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와 책
정혜윤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구식이라 그런지 모니터 상으로 긴 글을 잘 읽어내질 못하겠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긴 글은 출력해서 읽는 경우가 많다. 마우스로 쭉쭉 내리며 보고 나서 다음 페이지를 클릭하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글은 왠지 글이 아닌 것만 같다. 하얀 종이 위에 새겨진 까만 글자들을 매끈한 종이의 감촉을 느끼며 침을 묻히며 넘겨 읽어야만 진정 글을 읽는 것만 같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매일 들르는 채널예스에서 자주 업데이트 되는 정혜윤PD의 칼럼에서 제일 정확히, 자주 읽었던 건 마지막의 소개글이었다. 

   그리고 이 몽롱한 그림같은 표지사진 가운데 하얗게 삐뚤빼뚤 새겨진 침대와 책. 그러니까 불면 날라가버릴 인터넷 칼럼이 아닌, 힘이 센 내가 아무리 헥헥대며 불어도 날라갈리 없는 진짜 책, 진짜 종이, 진짜 활자로 이루어진 <침대와 책>을 읽었다. 정혜윤처럼 안락하고 넓은 새하얀 시트의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주말에 뚝딱 읽어버렸다고 하면 근사할 테지만, 일단 우리집엔 침대가 없다. 여자 셋이 사는 자취집이 그리 넓을리도 없고, 새하얀 시트같은 건 애시당초 없었다. 그래서 갓 이사왔을 때는 반짝반짝 광이 났으나 이제는 걸레로 팍팍 문질러도 얼룩들이 없어지지 않는 오래된 오렌지빛 장판 위에서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언젠가 내게도 책으로 둘러쌓인 새하얀 시트를 덮은 넓고 안락한 침대가 생길거라 기대하면서.

   첫 번째 이야기. 꽃 같은 그대가 울고 있을 때. 이 글을 읽을 때, 나는 이 책이 좋았다. 후배가 '언니언니언니언니언니' 라고 다섯 번이나 연달아 부르는 문자메시지를 보냈기에 한밤 중에 전화를 했더니 후배가 울면서 언니는 내가 새벽 세 시에 우는 것 알고 있었어, 라고 묻는 첫 번째 문장에서. 내게도 그런 후배가 있었다. 그 아이는 꼭 메일을 보내면서 내 이름을 두 번씩 연달아 불렀다. 언니언니. 언니는 꼭 이렇게 두 번씩 불러줘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하게 모르면서도 니가 그렇게 불러주니까 좋다, 면서 그 아이의 이름을 세 번 연달아 부르며 답멜을 보냈다. 그 아이도 새벽 세 시에 울고 있었을까?

   이렇게 꼭 다섯번 연달아 불러야 하는 정혜윤 언니의 방대하고 광대한 독서기가 이 책에 담겨있다. 한 꼭지에 무려 스무권의 책이 등장하기도 한다. 와. 정말 이런 사람이 있단 말이야? 어떻게 이렇게 많은 책을 읽을 수가 있어? 그것도 편식하지 않고. 그녀가 읽은 책들 가운데, 읽지 않은 책이 더 많았던 나는 나란 인간은 도대체 그 동안 뭘 한걸까?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 내용이 이 책이고 저 내용이 저 책이란 거지? 뒤죽박죽 복잡해지기도 했다. 하나의 책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또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또 다른 책으로 이어져 또 다른 책으로 끝나는 식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 오늘 나는 마음의 평화를 잃었는데, 마음의 평화를 잃고 나니 폴 오스터의 <신탁의 밤>의 포르투갈제 파란색 노트가 생각났다. 오늘 베트남 여성이 전과 6범의 남편에게 구타당해 죽었다는 뉴스를 들었는데, 그 뉴스를 읽는 순간 쉼보르스카의 <베트남>이란 시가 생각났다. 그해 여름 강화도 여행 길에 비가 내렸는데, 그 비를 보는 순간 <백년의 고독>의 이 구절이 생각났다. 세상에 얼마나 많이 독서를 해야 마음의 평화를 잃은 날, 베트남 여성이 남편에게 구타당해 죽었다는 뉴스를 볼 때, 여행길의 비를 보며 저런 책의 저런 구절들을 금방 생각해 낼 수 있단 말인가. 내 말은. 그러니 이 책을 읽는 중간중간 나오는 '...을 생각해냈다' 라는 구절이 나오면 띠옹해지는 거다. 와, 이 언니, 정말 무시무시한 사람이구나. 그리고 의심도 해 보는 거지. 정말 그 순간 바로 생각이 난 게 맞는 걸까? 정말 집에 와서 책도 뒤적거리지도 않고 바로 생각 난거야? 어려운 작가 이름이랑 제목들도 다 바로 생각나는 거야? 기억력이라곤 지독하게 없는 나는 정말 의심스러웠다.
 
   결론은 정혜윤 언니가 부러웠다는 얘기다. 어릴 때부터 많은 책을 읽어온 언니가. 그래서 어떤 순간이든 책의 한 구절을 떠올릴 수 있는 언니가. 책을 사방에 쌓아놓고 뒹굴수 있는 침대를 가진 언니가. 그래서 인기 절정의 칼럼을 마치고 이렇게 근사한 표지의 책을 낼 수 있었던 언니가. 새벽 세 시마다 울고 있었던, 엔딩의 사를 근사하게 써 준, 언니를 다섯 번 부르는 트뤼포 걸 후배가 있는 언니가.

   그리고 이 촉촉하고 복잡했던 책 속에서 내가 얻은 건 당장 읽어야 할 책 목록. 무진장 많지만, 그 중에서 무엇보다 <검은책>과 <사랑의 역사>, <그리스 인 조르바>와 <신탁의 밤>은 이 여름이 가기 전에 꼭 읽을테다. 얍! 끝으로 너무 부러워 다섯 번은 읽은 정혜윤 언니의 침대를 묘사한 부분. 

   
p.6-7

 
     
,
완득이
김려령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친구네 자취방은 옥탑방이었다. 그 건물의 3층까지 올라가다보면 큰 철제문이 나왔다. 왜 대문에나 있을 법한 그런 철제문. 그 철제문을 열쇠로 따고 올라가면 주인집이 나오고, 한 층을 더 올라가면 옥상이 나왔다. 친구의 자취방은 거기 있었다. 말이 옥탑방이지 여름 밤, 문 열어놓으면 날벌레가 조금 들어오는 것만 빼곤 나는 그 방이 좋았다. 지은지 얼마 안 되서 깨끗하고 무엇보다 넓었다. 그 때 나는 동생이랑 둘이서 나란히 누우면 꽉 들어차는 좁은 하숙방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의 옥탑방은 정말 대궐같았다. 안락하고 아늑했다. 친구는 자주 놀러오라고 하고선 밥도 만들어주고, 술도 사다줬다.

   친구의 옥탑방에서 가장 좋았던 건 자고 가고 다음 날이었다. 문을 열고 나와서 옥상의 난간 끝에 서면 성북동 조밀조밀한 주택의 전경이 아래로 펼쳐졌다. 옆으로 돌리면 3층 높이의 옆집 옥상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였다. 저기 멀리에는 갈 때마다 달라지는 높이의 아파트 공사 건물도 보였다. 상쾌하기로는 그 때 내가 살던 도봉산 밑 동네가 더 상쾌했겠지만, 도봉산 밑에서 매일 아침 내가 맡을 수 있는 공기의 높이는 겨우 1층이었고, 친구의 옥탑방 성북동 공기는 4층이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는 친구네 공기가 훨씬 더 상쾌하게 느껴졌다.

