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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함정임 지음/강



    이 땅에 김소진이라는 소설가가 있었다. <소진의 기억>이라는 책을 읽었다. 나는 김소진이라는 작가를 몰랐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이제는 이 땅에 없는 그를 떠올리며 쓴 글이 있다기에 찾아본 책이었다. <소진의 기억>을 읽으며 정작 그의 글은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주제에, 30분 전에는 그가 누구인지도 몰랐던 주제에, 나는 몇 번인가 울었다. 제일 크게 울어버린 건 아마도 성석제의 글을 읽으면서였다. 나는 성석제가 그려주는 김소진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려 봤다. 깡마르고 선하게 웃는 츄리닝을 입은 소설가. 그가 내어오는 찻잔을 생각했다. 찻잔을 담은 쟁반을 든 소설가의 정직한 손을 생각해봤다. 가슴이 뻐근해져 왔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후, 그를 기억하는 문인들의 글과 비평들로 이루어진 <소진의 기억>을 나는 끝까지 읽지를 못했다. 김중혁의 소설이 끝나고 '2000년대 비평이 김소진에게'라는 다섯번째 챕터 앞에서 책을 덮었다. 이 다음 글들은 김소진의 소설을 읽은 후에 읽으리라. 그런 다음에 내가 읽은 글은 김소진의 글이 아니라 그의 아내, 함정임의 글이었다. 이 땅을 떠난 사람이 이 땅에 머물렀을 적에 썼던 글보다 이 땅에 이제 없는 사람을 그리며 이 땅에 홀로 남겨진 뒤에 쓴 자기 치유적인 글은 얼마나 아플까 생각해보다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 때 나는 그녀의 슬픔을 빌려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땅에 김소진이라는 소설가가 있었다. 그는 열심히 살았고, 1997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동행>은 93년 그와 결혼한 소설가 함정임의 소설들을 모은 책이다. 93년과 98년 사이에 그녀가 쓴 소설들이다. '함정임 소설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이건 분명 수기에 가까운 글들이야, 나는 생각했다. 소설을 읽어나가며 표지의 사진을 여러 번 들여다봤다. 93년 마라도로 가는 신혼여행 길, 배 위에서 찍은 김소진과 함정임의 사진. 그야말로 새 신랑과 새 신부. 그들 앞에 펼쳐질 새로운 삶. 이 사진에서 김소진의 표정은 얼마나 푸근하고 산뜻한지. 그는 행복을 입꼬리에 가득 머금고 있어서 이 사진만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첫 번째 소설은 표제작인 '동행'이다. 나는 '동행'을 읽으며 그야말로 엉엉 울었다. 취기가 살짝 오른 후이기도 했는데 눈물이 자꾸 고여 글자가 안 보이기 시작하더니 울음이 터져 나왔다. '동행'에서 소설가 소진은 병을 얻는다. 죽음을 선고받는다. 침대 위에 누워 사경을 헤매며 두 사람의 처음을 생각한다. 1992년 영상자료원. 그런 그를 보며 그녀는 생각한다. "그때 우리가 그곳에서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막 외출하려던 나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내가 날 만나고 싶으면 예술의 전당에 나가려던 참이니 영상자료원으로 오라고 그에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또 그리고 그날 밤 그가 느닷없이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면. 우리는 지금쯤......  (p.14)" 그리고 어느 날 저녁, 그는 이 땅에 살았던 사람이 되었고, 그녀는 이 땅에 여전히 살아갈 사람이 되었다. "벽이 갈라지듯 세상이 쪼개지듯 쩡!하는 소리(p.38)"만 들리던 그날 밤.

   남겨진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게 되어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 구석구석에 있다. 남편과 뱃 속의 아이를 함께 보낸 여자, 연달아 두 명의 자식을 병으로 잃은 어머니, 남편을 잃고 혼자된 딸 아이가 안타까운 어머니, 언니, 그리고 또 다르게 사랑하는 이를 사고로 잃은 미경씨. 이 얇은 소설집을 읽으면서 나는 끝까지 엉엉 울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냈지만 마음을 다 잡으며 살아나가는 소설가처럼 내 마음도 그러했다. 나는 더 이상 울지 않았고, 그녀가, 그와 그녀의 아들이, 그의 어머니가 이제는 씩씩하게 그를 추억하며 꽤 잘 살아나갈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여전히 뻐근했지만 눈물은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병신 손가락'이란 소설을 읽으면 그와 그녀가 살았던 신혼집이 나온다. 튼튼한 벽돌로 둘러쌓인 2층집이었는데, 주인집인 1층에는 피아노를 가르치는 노처녀 언니와 그의 어머니가 함께 살았다. 그 따듯한 2층의 신혼집에서는 드뷔시의 음악이 흘러 퍼지고, 그는 그녀에게 불구자,라고 놀리며 발톱을 깍고, 그녀는 새 에이프런을 두르고 요리를 한다. 집 뒤로 산이 있고, 마당에는 나무가 있어 새들이 쉴새없이 지저귀는 그늘 같은 신혼집. 늦잠을 자고, 가만히 누워 빗소리를 듣고, 야근 때문에 늦는다는 남편의 전화를 받는 평온한 곳. 나는 소설집을 덮고 난 뒤에도 며칠을 그 집을 생각했다. 그야말로 따스한 신혼집의 풍경을 말이다.

