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자꽃 설화

from 서재를쌓다 2008. 2. 12. 00:39
치자꽃 설화
박규리




   작년에 치자꽃향을 그려보려고 애썼던 계절이 있었다. 봄이였으면 분명 화분을 사러 갔을텐데 그렇지 않았던 걸 보면 가을즈음이였던 것 같다. 치자꽃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향기로운지에 대해 쓴 글을 읽고선 그 향기를 지금 맡아보지 않으면 안 될 사람처럼 킁킁거렸었다. 분명 내가 언젠가 맡아보았던 향일텐데. 그리 진하다는데. 아카시아 향이랑 비슷한가. 냄새에 민감하지 못한 내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였다. 고작 기억나는 향이라곤 아아아아아아아~ 아카시아 향. 아쉬운 마음에 인터넷에서 치자꽃 사진들을 검색해서 보며 내년 봄에는 꼭 치자 화분을 사리라, 다짐했다. 곁에 오래 두고, 오래 냄새 맡을 수 있도록.

   명절에 엄마가 치자물을 만들어와선 야채전에 넣어 노랗게 구워내면서 색이 이쁘다, 이쁘다 하는 걸 듣고는 그 때 생각이 났다. 올라오기 전에 아빠가 봄이 되면 꽃을 볼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치자 나무와 붉은 색의 남천과 한약에 쓴다는 생선 비린내가 난다는 어성초를 뽑아주셨다. 나무들이 놀라지 않게 함께 지내던 흙도 따로 담아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빠의 메모



   집에 도착해서는 짐을 놓고 바로 나가서 화분이랑 흙을 샀다. 흙을 사러 꽃집에 들렀더니 꽃집 아주머니께서 긴기니아 난을 사가라고 하신다. 이름이 뭐라구요, 나는 계속 묻고 아주머니는 계속 긴기니아, 라고 말하고. 난인데 향이 진한 것이 그렇게 좋단다. 조금 있으면 꽃이 핀단다. 제일 실한 거라며 비싸다고 하는 내게 천원을 깍아주신다.

   그리하여 집에 화분이 늘었다. 원래있던 아이비 화분들과 블루베리, 남천에 치자나무, 어성초에 긴기니아까지. 동백나무도 가져오려 했는데 키우기 힘들다 해서 포기했다. 그리고 엄마가 따로 준 이름모를 식물도 하나. 나이가 들수록 꽃이 좋아진다. 꺾은 꽃이 아니라 화분에 담겨진 꽃이. 봄이면 피는 꽃. 그리고 그윽한 향기까지. 봄이 오고 꽃집에 화분들이 늘어나면 올 봄에는 국화 화분도 사야겠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빨리 봄이 오면 좋겠다. 따뜻한 남쪽에서 서울로 올라오니 추운게 괴로워졌다. 아, 서울이 이렇게 추웠지,라고. 새삼스럽게.  
,
엄마의 집엄마의 집 
전경린 지음/열림원

   갑자기 어깨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내 머리카락들이 무겁게 느껴졌다. 이것들을 당장 잘라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 가는 길 모퉁이에 작은 동네 미용실이 있다. 늘 눈여겨 보았던 곳. 문을 열고 들어갔다. 컷트를 하러 왔다고 했다.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주니 이건 너무 짧지 않냐고 한다. 그럼 그냥 컷트로 잘라주세요. 그러고보니 자르는 컷트와 짧은 머리 모양의 컷트의 말이 같다.

   잘려나가는 내 머리카락들을 보며 한창 읽고 있던 전경린의 <엄마의 집>을 떠올렸다. <엄마의 집>의 스무 한 살의 주인공은 엄마가 골라주는 예쁜 여자용 옷이며 신발을 거부한다. 나랑 어울리지 않아. 정 원한다면 언젠가 입고 싶어질 때 입을게. 서른 살쯤? 아니, 마흔 다섯 살쯤? 핸드폰에 저장해 온 머리보다 조금 길게 잘랐다. 나는 소년이 되고 싶은 걸까. 스물 아홉의 애인이 없어 선을 보는 예쁜 여자가 되기 싫은 걸까. 엄마는 얼마 전 전화를 걸어와서 내게 선자리가 들어왔다며 기쁘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런 엄마가 다른 엄마들처럼 별 수 없구나, 싶어 웃으면서 싫다고 했는데 엄마는 그걸 나도 드디어 선을 볼 수 있게 된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나보다.

   나는 왜 핸드폰에 그녀의 사진을 저장해가선 똑같이 잘라달라고 한걸까. 그녀는 이제 전 남편을 잃고 두 살짜리 딸 아이를 혼자 키우며 살아갈 나와는 나이만 같은 동갑내기일 뿐인데. 조금이라도 더 짧게 자르고 싶은 마음에 뒷 머리를 조금 더 잘라줄 수 없냐고 했다가 동네 미용실 언니는 자존심이 상한듯 금방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것까지 자르면 이쁘지가 않아요. 아줌마처럼 된다구요. 나는 집에 가서 대충 잘라봐야지, 생각하고 만원을 건넸다. 컷트를 하는 내내 생글생글 재잘거렸던 미용실 언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삼천원을 건네준다. 정 그러면 일주일 안에 와요. 잘라줄게.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일주일 안에 안 올거고, 미용실 언니도 잘라줄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걸. 그리고 내 등 뒤에서 미용실에 있던 미용실 언니의 언니와 내 험담을 시작할 거란 걸. 내가 컷트를 하는 내내 다른 손님 험담을 한 것처럼. 나는 갑자기 전경린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가 알고 있던 예전의 그녀의 글이 아니라고.