   <완득이>를 읽고 표지의 일러스트 그림이랑 책의 앞 뒤에 있는 완득이가 사는 동네, 운동했던 체육관의 그림을 찬찬히 보면서 그 때 친구의 옥탑방을 떠올렸다. 아침마다 맡았던 4층의 상쾌한 공기. 옆집 3층 높이의 옥상 위를 내려다보았던 기억. 아, 친구의 집 앞에 신문 배급소도 있었다. 그 신문배급소를 지나갔던 기억은 없고, 내려다 봤던 기억만 있지만. 아무튼. 그 때 그 옥탑방을 다시 가게 된다면 그 옥상의 난간 끝에 서면 이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햇반 하나 던지라는 완득이의 담임 똥주와 그래도 선생이라 차마 말은 못하지만 마음 속으로 일백번 죽어라, 죽어라, 악 쓰면서 태연하게 햇반을 던져 줄 완득이, 완득인지 만득인지 누군데 매일 이렇게 시끄럽게 구냐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앞집 아저씨를 왠지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 그러면 나는 그 난간 끝에 끼여서 '완득이 집에 전화 없다잖아, 이 양반아'라는 똥주의 대사를 먼저 내던지면서 왜 내 대사 훔쳐가라는 똥주의 고함소리에 '재밌잖아, 이 양반아'로 낄낄댈 수 있을 거라는 쓰잘데기 없는 상상.

   <완득이>를 공짜로 두 권이나 얻었다. 한 권은 신경림 시인 북콘서트에 가서, 또 한 권은 다른 곳에서. 두 번째 책이 배달된 건 첫 번째로 받은 책을 다 읽은 후였는데, 그 때 동생이 누워있다 이 책을 집어들고는 뒤적거리고 있었다. 조금 있다 보니 금세 다 읽을 태세였다. 책장이 거의 다 넘겨져 있었다. 그렇다. <완득이>는 빨리 읽힌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박장대소를 했다. 나는 컴퓨터를 하다말고 달려가서 그 부분을 확인했다. 그리고 같이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그렇지? 나 혼자만 여기서 웃겨 자빠진 게 아니였지? 아, 정말 눈물나게 웃겼다. 그리고 그 웃음이 날라가자 마음이 짠해졌다. 키가 조금 작은 아버지, 베트남 출신의 어머니, 정신이 조금 느린 삼촌(그래, 온전치 않다기보다 느린 거다), 세상 속엘 끼여들길 거부하는 완득이, 그리고 완득이 맨날 삥뜯는 담임 똥주똥주(꼭 두 번 불어줘야한다. 아, 똥주!). 이 최루성 눈물을 터뜨릴 요소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완득이>는 슬프기보다 웃긴다. 그 웃음이 날아간 뒤로 그래, 그래, 따위를 나부렁거릴 수 있는 짠하고 시큰한 틈이 생기니 너무 가볍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래, 그렇다고 공선옥 작가의 추천글처럼 완득이를 연민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뭐가 더 잘났다고 완득이를 연민한단 말이냐. 나는 혹시 어디선가 섀도복싱을 하면서 폼 잡고 지나가는 눈썹이 짙은 완득이와 마주치게 된다면 나는 어이, 완득이, 라고 불러 세울 거다. 그리곤 여유있게 완득이 앞으로 걸어가선 등을 한번 팍 쳐주고 자식, 좀 웃기더라, 라고 말하곤 지나가야지. 그럼 이 자식이 미쳤나, 하면서 뒤에서 눈깔 빠질듯 째려보겠지. 아니다. 한 대 맞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계획 수정. 웃기더라, 그러고는 당장 뛰기 시작하는 거다. 그러면서 외치는 거지. 열심히 해라, 누나가 너 좋게 봤다, 이 완득아! 라고.

    아, 나머지 한 권은 이 책을 좋아할 게 분명할 옥탑방의 친구에게 줬다. 이 책에서 진짜 웃긴 부분이 있는데, 거기서 나 웃겨서 죽는 줄 알았잖아. 너도 분명 그 부분 읽고 웃겨서 죽을걸, 이라고 말하면서. 친구의 집은 이제 3층인데, 옥탑방이 아니라 자고가는 다음 날 상쾌한 공기는 맡을 수 없다. 대신 깨 쏟아지는 냄새가 솔솔 나지.

           
 
,
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꿈에 김연수 작가가 나왔다. 무슨 내용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중요한 건 '내' 꿈에 김연수 작가가 나왔다는 거다. 꿈이 미래를 예언해주는 건 아닐까 간절히 바라면서 깨어나던 아침들이 있었다. 그 때 나는 꿈을 부여잡고 놓칠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예언처럼 깨달았다. 그 집착이 참 부질없다는 것을. 그러니 이제 꿈을 꾸고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뒤적거리는 날들은 없다. 누군가 내 꿈에 나오는 건 뭔가 이유가 있는 거다. 무언가 켜 둔 채로 잠에 들었거나, 그 사람을 많이 생각했거나. 이번의 경우는 후자다.

   김연수 작가의 블로그에서 곧 여행에 관한 산문집이 나온다는 글을 보고 그 뒤로 매일 인터넷 서점 검색창에서 '여행할 권리'를 검색했다. 알라딘에서는 모린 오코너의 <평등할 권리>만 검색되어 나왔고, 예스24에는 아무 것도 검색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어둑어둑한 푸른 길 위에 '김연수 산문집'이라고 노오랗게 새겨진 '여행할 권리'가 검색됐다. 아,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 것이 이렇게 신나는 거구나. 그의 신간을 기다리는 독자의 마음이란 이렇게 설레는 거구나. 나는 누군가의 부지런한 독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혼자 감격했다.
 
   그리고 열심히 읽었다. 어떤 구절에서는 깔깔거리며, 어떤 페이지는 아껴가며, 어떤 문장들은 두 번씩 반복해가며 읽었다. 책에는 직업이 작가인 '인텔리'하고 '총밍'한 김연수가 1999년부터 밟은 땅들, 그 땅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노오랗고 커다란 점과 함께 담겨져 있다. 곳곳에 그가 찍었을 게 분명할 자그마한 사진들과 함께. 이런 사람들이다. 옌뼨에서 만난 깐두부만 먹는 이춘대씨, 아버지의 고향에서 만난 도야마씨, 밤베르크에서 만난 쎄자르, 독일의 진실된 청년 푸르미, 네가 살고 싶다면 너는 살 수 있는 거라고 말해주었던 버클리의 후사꼬 할머니.

   중간쯤 읽다가 나는 김연수 작가가 블로그에 남긴 글을 생각해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또박또박 읽으려고 대충 훑어봤던 이 책에 관한 글. 이 곳에서 그가 만난 사람들, 그러니까 이 책에 등장하는 직업이 작가인 김연수가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본 구절과 이 책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라 밝혀놓은 글. 그걸 또박또박 읽으러 들어갔는데 '잠시 쉬다가 올게요' 라며 웃는 이모니콘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아, 허탈하여라. 이럴거면 진작에 읽어둘걸. 대신 그가 잠시 쉬다가 오겠다며 웃으며 함께 남겨놓은 음악을 재생시켜 들었다. 코타로 오시로의 '벚꽃 필 무렵'.