    아마도 나는 자주 이 책을 생각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주 들춰볼 것이라고. 어느 날은 엉엉 울고, 어느 날은 울지 않을 거라고. 이런 구절을 읽었다. 남자와 전에 사귀었던 여자에게 소설가가 하는 말이다. "그냥 그렇게 거기서 견디라고. 누구도 오래 행복할 수는 없고 아주 잠시 행복한 순간만이 스쳐지나갈 뿐이라고.(p.137)" 나는 이 문장을 자주 들춰 볼 것이다. 그리고 잠시 행복해하고, 오래 견딜 것이다. 이 땅에 김소진이라는 소설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 지금도 이 땅을 살아가는 소설가, 함정임이 있다. <동행>의 소설들은 그가 떠난 후, 그와 함께 열심히 살아나가기 위해 씌여진 글들이다. 아, 그리고 위의 저 문장이 씌여진 짧은 소설의 제목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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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의 기억

from 서재를쌓다 2008. 8. 14. 13:55

   

                                             
                                   
                                               어젯밤                                                                                   그날 밤






그리고 이런 詩



우주로 날아가는 방1
김경주




 


                                                                                                이건, 7월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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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이가든
편혜영 지음/문학과지성사


   돌아보니 시퍼런 마을이 있다. 하나의 저수지(첫째, 둘째, 셋째가 산다), 하나의 아파트(그 곳엔 개구리비가 내린다), 하나의 맨홀(임신한 어른의 배를 가진 아이가 있다), 하나의 동굴(빨간 터틀넥을 입은 여자의 시체), 하나의 세탁소(그는 하얀 양말을 신은 발로 금붕어를 터뜨려 죽인다), 하나의 박람회(개와 아이가 피를 흘리며 싸운다), 하나의 숲(고양이를 약으로 먹는 할머니가 있다), 하나의 방(친척의 아이를 낳은), 하나의 강(토막난 시체들이 차례로 낚여지는)으로 구성된 아오이 마을. 그런데 희안한 일이다. 피와 쥐, 구더기들이 난무하는 이 마을을 굽이굽이 지나쳐온 내 몸에 한 방울의 피도, 한 마리의 구더기도 옮겨 붙지 않았다. 깨끗하다. 배를 갈라 자궁을 싹뚝 잘라내 베란다 너머로 버리는 수술대 바로 옆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있는대로 숙이고 들여다봤는데도 내게는 피 한방울 튀지 않았다.

   그런 꿈을 계속해서 꾸었던 적이 있다. 도망가야 하는 꿈. 달아나야 하는 꿈. 그런데 내 몸이 꼭 매트릭스의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던 꿈. 모두가 슬로우 모션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꼭 그런 꿈에서는 나만 슬로우 모션이다. 지각하는 꿈. 꼭 입어야 할 옷이 없어 내내 그 옷만 찾으며 발을 동동 굴리다가 끝이 나는 꿈. 그러니까 시작도 못한 꿈. 이야기가 될 수 없는 꿈. 그런 꿈을 꾸다보면 하도 답답해서 어느 순간 이게 꿈이구나, 느껴지게 된다. 그렇다고 이건 꿈이니깐 지금 일어나버리자, 고 마음먹고 깨어날 수도 없다. 계속해서 옷을 찾아야 하고, 계속해서 슬로우 모션으로 도망가야 한다.

   그럴 때의 내 몸, 땅으로부터 1센티미터만큼 공중부양한 채 달아가는 모양을 하고 있는 괴로운 내 몸을 아오이 마을에서처럼 토막내본다. 텍사스의 전기톱을 닮은 아오이가든의 녹이 슨 톱을 빌려 내 팔을, 내 다리를, 내 자궁을 쓰삭쓰삭 잘라본다. 어느새 나는 도망가야 하지만 도망가지 못하는 어정쩡한 모양새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조각난 팔 두 개, 다리 두 개, 몸 하나, 자궁 하나, 눈 알 두 개로 분리되어 있다. 누군가 나를, 아니 나라고 할 수 없게 보이는 내 부분들을 아오이 마을의 강에 내다버린다. 풍덩, 질퍽한 소리가 난다. 잠시 후 한 낚시꾼이 다리 하나를 낚았다. 형사는 내게 전화를 한다. 나는 개구리 비가 내리는 아오이 마을까지 운전해서 간다. 이게 당신 다린가요? 나는 내 왼쪽 다리를 내려다보고 그 테이블 위의 다리를 다시 올려다봐도 그게 내 다린지 아닌지조차 모르겠다. 그저 왼쪽 무릎이 간지러워 긁적긁적거릴 뿐. 제일 마지막에 발견된 내 눈 알을 입 속에 넣고 쪽쪽 빠는 상상도 해 본다. 입 안 가득 지린내가 진동할 거다. 나는 보지 않아도 좋을 많은 것을 봐왔으니. 나는 그걸 삼킬 수 있을까. 우걱우걱 씹어 넘길 수 있을까.

    이건 소설이니까, 이건 상상이니까 가능한 거다,고 생각한다. 아오이 마을따위는 이 세상에 없을 거라고 생각해버리고 싶다. 그러니까 내 옷에 피가 하나도 묻지 않았고, 나는 이 끔찍한 이야기들을 아주 재미있게 읽어내려갔다고 말해버리고 싶다. 그런데 이 소설집을 읽고 나서 마음이 서늘해지는 건 아오이 마을이 단지 편혜영의 머릿속에서만 손 끝에서만, 내 꿈 속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아오이 마을이기 때문에. 나는 매일 그 강을, 그 저수지를, 그 맨홀 위를 지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언제고 또 다시 나만 슬로우 모션인 꿈을 꿀 것이기 때문에. 꼭 입어야 하는 옷이 없어 이야기가 되지 못하는 꿈을 꿀 것임을 알고 있기에. 꼼짝달싹 못하는 꿈에서 깨어났을 때 멀리서 개골개골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면 바로 그곳이 아오이 마을이다. 나는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내 몸 구석구석을 참 많이도 긁적거렸다. 눈알을 손가락 끝으로 돌리면 뽀드득 소리가 났다. 목욕탕에 가야겠다. 때도 밀어야겠다. 무더운 여름에 읽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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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먹다
김진규 지음/문학동네


