생님이 계셨다. 아나운서 외모에 단 한번도 똑같은 옷을 입는 걸 본 적이 없는 그 선생님께서 어찌나 사전, 사전을 입에 달고 다니셨는지 그 때 우리 모두 국어사전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다. 사전없이는 수업도 들을 수 없어 복도로 나가야했고, 국어책에 생소한 단어라도 나오면 무조건 그 날의 번호들을 불러 일으켜 세워 그 뜻을 물었다. 물론 정확한 국어사전식 대답을 해야만 앉을 수 있었다. 그 선생님만 아니였으면 나는 일찍부터 국어사전을 사랑하였을터인데. 아무튼 자판을 두드리는 컴퓨터 사전말고 책장 구석, 먼지에 쌓여있던 두꺼운 종이사전에 꺼내 침을 묻혀가면서 찾고 있다. <행복한 만찬>에서는 이런 말들을 찾았다. 도도록하다. 설핏하다. 톱톱하다. 바특하다. 톡톡하다. 역시 공선옥 책의 어떤 구절들은 직접 소리내어 읽으면 더 좋은 것처럼 이 표현들도 그렇다. 톱톱하다. 바특하다. 톡톡하다. 아, 그리고 여기 <행복한 만찬>에서 소리내어 읽었던 좋은 구절. 다이어리에 적어뒀다. 

   아. 어둠과 비와 바람과 달과 별빛을 먹는 우리들. 단순한 채소가 아니다. 봄의 바람과 여름의 비, 가을의 달, 겨울의 별빛. 배 불러 터져도 좋을 행복한 만찬. 외할머니는 택배를 보내시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오신다. 오늘은 뭐 해 먹었노? 장어는 맛있드제? 깻잎은 먹었나? 할머니가 직접 기른거다. 하모. 서울에서 파는 거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새우는 먹었나? 물 좀 더 넣고 끓여 먹지 그랬나? 그랬나? 잘했다. 옥수수는 쪄 먹었고? 달달하드제? 한참 먹겄제? 그래. 맛있게 묵으라.      
   

,
7번 국도
김연수 지음/문학동네


   <7번 국도>까지 마쳤다. <7번 국도> 속 나와 재현이 포항에서 속초까지 7번 국도를 거슬러 올라갔듯이 나도 김연수의 책들을 거슬러 읽었다. 절판된 <스무살>과 <7번 국도>는 조금 멀리 떨어진 도서관까지 땡볕에 걸어가 빌려왔다. 처음 가는 길이라 무작정 버스 노선을 따라 걸어 빙 둘러가 도착해보니 늘 가던 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던 곳이었다. 바보같이. '2001년 문학 활성화를 위해 문예진흥원이 뽑은 좋은책'이란 동그란 스티커가 붙여져 있는 <7번 국도>를 펼치니 놀랍도록 어린 김연수가 불테안경에 주황색 스웨터를 입은 채 이 보다 더 활짝 웃을 순 없다는 듯 아주 방긋 웃고 있었다. 초판의 인쇄가 1997년 11월 17일. 그러니 그는 1997년의 김연수. 무려 십여년 전.
 
  김연수를 거슬러 읽으며 감탄했던 책은 <꾿빠이 이상>과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설레여했던 책은 <스무살>과 <7번 국도>. 그러니까 어떤 식이냐면 내가 김연수를 배우 좋아하듯이 선망하게 된 것이다. 일단 작품을 모조리 찾아 읽고, 기사를 찾아 읽고, 인터넷을 떠도는 만나봤는데 -더라, 식의 잡담들에 혼자 깔깔거리고, 그의 소소한 사생활이 궁금해 미치겠으며, 그를 볼 수 있고 내가 참석할 수 있는 행사면 무조건 신청하고 당첨되어 가게 되었다는 것. 최근에는 창비의 북콘서트에 참석했는데 <꾿빠이 이상>을 가져가 사인을 받았다.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내밀고 그가 내 이름을 그 탐스런 파아란 만년필로 새겨넣는 순간의 어색한 공기를 뚫고 내가 어떤 말을 건넸더니, 그가 내 이름이 기억난다고 말해주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콩당거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야밤의 남산을 순식간에 폴짝폴짝 뛰어서 내려왔다는 사실. 배우 좋아하듯 김연수를 좋아하게된 나는 <스무살>과 <7번 국도>의 주인공들은 분명 주황색 스웨터를 입은 그 시절에 그가 겪었던 어떤 진실한 순간의 모음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 이 책들이 사랑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소제목 자체가 곧 기억의 편린이 되는 <7번 국도>를 한밤중에 읽다가 잠도 오지 않는데 책을 덮고 제발 이런 꿈을 꾸게 해 달라며 잠을 재촉했던 페이지가 있었다. 118페이지.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7번 국도'의 기억이다. 

   그건 1991년의 서연이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재현의 기억 속으로 영원히 들어간 1991년의 서연.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그래서 잊을 수 없는 사람이 평생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그래서 잊을 수 없는 그 모습 그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일도 있다는 사실. 내가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그래서 잊을 수 없는 행동 그대로, 세월 때문에 주름이 생기지도 않고, 술을 많이 마셔 살이 찌지도 않고, 머리카락이 자꾸 빠져 탈모를 걱정하지 않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 없이, 나를 바라봐 주었던 모습 그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나가고 있는 거다. 그래서 언젠가 2008년의 나와 1991년의 서연이 마주칠 수도 있고, 2008년의 너와 이야기로만 들었던 1991년의 서연이 마주칠 수가 있는 거다.

   나는 그 밤, 그런 꿈을 꾸고 싶었다. 1991년의 나와 1991년의 서연이 만나는 모습을 2008년의 내가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꿈. 2008년의 나와 1991년의 서연은 안된다. 2008년의 서연과 1991년의 나도 안 된다. 그건 생각만 해도 너무 슬플 것 같다. 그건 마치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먼저 마음이 떠나 헤어지는 것과 같다. 그건 너무 아프다. 그건 너무 아파서 장마비가 우두둑 떨어지는 포장마차에서 6만 7천원치의 술을 쉬지않고 퍼 마셔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만나려면 1991년의 나와 1991년의 서연이여야 한다. 쓸쓸하겠지만 꼭 2008년이어야 한다면 2008년의 나와 2008년의 서연이 만나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 밤, 원하는 꿈은 꾸지 못했다. 다음날 일어나 <7번 국도>를 다시 읽어 나갔고, 더 이상 책을 덮고 꿈을 꾸고 싶은 부분은 없었다. 속초에서 그들의 7번 국도는 끝났다. 진짜 정동진의 일출을 보자고 책 속의 나는 덧붙였지만 그들이 그 일출을 결국 보았는지, 보지 못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쨌든 이야기는 1996년 8월 7일로 끝나 있었다.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 내 기억 속에 담아둔 2000년의 그. 절대 2008년의 그가 아니다. 2000년의 그다. 복잡한 지하철역에서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고 마음이 쿵 주저 앉게 되는 때는 그런 순간이다. 2000년의 그를 발견하게 되는 때. 어떤 날은 그럴리가 없다며 쓱 앞으로 지나가 그가 아님을 확인하기도 했지만, 마음이 쿵 떨어지는 순간, 고개를 바로 돌려 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하는 날들이 더 많았다. <7번 국도>를 읽으면서 그 순간들을 위로받았다. 그 순간들을 이해받았다. 그래, 내 기억속 2000년의 그도 어떤 날의 내 그리움을 양분삼아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테지. 어쩌면 2000년 그 곳으로 가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럼 너무 슬퍼질 것 같아. 나는 2008년의 사람이니까. 그냥 언젠가 과거의 너와 현재의 내가 마주하는 날이 없기를, 마주하게 된다면 과거의 너와 과거의 나이기를. 이건 너무 꿈만 같은 일 같아. 꿈만 같은 일.