   가느다란 통기타 소리는 듣는 즉시 벚꽃길을 떠올리게 하지는 않았지만,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곡이었다. 그 길로 코타로 오시로의 음악을 모두 찾아 남은 책을 읽는 동안 들었다. 일본의 기타리스트가 들려주는 통기타 선율 위에 신화와 동방신기를 사랑한다던 애나와 려화, 마음 심을 믿는 중국 옌지의 신국판씨와 멸치, 자신의 한글 이름을 땅 위에 새겨보던 중국 후쟈좡 마을의 호세영 할아버지, 그리고 버클리, 서울, 일본 땅 위의 지나왔고, 진행되고 있는 어떤 이야기들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아, 나는 이 책이 참 좋다. 첫 이야기를 읽을 때부터 이 책이 좋았다. 이 책을 쓴 직업이 작가인 김연수가 좋았고, 그가 첫 번째로 만난 이춘대씨도 좋았다. 그 뒤로 그가 만난 사람들도 모두 좋았다. 길로 시작하고 길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가. 국경 안에 있고, 국경 밖에 있지만 그래서 다르지만 틀리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았다. 그가 들려주는 국경의 이야기가 좋았다.

   책을 덮어놓고는 포털창에 '김연수 작가'를 쳤다. 내가 읽었던 기사, 읽지 않았던 기사들을 찾아 다시 읽고, 새로 읽었다. 그 곳에는 작년 연말 문인들을 초청해놓고 강정 시인과 '수와 정'이라는 팀을 결성해서 몸을 숙이고 기타를 치는 김연수가 있었고, 여자 중에서 내 딸이 제일 좋다며 딸을 안아줄 때 꽉 안아준다며 포즈를 취하는 김연수가 있었다. 그런 사소한 이야기들을 읽곤 더 그가 좋아졌다. 직업이 작가인 김연수가. 그가 떠난 그 길도. 그가 만난 평범하고 특별한 사람들도. 그러니 그 날 꿈에 김연수 작가가 나온 건 당연한 일이다.

   요즘 적당히 취기가 올라 기분이 좋아지는, 친한 사람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 자꾸 그런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이 있는데, 너무 좋아. 오늘 읽은 부분 중에 정말 좋은 부분이 있는데 꼭 너한테 읽어주고 싶어. 그러면 친구의 경우는 좋아하고, 동생의 경우는 집어치우라고 하든지 지금 당장, 빠른 속도로 읽으라고 한다. <여행할 권리>를 받고 읽기 시작한 날, 동생에게 이 구절을 읽어줬다. 아주 빠른 속도로.

   "물론 택시는 오지 않았다. 대신에 검푸른 국경의 저녁하늘이 별들을 잔뜩 태우고 찾아왔다. 거기에 우리가 탈 자리는 없었다. 나는 자리가 비좁다며 소란을 피우는 별들을 올려다보며 이춘대씨에게 중국으로 들어가게 되면 사천식 샤브샤브 훠궈와 꼬치요리인 추알을 꼭 사먹자고 했다." (p.29)

   이 부분. 빠르게 읽었지만 언니가 읽는 건 늘 지루하게 생각하는 동생은 심드렁하게 어, 그래, 라고 말하곤 말았지만 나는 이 구절을 다시 떠올리곤 기분이 더 좋아졌다. 검색해서 본 어떤 글의 문구처럼 참 다행이다. 당신이 소설가가 되어줘서. 그리고 참 다행이다. 내가 당신 글을 읽을 수 있어서.

     
,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현대문학


   얼마 전 세계지도를 샀다. 뉴스에서 듣는 나라들이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 순간들이 많아진 후로 커다란 세계지도를 하나 사서 벽에 붙여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들이 사용하는 빛깔이 예쁜, 저렴한 것으로 구입했다. 바다는 짙은 하늘빛, 대륙은 아이보리 빛깔이다. 진하게 새겨진 나라 이름 옆에 그 나라의 특산물이나 명소가 귀엽게 그려져 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태평양의 한 가운데 돌고래 두 마리가 사이좋게 뛰어 놀고 있고, 북극의 그린란드에선 지친 기색이 역력한 개 두 마리가 헉헉거리며 눈썰매를 끌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벽에 붙여놓은 지도를 미술관의 명화를 감상하듯 가만히 들여다봤다. 어찌나 평화로운 곡선과 빛깔인지 이 지도 어딘가에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어 나가며 지도에서 자주 아프카니스탄을 찾았다. 부끄럽지만 처음 아프카니스탄을 찾을 때 아프리카 대륙을 먼저 훑었다. 그렇게 뉴스에서 많이 들었던 이름이었거늘 단지 발음되는 그대로만 기억하고 있었던 게다. 아프리카를 지나 중동을 지나 인도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파키스탄과 이란 사이에서 아프카니스탄을 찾았다. 생각보다 작은 나라였다. 엄지손가락으로 꾹 누르니 아프카니스탄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 곳, 블루 모스크가 고요하게 그려져 있는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담은 소설을 읽고 있었다. 삼면이 바다인 곳에서 태어나서일까. 사방에 다른 나라들로 꾹꾹 눌러진 아프카니스탄은 지도만 보고 있어도 숨이 막혔다.

   엄지손가락에 눌러진 지도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을 한 도시를 부르카를 입은 여인이 내려다보고 있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의 표지다. 나는 소설을 처음 읽기 시작하면서 이 여인이 마리암이라 생각했다. 이 도시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절망의 뒷모습을 하고 있는.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이 여인은 굳건하게 살아남은 라일라다. 그리고 그녀는 어두운 골목 구석구석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새싹을 마주하고 있다. 그녀는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희망의 물줄기를 내려다보고 있다. 비록 내가 보고 있는 건 그녀의 뒷모습이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아름다운 눈만 내밀고 있지만 부르카 속에서 라일라는 자그맣게 미소를 머금고 있다. 아주 멀리까지 펼쳐진 도시를 내려다보며 이 도시를, 자신의 가족을, 자신의 나라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아프카니스탄의 이야기는 생소했다. 그 곳의 소식은 뉴스나 기사를 통해 짤막하게 듣는 것이 전부였으니 이렇게 긴 이야기가 이어지는 아프카니스탄은 생소했다. 탈레반이나 무장 세력이니 이빨을 드러낸 채 쏟아져 나오는 그 곳의 뉴스 기사들 너머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황무지의 사막에서 총탄전만이 오고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살아 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삶이 있었다. 이름도 있었다. 마리암, 라일라, 타리크. 나는 자주 이들의 이름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보았다. 총탄전이 오가는 건조한 골목 구석구석에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아주 예쁜 이름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2세대에 걸친 굴곡 많은 아프카니스탄의 현재를 담은 이야기다. 그리고 그 가운데 두 명의 여인이 우뚝 솟아 있다. 마리암과 라일라. 하라미로 태어나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엄마를 잃은 열다섯의 마리암. 그녀는 늘 외로웠다. 정신이 온전치 않았던 어머니, 가끔씩 찾아와주어서 늘 그리웠던 아버지, 자신을 아끼던 선생님과도 이별하고 늙은 남편과 함께 카불에서 늙어갔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자는 남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므로 학대당하고 무시당했다.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한 삶이었다. 몸에 마르지 않고 물들었던 시퍼런 피멍처럼 그녀가 발 디디고 있는 땅, 그녀의 나라도 시뻘겋게 물들어갔다. 이 땅의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강자는 약자를 억압하고 학대하고 짓밟았다. 약자는 강자에게 대항하고 기회를 노렸다. 그 틈에 자신의 뱃속을 채우려는 기름지고 탐욕스런 자들이 그들을 침범했다. 폭격이 만발하고 아프카니스탄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길을 가다, 아이를 돌보다, 밥을 먹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중 이런 꿈을 가진 이가 있었다. 그는 무리해서 여행경비를 마련해 딸에게 큰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바위를 깍아 만든 웅장한 석불 위를 오른 부녀는 바미안 계곡의 풍요로운 땅을 내려다보며 꿈꿨다. 눈을 감은 그의 앞에 따스한 파도가 넘실대는 캘리포니아의 해변이 펼쳐졌다. 그의 꿈은 지극히 평범하고 작은 것이었다. 살아남은 그의 가족들이 행복해지는 것. 전쟁도 폭격도 없는 풍요롭고 따스한 곳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나가는 것이었다. 그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지 않았던 것일까. 라일라는 희망에 가득 찬 아버지의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코앞에서 보았다. 폭격에 맞은 아버지 바비의 몸은 공중에서 찢겨졌고, 그의 꿈도 처참하게 흩어졌다. 그는 라일라의 다정하고 따뜻한 아버지였다.