   가을에 읽었으면 더 좋았을뻔 했다, 라는 생각을 어젯밤에 문득 했다. 서늘해진 가을바람에 마음이 조금은 쓸쓸해지지 않았을까. 스무살에 읽었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 봤다. 스무살의 <깊은 슬픔>처럼 그렇게 울어버리지는 않았을까. 오늘이 반납마감일이다. 오랫동안 이 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여러 이유가 있긴 했지만 단숨에 읽어 내려간 건 며칠사이다. 어제는 오늘 이 책을 반납할 생각으로 읽는내내 프린트해 책갈피 대용으로 썼던 그림을 새 종이에 다시 출력했다. 작가의 블로그에 올려져 있던 등장인물들간의 관계도. 이 그림을 보면 묘연이 누구의 자식이고, 누구의 어미인지 난이와 향이의 가여운 운명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누구의 표현대로 '조각보같은' 이 소설을 좀더 쉽게 끼어맞춰나갈 수 있다. 묘연의 첫번째 이야기, 라고 시작되면 관계도의 묘연을 한번 슬쩍 들여다봐주고 시작하면 된다. 이 소설을 읽어 나가는데 내게 도움이 되었듯이 이 책을 다음에 읽을 누군가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혹시라도 처음 책을 뒤적일 때 잡동사니라고 치부해 버리고 버리지만 않기를 바라면서 빳빳하게 프린트된 관계도를 보기 좋게 오려서 꽂아뒀다.

   워낙 진기한 (내게는 그랬다) 단어들이 많아 처음에는 그걸 내 단어장에 꼬박꼬박 적어뒀다. 요즘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짓을 하고 있다. 몇 페이지씩 단어들을 정리해 적어두고 심심할 때마다 읽으면 소설만큼이나 재미있다. 이런 식이다.

오달지다                          달을 먹다 p.36
[허술한 데가 없이] 야무지고 실속이 있다.
최약국의 두루마기 옆선이 제 성정만큼이나 날카로웠다.
뜨거운 인두가 한두 번 지난 길이 아니었다.
하연의 오달진 노동의 흔적이었다.

   워낙 생소한 단어들이 많아 책 읽는 속도가 느렸다. 몇 페이지 안 가서 또 사전을 뒤적거리고 단어장에 정리해야 했으니깐. 오달지다, 밭다, 음전, 조갈, 갈급, 궤연, 벙글다, 동티, 자늑자늑, 되통스럽다, 등등. 그러다 안 되겠다 싶어 사전찾는 일을 그만 두었다. 귀찮은 일은 아니었다. 사전 찾는 일은 즐거웠다. 생소한 단어들을 입밖으로 소리내어 보면 달큰한 입내가 났다. 한번도 발음해 본 적 없는 것 같지만 익숙한 소리들이 이와 혀 사이로 새어나왔다. 그걸 내가 아끼는 삼색볼펜으로 이렇게 저렇게 적어내는 일도 꽤 즐거웠다. 그런데 이러다가 소설 자체를 온전히 읽어내지 못할 것 같아서. 왠지 공부하듯이 책을 읽게 되는 것 같아서 이 책에서만큼은 그만뒀다. 모르는 단어들은 후에도 끊임없이 나왔지만 읽어 내는데는 무리가 없다. 그냥 이런 단어들을, 표현들을 사전 하나 보지 않고 줄줄이 쓰여 냈을 것만 같은 작가가 대단할 뿐. 역시 다독이 큰 재산인가 보다.

   읽으면서 느꼈던 몇몇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이 책을 쓴 작가는 대단하다, 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읽으려고 처음 마음 먹었을 때는 지난 겨울즈음이었는데 한 편의 단편소설조차 써 보지 않았던 작가가 단번에 장편소설을 써 내고 그 소설이 문학동네소설상에 당선되었다는 사실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했다는 말. 당신에게 입력된 만큼 출력이 필요해, 그 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소설이라는 것 때문에. 이건 정말 소설같은 시작이다. 조금 더 넘쳤으면 좋았을 거라고, 결말이 너무 픽 갈대처럼 쓰러져 버린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흠. 나는 이 단정한 소설을 주로 단정치 못한 마음으로 읽었다. 그래서 늘 덮었다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는 흐트러진 자세였다. 잠시만 편안한 자세였다. 곧 허리가, 팔이, 다리가 아파올 자세. 그러다 몇 페이지 더 읽어가면 나도 모르게 자세가 꼿꼿해졌다. 맨 윗 단추에서 소매 맨 아래 단추까지 꼼꼼하게 끌어 잠구고는 단정하게 앉아 있는 소설 앞에서 나도 이내 자세를 바로 잡곤 했다.      

   어젯밤은, 아니 오늘 새벽에는 잠이 안 와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왜 달을 먹다, 인가를 설명한 작가의 글을 발견했다. "그래서 제목도 [달을 먹다]입니다. 월식을 응용한 것이지요. 월식이란 것이 지구의 그림자에 달이 가려지는 현상을 말하듯이, 누구나 자신의 그림자로 상대방을 가리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더워서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 나는 달의 그림자, 지구의 그림자를 생각했다. 당신의 그림자도. 여름이 너무 길다. 더위도. 당신도, 당신의 그림자도 이 더위 속에서 무사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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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여행자 도쿄
김영하 지음/아트북스

 
   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뒀다. 왠지 이번 책은 사서 보기가 싫었다. 그리고 지금, 그 선택에 아주 만족해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편이랑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데 왜 그럴까 생각해봤다. 여행자 시리즈의 첫번째 책인 하이델베르크 편에 나는 그럭저럭 만족했다. 책이 생각보다 너무 얇네, 글이 너무 적네, (이건 확실히 좀 실망스러웠다) 투덜거리긴 했지만. 확실히 이번 도쿄편은 이전보다 책이 두꺼워졌다. 묵직하다. 그만큼 가격도 상승. 역시 글은 너무 적다. 하이델베르크 편에 비해 산문이 더 늘긴 했다. 나는 왜 하이델베르크를 담은 책처럼 도쿄를 담은 책을 그럭저럭 만족하지 못하는걸까. 이런 결론까지 내렸다. 아무래도 앞으로 쭉 나올 여행자 시리즈를 좋아하긴 힘들 것 같다는.