   그 길로 도서관에 들렀다. 요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리가 있다. 책 진열장을 지나 창가에 의자만 나란히 놓아둔 자리. 여기 앉아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이해될 것처럼. 책갈피를 꺼내고 그 곳에서부터 <엄마의 집>을 읽는다. 내가 아는 전경린은 이렇다. 그래, 그녀의 모든 책은 읽지 못했다. 세어보니 세, 네 권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도 기억력이 좋지 않은 탓에 오래 전에 읽은 책들은 내용이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친구가 무척 좋아했다. 전경린. 다른 여자 작가들과 달라서 좋다고 했다. 관습적이지 않아서.  늘 선을 벗어나려는 이야기를 쓰는 작가. 친구는 전경린을 여전히 좋아한다. 얼마 전 <엄마의 집> 신간 소식을 듣고 문자를 보냈더니 전경린이 좀 더 자주 글을 썼으면 좋겠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중반까지 읽으면서 이건 전경린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이건 너무 따뜻해. 이건 너무 평온해. 이건 너무 교훈적이야. 이건 너무 평범해. 스물 한 살 주인공의 부모님은 이혼을 했고, 사춘기 시절 엄마와 함께 살지 못했고, 아빠는 금새 재혼을 했다. 운동권이였던 아빠는 직업을 제대로 가지지 못한채 세상을 맴돌고, 엄마에게는 새 애인이 생겼다. 어느 날 아빠는 재혼한 여자의 딸을 자신과 엄마에게 맡기고 갔고, 엄마는 그 아이에게 자신을 친척 아줌마라고 생각하라고 한다. 스물 한 살의 내가 사랑했던 K는 여자다. 그래, 이건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다. 너무나 극적인 상황들의 조합이다. 그런데 이것을 이야기하는 전경린의 시선이 너무나 따스하다. 62년생 실제 작가의 시선이 아니라 88년생쯤의 주인공 아이의 1인칭이라 그랬던 걸까. 이건 친구가 좋아했던 전경린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러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전경린이구나 싶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이야기. 전경린은 말한다. 잠자는 공주도, 덩쿨도, 그 덩쿨을 휘두르는 칼도, 공주를 구하려 오는 왕자도 모두 '나'라고. 덩쿨도, 칼도, 왕자도 모두 공주, 바로 나 자신이라고. 나는 내가 휘감은 덩쿨에 갇혀있고, 내가 스스로 무찔러야 할 칼을 집어 들어야 하고, 그걸 휘둘려야 할 사람은 왕자가 아닌 잠자고 있는 공주, 바로 나라고. 결국 잠자는 나는 내 자신만이 깨울 수 있는 거라고. 이제야 모든 것이 전경린다워진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장까지 조금 따스해져서, 교훈적이게 말하는 엄마의 이야기들이 여전히 전경린스럽진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변한 것도 전경린이고 그 속에 전경린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을 느끼며 읽어내려갔다. 삼인칭 시점으로 바뀌는 순간은 어쩐지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책을 덮고 나니 스물 한 살의 주인공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1인칭으로 쓰여진 소설. 주인공의 이름이 한번도 등장하지 않은 걸까. 엄마의 이름은 또렷했다. 윤진. 처음 엄마의 이름을 읽었을 때, 작가의 소설 <내 생애 꼭 하나뿐일 특별한 날>을 원작으로 한 영화 <밀애>의 여배우 김'윤진'을 떠올렸다. 남편에게서 상처 받는 여자, 아슬아슬한 다른 사랑을 즐기는 여자. 제도 안에서 제도 밖을 꿈꾸는 여자. 결국 그 여자가 이혼을 했던가. 그녀의 사랑이 계속 되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린 아이였던 그녀의 딸이 이렇게 커서 '엄마의 집'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 아닐까. 한 십년쯤 후에. 다시 책을 뒤적거리다 알았다. 이 책에서 주인공 이름은 엄마 윤진에 의해서 꽤 많이 불려졌단 걸. 엄마는 항상 호은아, 라고 다정하게 딸의 이름을 부르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호은아. 호은아. 꽤 멋진 이름이다. 소녀같지도 소년같지도 않은 이름.

   미용실에 다녀온 다음 날 머리를 감고보니 꽤 마음에 들었다. 뒷머리도 자르지 않는 게 나았다. 미용실 언니의 판단이 옳았다. 확실히 어깨까지 내려오던 긴 머리가 꽤 무게가 나갔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마음이 가벼워진 것 보면. 나는 소년이 되었다. 그렇게도 원하던.          