    이제 <가면을 가리키면 걷기>만 남았다. 아, 읽는 내내 갖고 싶었던 파스텔 톤의 <스무살>은 중고샵에서 발견했다. 도서관 책을 훔칠 필요는 없어졌다. 흐흐- 이런 상상을 해봤다. <스무살>을 읽는 동안. 어떤 소설가의 첫사랑이 되는 것에 대해. 소설가와는 헤어졌지만 수년이 지나보니 본래 소설가는 아니었던 소설가는 소설가가 되어있고, 소설가의 첫사랑이었던 그 시절의 이야기가 오래된 어떤 책에 담겨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에 대해. 그 책 속에 그려진 자신의 아름답게 빛나는 젊은 시절에 대해. 소설가의 첫사랑은 늙어가지만, 오래된 책 속 주인공은 영원히 늙어가지 않게 되는, 주름이 생기지도, 살이 축축 늘어지지도, 삶이 지긋지긋해지지 않는 소설 속 삶에 대해. 그러면서 배우처럼 한 작가를 좋아하게 된 나는 생각했다. 책 속에 존재하는 그 시절의 나를 가진 이는 얼마나 행복할까. 나도 소설가와 사랑했어야 했다. 꼭 한 명, 누군가와 첫번째 사랑을 해야 했다면, 그건 훗날 소설가가 될 운명을 지닌 사람이여야 했다.


,

바닥, 옥산휴게소

from 서재를쌓다 2008. 6. 30. 13:10
어제, 너무 화가 나서 도저히 집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반납할 책을 챙겨 들고 나와 조금 걸었다.
주말, 비가 오래 올 줄 알았는데, 하룻밤뿐이었다.
비온 뒤 쾌청한 하늘이 아주 새파래서, 썬크림도 안 바른 얼굴로 오래오래 하늘을 올려다봤다.
자주 걷는 그 길에는 얼마 전, 주홍색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침엽수같이 생긴 진한 초록의 식물에는 연한 연두빛 새순이 돋아나 있었다.
나는 그것이 신기해 한참을 들여다봤다.
진하디 진한 초록과 연하디 연한 연두가 한 몸으로 이어져 있다.

간밤에 시인의 낭송 소리를 엠피쓰리 플레이어에 담아뒀다.
다 옛일이 되었다, 이 구절 하나에 마음이 먹먹해져 버렸던 기억.


바닥
문태준


그리고.
도서관에서 이런 시를 읽었다.



옥산휴게소
정호승


오늘은 하늘이 조금 흐리다. 바람도 적당히.
이번주에도 비소식이 들리는데, 또 하룻밤뿐인건 아닌지.

,
돌의 내력
오쿠이즈미 히카루 지음, 박태규 옮김/문학동네

  
    나는 이 책을 '돌의 내력'을 담은 장편소설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144페이지에서 뚝 끊겼다. 그래서 큰 챕터가 나눠진 것이라 생각하고 '세눈박이 메기'를 읽었다.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돌의 내력'은 144페이지가 마지막이었다.

   그러니까 <돌의 내력>은 '돌의 내력'과 '세눈박이 메기' 두 중편소설을 담은 책이다. '돌의 내력'을 읽다 가슴이 시릴대로 서늘해진 나는 갑자기 밝아진 분위기의 '세눈박이 메기'를 그냥 덮어버리고 읽지 않으려 했다. 이건 순전히 '돌의 내력'의 서늘함 때문이었다. 그러다 '돌의 내력'을 쓴 작가라는 생각에 끝까지 읽어냈다. 그러다 이 문장을 발견했다. 279페이지. "세계는 그야말로 웅대하고 산뜻했다." 이 짧은 문장을 반복해서 읽었다. "세계는 그야말로 웅대하고 산뜻했다." 세계는 그야말로.

   '세눈박이 메기'는 일본의 민간신앙과 종교의 마찰을 한 평범한 가족 속에서 이야기한다. 내가 반복해서 읽었던 문장의 앞에는 소나기가 한동안 시원하게 쏟아진다. 주인공과 그의 삼촌은 낚시를 하던 중이었고, 그 날은 민간신앙에 따르면 절대 낚시를 해서는 안되는 날이었다. 그들은 같이, 혹은 따로 가문이냐, 신앙이냐를 두고 갈림길에 서 있었다.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무료한 낚시 중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고, 그들은 흠뻑 젖은채 비를 피했다. 구약성서에서 신은 대부분 폭풍우과 함께 나타나,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소나기가 그쳤다. 세상이 10미터쯤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다시 낚시를 시작했고 조그만 메기 한 마리를 낚았다. 처음부터 낚시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 별들과 은하수가 보이기 시작하는 밤하늘 아래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던 그 때, 이 문장이 (내게) 반복되었던 것이다. 세계는 그야말로 웅대하고 산뜻했다. 세계는 그야말로.

   세눈박이 메기의 세계가 그야말로 웅대하고 산뜻하기는 해도 이 책의 압권은 단연 '돌의 내력'이다. '돌의 내력'을 읽다 '세눈박이 메기'가 시시해졌을 정도니까. 강가의 돌 하나에도 우주의 전 과정이 새겨져 있다, 고 시작하는 소설은 마치 우물 안쪽의 서늘한 돌을 만지는 느낌이다. 우연히 들른 마을에 아직도 남아 있는 우물이랄까. 발끝을 있는대로 바짝 들어올리고 허리를 바짝 꺽어 캄캄한 우물 속 서늘한 바람의 기운을 마주하고선 손바닥을 뻗어 서늘한 돌의 감촉과 그 속에 끼여있는 이끼의 눅눅함을 쓰다듬는 느낌. 내 눈 아래 캄캄한 어둠의 끝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이 있고, 그 물 속에 어떤 것이 담겨져 있을지 모르는 상황. 우물에 빠져 죽어 귀신이 되어 이승의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의 실체와 마주할 수도 있고, 지금 이렇게 떨어져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고독하게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안에서 아무런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늙어갈지도 모르는 내 두려움이 깊게 가라앉아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읽은 '돌의 내력'은. 결말이 서늘하고 따뜻하다. 결말이 좋아 마지막 몇 페이지만 두 번을 읽었다. 처음에는 서늘했다. 6월이었는데도 피부 끝으로 한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두번째는 따뜻했다. 나는 내가 처음에 결말을 잘못 읽어냈구나, 생각했다. 이건 직접 읽어봐야 안다. 