   그게 있었다. 음악 씨디. 작가가 하이델베르크에서 들었다고 했던가, 하이델베르크를 생각하며 골랐다고 했던가. 내가 산 여행자 하이델베르크 편에는 그 씨디가 보너스처럼 실려 있었다. 물론 이건 내가 부지런해서 얻은 것이다. 당시 예약주문한 사람들에게만 공짜로 끼워 주었으니까. 나중에는 따로 음반을 판매했다고 알고 있는데, 이 음악들이 좋았다. 씨디를 리핑해 엠피쓰리 플레이어에 옮겨두고 '김영하'라고 입력한 폴더에 넣어뒀다. 책을 읽을 때 잠깐 듣고는 내내 잊고 있었는데, 어느 저녁 꽉 막히는 도로 위 버스 안에서 심심해 플레이어를 뒤적거리다 찾아내곤 들어볼까하고 재생시켰던 음악들. 그 때 나는 버스 제일 맨 뒷 좌석 오른쪽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버스가 한강 다리 부근에서 거의 정차되어 있었다. 노을이 슬며시 지고 있었고, 버스 안이며 버스 밖이며 옴짝달짝할 수 없어 짜증나는 얼굴을 한 사람들이며 차들뿐이었는데 그 음악들을 들으며 노을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만 그 속에서 생기있게 느껴지는 거였다. 나만 달리는 것 같고, 나만 즐거운 것 같았다. 나만 행복한 것 같았다. 30분이면 올 거리를 1시간 걸려 왔는데도 내리기가 싫었다. 이 버스를 타고 이 음악들을 계속 들으며 앉아 있고 싶었다. 맨 뒷 좌석 오른쪽 창가 자리에 앉아서 나른한 기분으로.

   그러니까 나는 그 때 하이델베르크가 배경인 아주 짧은 소설과 카메라와 도시 이야기가 담긴 짧은 산문과 도시를 담은 사진들, 작가가 직접 고른 14곡의 음악을 9,800원을 주고 샀다. 인터넷으로 산 거니 몇 백원은 더 할인 받았을 거다. 그리고 이번에는 14곡이 음악을 빼고, 도쿄가 배경으로 짧게 등장하는 단편 소설 한 편과 도쿄와 카메라 이야기의 산문, 도시의 사진들을 주고 13,800원을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12,420원, 마일리지 1,250원 플러스) 지불해야 된다는 건데. 흠.

    뭐랄까. 여행자 시리즈라는 이름이 있지만 '소설가 김영하의 사진집'이라고 소개하는 편이 더 확실하지 않을까 싶다. (글은 보너스같다) 소설과 에세이, 사진의 결합이라고는 하지만 글을 쓰는 소설가의 여행책을 기대하는 나같은 독자에겐 여행자 시리즈의 글은 너무 적다. 사진을 좀 더 줄이고 글을 더 늘여도 좋으련만. 산문이든, 소설이든. 사실 도쿄편의 소설은 내겐 좀 별로였다. 풍선처럼 가벼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도 했다. 차라리 앞으로 여행할 도시들에서 끌어낼 각각의 도시를 담은 단편소설을 한 책에 묶어내는 편이 독자들에게는 더 알찼을거라는. 아무래도 나는 소설가의 사진보다는 소설가의 글을 기대하는 거였나보다. 그럴려면 이 책을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1-2시간이면 후루룩 읽을수 있는 책이다. 기억에 남는 건 거품 가득한 일본의 맛있는 생맥주와 캔맥주 이야기. 침이 고였다. 그 옆에 있는 생맥주 사진에 한번 더. 아무튼. 김영하의 하이델베르크를 보고나서는 도쿄가 기다려졌는데, 도쿄를 보고나니 다음 도시는 별로 기다려지지 않을 것 같다. (이러면서 나오면 또 궁금해서 볼 거면서) 그러니까 아무래도 나는 사진 찍는 소설가보다 글 쓰는 소설가가 더 좋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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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키핑
메릴린 로빈슨 지음, 유향란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구절을 한 군데만 말해보라고 한다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다. 소설에 나오는 두 소녀, 언니와 동생, 그러니까 루스와 루실이 호수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그들은 외로웠으므로 아주 늦게까지, 어둠이 꽁꽁 언 호수 위에 소리 없이 내려 앉을 때까지 빙글빙글 스케이트를 탔다. 같이 타던 아이들이 모두 사라지고 두 사람만 남을 때까지. 내가 좋아하는 구절은 바로 이 부분이다. 루스와 루실이 어둠이 내려앉은 호수 위에서 마을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하는 생각들. 이건 정말이지 따'듯'한 문장이다.

p.49-50

   <하우스키핑>은 외로움에 관한 책이다.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이 책에는 온갖 외로움들이 나열되어 있다. 외로움이란 편의점에 진열되어 있는 커피우유의 종류처럼 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만큼 비슷비슷한 거 아닌가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곳에는 열 개의 외로움이 있다. 백 명의 사람들이 있다면 말할 것도 없이 그 곳에는 백 개의 외로움이 있다. 외롭다는 것, 우리가 모두 한 가지씩 각자의 외로움을 지닌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것만이 외로움에 관한 우리의 유일한 공통점이다. 그건 스케이트로 뒤로 가는 법을 배워야하는 것이고 한 발로 도는 법을 연습해야하는 것이다. 살을 에이는 차가운 바람을 얼굴로 맞기 좋아하는 사람이 더 외로운 사람이라는 걸 안다. 불빛 하나가 위안이 된다고 하는 사람은 얼마나 외로운 사람인지 나는 안다.