,
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Media2.0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큰 수확은 작가 이언 매큐언을 알게 되었다는 것. 마지막 장을 덮고 앞 표지에 씌여진 작가 소개를 다시 읽었다. 48년생의 영국 출신 작가. 서머싯 몸 상을 수상한 작가. <암스테르담>으로는 부커상을 받은 작가. 곧 그의 다른 작품 <속죄>을 원작으로 한 영화 <어톤먼트> 가 국내 개봉 예정인 작가.

    표지 그림에는 매력적인 여인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사진기 한 대. 이 여인의 이름은 몰리. 소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모두 이 여인으로부터 비롯된다. 소설의 주인공인 두 남자, 클라이브와 버넌은 이 여인을 열렬히 사랑한 적이 있었고, 소설의 결말은 모두 이 여인이 찍은 사진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아니, 사실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다. 모든 일이 그렇듯 근본적인 원인은 이 두 당사자들에게 있었으니 남 탓 할 수는 없겠다.

   누구도 대나무처럼 정확하고 곧은 도덕적 잣대로 분명 너의 그 판단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네덜란드가 다른 국가에서는 금지하고 있는 안락사, 마약,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고 있는 것을 두고 그들이 분명하게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분별하고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정한 틀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 나름의 틀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뿐.

    결국 클라이브와 버넌의 최후는 자신들 각자의 잣대를 상대방에게 들이민 것이다. 물론 시작은 서로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 누구 잘못이라고 할 것도 없다. 아니, 그 최후가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로써 가장 정확한 판단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때떄로 우리는 절망에 파묻쳐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니까. 총리를 꿈꾸는 외무장관의 성적 취향이 적나라하게 담긴 사진을 신문 1면에 공개하든 안 하든, 한적한 산길에서 다툼을 심하게 벌이고 있는 남녀를 음악적 영감의 흐름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 그냥 지나치든 말든, 누가 그들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옮긴이의 말을 보면 이언 매큐언은 더 이상 뺄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까지 삭제하고 삭제해 이 짤막하고 재미있는 플롯의 소설을 완성했다고 한다. 소설이 탄탄하다. 군더더기없이. 두 주인공이 올라탄 플롯의 곡선이 함께 시작해 따로 물결치다 함께 만나는 지점까지 매끄럽게 읽힌다. 군살 없는 콜라병 같은 소설. 캔이며 패트 일색인 진열장의 콜라 행렬 속에서 매끈하게 빠진 콜라병을 발견하면 가끔 나는 묵직하고 따기 힘든 병을 살 때가 있다. 펑하고 상콤하게 마개를 타고, 긴 빨대를 꼽는다. 아랫배까지 싸해지는 탄산 덩어리들을 쭉쭉 빨아 마시고는 깨끗하게 씻어 볕이 잘 드는 창가에 두면 고 투명하고 매끈한 병이 그렇게 눈부실 수가 없다.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
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지음/문학과지성사


   정이현 작가의 소설은 <달콤한 나의 도시>에 이어서 두번째예요. 첫번째 단편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은 읽을 생각만 하다가 아직까지 못 읽었어요. 지난 여름 강연회에서 새 책에 사인까지 받아와 놓고서는 고이 책장에 모셔두다가 얼마 전에 잃어버렸어요. 마침 동생이 이 책을 선물받아 왔던 게 있어서 바로 읽긴 했는데, 한 집에 같은 책 두 권이 뭐가 필요있냐고 그렇게 된건지. 누군가 주워서 읽고 있겠죠? 잃어버리니 <오늘의 거짓말>을 빨리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책마저 사라지기전에.

   정이현 작가는 서울내기 같아요.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을 한번도 떠나 살아본 적 없는 사람이요. 실제로 프로필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했구요. 제가 지방에서 올라와서 그런지 서울내기들은 딱 보면 알 수 있어요. 저같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딱 보면 알 수 있구요. 사투리를 쓰지 않아도, 얼굴에 그렇게 써져 있는 것도 아니고, 별다른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닌데 그래요. 그런데 그녀를 닮은 그녀의 소설도 서울내기 같아요. 사투리 섞인 대화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소설 어딘가에 그런 딱지가 붙여져 있는 것도 아니고, 책에서는 단지 종이와 글자 냄새만 날 뿐인데 그래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아온, 그래서 지방에 잠시 내려갔다가도 서울 톨게이트 팻말이 보이기 시작하면 안심이 되는 서울내기의 소설 같아요.  

    재밌고 빠르게 읽었어요. '타인의 고독'과 '삼풍백화점'은 예전에 문학상 수상집에서 읽었는데, 다시 읽어도 좋았어요.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엉엉 울면서 썼다는 '삼풍백화점'. 저는 이 단편이 참 좋아요. 냉소적인 시선이 가장 많이 들어간 '어금니'의 무표정함도, 박정희 대통령이 윗집에 살고 있다는 '오늘의 거짓말'의 상상도, 자꾸만 내 몸을 킁킁대며 냄새를 맡아보게 되었던 '그 남자의 리허설'도, 자판기 밀크 커피에서 스무살의 맛을 느끼는 한 여고생의 '비밀과외'도, 빛이 하나도 들지 않는 '빛의 제국'도, 둥그렇고 말아 뻣뻣하게 올렸던 그 때의 앞머리를 생각나게 했던 '위험한 독신녀'도, 소설가들은 늘 이렇게 메마르고 건조한 부부만 그린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결혼생활은 다 그런 거겠지, 라고 결론을 내어버린 '어두워지기 전에'도, 항문을 찍은 사진을 보고 흥분하는 '익명의 당신에게'까지. 재밌고, 공감했지만, 끄덕거렸지만, 뭔가 허전한 구석이 있어요. 가려운 부분을 긁긴 한데 시원하게 박박 긁지 못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녀를 다음 번에도 꼭 다시 만날 거지만, 이번에 만나고 뒤돌아서는 순간 왠지 우리가 더 깊이 내려가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드는 그런 허전함이요.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떠들어대야 하는 거 아닌가, 발라당 넘어지는 실수 한 번쯤 해서 무안하게 웃다가 같이 크게 웃어버리고 그런 순간들이 있어야 했던 거 아닌가 하구요.  