  각섬석반려암, 석영섬록암, 구과휘록암, 감람석현무암......
   

   고독할 때,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고 느껴질 때, 내 어떤 과거가 끔찍해질 때 주문을 외우자. 각섬석반려암, 석영섬록암, 구과휘록암, 감람석현무암. 그저 평범한 돌멩이 하나에도 지구라는 한 천체의 역사가 아주 선명하게 새겨져 있으니, 나보다 더 오래 전에 이 세상에서 태어나, 수도 없이 깍이고 깍이고 깍여나갔으니. 이 주문은 분명 효과가 있을 것이다.


,
검은 책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민음사


   내가 가진 유일한 세계지도, 삼성지능업 세계지도에서 보자면 터키를 대표하는 건 성 소피아 성당이다. 포털 검색창에서 '터키 성 소피아 성당'이라고 치니 성 소피아 성당을 앞에 우뚝 세우고 가지각색의 하늘이 펼쳐진다. 사파이어 빛깔의 파아란 하늘, 금세 쏟아질 것 같은 회색빛 하늘, 노을을 품은 주홍빛 하늘, 야경만 환히 빛나는 까아만 하늘. 성당의 지붕, 돔 위에 하얗게 눈이 내려앉은 사진도 있다. 이 즈음이 <검은책>의 계절일테지. 이 곳에서 쓰여진 책을 읽었다. 언젠가 친구가 꼭 가보고 싶어했지만 결국 계획에서 빼버릴 수밖에 없다고 했던 나라, 터키.
 
   내겐 사람에게도 그렇듯 책에게도 첫인상이 있다. 물론 사람에게도 첫인상을 착각해 나랑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나쁜 사람으로 분류했다가 나랑 닮은 구석은 눈씻고 찾아볼래도 없지만 즐겁게 어울릴 수 있는 좋은 사람으로 재분류되는 경우도 있듯이 (그런 사람은 대개 사귀고 보면 닮은 구석이 꼭 한 군데 이상은 있는 경우긴 하다.) 책도 그렇다.  이건 도저히 내가 읽지 못할 딱딱하고 어렵고 재미없는 나쁜 책으로 분류해 몇 장 채 넘기지도 못하고 덮어버렸다가 시간이 지나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을 때 후다닥 끝까지 단숨에 읽어버리게 되는 딱딱하지만 촉촉하고 어렵지만 깊이 있으며 재미없는 부분과 재미있는 부분이 공존하는 좋은 책으로의 재분류. 노벨상 수상작가라고 하면 일단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어 <눈>인지 <내 이름은 빨강>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도서관에서 꺼내들었다가 다시 금세 꽂아두었던 기억을 뒤로하고 <검은 책>을 읽었다. 정혜윤의 <침대와 책>에 인용된 구절 때문에.  

   쉽지 않았다. 어려웠다. 길고 어지러운 미로같은 만연체의 홍수 속에서 헤매고 또 헤맸다. 출구를 찾아가는 내 앞으로 한 문장 안의 넘치고 넘치는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와 조사가 넘실거렸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발로 헤쳐내야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는데 그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코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도 익숙해지면 어느새 환해지는 것처럼 어느 정도의 미로를 지나니 나는 그것들을 손으로 발로 헤치내지 않고서도 미션 임파서블의 거미줄같은 보안선을 사뿐히 피해가는 주인공처럼 묘기를 부리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어떤 형용사와 명사는 쉽게 지나칠 수 없어 다시 돌아가 가슴팍에 단단히 쑤셔넣고 함께하기도 하면서. 딱딱하고 어렵긴 했지만 재밌고 좋은 책이었다. 내 첫인상이 반쯤은 틀린 셈이다.

   그러다 내게 마법같은 순간이 왔다. 2부를 읽어가고 있던 때. 이 부분이다. 174페이지.

  
   그 때 나는 집 앞 도서관에서 이 책을 읽고 있었는데 저녁시간이었다. 그날은 운 좋게도 늘 내가 호시탐탐 노렸던, 그러나 너무나 안락해 그누구도 쉽게 자리를 떠나지 않았던 창가의 쿠션의자를 차지했던 날이었다. (정말 그 의자에 앉으면 뭐든 잘 읽힐 것만 같았다. 창가의 나무의자들은 죄다 딱딱하기만 해서 허리가 금세 아파왔다.) 과연 그 의자는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안정감 있는 양 옆의 손잡이하며. 허리를 받쳐주는 믿음직스런 쿠션의 감촉하며. 그 창가의 쿠션의자에 허리를 기대고 <검은책>을 읽어나가고 있는 즈음(끊임없이 책은 말하고 있고. 나 자신이 되어야 해!) 창밖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앞 건물의 옥상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이는 환한 여름 저녁밤의 풍경이 점점 어두워졌다. 해가 완전히 지고 도서관 안 형광등을 더욱 빛을 발했다. 그러다 저 구절을 읽다 우연히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는데 그 너머에 지루한 얼굴의 내가 있었다. 믿을직한 쿠션의자에 앉아 <검은책>을 읽고 있는 글자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내가. 아, 나는 그 순간 이 책의 명사며 동사며 형용사며 조사들이 모조리 이해될 것 같았다. 제랄과 갈립도. 뤼야와 보스포루스 해협도. 알라딘 가게와 코낙 극장도. 지금까지 읽었던 이야기도, 앞으로 읽을 결말도 모조리.

   그리고 그 밤. 믿음직한 쿠션의자 위에 앉아 창 속의, 아니 창 바깥의, 아니 거울 속의 나를 보면서 책 속의 갈립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내가 사랑했었던 한 사람을 생각했다. 내가 사랑했던 그의 행동, 그의 표정을 생각했다. 눈과 입은 충만하나 코는 고독했던 얼굴. 그리고 <검은책>. 처음부터 끝까지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눈 앞이 번쩍였다. 뭔가 내 마음 한귀퉁이를 쓸고 나갔다. 역시 나는 나를 끔찍히도 사랑했던 거다. 그건 그의 행동, 표정이 아니라 그것들은 나의 행동, 나의 표정, 나의 마음이었다. 갈립은 점점 제랄이 되어갔지만 그건 제랄의 외투를 걸쳐입은 갈립일 뿐이었다. 갈립은 점점 이 세상의 오직 하나뿐인 깊고 깊은 갈립 자신이 되어갔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나 자신을 알기 위해, 온전한 나 자신이 되기위해 평생을 노력하지만 나 자신이 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기도 하고, 나 자신이 되는 순간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 자신이 된다는 건.