   핑거본의 호수 아래에는 외로운 사람들이 잠겨져 있다. 새까만 밤, 기차는 소리없이 추락했고 사람들은 호수 아래에서 잠들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람들의 표정이 아주 평온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소를 짓고 있었을 거라고. 루스와 루실을 할머니집에 데려다 준 엄마도 호수 아래로 떨어졌다. 경쾌한 엔진소리를 내면서. 엄마는 웃고 있었을 거다. 눈물이 얼굴 위로 쏟아지는 채로. 외로움이 적은 사람은 호수의 도시, 겨울의 도시 핑거본을 견디지 못했다. 그들은 살을 에는 차가운 바람을, 파묻혀버릴지도 모르게 쏟아지는 눈을 무서워했다. 그들은 핑거본을 떠났다. 외로움이 아주 많은 사람도 그랬다. 그들도 기차가 매일 몇 번씩이나 소리없이 지나가는 호수 아래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사람들이었다. 핑거본에 영원히 머무르거나, 영원히 떠나거나. 당연하게도 핑거본에는 그런 사람들이 살았다.


   호수 아래의 세상을 생각해봤다. 호수 아래에도 외로운 사람들의 세상이 있다. 겨울이 시작되면, 호수물이 꽁꽁 얼기 시작하면 살을 에는 차가운 물에 얼굴이 바짝 닿는 사람들. 수면 위로 어렴풋이 보이는 불빛이 위로가 된다며 속삭일 사람들. 봄이 오고 빙판이 녹기 시작하면 그들은 호수 바닥에서 축제를 벌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또 한 계절이 갔어요. 이렇게 또 한 계절이 오고 있답니다. 댄스 파티. 아주 천천히 물살에 몸을 맡기는 춤을 추는. 상상해보면 그건 왠지 좀 슬픈 동작처럼 보일 것 같다. 그러면 호수 위의 이들에게까지 그 동작이, 그 기운이 전달될 것이다. 출렁이는 호수 밑바닥에 이는 흙탕물의 냄새까지. 핑거본은 '바람 속에서도 호수 냄새가 나고, 마시는 물에서도 호수 맛이 느껴지는' 곳이니까.

   이 소설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야 한다) 읽어나가면 겨울을 만날 수 있다. 무더운 여름날, 눈이 지독하게 많이 내리는 호수의 도시 이야기는 꽤 매력적이다. 당장 그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눈이 많이도 내린다. 외로움도 많이도 내린다. 이 호수의 도시에서는.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집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해야 한다. 외로움이 쌓이고 쌓여 호수 아래로 떨어지는 수밖에 없나 걱정해야 한다. (호수 아래에는 이미 많은 외로움이 있다) 결국 두 여자는 호수 아래로 떨어지는 대신 핑거본을 떠났다. 그리고 덕분에 가끔 자신의 외로움을 어두운 창가에서 발견하는 사람이 생겼다. 밖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낮 말고 밖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그래서 안만 훤히 내비치는 밤의 창가에서 자신을 꼭 닮은 서늘하고도 따듯한 외로움을 발견하는 사람. 이건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니까. 신기하게도 그런데도 자꾸만 따뜻해지는 이야기니까. 우리 모두는 마음 속에 핑거본의 호수를 가지고 있으니까. 나는 살을 에는 적막한, 사람을 마비시키는 차가운 공기를 지독하게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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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틈새
권여선 지음/문학동네

 
    지난 가을 <분홍리본의 시절>을 읽었다. 아직도 나는 그 소설집을 생각하면 조건반사마냥 입 안의 침이 고인다. 수십마리의 생선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하얀 죽의 빛깔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아직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뽈찜이 무슨 맛일까 궁금하고, 김치볶음밥을 만들 때 김치의 반은 먼저, 반은 나중에 넣게 되었다. 그 뒤로 여기저기서 권여선의 단편을 만났다. 그러다 <소진의 기억>을 읽을 때에 나는 권여선,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자, 고 다이어리 한 귀퉁이에 적어놓았다. 그녀의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를 읽었다.

   이번 <문학동네> 여름호의 젊은작가특집에 권여선이 실렸다. 아직 자전소설은 읽지 못하고 '미인 작가 권여선을 말한다' 제목의 작가초상만 먼저 읽었다. 이런 식의 구절이 있었다. 그녀가 소주를 마시는 걸 보면 소주는 본래 저렇게 맛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 나질 않는데 아무튼 권여선 작가가 소주를 무척이나 맛나게 잘 마신다는 이야기였다. 

   작가 권여선의 본명은 권희선이다. 그녀는 소주를 잘 마시고, 욕설도 유쾌하게 하는 사람이다. <분홍리본의 시절>을 읽을 때 한강과 비슷하게 깡마르고 여린 느낌이었는데, 정반대인가보다. 

   그녀는 소주를 잘 마시고, 유쾌한 욕설을 하며, 넉넉한 사람이다. 