   라일라도 마리암처럼 혼자가 되었다. 외롭고 고독했다. 쓸쓸하고 무서웠다. 그렇지만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는 라일라에게 희망을 실어주었다. 마리암에서 시작된 이 땅의 절망과 외로움이 이어져 내려오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라일라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갖게 해 주었고, 가슴 아픈 방법이었지만 마리암 남편의 두 번째 부인으로써 이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서로를 만나게 해 주었다. 마리암에겐 라일라의 희망을, 라일라에게 마리암의 믿음을. 그들은 이내 서로를 알아보았다. 이 땅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로의 희망이었다. 그녀가 내 어머니이자 내 딸이라는 걸. 마리암의 희생이 있었기에 라일라와 타리크, 그들의 아이들은 이 척박하게 붕괴된 메마른 땅에서 희망의 탑을 쌓아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라일라는 새로운 생명을 계속해서 잉태하고, 그들의 아이들이 마리암과 자신과 같은 절망 속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고운 씨를 뿌리고 땅을 일구고 물을 준다. 나는 결말이 이리 따스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마리암과 라일라의 긴 여정을 따라가며 종종 고개를 들어 창밖을 봤다. 봄이 왔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땅을 디디고 있는 이곳에는 봄이 만연했다. 모든 꽃들과 사물이 선명하고 따스했다. 개나리의 색깔이 이리 샛노랬나, 진달래의 빛깔이 이리 고왔나. 새삼스럽게 봄이 눈부셨다. 캘리포니아는 아니지만 어쩌면 라일라의 아버지, 바비가 꿈꾼 작은 소망이 이런 풍경이 아니였을까? 그리고 미안해졌다. 힘들게 살아나가고 있는 마리암과 라일라에게. 우리들만 이렇게 찬란하게 반짝이는 봄의 한 가운데서 평화롭게 그 기운을 즐겨도 괜찮은 건가. 그들의 봄을 상상해봤다. 그곳에도 갈라진 땅 틈 속에서 힘겹게 꽃들이 피어나겠지. 500페이지에 달하는 그들의 겨울을 읽어나가며 자주 책을 덮었다. 읽는 속도가 더디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속도에 맞춰 읽어나가다간 철철 눈물이 쏟아져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마음이 아렸다. 시렸다. 이 책엔 쉼표가 너무 적다. 이 아픈 이야기에는 좀 더 많은 쉼표가 필요하다.

   부르카, 이드, 타블라, 판즈시르, 카불, 헤라트. 익숙하지 않은 명칭과 지명들이 등장할 때면 메모지 한 귀퉁이에 생소한 단어들을 메모했다. 그리고 인터넷 검색을 해서 이들에 대한 설명과 사진들을 찾아봤다. 부르카를 입은 어느 여인은 두껍고 검은 천으로 온 몸을 휘어 감고 있었다. 그녀가 드러낸 건 오직 짙은 두 눈뿐. 나는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깊고 슬퍼보였다. 부르카 너머 마리암과 라일라가 보였다. 이슬람의 축제라는 이드를 검색해 찾은 어떤 사진에는 새벽 기도를 올리는 남자들이 있었다. 눈을 감고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있었다. 어떤 이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기도하고 있었다. 타블라로 찾은 동영상에서는 투박한 겉모양과는 달리 청명하고 경쾌한 리듬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카불을 검색창에 입력했다. 전쟁으로 참혹해진 사진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페이지를 넘기고 넘겨도 끝이 없다. 이 중에 낯이 익은 한 장의 사진. 검은 실루엣의 상인이 오색찬란한 풍선 다발을 쥐고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아, 이 사진. 카불에서 찍은 사진이었구나. 몇 년 전, 어느 세계적인 상을 받은 작품으로 본 사진이었다. 아름다웠던 사진. 사진 안에는 모든 것이 회색빛으로 뿌옇다. 단지 하늘 위의 풍선만이 제 색깔을 내며 반짝이고 있다. 어찌나 고운지. 모니터에 손을 대고 그것을 만져보았다.

   마지막 검색어는 바미안 석불. 라일라와 그녀의 아버지가 그 위에서 잠시나마 희망과 행복을 꿈꿨던 바미안 석불 사진을 보았다. 탈레반이 파괴하기 전의 아름다운 석불 사진도 있었다. 이 거대하고 웅장한 석불을 인류는 어떻게 만들어냈으며, 어째서 후손을 이 아름다운 걸 파괴하는 걸까. 석불이 사라진 곳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풍선을 매만졌듯 손을 뻗어 텅 빈 그곳을 매만져 보았다. 라일라의 꿈이 사라진 곳. 아버지의 희망이 흩어진 곳. 수많은 아프카니스탄의 행복이 순식간에 파괴된 이 곳. 어느 기사에서 2009년에 밤하늘을 배경으로 최첨단 레이저로 붕괴되기 전의 형상을 복원시키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 하나, 무슨 의미가 있을까. 촉감이 느껴지지 않는 일회적인 그것이. 어루만질 수 없는 그 것이. 텅 빈 석불의 자리에 햇살이 내리쬐는 사진을 가만히 보면서 내 마음 한 구석이 비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라일라의 아버지 바비에게서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를 보았다. 바비가 꿈꿨던 작은 행복. 전쟁과 가난으로 얼룩진 이 땅을 벗어나 따뜻한 바닷가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꿈을 지녔던 바비. 소설 속, 바비의 이 작은 꿈은 공중에서 찢겨졌지만, 실제로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는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망명했다. 살기 위해 공부했고, 의사가 되었고, 아프카니스탄을 담은 두 권의 소설을 집필했다. 결국 그 곳을 도망쳐 나온 그가 아프카니스탄에 대한 이야기를 쓸 자격이 되는 걸까, 그는 미국인이 아닌가, 따위의 반론들은 묻어두기로 했다. 누가 우리에게 짧고 간결한 뉴스가 아닌 길고 풍성한 서사를 담은 아프카니스탄을 들려주겠는가. 단지 테러국가로 알고 있었던 무지했던 내게 아프카니스탄이라는 나라에 대해, 그 곳을 열심히 살아 나가고 있는 여인들에 대해, 그들의 풍습과 관습에 대해, 이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 귀중한 소설에 감사할 뿐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 언젠가 다시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떠오를 것임을 확신하는 땅. 수많은 마리암과 라일라, 타리크가 잘 견뎌주기를. 아지자와 잘마이, 그리고 곧 태어날 라일라와 타리크의 아이의 두 발이 디딜 이 땅에서 절망과 폭력이 하루 빨리 사라져주길. 그래서 언젠가 평화로운 이 땅을 찾게 되면 책 속에서 보았던 바미안 계곡이며 카불 거리에서 미소를 머금은 행복한 그들을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마리암, 라일라, 살람!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무사하기를.