    학교를 서울에서 다니면서 새 친구들을 사귈 때 서울사람이라고 그러면 왠지 불편하고 쉽게 깊어지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아, 지금 생각해도 이 생각 너무 촌스러워요. 지방에서 올라온 우리끼리 '서울사람'이라는 호칭을 써가면서 이야기하고 그랬거든요. 물론 그러면서 친해진 친구들도 있었지만, 같은 지방 사람이라면 사투리를 쓰지 않아도, 인사를 하면서부터 편안해지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 사람에게는 좀 더 내가 먼저 다가가고 싶다, 이 사람에게는 내 부족한 면들을 보여줘도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촌스럽게도 서울에서 생활하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그런 면이 남아 있어요. 아, 촌스럽다.

   아무튼 자꾸 만나고 싶어요. 자꾸 그녀에게 관심이 가요. 그리고 좋아지기 시작해요. 그녀의 새초롬해 보이는 이야기도 좋고, 조금 차가워 보이는 시선도 좋아요. 실은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 것 같구요. 다음 번에는 우리의 관계가 좀 더 깊어지길 바래요. 실수 하나씩 하고, 이번보다 좀 더 크게 떠들면서 이야기 나눠요. 그 때는 소주 한 잔 어때요? 달큰하게 취해가면서. 헤헤. 오늘의 거짓말이 내일의 거짓말이 되지 않길 바래요. 두번째 만남, 즐거웠어요. 그나저나 잃어버린 책은 포기해야겠죠? 그 책이 가방에서 스르르 떨어져 나갔다는 게 오늘의 거짓말이길 바랬지만, 결국 오늘의 진실이였듯이요.  


,
산이 있는 집 우물이 있는 집산이 있는 집 우물이 있는 집
신경숙.츠시마 유코 지음, 김훈아 옮김/현대문학

    책을 읽으면서 12월에 다녀왔던 신경숙 작가님의 강연회 생각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넓고 넉넉한 공간이였는데 마이크가 안되는 바람에 작가님 곁으로 다들 옹기종기 의자를 끌어다가 둥그렇게 앉았어요. 첫 줄이라 작가님의 얼굴이 바로 코 앞에 보였어요. 마이크는 금방 해결이 됐지만 그 거리 그대로 작가님의 이야기를 들었죠. 고백하건데 강연회를 들으면서 울어본 건 처음이예요. 더군다나 그게 한 번에 그친 게 아니였어요. 슬픈 이야기도 아니였는데 어느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거예요. 아무도 모르게 슬쩍 눈물을 닦아냈는데, 얼마 안 있어서 또 눈물이 쏟아졌어요. 그 날 이후로 작가님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확실하게 깨달은 거죠. 그런데 다리 위에서 만난 아버지 이야기는 좀 슬펐던 것 같아요.

   도서관 새로 들어온 책 코너에 이 책이 놓어져 있길래 냉큼 빌렸어요. 신경숙 작가님과 일본의 츠시마 유코 작가님이 1년동안 12번씩 교환한 편지글이예요. 사는 곳, 어린 시절, 살아가는 모습 등의 개인적인 모습과 생각들이 많이 담겨져 있어요. 급하게 읽지 않으려고 하나씩 천천히 읽어나가려고 했는데 그만 밤새 다 읽어버렸어요. 조금만 읽고 자자, 다음 편지만 읽고 자자, 했던 것이 어느새 마지막 편지까지 가 버렸더라구요.

   두 작가님이 공통적으로 가장 많이 한 이야기는 각자의 어머니에 관한 것이예요. 어머니는, 이라고 시작하는 문장들이 많았어요. 신경숙 작가님의 늘 일하시던 어머니, 츠시마 유코 작가님의 남편때문에 자식에게 엄격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그리고 처음 듣는 것 같은 신경숙 작가님의 아버지 이야기. 역시 처음 들은 츠시마 유코 작가님의 아버지 이야기. 츠시마 유코 작가님의 아버지가 <인간 실격>의 다자이 오사무라는 이야기에 깜짝 놀랐어요. <인간 실격>을 읽었거든요. 읽고 나서 무척이나 우울했었는데. 그리고 장애가 있었던 오빠에 관한 이야기두요. 문학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을 했죠.