    왜 내가 그녀의 소설들을 읽으며 입맛을 다지고, 그날 저녁에는 그녀가 소설 속에서 말해주었던 음식들을 하나씩 만들어보았는지 의문이 풀렸다. 그녀는 소주를 잘 마시고, 유쾌한 욕설을 하며, 넉넉하고,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소주를 잘 마시고, 유쾌한 욕설을 하며, 넉넉하고, 요리를 좋아하며, 나이 먹는 것을 즐기는 사람. <푸르른 틈새>를 읽으며 여러번 울었다. 엉엉 울어버린 게 아니라, 마음이 저릿저릿 아파오며 한방울씩 떨어지는 눈물이었다. 여자의 아버지 이야기에서 많이 울었다. 젊은 시절, 망망대해를 헤치며 호탕한 뱃사람으로 기세등등했던 그가 나이가 들고 무릎이 꺽이여 술을 먹고 '이년들아! 나, 손재우 아직 안 죽었다!'를 연거푸 외치는 외로운 사내가 되었을 때. 그와 여자가 나란히 서서 각자의 라면을 끓이고, 나란히 앉아 각자 한 병씩의 소주를 비워낼 때. 그가 여자에게 용돈을 줄 때 하던 말들. 바다를 헤쳐나가던 그가 거리 위에서 죽었을 때. 그리고 이제 여자가 '이년들아! 이년들아! 나, 손미옥이, 아직 안 죽었다!' 외쳐댈 때.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 "아버지, 정말 천하일품이예요!" 그리고 여자가 사귀던 남자의 결혼상대를 알게 되었을 때.

    분명 십여년 전에 발표되었던 이 장편소설 후에 발표한, 그러니까 내가 이 장편소설 전에 읽었던 그녀의 단편소설들이 이 푸르른 장편소설보다 더 잘 쓴 작품이라는 건 알겠는데도 나는 이 긴 소설을 읽으면서 그 단편들보다 더 아껴주었다. 너는 참 좋은 책이야. 좋은 이야기야. 여러번 말해주었다. 꼼꼼하고 잘 쓰여진 단편소설들보다 그저 생각이 흐르는대로 쓰여진 것 같은 이 하얗고 긴 책에 더 마음이 갔다. <새의 선물>과 같은 시기에 문학상에 당선된 작품이라는데, 내가 <새의 선물>을 읽을 때 이 소설도 함께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몰려왔다. 지금보다 좀 더 젊은 나이일 때 읽어두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마지막으로. 인터넷에서 인터뷰 기사도 찾아 읽었다. 여기까지 보면 그녀는 소주를 잘 마시고, 유쾌한 욕설을 하며, 넉넉하고, 요리를 좋아하며, 나이 먹는 것을 좋아하고, 꿈을 이룬 사람이다. 앞으로 더 많은 소설을 읽어가면서 그녀를 더 잘 알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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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빨개지는 아이
장 자끄 상뻬 글 그림, 김호영 옮김/열린책들


  '금령씨에게 잘해줄게요'로 끝나는 메일을 받았다. 나는 내가 아끼는 김연수의 낭독 파일을 첨부해 보냈다. '난 이걸 우울할 때마다 꺼내 들어요. 슬픈 날에도요.' 라고 쓴 메일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성기완 시집의 낭송 파일을 보내왔다. '기분이 조금 좋아지더라구요. 솜사탕도 사탕일까, 솜솜솜.' 어제 오늘 나는 여러번 이 파일을 꺼내 들었다. '솜은 왜 솜이 되었을까. 솜솜솜. 솜사탕도 사탕일까. 솜솜솜.' 나는 그녀의 메일을 받고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거기다 어제부터 시작된 이 비에 기분이 더 좋아졌다. 장맛비는 도대체 언제오는거야, 노래를 불렀었는데. 가끔씩 속이 시원해질 정도로 쏴아쏴아 쏟아져준 덕분에 오늘 하루 아주 자알 보냈다. 저녁에는 도서관에서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빌렸다. 신간도서코너에 이언 매큐언의 새 책이 놓여져 있었는데, 오늘은 정말이지 복잡한 이야기는 읽고 싶지 않았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촉촉한 이야기였으면 했다. 얼마전 자주 들르는 블로그에서 이 책에 관한 짧은 글귀를 봤는데, 오늘이야말로 내가 이 책을 읽을 더할나위없는 날이라는 생각에 도서관 검색창에 '얼굴 빨개지는'이라고 친 뒤 청구기호 'NB863-ㅅ194얼'를 쪽지에 옮겨적고 책들 사이에서 얼굴이 빨간 요 녀석을 찾아 대출했다. 도서관 1층에서 비가 내리는 풍경을 보며 크림커피를 한 잔 하면서 '이불솜 틀어드립니다' 파일을 꺼내 들었다.

   들어오는 길에 집 앞 슈퍼에서 밀가루와 서울쌀막걸리를 샀다. 막걸리는 누가 뭐라해도 서울쌀막걸리다. 톡 쏘며 새콤달콤한 서울쌀막걸리의 맛. 나는 이 맛에 반했다. 그래서 비오는 날은 혀가 먼저 반응을 한다. 서울쌀막걸리를 사. 신김치를 꺼내 사각사각 썰고 냉동실에서 오징어도 꺼내 길쭉하게 썰었다. 밀가루 반죽을 하고 후라이팬에 식용유 약간 두른 뒤 동그랗게 모양을 만들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 동생이랑 예쁜 잔에 막걸리를 따라놓고 맛나게 먹어치웠다. 먼저 한 장 구워 먹고 있는 사이에 후라이팬 위에 반죽을 얹어놓고, 먹고 있는 김치전이 반쯤 사라지면 가스렌지로 가 노릇노릇 익고 있는 전을 한 번 뒤집었다. 그렇게 한 7장 정도를 먹었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기분이 조금 더 좋아졌다.

   그리고 배 깔고 누워 9시 뉴스를 기다리며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읽었다. 술 기운이 올라오는지 이 작고 귀여운 아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눈물이 찔끔찔끔 나왔다. 특히 이 부분들.