,
오늘의 사건사고
시바사키 토모카 지음, 신유희 옮김/소담출판사


   <오늘의 사건사고>를 '읽은' 건 <오늘의 사건사고>를 재밌게 '보았기' 때문에. 영화 <오늘의 사건사고>의 원작 소설과 원작자가 영화 촬영 현장에 다녀온 뒷 이야기가 함께 있는 책이라고 해서 집어 들었다. 읽고 난 후의 소감은 영화가 훨씬 낫다. 소설은 날아갈 것처럼 가볍고, 촬영장을 다녀온 뒷 이야기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별 게 없었다. 영화는 원작소설을 거의 그대로 스크린에 옮겼다. 건물 속에 끼인 사내 이야기와 마지막 해변의 고래 이야기만 첨가하고. 그래서 소설을 읽는 내내 영화를 다시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긴 했는데, 역시 결론은 영화가 훨씬 이 사소하고도 소소한 이야기를 잘 표현했다는 것.

   똑같은 시간이지만 여러 장소에서 상상하지도 못할 많은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오늘의 사건사고>의 감독도 이런 점이 마음에 들어서 소설을 영화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예전에 영화 개봉 때 그런 기사를 읽었던 것 같은데 찾아보니 없네.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서 여관방에 박혀있었는데 TV를 켜니 9.11테러로 뉴욕에서는 건물이 무너지고 있었단다. 자신이 속한 공간은 이렇게 고요한데, 지구 어딘가에선 사람들이 죽어가는 이런 현실들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였다는. 그래서 만들게 되었다는 오늘의 사건사고.

   그래. 나도 예전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우리의 인생이, 나의 하루가 왜 영화나 드라마가 되지 못하는가에 대해. 현실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극적인데, 왜 우리의 하루는 그렇지 못한가. 드라마에서는 헤어진 남녀가 애틋한 마음을 부여잡고 기가 막히게 엇갈려서 보는 사람을 이리도 애태우는데, 왜 우리의 사랑은 그렇지 못한가. 그 때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의 하루도 애틋하다고. 우리의 사랑도 분명 극적일 거라고. 단지 드라마처럼 전지적 시점에서 보지 못해서 그럴 뿐이라고. 우리가 TV 드라마를 보듯 누군가 하늘 위에서 우리네 인생을 가만히 내려다보면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하루도 기가 막히게 애틋하고 극적일 거라고. 단지 우리는 모르니까. 그 사람이 나를 잡기 위해 마지막으로 달려와 한참을 기다리다 돌아간 그 밤을 말하지 않아 알지 못했으니까. 내가 그 사람을 울며 찾아가 허탕치고 온 날, 그 사람도 나를 찾아 울며 애태웠다는 걸 그 사람도 다른 누군가도 일러주지 않았으니까. 사람 많은 명동 길에서 스쳐가듯 지나쳐 설레이며 다시 우연히 만날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하니까 그런 거라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과거와 미래와 스쳐 지나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오늘이 재미없는 드라마가 되어버리고 있다고 내멋대로 결론을 내렸었다. 


   영화 <오늘의 사건사고>도 소설 <오늘의 사건사고>도 그런 이야기다.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어느 날.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도 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줄 알았지만, 지나보면 어떤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한 그런 날의 이야기. 그렇게 지나가는 사소하고 소소한 이야기.

   영화 <오늘의 사건사고>를 생각하면 밤새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창 밖의 검푸른 이미지가 떠오른다. 조용하고 편안해서 이대로 계속 달리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영영 집에 도착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 케이토가 술이 취하면 들어가는 올챙이알 속같은 느낌. 덜컹거리는 작은 진동과 함께 나의 자리가 작지만 분명한 곳. 내 무릎 옆에 누군가 바짝 당겨 앉아 있지만 동시에 철저히 혼자일 수 있는 시간. 혼자지만 외롭지 않은 느낌. 한밤 중 차 안의 그런 느낌이 참 좋다. 그래서 결국 도착한 곳이 집이 아니라 어느 바닷가고, 그 바닷가엔 고래들이 육지 위로 올라와 자살을 진행 중이다. 그건 너무나 육중하고 매끄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바라보게만 되는 그런 느린 자살이다. 우리가 자살을 하는 것처럼 고래도 자살을 꿈꾸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생각이 절로 드는 아름다운 검푸른 새벽의 바닷가. 다행히 영화의 끝에 고래는 저절로 사라졌다. 저절로 바다로 돌아갔다. 그래. 살아야지. 분수처럼 시원하게 물을 뿜고, 넘실넘실 헤엄치며, 아무리 사소하고 소소해도, 아무리 극적인 해피엔딩이 찾아올 기미가 보이질 않아도 그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그렇게 느리고 슬프게 죽어갈 순 없지. 암. 그렇고 말고. 


 
,
첫사랑
수필드림팀 지음/해드림출판사


   첫사랑. 처음 표지를 보고선 제목과 어울리지 않는 사진이라 생각했다. 뒷모습이라니. 덧니 하나가 박혀 커다란 미소를 터뜨리는 앞모습이여도 부족할 터인데 무얼 보고 있는지,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뒷모습과 첫사랑이라니. 그렇게 심드렁하게 첫 장을 넘겼다. 그리고 마지막 장. 책을 덮고 첫사랑이란 제목과 나란히 앉은 표지의 뒷모습을 다시 마주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뒷모습은 사랑’이리라. ‘첫’은 빨간 색으로 칠해져 확실히 뒷모습 위에 위치하고 있다. 첫-풋-이 그렇듯 다음 단어를 더 싱그럽고 아련하게 해 줄 빠알간 접미사일 뿐이다. 그러니 사랑과 나란히 앉은 두 볼이 발그레할 것이 분명할 첫-스런 뒷모습. 헝클어진 듯 자연스레 묶은 머리 위로 반짝이는 오전의 것이 분명할 햇살이 쏟아지는 이 한 소녀의 뒷모습을 마주하곤 그 날 그를 만난 일이 떠올랐다.

   사람이 많은 지하철 환승구역의 에스컬레이터였다. 내 열 걸음쯤 앞에 그가 서 있었다. 영락없이 십여 년 전 내가 사랑했던 그의 뒷모습이었다. 비쩍 큰 키에 마른 몸, 늘어난 갈색 스웨터에 통이 넓은 면바지, 어깨에 비스듬히 맨 크로스백.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와 헤어진 뒤 얼마간 애타게 바랬던 일. 그 시절 나는 우연히 길을 가다 그와 마주치게 되면 어떤 말을, 어떤 표정으로 건네야 그가 내게 미련이 남을까 매일 거울 앞에서 연습했었다. 그런 그가 내 앞에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우리의 마지막이 그랬듯 그를 종종걸음으로 뒤쫓았다. 그러다 그가 뒤돌아보는 순간. 그가 아니었다. 그냥 갓 스물을 넘긴 그 시절 그를 닮은 대학교 신입생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그 날 그 스무 살의 신입생 곁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면서 그동안 얼마나 아둔했나 깨달았다. 사람 많은 곳에서 그를 닮은 뒷모습에 가슴이 쿵쿵 무너진 적이 그 날 말고도 있었다. 내가 쫓았던 건 십여 년 전 그의 모습이었다. 세월이 흘렀고 그도 이제 스무 살 신입생의 모습이 아닐 터인데. 더군다나 최근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아놓고선. 그는 그 시절보다 살이 올랐고 품이 넓은 스웨터나 면바지는 더 이상 입지 않는 듯 여러 사진 속에 머물러 있었다.