   아, 횡설수설. 나는 이 책을 살아가면서 스무번은 넘게 읽어야 온전한 작가의 뜻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스무번이 넘는 오독을 하면서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이해했노라고 만족할지도 모른다. 그 때마다 창가가 거울이 되는 마법같은 순간들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스무번이 넘는 나를, 스무번이 넘는 모습으로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멀고 먼 성 소피아 성당의 나라 한 쪽 구석, 쓸쓸한 오르한 파묵의 창가에 앉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다보면 언젠가 브라보를 외치며 온전한 나 자신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읽어나가며 제일 위안이 됐던 것은 소설의 형식에 있었다. 제랄의 시詩적인 칼럼이 끝나면, 여전히 나 자신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갈립의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라는. 그리고 갈립의 한 토막 분량의 미로가 끝나면 다시 제랄의 '마치 흐린 날 아침, 꿈에서 깨어나 맞이하게 되는 회색빛의 칼럼'이 시작될 것이라는. 이 두 이야기가 연결된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리며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는 걸. 결국 오르한 파묵의 <검은책>은 2권의 314페이지에서 끝이 났지만 여전히 온전한 내가 되지 못해 헤매고 있는 나의 검은책은 끝도 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정말.  



   덧, 제랄의 칼럼은 모두 좋았는데(갈립의 칼럼이기도 한) 특히 2장의 보스포루스 해협의 이야기(이건 마치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마지막 카메라의 시선을 연상시켰다)와 6장의 마네킹 이야기가 특히 좋았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난 수요일, 일산에서 김연수 작가의 낭독회가 있었다. 우연찮게 한 달여 전에 일산에 있다는 아람누리 도서관에서 진행된 은희경 작가 낭독회 기사를 봤다. 그 기사에는 다음 달은 김연수 작가가 낭독회를 합니다, 라고 적혀져 있었다. 앗싸. 가야지. 그런데 다음 문장, 일산 주민들만 초대합니다. 이런.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 메일을 보냈다. 일산주민도 아니면서 일산주민인 척 한 건 아니고, 일산주민이 아니지만 작가님을 아주 좋아하는 독자라 꼭 참석하고 싶다고 했다. 이틀 후 메일이 왔는데, 착한 담당자께서는 오히려 먼 거리를 걱정해주셨다. 그래서 아 기다리고 오 기다린 지난 수요일.

   김연수 작가를 보러가는 길인데 일산까지가 뭐가 머냐, 고 생각은 했지만 한 번 갈아타고 내내 서서 가는 길은 정말 길었다. 책도 읽다가 지쳤고, 음악도 듣다가 지쳤다. 다리는 아파죽겠는데 자리는 전혀 안 생기고. 종로쯤엔 자리가 나겠지, 안국동에서는 분명 많이 내릴거야, 굳게 믿었지만 다들 일산 언저리까지 가는 사람들이었다. 몇 정거장 남기고 겨우 앉았다. 뭐 그렇게 힘들게 갔지만 결론은 일산에서 아주 좋은 시간을 보내고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발걸음도 상쾌하게 돌아왔다는 이야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날 김연수 작가는 일산 주민들을 위한 특별한 단편소설을 만들어 왔다. 제목하야 세계의 끝 여자친구. 그리고 이 A4용지 10매 분량의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멋지게 낭독했다. 작가님의 설명은 이랬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일산을 배경으로 썼다. 스물다섯의 남자가 자신이 지나가고 있는 시간에 대해 이게 무슨 의미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어떤 아주 햇살이 뜨거운 날의 오후같은 이미지의 이야기다.

   이 낭독이 특별했던 건 중간중간 김연수 작가가 직접 선곡한 노래와 함께 듣는 낭독이였다는 것.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이렇게 시작한다. "뭔가를 예감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다음날 등산을 하기 위해 배낭을 꾸린 뒤 부푼 기대에 가득 차 올려다보는 창밖의 달무리, 두 시간이나 기다려서 들어갔건만 똥이 마려운 것인지 굳은 표정으로 앉아서 내게는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는 면접관, 밤을 새가며 1주일 만에 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과제를 모두 끝마친 뒤 제일 먼저 강의실에 도착해 잠시 책상에 기댄다는 게 한 시간이나 실컷 자고 나서 깨어나 바라보게 되는 핸드폰 액정의 시각, 둥근 달무리나 똥마려운 얼굴, 혹은 어느덧 지나가버린 한 시간을 통해 우리는 인생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문장들은 다른 문장들로 이어지고, "내가 열람인의 발길이 뜸한 식물학 코너에 쪽혀 있던, 아마도 아무도 대출한 적이 없어보이던 그 책을 빌려온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라는 문장을 읽은 뒤에 Iron&Wine Naked As We Came가 울러퍼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Naked As We Came의 달콤한 기타선율이 끝나면 김연수 작가가 그 다음 문장을 이어 읽는다. 경상도 사내의 억양이 잔뜩 묻어나는 친근감 어린 목소리로. "잎 지는 초저녁, 무덤들이 많은 산 속을 지나왔습니다."로 시작해 "약간 무뚝뚝한 목소리로 그 할머니가 내게 말했다."로 끝나면 이어지는 이바디 '오후가 흐르는 숲'. "말하자면 이런 이야기였다."로 시작해 "그렇게 최근 들어서 국내에, 그것도 주로 가로수로 보금된 나무이기 때문에 한 그루의 메타세쿼이아를 보는 일은 그처럼 드물었던 것이다."의 나무 이야기로 끝나면 이어지는 정직한 제목의 나무. 소규모아카시아밴드가 부른. 그리고 김희선 할머니과 스물다섯의 괜찮은 청년과의 대화가 이어지고, pete and the pirates'Moving'. 메타세쿼이아 나무 밑에서 2천어치의 우표가 붙여진 편지를 발견하고는 world's end girlfriend 'birthday resistance'.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지막 노래 전에는 내가 이 소설을 세 번 읽으면서 제일 좋아했던 구절이 있다.

   나는 생각해봤다. 맞아요. 그랬어요. 십 년은 고사하고 당장 내년 이맘때는 어떨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다음 여름에도 햇살이 이렇게 뜨거울지, 어떤 노래가 유행할지, 다음에는 어떤 나라의 이름을 가진 태풍들이 찾아올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나는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바라봤다. 호수 건너편, 메타세쿼이아가 서 있는 세계의 끝까지 갔다가 거기서 더 가지 못하고 시인과 여자친구는 다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무척 행복했고, 또 무척 슬펐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그 거리에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남게 됐다. 다시 수만 년이 흐르고, 빙하기를 지나면서 여러 나무들이 멸절하는 동안에도, 어쩌면 한 그루의 나무는 살아 남을 지도 모르고, 그 나무는 한 연인의 사랑을 기억하는 나무일지도 모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희선 씨에게 내가 말했다.
   "맞아요. 그러니까 그렇게요."
 
   그리고 마지막 곡. 이 곡의 이미지에 맞는 톤의 소설을 쓰고 싶었다던. La Buena Vida La Mitad De Nuestras Vidas가 밝게 흘러나오면서 김연수의 아주 특별한 낭독이 끝났다.