   각자 사는 곳에 관한 이야기도 많았어요. 이 책의 제목도 두 작가님의 사는 곳 때문에 붙여졌대요. 신경숙 작가님이 사시는 곳은 북한산 근처이고, 츠시마 유코 작가님의 집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는데 아직도 우물이 있대요.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무시무시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지금의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 빠질 수 없는 문학에 대한 이야기가 두 작가님이 직접 손으로 쓴 편지처럼 정성스럽게 담겨져 있어요.

    책을 읽고 갑자기 <작가의 방>이 생각이 나서 책장에서 꺼내 펼쳤어요. 신경숙 작가님이 자신의 집, 그 집이 위치한 산, 글을 쓰고 있는 서재 이야기를 여러 번 언급하셨거든요. 제일 마지막에 있는 신경숙의 방의 사진들을 다시 유심히 들여다 봤어요. 처음 책을 볼 때 탐났던 커다란 책장과 책상, 그 속의 책들, 볕이 잘 들어오던 창과 화분들, 그리고 무릎을 안고 있는 여인의 조각상까지요. 그러다 발견했어요. 사진들 중에 츠시마 유코 작가님의 <나>의 책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사진이요. 그리고 그 곁의 글을 읽는데, 이 취재가 이루어질 당시에 서신 교환은 이미 끝났고 책으로 엮는 작업이 진행 중이였나봐요. 이 책의 원고가 책상 위에 놓여져 있었다는 글에 츠시마 유코님과의 인연에 대한 간단한 언급이 있었어요. 갑자기 반가운 마음이 들어 몇 번을 그 사진을 들여다 봤어요.

   마지막 책장을 덮고 처음 든 생각은 벌써 새벽 4시다, 빨리 자야겠다는 것과 자고 일어나면 꼭 누군가 보고 싶은 사람에게 메일을 써야겠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좀 더 자주 메일을 쓰자고, 손편지도 가끔은 쓰자고 다짐을 하고 금방 잠들었어요. 아, 유일하게 번역되어 있는 츠시마 유코 작가님의 <나>도 꼭 읽어야 겠다는 것두요. 
     
,
푸른알약푸른알약
프레데릭 페테르스 지음, 유영 옮김/세미콜론


 

    꽤 오래되었어요. <푸른 알약>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요. 'TV, 책을 말하다'에 한창 빠져있던 때 소개되었던 만화책이였어요. 실제 작가 자신의 경험이 고스란히 들어간 작품이여서 충격적이었고 유럽에서 인기도 꽤 끌었다고 해요. 내용이 에이즈에 걸린 여자와 사랑에 빠진 이야기거든요. 여자의 전 남편 사이에 태어난 아이도 에이즈에 걸렸구요.

   그러니까 '어느 날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와 그녀의 아이가 에이즈라고 한다. 그런 하찮은 에이즈따위는 우리 사랑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 이렇게 견고한 우리들의 사랑을 보라.' 이런 내용은 절대 아니구요. 작가임이 분명한 이 만화책 속의 주인공 남자는 자신이 사랑에 빠진 여자가 에이즈라는 사실을 알고 주위가 깜깜해지면서 심하게 충격을 받기도 하고, 함께 살게 된 뒤에도 어느 날 관계 중에 콘돔에 구멍이 나 있던 사실을 발견하고 다음 날 의사를 만나기 전까지 오직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초조하게 밤을 꼴딱 새는 보통의 사람이라는 거지요. 아니, 어쩌면 그는 조금 용감한 남자예요. 그녀와 함께 살기 시작했으니까요. 꽤 큰 결심인 거잖아요. 아니, 그는 용감한 남자예요. 에이즈에 걸린 그녀의 아이까지도 어느새 사랑하게 되었으니까요. 말이 쉽지 그게 보통 일은 아니잖아요. 아니, 그는 정말 용감한 남자예요. 에이즈라는 질병에 무지한 자신을 조금씩 깨뜨리기 시작했고, 여전히 에이즈따위 아무 상관없는 건 아니지만 조심하면 된다는 것, 사람들이 벌벌 떠는 그 병균 덩어리 속에서도 충분히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걸 이렇게 만화책으로까지 내어서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랬으니까요. 어쩌면 이 책의 작가는 용감하지 않은 것같은 주인공을 내새워 제일 용감한 척하는 사람인지도 몰라요.

   '고맙습니다'의 봄이도 있었고, 이번에 하는 드라마 '뉴하트'에서도 에이즈때문에 시끄럽던데요. <푸른 알약>에서 강조하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게 옮는 병이 아니라는 거예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끔찍한 밤을 보낸 뒤 두 사람이 찾아간 의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상대에게 에이즈가 감염될 확률은 지금 이 방을 나가서 흰코뿔소와 마주치게 될 확률과 같다'구요. 그러니 크게 걱정하지 말라구요. 단지 조금만 조심하면 된다구요. 그 뒤 조그만 상처만 발견해도 병원으로 쪼르르 달려오는 남자에게 의사는 더 이상 이런 하찮은 일로 병원에 오지말라고, 에이즈는 그렇게 쉽게 옮는 병이 결코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해요.