   다시 돌아와 빠알간 첫사랑의 뒷모습. 이것을 처음 보곤 누군가가 사랑했던 그녀의 오래 전 뒷모습이란 생각을 고쳤다. 이건 오래 전 그를 사랑했던 의 뒷모습이었다. 열아홉 편의 곱디고운 첫사랑이 담긴 수필들. 현재의 나를 담아 읽어가는 것이 최고의 독서법이라 생각하는 나는 첫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하는 열아홉 편의 수필들을 읽으며 생각했다. 이건 여리고 서툴러서 아름다웠던 오래 전 스스로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라고. 그 시절의 그이를 추억하는 것보다 그 시절 그이를 사랑했던 자신을 추억하는 아련하고도 그윽한 그리운 글귀라는 것을. 입 안 가득 따끈한 팥죽이 고이는 것만으로도 설레던 나, 밑이 뻥 뚫린 자동차로 도로를 달리며 즐거워했던 나, 새벽녘 어두운 방 안에서 얼굴 위를 지나는 입술만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나, 절름발이 흉내를 내며 찹쌀도넛을 꼭 전해주고 싶었던 나, 어떤 이의 눈에 코스모스와 꼭 닮아있었던 나를 추억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더 따스하다는 것을.

   봄이 되어 오래 전 보았던 영화를 다시 꺼내 보았다. 4월 싱그러운 첫사랑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영화. 이야기는 소녀가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소년을 드디어 만나면서 끝난다. 오래 전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시시한 결말이라 생각했던 나는 다시 보고는 가장 싱그러운 결말이라 생각했다. 우리들의 첫사랑이란 덜 여문 풋사과 같아서 시큼하고 때론 베어 물기 힘들 정도로 딱딱하지만 그만큼 상큼하다는 것. 잘 여문 사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싱그러운 향이 가득하다는 걸 안다.

    열아홉 편의 봄바람 같은 첫사랑들을 마주하곤 왠지 내 사랑은 그저 열심히 사랑하다 허무하게 끝나버린 것이 아닌가 시시한 생각마저 들었다. 내겐 기차 안의 설렘도, 고무신을 신고 달려 가야했던 다급함도, 은방울 향 손수건의 추억 따위도 없었다고. 그러다 고개를 들었다. 봄.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봄이 코앞에 있었다. 갑자기 도토리묵이 떠올랐다. 싱그러운 깻잎 향에 짭짤한 양념을 곁들여 오물오물 나눠 먹었던 안동 버스정류장 앞 허름한 식당. 밤새 그가 끙끙대며 꾹꾹 눌러썼다는 편지를 건네주었던 지하철 4호선. 떠오르기 시작하니 그와 내가 함께 했던 추억들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내 첫사랑도 시시하지 않았다. 우리들의 모든 사랑이 그렇듯. 그리고 어김없이 그를 사랑한 봄빛같이 서툴지만 충분히 사랑스러웠던 뒷모습의 내가 있었다.





덧, 독후감 공모전이 있어 냈는데 '똑'하니 떨어졌다. 뭐든 응모할 때는 안 보이는데, 후에 읽으면 보인다. 글 속에 뭐가 없고 뭐만 있는지.
 

,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
공선옥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지난 주, 비가 내리던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쓸쓸해졌다. 마음 속 묵직한 무언가 휙 빠져나간듯 공허해지는 순간이 있다. 당장 우산을 챙겨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다이어리에 공선옥 책들의 청구기호를 적어놓은 페이지를 펼쳤다. <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를 빌릴 생각이었는데 손은 자꾸만 자운영 꽃밭쪽으로 갔다. 두 책을 펼쳐놓고 뒤적거리다 자운영 꽃밭을 들고 나왔다. 잘한 짓이었다. 물론 마흔에 길을 나선 작가의 이야기도 그랬겠지만 자운영 꽃밭 속 작가의 이야기는 따스하고 따스해서 쓸쓸한 내 마음을 요리조리 잘도 어루만져주었다. 나는 정말 이 책을 금세 읽어버릴 것이 두려워 아껴가며 읽었다. 자주 책장을 덮고 두꺼운 표지 양장을 쓰다듬었고, 혼자 있는 방 안에서 자주 소리내어 읽었다. 나는 이렇게 읽는 것이 제대로 공선옥을 읽는 것이라 믿게 되었다. 겨우 하나의 소설집과 하나의 산문집을 읽은 주제에 말이다.

   내가 읽은 공선옥의 두번째 책. 물론 공선옥의 두번째 책이 아니라, 나의 두번째 책이다.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를 읽고, <명랑한 밤길>을 읽고 그랬던 것처럼 아, 공선옥,이라고 다시 한번 나즈막히 외쳤다. 아, 공선옥. 나는 이제 그녀의 열렬한 독자가 되었다. 그녀의 팬,이라고 하고 싶지만 왠지 닭살스럽다. 팬,이라는 건 왠지 뮤지션이나 영화배우에게 잘 어울리는 표현같다. 그러니 나는 그녀의 열렬한 독자다. 아, 얼마나 멋진가. 공선옥의 열혈독자.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에는 작가 공선옥보다 인간 공선옥의 이야기가 그득하게 담겨져 있다. 시골에 살면서 도시를 갈망했던 어린 시절, 도시에 살면서 시골을 그리워했던 어느 시절, 드디어 시골에 살게 된 지금. 노란 마당에 노란 장판에 노란 볕을 좋아하는 공선옥. 늘 떠나기를 갈망하고 떠나면 남아있는 가족 걱정에 금방 돌아오기 일쑤인 엄마 공선옥. 자운영 꽃밭에서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는 딸 공선옥. 비를 사랑하는 공선옥. 비오는 밤 묘지에서 가고 없는 그리운 이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비처럼 눈물을 흘리고 마는 공선옥. 티코를 타고 시골길을 천천히 달리는 공선옥. 버스 안내원이었던 85년의 광주에서 분신하는 남자를 보고 그대로 버스를 박차고 달려나갔던 공선옥. 세 아이의 엄마인 공선옥. 무례한 독자의 방문에 자신이 잘못한 거라는 바보 작가 공선옥. 아, 나는 이런 인간 공선옥의 이야기를 한 꼭지씩 읽어나가며 그야말로 열혈독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도 공선옥 작가처럼 내가 꿈꾸는 노란 삶이 있다. 언젠가 그녀처럼 이루어낼 꿈일 수도 있고, 그녀처럼 이루어내지 못할 꿈이 될 수도 있겠다. 작가가 일구는 자운영 꽃밭에 머무는 동안 나는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노랗게 아름다운 것인지 보았다. 그녀의 글은 마음을 울린다. 가슴을 적신다. 너무나 좋다. 한 구절 한 구절 따뜻해지지 않는 순간이 없다. 그런 꿈을 꾸어본다. 언젠가 모내기 전, 만발한 자운영 꽃밭에서 밤 마실의 그것처럼 신김치 한 접시와 된장과 오이 안주를 앞에 두고 그녀와 막걸리 한 잔 나누는 꿈. 그 때가 낮이면 보라빛 자운영 꽃에 취할테고, 밤이면 노오란 달이 환할테지. 나는 한 잔 막걸리에 취해 내가 얼마나 그녀의 열혈독자인지 1시간이 넘도록 떠들어댈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녀는 슬그머니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내게 더 내어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자운영 꽃에 취해, 달빛에 취해, 그녀에게 취해 오늘이 내게 얼마나 행복한 날인지 2시간이 넘도록 지껄어댈지도 모른다. 바보작가와 열혈독자가 떠난 보라빛 자운영 꽃밭은 곧 갈아엎혀 초록빛 논밭이 될테지만.

   그 정도로 좋다. 이 책이. 바보 작가 공선옥이. 
 