   아, 이 1시간이 얼마나 달달했는지. 이 소설이 이 낭독회를 위해 특별히 만드셨다는 김소연 시인의 말을 들은 순간. 멀리, 힘들게 오길 잘했구나, 안 왔으면 어떡할 뻔 했냐며 좋아라 했다. 낭독이 시작되자 조명은 어두워지고 분위기 좋은 향초 냄새가 그득했다. 스위치를 누르면 파파팍 깜빡거리며 로딩시간을 두고 켜지는 스탠드 불빛 아래서 김연수 작가가 낭독을 시작했다. 노래 제목이 써진 바로 윗문장을 읽고나면 스탠드를 껐다. 그러면 음악이 흘러나왔다. 작가는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까닥거리고 미소를 띄며 음악을 느꼈다. 마치 내 선곡 죽이지? 라는 것처럼. 목이 타는지 자주 물을 따라 마시고, 가끔 우리들을 염탐하듯 씨익 둘러보기도 했다. 가수나 배우처럼 늘 TV를 켜면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또 언제 얼굴을 마주할지 모르기에, 나는 자주 그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가 낭독한 문장의 목소리 위에 립싱크를 해 보기도 했다. 행복했다. 즐거웠다. 달콤했다.

   내 옆에 50대 초반의 아주머니가 앉았는데, 아아, 낮은 탄성을 터뜨리시며 자주 노트에 뭔가를 메모하셨다. 뭘 적으시나 궁금해서 훔쳐봤는데 이런 식이었다. 김연수 작가. 성균관대 영문과. 밴드하는 게 꿈이었음. 햇살이 뜨거운 날의 오후. 시 모임. 기타리스트. 죽음의 향연. 자주 만나는 작가 일산의 김선생님. 등등.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들.

- 사실은 제가 소설을 다 쓰고 나면 혼자 춤을 춰요. 소설을 쓰면서 음악을 계속 듣고 있거든요. 한 가지 음악을 반복적으로 들으면서 소설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다 쓰고 나면 시간이 거의 새벽쯤이죠. 최대한 늦춰서 원고를 보내기 때문에, 출근하기 직전에 원고를 보내는 거죠. 해가 뜰 때 정도, 다 썼다는 생각이 딱 들고 기분이 아주 좋아요. 그러면 덩실덩실은 아니고요. 30대 후반답지 않게 예쁘게 춤을 춰요.
(김소연 시인이 30대 후반답지 않은 예쁜 선곡들이라고 하니깐 센스있게 받아치셨다는)

- 마지막에 나온 음악, 그 이미지를 가진 소설을 쓰겠다, 라는 생각으로 쓴 소설이예요. 그래서 톤도 약간 밝게 가는 톤으로 썼던 것이구요. 나이도 스물다섯살 정도가 나와서. 스물다섯살이 사실은 이렇게 괜찮은 생각을 할 리가 없어요. 스물다섯살의 남자들이란 좀 바보 같거든요. 그렇게 하면 소설이 엉망이 되니까.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서. 지나가고 있는 시간들에 대해서 이게 무슨 의미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그런, 어떤 아주 햇살이 뜨거운 날의 오후 같은 그런 소설을 쓰려고 한 것이죠.

-  골치 아픈 소설 되게 많이 썼거든요. 오늘과 같은 소설은 잘 안 써요. 고문에 가까운 소설만 쓰거든요. 낭독하면 반은 나가실. 제가 발음도 안 되는데다, 한자도 많고, 굉장히 어려워요. 오늘 본 소설을 가지고 제 책을 사시고 저한테 항의하고 그러시면 안돼요. 미리 말씀 드려요. 제가 원래 쓰는 소설은 굉장히 어려운 소설이예요. 남들처럼 호란도 딴 걸 해 보고 싶었겠죠. 그래서 클래지콰이를 하다가 어쿠스틱한 쪽으로 해 보겠다 해서 프로젝트 밴드를 만들었어요. 세계적인 추세에 따르면 호란 혼자 만들었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두 명이 합쳐져 가지고 이바디라는 이바지 음식 있죠? 그 이바디. 함경도 식으로 읽으면 이바디. 그래서 호란 목소리를 제가 되게 좋아하거든요. 노래를 워낙 좋아하니까 가수들에 대한 존경심이 커요.  저는 모든 가수들이 저보다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호란도 마찬가지로. 제가 팬이죠. 그런데 어느 날 호란이 책을 냈어요. 호란의 다카포. 책을 냈는데 저한테 붙여준 거예요. 얼마나 좋았겠어요?  딱 펼쳤더니 김연수 선생님에게, 적혀 있더라구요.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같은 또래 내지는 어린 줄 알고 있었는데. 저는 좋아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김연수 선생님에게, 되어 있으니까 가까이 할 수 없는 감정이 확.    

-  소설을 발표하고 나면 항상 이 느낌의 음악을 들으면서 썼다, 말하자면 사운드트랙을 내고 싶은 거죠. 이 음악과 같은 소설을 썼으면 좋겠다, 라는 게 저의 꿈이었는데. 작년에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책을 낼 때 만들었어요. 음악들을. 내가 쓰면서 이런 식의 문장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음악들을 녹음해서 주위에 나눠졌죠. 아주 반응이 좋았어요. 아직까지도 그걸 자기한테 보내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30장만 찍고 더이상 찍질 않았거든요.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사운드트랙 같은 것들을 만들어서 끼워..줘..야 되겠죠? 그냥 팔면 아무도 안 살테니까. 끼워 주는 걸로 해서 한번 냈으면 좋겠어요.
 
- 소설을 쓰기 전에 음악을 막 찾아 헤매요. 닥치는대로 막 듣다가 이 소설에 막 맞겠다는 음악을 찾으면 그때부터 그것만 들어요. 딴 음악은 듣진 않고. 한 음악만 계속 들어요. 소설을 끝날 때 보니까 저는 아이팟 프로그램을 쓰는데 거기 재생횟수가 나와요. 끝날 때 보면 89번 정도 한 곡만 들었더라구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저는 그 통속적인 게 너무 좋아요. 대중음악의 느낌이, 클래식보다 너무 좋아서 제가 살아가면서 몇 번 아, 너무 좋다, 너무 행복하다, 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음악듣다가 들거든요.      