   이것이 이 만화의 장점이기도 해요. 의연한 듯 에이즈따위 신경쓰지 않는다며 에이즈 보균자와 살아가는 사람이 실제 얼마나 되겠어요? 우리가 그 질병에 지나치게 무지하고, 그래서 에이즈가 더 두려운 것처럼 주인공 역시 그래요.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물어보고,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어떤 날은 걱정하면서 밤을 세우기도 하고, 어린 나이에 치료받는 아이를 옆에서 직접 돌보면서, 자신의 에이즈때문에 결국 아이까지 보균자가 되었고 사랑하는 남자에게까지 옮기게 되면 자신은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 거라고 자책하는 그녀를 달래면서 남자는 조금씩 막연했던 에이즈라는 병에 관해 구체적으로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만화의 끝에서도 그 긴 여정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구요. 푸른 알약은 치료를 위해 먹어야 하는 약이예요.

   이 책을 'TV, 책을 말하다'에서 소개받을 때 한 패널이 이런 말을 했어요. 이 작가가 이제 겨우 1년 같이 살고 책을 낼 것이 아니라 좀 더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책을 내었다면 더 가치있지 않았겠느냐구요. 만화책을 넘기면서 자꾸 그 때 그 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는 거예요.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확실해졌어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많은 경험들이 열정으로부터 우리를 무덤덤해지게 만들고, 많은 경험들이 상처로부터 우리를 아물게 만들어 주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10대가, 우리의 20대가 소중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비록 이별뿐이였던 20대라도 그것이 존재했다는 자체도 소중한 거잖아요. 저는 사랑으로부터 열정적이고, 에이즈로부터 파닥파닥 떨었던 작가의 그 1년이 어루만져 주고 싶었어요. 이쁘잖아요. 미리 나중에 지쳐서 떨어져 나갈 수 밖에 없을거다, 너희 사랑의 끝은 뻔하다, 말할 필요 없잖아요. 두 사람이 죽을 때까지 함께 살든, 책을 내고 얼마 안 돼 헤어지든 이 책의 1년은 그것 자체로 소중한 거 잖아요.

   어두운 도시에 갇혀 까만 배경으로 자주 표현되었던 초반부에 비해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여백의 하얀 배경이 많아져요. 작가 자신의, 주인공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는 거겠죠. 사랑도 없고 그저 흘러가기만 했던 무미건조했던 하루하루가 사랑이 가득하고 늘 가슴 조이게 만드는 생각치도 못했던 에이즈라는 녀석의 출현으로 스펙타클해지고 하루하루의 일상에 감사하는 마음이 더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저는 그렇게 제멋대로 생각해봤어요. 현실의 거리에서 흰코뿔소를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일은 0.0000000000001%에 불과하겠지만, 상상의 거리에서는 흔한 일이예요. 상상만 시작한다면 언제든 만나서 하이,하고 외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 상상의 거리에서 나를 늘 쫒아다니는 그 흰 코뿔소와 모퉁이에서 안녕을 고하고 헤어지는 일도 쉬운 일이예요. 상상만 하면 되니까요.



,
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네거트 지음, 김한영 옮김/문학동네



   커트 보네거트. 소설은 아니지만 그의 이름으로 된 책 읽은 것은 이번에 처음입니다. 워낙에 유명하신 분이니 여기저기서 이름을 들었고 언젠가 읽어야지, 내내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나라 없는 사람>을 읽는데 첫 수필이 익숙하다 생각이 들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판타스틱>이라는 잡지에서 그의 죽음을 기리면서 단행본으로 출간하기에 앞서 수필 한 편을 소개했던 것을 읽었던 기억이 있었어요.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내가 2008년 첫 책으로 이 책을 읽게 된 건 정말 잘 된 일이다, 이제 좋은 책들만 읽게 되는 한 해만 읽게 될 계시인 것이다, 라고 생각을 했을 정도로 짧지만 강한 책이였어요.

 

   우선 김애란 작가 이야기예요. 지난 해 낭독회에서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김애란 작가가 얼마 전에 이 책을 읽었다고 했어요. 이 책 속의 서사에 관한 그래프가 있는데 이 선의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져서 그걸 오려서 작업실 벽에 붙여놨다고 했어요. 햄릿의 그래프는 일직선뿐이라는 이야기도 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궁금했었어요. 그 그래프의 곡선들에 관해서요.   

 

   '문예창작을 위한 충고'에 이 그래프들이 있었어요. 다섯 종류의 이야기에 대한 거예요. '구덩이에 빠진 남자'의 그래프는 구덩이를 닮았어요. 행운에서 시작해서 불운으로 이어지고 행운으로 마무리되는 곡선이예요. '소년, 소녀를 만나다' 그래프는 행운으로 솟아올라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불운으로, 그리고 행운으로 끝나요. '신데렐라'의 그래프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불운에서 시작해요. 계단식으로 차츰차츰 행복해지다가 불운으로의 절벽을 맞이한 후에 행운의 무한대로 신데렐라는 날라가요. '카프카'는 불운의 무한대, '햄릿'의 그것은 불운도 행운도 아닌 곧은 직선만이 존재할 뿐이예요. 저도 김애란 작가가 아름답다고 표현한 이 곡선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어요. 제 눈에 아름답지까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야기를 부드러운 곡선같은 마음이 느껴졌죠. 김애란 작가의 그 마음두요.