그러나 (이 글자는 좀더 까만색이다. 왜냐하면, 이어질 이야기들이 조금은 슬픈 것이기 때문이다.)
65페이지.
그리고 (이 글자가 왜 분홍색으로 씌어졌는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98페이지.


   마지막장을 넘기고 나서 나는 기분이 더 좋아졌다. 이 책을 쓰고 그린 장 자끄 상뻬가 <꼬마 니콜라>를 그린 이라는 걸 발견하고 난 뒤에 더더욱. 나는 니콜라는 사랑했었다. 아, 그 책들 고향집에 가면 아직도 있을텐데. (동생과 최근에 니콜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아, 니콜라 나 그 아이 너무 좋았어' 라고 말한 동생이 사랑한 건 스누피의 찰리 브라운였다는 게 이런저런 대화 끝에 밝혀졌다. 동생은 찰리 브라운을 니콜라로 기억하고 있었다. -_-) 그리고 배를 두드리며 천장을 향해 돌아 누으며 엠피쓰리 플레이어를 꺼내 '이불솜 틀어드립니다'를 다시 들었다. '나는 솜이라는 글자를 생각보다 오래도록 쳐다봅니다. 솜 솜 솜사탕.' 이 파일을 보내준 그녀는 메일에 이렇게 적기도 했다. '가족과 친구들이 그러는 것처럼 다정하게 내 진짜 이름을 불러주는 친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요.'

    아, 나는 서울쌀막걸리에 취해 얼굴이 빨개졌다. 예전엔 술을 마셔도 빨개지지 않았는데 요새는 자주 그런다.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 재채기를 하고 있을까. 감기에 걸리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이런 상상을 하면서 나는 조금 더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니까 오늘밤 나는 아주 많이 행복하다는 말씀.


그들은 정말로 좋은 친구였다. 그들은 짓궃은 장난을 하며 놀기도 했지만,
58페이지.
또 전혀 놀지 않고도, 전혀 말하지 않고도 같이 있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함께 있으면서 전혀 지루한 줄 몰랐기 때문이다.
5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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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
이지민 지음/문학동네


   왜 형,에서 민,으로 바꿨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이지형,이라고 발음했을 때의 입 안의 울림이 작가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데. 어떤 이유가 있겠지만 이지민,은 너무 여성적인 느낌이다. 여리고 흔한. 그러고보니 우리 사촌동생 꼬맹이랑도 같은 이름이네.
 
   표지가 예쁜 문학동네 책. 이 소설집에서 마음에 들었던 단편들은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와 '오늘의 커피', '키티 부인' 정도. 소설을 읽고 난 후에 책 표지와 차례를 놓고 봤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오늘의 커피'에서는 번쩍거리는 카페에서 조명을 가장 많이 받는 빛나는 주인장 자리에 어떤 손님이 서서 카페의 주인이 되어 씨디를 고르고 커피를 내려 마시는 모습. '키티 부인'에서는 네모난 방 안 가득한 하얀색 헬로우 키티 얼굴에다 입을 그려놓는 주인공의 모습. '그 남자는...' 에서는 하얀 목련꽃이 핀 좁은 골목길을 돌고 돌아 여자가 남자를 매일 밤 바래다주는 풍경. 소설들이 이미지가 강해 꼭 아홉편의 영화 시놉시스같다. 적당히 기름지고, 적당히 부유해, 매일 밤 외롭고, 어느 날은 쓸쓸하다고 울부짖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p.31-32)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함께 길을 걸었던 사람. 오래 손을 잡고 그 길을 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사람과는 그 길을 딱 한 번밖에 걸어보질 못했다. 매일 술을 마시고, 매일 실연에 빠졌던 서로를 위로했던 스무살 시절의 일이다. 그래, 정말 그 때 나는 스무살이었다. 텅빈 운동장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가 저 멀리서 그 넓고 넓은 운동장을 비틀비틀 가로질러 내게로 왔다.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너에게로 다가가면 언제나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날 뿐이지. 때론 내게 말을 하지 사랑이라는 건 우정보다 유치하다고,로 시작하는 노래였다. 하늘에 별이 총총 떠 있고, 옆에는 얼굴만 봐도 심장이 벌컹거리는 사람이 달큰한 술냄새를 풍기던 스무살. 그 때는 술에 취하면 평소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스러워진다는 걸 잘 모르던 시절이었으니 나의 그의 노래를 카사노바의 세레나데쯤으로 받아들였었다.

   그는 그저 적당히 외로운 순간에 누군가가 필요했던 사람이었다. 때마침 내가 가까이 있어 내게 오고, 내게 와달라고 하고, 내 손을 잡아주었던 거다. 그러면서도 내게는 누구도 아닌 너이기 때문에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건 아주 나쁜 짓이었다. 내 마음은 진심이었는데, 그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도 나중에는 누군가에게 그런 나쁜 짓을 하는 못된 사람이 됐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때서야 스무살 딱 한 번 그 길을 손잡고 걸었던 그 아이의 심정을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내가 참 바보같았구나 깨달았다.


    '그 남자는...'를 읽으면서 갑자기 그 때 그 길이 떠올랐다. 운동장에서 시작해서 친구의 자취집까지 이어지던 정류장이 다섯군데는 될법한 그 길. 어렴풋한 그 밤의 공기. 이제 그 아이의 얼굴이며 이름은 가물가물한데도 그 운동장이며, 불러주었던 노래며, 손을 스르르 잡았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한 걸 보면 내가 스무살 쉬지않고 가슴을 벌렁거렸던 건 꼭 그 아이였기 때문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런 식이라면 그 아이만 내게 나쁜짓을 한 거라고 말할 수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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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민음사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 제1장 첫번째 이야기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8월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 그리고 첫번째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 "이렇게 하여 아무도 그가 실종된 진정한 이유를 모르는 채 7년이 지나, 민법 제30조에 의해 끝내 사망으로 인정되고 말았다."