- 제가 지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요. 인문적이다, 책을 많이 읽는다, 많이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기억력이 되게 안 좋아요. 그래서 이름을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추천하고 싶은 음악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음악을 기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좀 들구요. 추천해주고 싶은 음악은, 제가 요즘 되게 좋아하는, 영원히 좋아할만한 사람인데요. 포르투갈 출신의 작곡가가 있어요. 호드리구 레앙이라고. Rodrigo Leão이라고. 이 사람이 원래 있었던 그룹이  Madredeus이라는 그룹이 있어요. 엄마신. 거기 있다가. 그 룹도 제가 좋아하는 그룹이예요. 이 사람 음악은 주로 사운드트랙으로 만들었던 음악인데. 음악 자체가 계속 다른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음악들이예요. 실용적으로는 저는 사운드트랙을 많이 듣거든요. 보통 어떤 심상을 가지고 만든 음악들. 저는 영화를 안 봐요. 영화 보는 사람들을 아주 싫어해요. 영화를 안 보는데 그 이유 또 하나도 사운드트랙을 많이 듣는데 내용과 연결이 되면 곤란하거든요. 그래서 영화를 안 본 채로 사운드트랙을 들으면 제 독자적인 이미지가, 이야기들이 만들어 지거든요. 그래서 실용적으로 들을 때는 영화 사운드트랙을 많이 듣는 편이죠. 그리고 최근에는 베이루트라는. 이 사람도 혼자 하는데 이름을 베이루트라고 지었어요. 베이루트를 좋아하고 그렇습니다.
 
-  약주는 많이 안 먹고 술만 먹습니다. 약주 먹을 나이가 아닌 것 같은데.

-  제가 만들어내는 건 거의 없구요. 다 찾는건데 전제조건이 하나 있어요. 말하자면 소설에 미친 사람들의 전제조건과 같은 건데요. 뭐냐하면 우리가 모를 뿐이지 모든 사물에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라는 믿음같은 게 하나 있어요. 찾지 못할 수도 있고, 그 이야기가 감춰졌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근본적으로는 모든 게 이야기가 다 존재 한다. 지금 막 만들어진 게 아니면. 그러고 나면 일단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거죠. 책은 일단 저는 소설책 많이 읽구요. 가끔씩 뭐 최근에 죽음의 향연이라고 광우병 관련해서 광우병이 도대체 문제가 뭔가, 하는 건데 무진장 재밌어요. 그런 거 읽구요. 그러니까 주로 재밌어서 책을 읽어요. 뭘 찾아야 되겠다고 해서 책을 읽는 건 아니고요. 재밌으니까 제가 재밌는 책들만 골라서 보는 거구요. 그 시간까지 뭘 찾는 것은 저는 그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일단 이야기를 만들어서 쓰다가 보면 중요한 소재가 어떤 사물이 됐건, 사람이 됐건, 시대가 됐건 큰 이야기는 존재를 하구요. 큰 이야기들 말고 작은 이야기들도 다 이야기가 있어요. 사실은. 저는 거기에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단 쓰기 시작하는 거예요. 일단 현실성을 띄기 시작하면 그 이야기 속에 나오는 것처럼 중요한 의미를 다 띄는 물건이다, 라고 생각을 하고요. 그런 경험들을 되게 많이 했어요. 예를 들어서 1958년도 여름에 무슨 사건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신문을 뒤져보는 거죠. 그러면 틀림없이 사건이 있어요. 그러면  그걸 찾아서 제가 쓰는 거죠. 있을줄 알았다, 하고 찾기 때문에 찾는 건데요. 소설 쓰다보면 일단 그 전제조건, 모든 것들은 일단 이야기가 있다, 숨어있을 뿐이지, 그걸 일단 믿으시구요. 믿은 다음에 소설을 쓰면서 거기에 가면 있을 것이다, 감 같은 게 들면 그 때 자료를 찾아보는 거예요. 제가 뭐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지적인 작가네, 했는데 별로 안 지적이구요. 책도 예전에는 많이 봤는데 연세가 약주 먹을 연세가 되어가지고 요즘 책을 많이 못 봐요. 제가 이런 말 하기는 참 부끄럽습니다만 젊었을 때 책을 많이 읽으세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  결혼했습니다. 했구요. 딸도 있구요. 그 딸이 이 도서관을 굉장히 자주 다녀요. 어린이 도서관에서 지내는데, 집이 가까운 곳에 있어서. 따님이죠. 제가 따님이라고 부르거든요. 굉장히 훌륭한 분이셔가지고. 그 분이 아홉살이예요. 크구요. 오늘 또 온다고 했는데 올 분이 아니예요. 말은 온다고 했는데 막상 닥치면 자기 좋은 거 하고 약속을 잘 안 지키기 때문에. 안 오네요. 그렇습니다. 저는 그런 질문 되게 좋아합니다. 큰 따님은 아주 훌륭하신 분이죠. 그 분도 오늘 오신다고 그랬는데 안 오시네요. 걸어서 15분이면 올 수 있는거린데.

- 열무는 말이죠. 제가 아주 싫어하는 음식이예요. 입에 대질 않는 음식이거든요. 그래서 열무라고 지었구요. 그렇습니다. 지금도 안 먹습니다. 열무는. 잠깐 먹었었는데.

- 사실은 소설가가 되서 굉장히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하면 닭살이긴 한데 사실은 소설가가 되어서 사람이 된 경우예요. 제가 소설가가 아니었을 때. 스물 두 살, 세 살  이럴 때죠. 소설 열심히 써 본 적이 없었는데. 그 때는 참을성도 없고, 가치판단도 아주 저능적이었고, 말도 그냥 막 내뱉고 이런 사람이었어요. 소설을 쓰고 나서, 뭐라고 해야할까요, 그게 참 독특한 경험인데요. 어떤 거와 가깝냐면요. 마라톤. 마라톤을 하면 차이가 나는데. 제가 한번 경험을 했어요. 제가 뛰다가 포기를 했어요. 뛰다가 포기한 사람들은 뒤에서 회수차가 와요. 페이스 메이커들이 지나가요. 3시간, 3시간 반, 4시간, 4시간 반, 5시간 지나가는 거죠. 뛰다보면 앞으로 4시간이 지나가고, 저는 뒤로 가고 있죠. 그 다음에 4시 반이 지나가죠. 그러면 꼭 회수된다는 거죠. 5시간이 지나가요. 그러면 그 뒤에 차들이 오는 거죠. 회수되어서 가는데 그 차 안은 정적이예요. 아무도 얘길 안 해요. 다들 이러고 있어요. 제가 타고 간 차는 VJ특공대가 올라왔어요. 지금 기분이 어떻습니까, 그러면 막 욕하고 당장 집어치워라. 그러면 회수차 타고 결승점에 들어가는데 일주일동안 죽는 줄 알았어요. 몸이 아파가지고. 온 몸이 쑤시고 부러져 나갈 것 같고. 마라톤은 너무 힘들다. 정말. 한번은 다 뛰었어요. 보통 36km부터 고통이 시작되거든요. 그 때부터는 뛰는 것도 아니고 걷는 것도 아니예요. 걷을 힘이 없어서 뛰는 그런 자세예요. 경보 자세로 뛰는데. 그로부터 10km 더 가야 한다 하면 그 때 속도로 봐서는 1시간 반 정도 더 가야되나, 어떨 때는 시간만 보내자, 시간만 보내면 어떻게든 들어갈 테니깐 그런 자세로 들어갔어요. 끝까지. 들어가고 나서 그 다음날 하나도 안 아파요. 몸이 정말 하나도 안 아파요. 소설을 쓰다보면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있어요. 보통 마감이 있기 때문에, 마감을 지켜야 되는 거죠. 보통 안 하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을 항상 해요. 안하고 안하다가 하게 되는데. 그렇게 하고 나면, 아까 제가 아까 춤을 춘다고 했잖아요. 무진장 좋은 거예요. 무진장 그렇게 좋다는 걸 알게 되는 거죠. 소설가가 되어서 얻은 것 중에 가장 큰 건 그걸 알게 된 거 같아요. 인내심, 그런 문제도 아니구요. 참을성, 그런 문제도 아니고 뭔가 알기 시작한 거예요. 어떤 식으로 세상이 돌아가는지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 거 같아요. 그게 얻은 가장 좋은 것이구요.    