 

   제일 신났던 수필은 '러다이트의 즐거운 나들이'예요. 컴퓨터를 쓰기 전에 타자기로 글을 쓸 때의 이야기예요. 글을 쓰고 연필로 사각거리며 간단한 교정을 한 뒤 카피라이트에게 전화를 걸어 간단한 수다를 떨고 새로운 글을 타이핑해 줄 수 있겠냐고 부탁의 전화를 끝낸 뒤, 아내에게 봉투를 사러 나갔다 오겠다고 말하고 길을 나서요. 항상 가는 가게에서 봉투를 사고, 항상 가는 우체국에 들러서 우표를 붙이면서 우리들에게 자신은 사실 우체국 아가씨에게 사랑에 빠졌다는 고백을 하죠. 그리고는 우체통에 봉투를 넣고 집에 돌아오는 이 간단한 나들이를 쓴 글인데 그가 이런 행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생생히 느껴져요. 왜 그가 봉투를 대량으로 구입해 놓고 쓰지 않는지 이 글을 읽으면 단번에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요. 저도 이런 사소한 즐거움을 무척이나 사랑하거든요.

 

   커트 보네거트는 책 속에는 미국에 대한, 지식인들에 대한, 석유 소비에 대한. 환경에 신경쓰지 않는 것에 대한, 전쟁과 침략에 대한, 이 세상의 모든 차별에 부조리한 것에 대한 비판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배웠다고 말하는 우리들이 얼마나 현재에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지금 풍요롭게 살기 위해 얼마나 미래를 고갈하고 있는지를 알아야한다고, 정말 모르는 거냐고 이야기해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생각했어요. 거트 보네거트가 지금 살아 있다면, 우리나라의 서해안 석유 유출 사건을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하구요. '그것 봐. 내가 그랬잖아.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라고 하지는 않았을까 하구요.

 

   박찬욱 감독님이 <제5도살장>인가, <고양이 요람>을 무척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읽었던 것 같아요. 이제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을 읽을 거예요.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알았으니 그의 소설들이 더 잘 이해될 것만 같아요. <제5도살장>을 먼저 읽을까요? <고양이 요람>을 먼저 읽을까요? 앗. 그가 '문예창작을 위한 충고'에서 세미콜론을 쓰지 말라고 충고했는데, 이렇게 많이 쓰다니요. 심지어 이 문장에서까지도. 아, 저는 좋은 문장을 쓸 수 없는 걸까요? 거트 보네커트. 당신이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된 후에야 나는 당신을 만납니다.

,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김연수 지음/문학동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읽고 그의 작품들을 거꾸로 읽어나가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청춘의 문장들>도 천천히 다시 읽고. 그럴려면 2005년에 출간된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먼저 읽었어야 했는데 그보다 3년 전에 출간된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를 먼저 읽었어요. 순전히 '7번 국도'라는 닉네임을 쓰신 분이 달아주신 댓글 때문에요.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는 단편집이지만 눈물 펑펑 쏟으며 읽었던 기억이...' 이 댓글이요. 예전에 곡예사님이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를 추천해주시면서 '울어버릴 지도 몰라요' 라는 문장 하나에 어떻게든 그 책을 빌려보려고 애썼던 것처럼 저는 '눈물이 날지도 모르는' 소설에 맥을 못 추리는 것 같아요. 네. 그리하여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를 읽었고, 7번 국도님이 쓴 댓글처럼 저도 울어버렸어요. 좋더라구요. 정말.

   어제 지하철에서 마지막 장까지 읽을 수 있었는데 일부러 마지막 단편은 남겨뒀어요. 이 소설집의 마지막을 시끄러운 지하철 안에서 읽어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는 일부러 빙 둘러서 집으로 왔어요. 평소보다 조금 더 걷고 싶었거든요. 그 역에서 집으로 오는 길은 늘 뻔했었는데 어제는 가보지 않은 길로 일부러 돌아서 와 봤어요. 큰 도로를 끼고 있는 길은 한적했어요. 아이가 아픈지 등에 업고 종종걸음으로 서로 씩씩거리며 택시를 잡으려는 부부가 제 옆을 지나갔고, 커다란 커피 잔을 들고 조잘거리며 나란히 속도를 맞추는 여자 아이 둘도 지나갔어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씻고 잠자기 직전 마지막 단편을 읽었어요. '캔디'같은 노래는 눈물나니깐 다신 부르지 말라는 시설 출신의 친구를 가진 아이 이야기였는데 아이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죠.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자고. 아, 정말 좋다, 라면서 잠이 스르르 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는 제일 마지막 장, 작가의 말을 읽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순간이예요. 좋았던 소설의 작가의 말을 마지막에 읽는 일은.
 