,
풋 2008년 봄호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문학동네

 
    Foot,이 아니라 풋,이다. 풋사과할 때 풋. 풋사랑할 때 풋. 풋풋하다할 때 풋. 빠알갛게 여물기 전 단단한 연두빛의 아삭한 접두사. 더 열심히 물을 빨고, 햇살을 쬐면 먹음직스럽고 탐스럽게 영글 글자. 풋,하고 웃는 수줍은 소리. 그 풋,이다.

   그러니 내가 이 따스한 봄에 연두빛 청소년 잡지 풋,을 만난건 당연한 일이다. <풋,>을 산 건 김연수 작가의 새 연재물 때문이다. 늘 그렇듯 김연수 작가의 글은 따스했다. '원더보이'라는 놀라운 초능력을 가진 소년의 이야기다. 소년은 소설의 첫번째 이야기에서 아버지를 잃고 초능력을 얻었다. 그리고 첫번째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소년은 창 밖의 내리는 눈을 마주한다. 

   눈을 묘사한 마지막 장을 읽고서 나도 모르게 아, 탄성이 나왔다. 또 이렇게 따스한 이야기구나. 이 작가는 어떻게 이런 감수성을 지녔을까. 중심을 잃지 않으며 그가 내어놓는 따스한 감수성 어린 묘사의 나열. 시를 썼던 이라 그런걸까. 그런 거라면 나도 시를 쓰고 싶다. 어떤 부분은 예전에 읽었던 조너선 사프란 모어 소설과 닮은 구석이 있다. '아빠죽지마'가 49번 반복되는 문단이 있다. 소년은 진정으로 아빠가 죽지마기를 49번 바라는 것이다. 먹먹해진다. 따스하고 아름다운 스노우볼을 한 손에 들고 이리저리 흔들어 내려놓곤 그걸 가만히 바라보는 느낌이다. '원더보이'는.


   <풋,>의 여러 글들을 읽어내려가며 나는 고동색 교복을 입은 단발머리 여고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초록색 교복을 입은 커트머리 여중시절이면 더 좋겠고. 그 때로 돌아가 북적대는 교실 안, 작은 나무 책상 위에서나 내 방 침대 위에서 좋아하는 테잎을 틀어놓고 이 꿈꿀 수 있게 만드는 잡지를 읽고 싶어졌다. 앞자리에 1을 단 나이인 채로 잡지 속에 소개된 책들을 찾아 읽고 싶어졌다. 스티비 원더의 음악을 듣고, 만화책을 열심히 모으고, 18세 금지 영화도 몰래 찾아가 보고, 튕튕거리며 기타도 배워보고 싶어졌다. 내가 그랬던 것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은 글을 끄적거려보고 싶어졌다.  

   그러니 이건 스물아홉이 열아홉의 나에게 하는 풋,스런 이야기다. 스물아홉이 열아홉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건 니가 아니라고 읊조려 보라고. 가장 행복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보라고. 힘들 땐 책과 음악, 영화를 끝없이 찾아보라고. 세계 지도를 붙여두고 그 곳을 디딜 상상을 해 보라고. 친구와 나란히 서 자판기 커피를 빼어 먹으며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라고. 그리고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기억해두라고. 그 시간의 설렘을 만끽하라고. 스물아홉이 열아홉에게 말한다. 이 책을 읽을 바로 지금 싱그러운 너희들의 시간이 부럽다고. 너희의 앞자리 1의 나이가 그립다고. 그렇기에 가질 수 있는 연두빛 단단한 너희들 꿈이 부럽다고. 벌써부터 이렇게 글을 써대는 그 자체로 질투가 난다고. 서툴지만 상콤하다고. 너희들 글이 싱그럽고 솔직하다고.

    좋은 글이 많다. 여름호도 가을호도 기다려야지. 윤대녕 작가의 글엔 가슴이 뛰었다. 만해마을을 소개하는 글에도. 아, 그 곳에 가보고 싶어라. 이 잡지에서 제일 좋았던 건 센스있는 두 줄짜리 작가 소개글들이었다. 어떤 소개글은 너무 좋아 다섯번씩 읽어댔다.


,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
제레미 머서 지음, 조동섭 옮김/시공사


    이름은 팝앤북. 북앤팝보다 왠지 더 부르기 편한 것 같다. 3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그리 크지도 그리 작지도 않은 너비에 1층은 서점. 이야기가 있는 소설만 파는 서점이다. 나무로 된 책장들 사이사이 나무 의자가 놓여져 있다. 책을 살 수도 있고,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책의 배열은 작가별로. 영화 <댄 인 러브>에서 보았던 것처럼 손으로 쓰거나 글자를 오려붙인 친근한 팻말의 작가 이름이 책장 사이사이 붙여져 있다. 훌륭한 책의 표지들이 영화 포스터처럼 벽 사이에, 책장 사이에 무심한듯 멋드러지게 붙여져 있다. 2층은 음반가게. 말랑말랑한 팝 위주의. 영화 <비포 선라이즈>처럼 사랑의 눈빛을 훔쳐볼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역시 나무로만 이뤄진 테이블에 나무 의자가 놓여져 있다. 음악을 살 수도 있고, 음악을 들을 수도 있다. 3층은 커피와 술을 파는 카페. 역시 나무로 이뤄진 테이블과 의자가 있다. 영화 <카모메 식당>처럼. 책을 사고 음반을 산 사람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갈 수 있는 공간. 책을 사지 않고 음반을 사지 않은 사람도 행복해질 수 있는 공간. 3층에선 간간히 작가의 낭독회나 뮤지션의 어쿠스틱 무대가 펼쳐진다. 옥상은 흡연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카페. 난간마다 계절의 꽃이 만발하고 밤이면 촘촘한 별을 볼 수 있는 곳. 건물 전체에는 2층에서 엄선한 음악들이 하루종일 울려퍼지고, 3층엔 촌스럽게도 주크박스가 있다. 언제든 누군가 동전을 넣으면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온다. 건물 전체에 흐르는 노래는 멈추고 그 오래된 노래가 3층, 아니 옥상까지 로맨틱하게 울려퍼진다.

    <시간이 멈춰진 파리의 고서점>을 읽으며 이 꿈의 건물을 끊임없이 상상했다. 심지어 팝앤북의 종이봉투와 테이크 아웃용 컵의 디자인까지 생각했다. 1층에서 책을 한 권 사고, 3층으로 올라가 2층에서 틀어주는 음악을 들으면 생맥주 한 잔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는 정말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기까지 했다. 다이어리에는 말도 안 되는 그림을 그리며 북앤팝의 설계도를 완성했다. 작가들이 이 공간을 너무나 좋아해 팝앤북에 가면 언제든 작가와 뮤지션을 만날 수 있다는 소문이 나는 상상을 했다. 이런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니 나도 참.

   예스24에서 자신의 책장에서 가장 오래된 고서적에 대한 이야기를 댓글로 달면 <시간이 멈춰진 파리의 고서점>을 선물해주는 이벤트에서 당첨됐다. 나는 내 책장에서 가장 오래된 책, 1981년에 민성사에서 출간된 <잠재력의 기적>에 대한 짧은 댓글을 달았다. 세로로 씌여진, 이제는 누렇게 바랜 책. 내가 태어난 다음해에 출간된 것을 아빠는 어느 해엔가 구입했다. 뒤의 몇 장은 벌써 떨어져나갔다. 아빠는 언젠가 명절에 이 누렇고 오래된 책을 내 손에 쥐어주며 가져가서 한 꼭지씩 읽어보라고 했다. 잠재력이란 게 별 게 아니라고. 아빠는 그 순간 큰 딸의 숨어있는 잠재력이 하루 빨리 기적처럼 깨어나기를 바랬을텐데. 내 잠재력은 아직까지 깊은 곳에서 고이고이 잠들어있다. 요 녀석은 당최 깨어날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하다.