   <모래의 여자>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 제1장 첫번째 이야기, 9페이지에서 11페이지에 걸쳐 짧게 요약되어있다. 아니, 나는 그렇다고 본다. 실종된 '진정한' 이유는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도 나는 잘 모르겠다. 어렴풋이 알 것 같지만, <모래의 여자>를 읽지 않은 누군가가 그래, 7년이 지나게 그 남자가 실종된 '진정한' 이유란 뭐요? 라고 묻는다면, 나는 글쎄요, 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제1장 첫번째 이야기에는 실종된 '진정한' 이유를 추측을 해 보는 문장들이 있다.

살인이나 사고로 실종됐다면 확실한 증거가 남아 있을 것이고, 납치 같은 경우라도 관계자에게는 일단 그 동기가 명시되는 법이다(p.9)  당연한 일이지만 처음에는 모두들 은밀한 남녀 관계 때문,이라고 상상하였다 (p.10)  세상살이에 넌더리가 나 자살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피력되었다. (p.10)

   <모래의 여자>를 읽지 않은 누군가가 내게 이 문장들을 이용해 질문한다고 생각해보자면, 이런 질문들이 되겠지. '그 남자는 살인이나 사고로 실종됐나요?' 나는 글쎄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요, 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럼 그 남자가 납치당한 건가요?' 글쎄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요. '역시 은밀한 남녀 관계 때문이었지요?' 글쎄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럼 혹시 자살인가요?' 그러면 나는 또 다시 1분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글쎄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한 남자가 있다. 8월의 어느 날, 그는 실종되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곤충채집. 그는 모래 위에서 살아가는 곤충에 관심이 많아 그 곳을 찾았다. 바다가 가까이 있는 모래로 뒤덮인 마을. 모래구멍이라고 해야 하나, 모래에 파묻혀 있는 집들이라고 해야하나. 여하튼 그 독특한 구조의 집에 단지 하룻밤 머물다 가려 했는데 믿을 수 없게도 갇혀 버렸다. 그는 이제 매일 모래의 여자와 함께 모래의 집에서 집 주위로 밀려드는 모래들을 파내야 하는 운명에 처해졌다. 그렇게 그는 실종되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는 어떻게든 이 모래의 집에서, 모래의 여자로부터, 모래의 마을로부터 탈출하려 애쓴다.

  대충의 줄거리다. 결론은 소설의 맨 처음에 제시되었으니 궁금해할 필요도 없다. 그는 7년동안 실종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7년동안 모래의 마을에서 탈출하지 못한 것이겠지. 그러니 이 소설을 읽는동안 궁금증은 과연 남자는 탈출했느냐, 실패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탈출 방법을 시도했으며, 왜 끝끝내 탈출에 성공하지 못했나, 에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이런 순서로 읽었다. 1장, 2장, 3장까지 한 권을 다 읽고, 마지막에 처음으로 다시 돌아와 제1장의 첫번째 이야기를 읽었다. 그렇게 읽으면 소설은 좀 더 명확하게 끝이 난다.

   일단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잘 읽힌다. 읽어갈수록 좋은 책이라는 확신이 드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모래, 라는 물질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늘 고여있는, 정지되어 있는 물질이라고 생각했는데 소설을 읽는동안 머릿속에 그려진 노오란 모래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명체였다. 물결처럼, 바람처럼 흐르는. 그러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모래가 담겨져 있는 이미지들을 기억속에서 죄다 불러내보았다. 그 이미지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과연 모래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보이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바람에 날리고 물에 깍이며 작고 강한 생명체처럼 떼지어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조금 코믹한 상상이라 이 소설과는 어울리지 않긴 하지만, 움직이는 모래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다가 영화 <미이라>까지 갔다. 그건 확실히 역동적이고 거대하고 사악한 모래의 이미지니까. 모래 입에서 검은 벌레들이 막 나오고! 흐흠.)

   마지막에 딱 한번 실종 신고 최고장에서만 이름이 밝혀지는 남자는 처음 모래마을을 찾았을 때 이런 생각을 한다. 모래땅에 사는 새로운 종을 발견해서 곤충도감에 이름을 올리자. 그렇게 곤충이란 형태를 빌려서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자. 그에겐 반영구적인 삶에 대한 바람이 있었다. 결국 모래의 마을에서 그는 정반대의 결과와 마주한다. 이 책의 끝이 남자의 나머지 생의 모습의 반복이라면 말이다. 남자의 이름은 니키 준페이였다. 하지만 모래 위의 주인공은 이름도 없이 그냥 한 남자였다. 모래 위에 새겨진 글자처럼 니키 준페이라는 이름도, 나이도, 선생이라는 직업도 어디선가 스르르 바람이 불면 금방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삶. 소설은 그렇게 끝을 맺는다. 우리들의 대부분의 삶이 그렇듯이.

   니키 준페이가, 아니 남자가 모래 위에 사는 곤충을 채집하려 왔을 때, 그가 열심히 찾았던 곤충을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길앞잡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녀석이다. 등껍질에서 에메랄드빛이 나는 화려한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다면) 이 길앞잡이의 설명 중에 이런 부분이 있었다.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먼저 수직으로 땅에 구멍을 파기 시작한다. 이곳에 살면서 구멍에 빠지는 곤충을 기다려 잡아먹는다." 찾았다. 바로 이 두 문장이다. 이 두 문장으로 길앞잡이의 습성도,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 소설도 모두 설명되어질 수 있겠다. 딱이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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