- 보니까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구요. 십 년. 적성도 딱 맞고. 여성지도 비슷해요. 맨날 때려치우고 싶은데 약간 카타르시스를 주는 게 있어요. 그랬는데 아까 말했다시피 그 전까지는 소설을 그렇게 쓴 경험이 없었어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끝까지 한번 써 보는 거, 끝까지 가 보는 거,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그런 경험이 없었는데. 직장은 역시 무서운 곳이예요. 여성지에서 그렇게 일 할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일을 무진장 시키는 거예요. 하기 싫어 죽겠는데. 거의 밤샘하는 야근을 한 일주일 시키더라구요. 그렇게 일을 하다보니까 약간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소설을 그렇게 써본 적도 없는데. 그래서 소설을 한번 이렇게 해보자.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끝까지 해보자, 한번 끝을 내 보자, 라는 생각으로 소설을 쓰기 했죠. 그 때쓴 게 굳빠이 이상이라는 책이예요. 회사 다니면서도 쓰고, 회사 그만두고 나서도 썼는데. 그 때 생각엔 만신창이 되면서 가 봤는데 아니더라, 그럼 말자, 글 쓰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라고 생각을 했는데요. 그 소설을 쓰다가 내가 소설을 쓸 수가 있겠구나, 이제는 소설 쓰는 방법을 알겠구나, 라고 깨달음같은 걸 얻었어요. 그 다음부터는 소설만 계속 쓰는 거죠.  

- 제가 손꼽아 신작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무라카미 하루키 신작 기다리구요. 폴 오스터라고 있어요. 신작 기다리구요. 지금 한국에 왔을텐데 오르한 파묵, 신작 기다리구요. 제가 진짜 다 좋아하는 사람들이예요. 마르케스, 신작 기다리구요. 줄리언 반즈라고 영국 작가. 그 정도. 그런데 다 남자작가네요.





   녹음상태가 좋지 않아 들리는 부분만 옮겨 적었다. 일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긴 시간동안 녹음한 파일을 다시 들었다. 조곤조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와 낮게 흐르는 음악소리. 톱니바퀴가 돌고 있었다. 스물다섯의 나와 옛 여자친구의 이름과 같은 김희선 할머니는 세계의 끝까지 함께 걸어 어느 시인의 마지막 편지를 찾아냈다. 어쩌면 시인은 이 편지가 결코 발견될 리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발견되더라고 결코 주소의 그녀에게 배달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메타세쿼이아, 살아 있는 화석> 따위를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스물 다섯의 남자따위는 없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 넷, 아니 그 이상으로 맞물려 있는 톱니바퀴는 크기만 다를 뿐, 속도만 다를 뿐 삐걱삐걱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날 수 있고, 톱니바퀴도 둥그니까 자꾸 돌아가다보면 제자리로 돌아 올 수 있다는 이야기. 너와 내가, 김희선 할머니와 김희선 아가씨가, 난아와 나나가 모두 맞물려 있다는 이야기. 결코 그 사실이 우표값이 2천원할 때까지 발견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플레이어를 멈추니 삐걱대며 느리게 돌아가는 내 톱니바퀴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맞물려 있는 김연수 작가의 톱니바퀴가 윤기있게 돌아가며 말한다. 그러니까, 책을 많이 읽으세요. 그러니까, 여름나무처럼 꿋꿋하세요. 그러니까, 제 블로그가 다시 열렸어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앗싸. 김연수 블로그가 다시 열렸다. 한밤중에 그걸 발견하고 좋고 좋고 좋아서 가슴이 스컹크처럼 벌렁거렸다.  

,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마음산책

   알라딘 중고샵에서 '김영하'라는 판매자 이름을 발견했다. 김영하? 그 김영하? 정말? 판매자 김영하가 내어놓은 중고책 리스트를 봤다. 책의 권수도 많았고, 그 중에 한국소설도 많았다. 아, 이 책을 왜 파는거지? 소장하시지 않고? 나는 판매자 김영하를 그 김영하로 확신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책은 출판사에서도 보내주고 직접 구입도 하고 그러그러해서 두 권이 생긴 걸거야. 그래서 알라딘 중고샵도 오픈했다, 재밌겠다 그런 생각으로 이렇게 대방출하는 거겠지. 언젠가 책이 너무 많아 둘 곳이 없어서 한번씩 헌책방에 판다는 이야기를 읽은 것도 같다. 아, 그래도 이 책은 가지고 계시는 게 좋을텐데. 그러다 상품상태에 구입날짜와 서명이 적혀져 있다는 책들을 발견했다. 오호라, 그럼 그 김영하가 직접 쓴 날짜와 서명이 적힌 책이란 말이지? 생각해보고 말 것도 없었다. 그 중에서 읽고 싶은 책 3권을 추려내 주문했다. 김훈의 <칼의 노래>, 신경숙의 <딸기밭>, 그리고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

   판매자 김영하가 그 김영하가 아니라는 사실은 금방 알았다. 알라딘 중고샵 배송 느리기로 소문 났는데, 이 칼을 품고 딸기밭에 앉은 청춘의 문장은 엄청나게 빨리 도착했다. 일단 택배상자의 보내는 이의 이름이 김영하가 아니었다. 주소도 내가 아는 그 김영하가 살고 있는 서울이 아니었다. 왜 판매자 김영하는 김영하라는 닉네임을 쓴 걸까? 김영하의 김자도 써져 있지 않은 판매자 김영하의 자필서명을 보며 생각했다. 나처럼 그 김영하인 줄 알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봐? 판매수익을 올리기 위해? 설마. 그럴리 없어. 그래,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김영하를 너무나 좋아해 닉네임을 김영하라고 지은 거라고. 아니면 가족 중에 진짜 이름이 김영하인 사람이 있을 지도 몰라. 하지만 판매자 김영하는 김씨가 아닌걸? 그럼 엄마나 아이들 중에 김영하가 있나 보지.

   그렇게 구입하게 된 <청춘의 문장들>. (그래도 판매자 김영하가 보내준 세 권의 책은 모두 새 책처럼 깨끗했다) <여행할 권리>를 읽고 그의 산문을 연달아 읽고 싶어 꺼내들었다. 예전에 동생이 정말 좋다,며 도서관에서 빌려왔을 적에 다 읽지 못하고 골라 읽고는 반납기간에 쫓겨 반납했는데 이번에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읽었다. 그리곤 또 아, 김연수, 모드로 전환해버렸다. 그야말로 아, 김연수다.