   그리하여 내게 온 책. 소설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에세이였다. 실제로 파리에 '셰익스피어 & 컴퍼니'라는 믿을 수 없는 공간이 존재한단다. 오래된 파리의 영어서점이고, 영화 <비포선셋>에서 에단 호크가 낭독회를 하던 그 서점이 바로 이 곳이란다. 낡은 나무 책장에 오래된 영어 서적들이 즐비해있는 1층이 있고, 2,3층에는 이 서점의 주인인 조지의 허락을 받은 작가들이 공짜로 머물고 있다. 다소 더럽고 복잡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는 가난한 작가들에겐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이들은 아침에 서점을 함께 열고, 일주일에 한 번 깨끗이 서점 청소를 하고, 밤에 함께 문을 닫는 일만으로 이 곳에서 공짜로 잠을 잔다. 아, 글도 쓰고. 일주일에 한 번 홍차 파티와 팬케이크 아침을 얻어먹을 수 있다. 이 곳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터라 파티도 여러 번 있다. 그러니 이 곳의 작가들은 식사를 해결할 식비만 마련한다면 천국과 같은 이 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사람이 사는 곳인지라 예기치 못한 시련과 문제들은 언제든 불어닥치긴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제레미 머서가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보낸 여러 날들을 기록한 책. 책을 읽으며 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서울에 있는 내가, 파리도 한번도 가 보지 못한 내가 제레미 머서와 함께 '셰익스피어 & 컴퍼니'에 들어가 여러 날을 함께 묶는 경험을 했다. 오래된 책들의 냄새가 가득한 센 강가의 작은 서점. 완벽한 공산주의를 꿈꾸는 서점의 주인 조지가 있고, 아일랜드에서 환상의 낭송회를 성공한 사이먼이 있고, 한밤 중 와인에 취해 오돌오돌 떨며 센강에서 이야기 시간을 가지는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곳. 책을 읽으며 이 곳에 반한 나는 그럴 거라 믿긴 했지만 이 곳이 계속해서 이 비현실적인 전통들을 이어나갔으면 하고 바랬다. 나도 언젠가 이 곳을 방문하고, 내 자식들도, 내 자식의 자식들도 이 곳을 방문할 수 있기를. 그래서 이 에세이의 마지막 장을 읽으며 정말 다행이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거쳐간 작가들의 짧은 자서전을 묶은 책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곳에 머물려면 누구든 자신의 짧은 자서전을 조지에게 제출해야 한다. 그 자서전이 조지의 마음에 들어야만 이 곳에 머무를 수 있다. 만일 내가 조지에게 자서전을 써야한다면, 내 인생의 어떤 순간을 극적으로 써 낼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내 인생은 너무 극적인 구석이 없다. 난 이 곳에서 머무를 수 없을 게 분명하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책을 다 읽고 양장 위에 덮여진 파아란 표지를 빼냈다. 4면으로 접혀져 있었던 표지가 하나로 이어지면서 푸른 체실비치 풍경이 길다랗게 펼쳐졌다. 아니, 푸르다는 표현으로 부족하다. 뭐랄까. 아득해지는 빛깔이랄까.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표지를 펼쳐 보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릴게 분명하다. 해가 거의 진 후, 바닷가에 홀로 서 있으면 이런 느낌일까. 서글프다는 말로도, 시리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아득하다는 말로도, 저리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저기 앞에 하늘하늘 걸어가는 여인. 플로렌스. 나는 에드워드 대신 그 뒷모습에 대고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고 단번에 달려가 말해주고 싶다. 당신 마음은 그게 아니잖아요. 에드워드 마음도 그게 아니예요. 이렇게 끝내고 평생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하지만 소설은 그렇게 끝났고, 훌륭한 결말이었다. 나는 또 이언 매큐언에게 빠져버렸다.

   1960년의 영국을 상상해보자. 보수와 해방이 넘실대며 물결치던 시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한 여자가 있다. 락앤롤에 빠져있는 한 남자가 있다. 둘은 자라온 환경도, 좋아하는 것들도 다르지만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여자의 바이올린 연주에 열중하는 모습에 남자는 넋을 놓고, 남자는 여자에게 역사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기록된 중요한 인물들에 관해 책을 쓰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다르기에 상대방이 가진 것에 더욱 매력을 느꼈던 두 사람은 결국 결혼에 골인한다. 그리고 첫날밤. 결혼식 전까지 두 사람은 정절을 지킨 그들이 첫날밤을 치루면서 틀어져 서로 등을 돌리고 걸어간다.

   지금까지 읽었던 이언 매큐언의 책들은 모두 그랬다. 심드렁하게 혹은 더디게 전개되다가 소설의 마지막 몇 장을 남겨두고 펑 터지는 거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뭔지 모르는 그것이 펑 터진다. 아, 라는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오고 아득해진다. 가슴이 시려온다. 나는 그 느낌이 좋아 몇 번을 반복해서 결말을 읽었다. 아프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드는 결말. 사는 게 이런 거랍니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 잃게 되는 것들이 많지요,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라고 말하는 듯한. 왠지 이언 매큐언은 결말을 위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거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그의 결말들은 서늘하고 아득하다. 그는 서늘하게 쓰고, 읽는 독자들은 아득해진다. 그래서 좋다.

   그의 심리 묘사는 지극히 사실적이다. 그래서 때론 치졸하고 이기적이고 이중적이다. 보기 싫다고 느껴지는 구석구석까지 훤히 내려다본다. 사랑이라 믿었던 일들이 순식간에 배신이란 감정들로 변모하는 어떤 순간. 그 전까진 모든 게 사랑이었지만, 그 이후론 모든 게 가식이 되어버리는 자기 합리. 그리고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래, 내 평생의 사랑은 그 때 그이뿐이였어, 라고 후회하는 자기 연민. 의도하지 않은 말을 무섭게 뱉어내어놓고는 마음이 말을 뱉어내는 게 아니라 말이 말을 뱉어내는 꼴이 되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자기 방어. 이 순간 그이를 잡지 않으려 영영 놓쳐버리고, 영영 후회하면 살 것을 알면서도 잡지 못하는 얕은 자존심. 평범한듯 평범하지 않게 일상의 심리들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덕분에 소설을 읽으며 여러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나도 이런 생각한 적 있었어. 비겁하고 치졸했지. 이런 식의 말 해서 엄청 후회했었지. 이기적이고 소심했지.

    5장을 읽어내려가며 체실 비치를 상상했다. 실제로 신혼여행지로 많이 택하는 곳이라는데. 표지와 같이 해가 거의 진 서늘하고 푸른 바닷가.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 있는 풍경. 여자의 위치에서는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남자의 위치에서는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파도가 쏴아, 해변가에 부딪치며 사라지는 소리. 여자가 소리치고, 남자가 발로 해변가의 돌을 걷어차고. 여자가 남자를 지나서 걸어가고, 남자가 그 뒷모습을 잡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는 풍경. 더 크게 부딪치는 쏴아쏴아, 파도 소리. 완전히 어둠이 깔린 체실 비치. 언젠가 체실 비치에 가게 된다면 이들을 꼭 기억하리라. 플로렌스, 에드워드. 여자가 걸어가고 남자가 그걸 보고 서 있는 모습을 나는 남자 뒤에서 보리라. 세번째 줄 중앙의 C9 자리일지도 모른다. 파도처럼 아스러져 버린 그들의 첫날밤을 밀려오는 푸른 파도를 보며 떠올려주리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