   <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나는 김연수의 소설도 좋아 하지만, 산문을 더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뭐라해야하나. 그의 산문들은 나를 위로해준다. 자기 자신이 치유되기 위해 소설을 쓴다는 소설가처럼, 나는 그의 문장에서 치유받는 거다. 자신의 소설이 위안이 된다는 독자의 말이 위안이 된다던 김애란처럼, 그의 문장이 내게 위안이 된다. 진심으로.

   읽다보니 동생이 도서관에서 빌려왔을 때 읽었던 글들이 다 김광석에 관한 글이었다. 이번에 <청춘의 문장들>을 읽겠다고 하니 정말 좋았어, 라며 김연수는 김광석을 들으며 청춘을 보냈어, 그리고 김광석도 실제로 한번 봤대, 라고 하는 걸 보니 그 때 동생이 김광석 이야기를 하며 목록의 어떤 제목들을 몇 개 집어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 다른 글들은 처음으로, 김연수의 청춘에 얽힌 김광석에 대한 글들은 두 번씩 읽었다. 정릉의 한 자취집 마루에서 퇴근 후 모여앉은 그녀들과 술을 마시며 김광석을 듣던 이야기. 모두들 처음엔 가만히 듣기만 하다가, 어느 한 사람이 먼저 낮게 따라부르기 시작하다가, 결국에는 목청 터지게 합창하게 되는 김광석을 품은 밤. 복학생 시절 도서관에서 오후를 보내고 유리문을 여는 순간 마주한 김광석의 목소리. 5월의 푸른 밤 아래 통기타를 든 키가 작은 김광석과 마주한 이야기. 이 글을 읽곤 엠피쓰리에 김광석의 '그날들'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당장 이어폰을 꼽고 들었다. 언젠가 설경구가 러브레터에 나와서 박자 무시하고 마음대로 '그날들'을 불렀는데, 이렇게 근사한 노래가 있나, 하곤 찾아보고 수도 없이 따라불렀던 그 노래. (최근에 그 때 설경구가 노래한 파일을 우연히  들었는데, 정말 완전 박자 무시하고 불렀더라. 그럼에도 설경구이기에 어떤 진심이 느껴졌었던 거지. 그 때 나는 윤도현이 껄껄거리며 웃으며 정말 니멋대로 부르시네요, 식의 멘트를 날렸을 때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정말 잘 불렀는데. 눈물이 찔끔 나왔는데.)

   산문은 소설 마감 후의 회복훈련으로 쓴다는 김연수. 영서를 번역하고 한시를 즐겨 읽고 하이쿠를 좋아하는 김연수. 아, 정말 이 사람은 작가가 되기 위해 태어난 거구나. 정말. <청춘의 문장들>을 읽고 정보의 바다를 떠돌다가 같은 김천출신 김중혁 작가가 쓴 한 때 '김연수와 함께 불법 일본 만화 번안도 했다우' 식 의 칼럼을 발견했다. 한참을 웃었다. 이 글에는 밤을 새워 작업을 하리라 결심했던 김연수 작가가 타이밍을 먹고 단숨에 잠들어버려 김중혁 작가가 김연수 작가의 몫까지 해치웠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좀 더 정보의 바다를 넘실거리니 김연수 작가가 황순원 문학상을 받은 시상식에서 문태준 시인이 한 축사 녹음파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한참을 웃었다. 거기엔 시인의 꿈을 끝내 포기한 김연수의 이야기가 있었다. 옮겨보면 이렇다.

  시를 막 쓰겠다고 마음을 다잡아먹은 열렬한 문학 청년 시절이였습니다. 찾아가서 방바닥 곳곳에 있던 고양이 오줌을 제가 내려다 보고 있었는데, 김연수 작가가 저에게 한마디 아낌없는 충고를 해 줬습니다. "이대로 쓰면 등단하겠네." 어쨌거나 전 김연수 시인의 그 점검 덕택에 아주 간단한 그 말 한마디, 이대로 쓰면 등단하겠네, 라는 그 말 한마디 덕택에 시로 등단까지 하게 되서 시인이 되었습니다. 김연수 작가는 저를 만나면 은근히 자기도 시인 출신이라는 사실을, 그것도 등단연도가 저보다 1년 빠른 선배 시인이라는 행세를 합니다. 오늘 김연수 작가가 소설을 잘 써서 이런 큰 상을 받습니다만, 김연수 작가는 시인이기를 더러는 꽤 고집을 합니다. 김연수 작가는 종종 저한테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도 시집 한 권 묶을 분량의 원고가 있는데. 이렇게 말하면서 말 끝을 흘립니다. 물론 저는 김연수 작가의 이 말에 묵묵부답 별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한 잡지에서 시인 출신 소설가들에게 시 원고 청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김연수 작가도 물론 시 원고 청탁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어느날 그가 나에게 발표할 시 원고를 보여줬습니다. 발표를 해도 되는 그런 수준인가를 그는 내심 은근슬쩍 저에게 묻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1994년 그 정릉집의 상황을 우연찮게 떠올렸습니다. 1994년에는 제가 그에게 시를 점검받았지만 이제 역전이 되서 그가 저에게 점검을 받게 된 것입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그게 좀 그렇다이."  그 이후로 김연수 작가는 시 쓰는 일을 본격적으로 피압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를 자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김연수 작가가 황순원 문학상을 받게 되었다고 보도가 나간 후에 그에게 몇 개의 축하화분이 집으로 도착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화분 가운데 하나의 화분이 문제였습니다. 다른 화분에는 모두 '축 황순원 문학상 수상'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만, 그 문제의 화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축 미당 문학상 수상'. 이제 이런 일은 김연수 작가에게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소설만 쓰기로 겨우 김연수 작가가 마음을 다 잡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정말 이 파일을 듣다가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어대다가 녹음을 한 뒤, 엠피쓰리에 넣었다. 언제고 이 이야기를 문득 다시 듣고 싶어지는 순간이 올 것만 같아서. 그러면 조금 울적한 마음도, 그냥 포기해버릴까 하는 마음도 모두 깔깔거리면서 날려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청춘의 문장들>을 읽고 김연수 작가의 모든 것이 부러워졌다. 그가 지나온 청춘, 그의 딸이 가진 이름 열무, 그의 문장, 그의 친구들까지. 오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주문했다. 어떤 독자의 글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김연수의 책, 이라는 문구를 보고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요즘 인터넷 서점은 총알배송이라 오늘 늦게 도착한단다. 신난다. 더불어 판매자 김영하님께도 감사의 말을. 김연수 작가가 쓴 연두빛 청춘을 이렇게나 착한 가격에 깨끗하게 소장할 수 있게 해 주어서. 감사. 언제고 문을 닫아두고 혼자 울고 싶은 날 당장이라도 꺼내 읽을 수 있는 시같은 문장을 내게 주신 김연수 작가에게도 감사, 또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