   잠이 들면서 왜 이렇게 이 사람의 글이 좋을까 생각해 봤어요. 폭신폭신한 베개 하나를 꼭 끌어안고 잠에 빠져 들기 직전에 생각난 단어는 이거였어요. 촉촉함. 촉촉해요. 이 사람의 소설은. 5.18을 다룰 때도, 학교 폭력을 다룰 때도, 낙태를 다룰 때도, 학생 운동을 다룰 때에도. 그의 소설에는 예민하고 날카로운 아픈 상처가 많은 사회 안에 촉촉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이 담겨져 있어요. 5.18 신문기사를 반복해서 읽어내려가면서 그 곳에 있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고, 자신의 땅에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려는 작은 어깨의 아빠가. 보랏빛 꽃비가 내리는 운동장, 편견의 벽 앞에서 비에도 바람에도 지지 말자고 말하는 가여운 친구가. 노랗고 빨갛고 푸른 연등이 펄럭이는 아기부처님 오신 날의 한가운데에서 세상에 나오지 못한 자식에게 용서해달라며 그 둥근 빛들을 올려다보는 눈이 젖은 어미가. 유리판을 검게 그을려 일식을 보며 그 둥근빛의 첫사랑을 고백하는 어린 아이까지. 그들은 짧은 단편 속 메마르고 각박한 세상을 살아나가지만 모두들 촉촉하게 젖어 있어요. 그래서 이 짧은 단편이 끝나고 나면 아픈 마음들이 모두 사라지고 세상 전체가 촉촉해질 것만 같은 마법의 문장들을 그에게서 하나씩 선물받게 되요. 그게 좋아요. 그 촉촉한 감수성이.
 
   자전적인 '뉴욕 제과점'을 읽으면서는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서 만난 그를 일부러 떠올리지 않아도 자꾸 생각이 났어요. 조그맣고 삐그덕 소리가 나는 무대 위에 앉아 저한테는 지금 현재가 제일 중요해요, 어제 일도 금방금방 까먹는데요, 음악을 무척 좋아해요, 소설 쓰다가 막히면 무조건 자요, 먹는 건 상관없어요, 예전에는 나도 사전 찾아가면 소설 썼으니 독자들도 어려우면 사전 찾아가면서 읽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소통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야기가 더 펼쳐지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아직 어린 제 아이가 제 소설을 꺼내서 몰래 읽는 거예요, 라고 수다를 떨던 모습이요. 그리고 헷갈리는 거예요. 이게 소설에서 읽은 부분인가, 그 때 그가 말한 이야기인가. 분명 찾아보면 소설 속 문장들인데 꼭 그 날 그가 자신에 관해 말한 이야기들 중 일부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드는 거예요. 그의 소설들에서는 그 날 잠깐동안 보았을 뿐이지만 그 모습이 진하게 박혀져 있었거든요. 그 촉촉한 감수성이요.

   단편의 제목들을 쭉 읽으면 이 소설들이 얼마나 촉촉한지 알 수 있어요. 마치 시어들 같거든요. 역시 시로 등단하셔서 그런건지 지금은 시를 쓰지 않는다고 하시지만 이렇게 시를 쓰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우리들에게는 비밀인 것처럼 하구요. 이 소설집의 목록들은 모아놓으면 마치 한 편의 시 같거든요. 어쩌면 '느'를 붙이느냐 빼느냐를 긴 시간을 두고 고민했을 아버지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가 그렇게 촉촉한 감수성을 지닌 것은요. '나는 너를 믿는다. '네 소신껏 희망을 갖고 밀고 나가거라. 어차피 人生이란 그런것이 아니겠냐'라고 써놓은 뒤, '아니겠냐'의 '겠'과 '냐' 사이에 'V자'를 그려놓고 '느'를 부기한 아버지 말이예요. 정말 그의 아버지인지는 아무리 자전적 소설이라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요.

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
뉴욕제과점
첫사랑
똥개는 안 올지도 모른다
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
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고
     
,
퀴즈쇼
김영하 지음/문학동네

   어디선가 이런 글귀를 봤어요. 너희 20대들, 지금 잘 해나가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는. 그래서 <퀴즈쇼>를 쓰게 되었다는 작가님의 글이요. 그래서 출간하자마자 단번에 주문했습니다. <빛의 제국>을 읽으면서 소설이 나랑 맞지 않는 것 같은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의 이전 소설들은 충분히 좋았으므로 새 소설을 읽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좀 아껴서 뒤에 읽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다른 책들이 밀려있어서 낭독회를 다녀온 뒤에 읽게 됐어요. 낭독회에 같이 간 친구는 20대에게 위로가 되는 책, 이라는 것에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읽고 있는 중간에 친구에게 무척 재미있다, 고 이야기했습니다. 정말 그랬어요. 꽤 두꺼운 분량인데도 책장이 금방 넘어가고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예전의 파란 화면의 나우누리 통신 시절 생각도 나고, 그 때 만났던 어떤 아이 생각도 났죠. 언급되는 음악과 책은 듣거나 읽어보지 못했지만 영화는 대부분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영화 피아노와 반지의 제왕, 번지점프를 하다의 공통점을 대번에 알아맞히고는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면서 즐거워 하기도 했습니다. 빠른 속도로 유쾌하게 한 권을 끝내고 났는데, 책을 덮고 나니 왜 이리 허전하던지요. 그래서 인터넷 여기저기 들어가서 남의 리뷰들도 뒤적거리고, 작가님 인터뷰 기사도 찾아서 봤습니다. 김영하 기사때문에 일부러 챙겨두었다던 언니가 건네준 필름 2.0을 받아들고 지하철 문에 기대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문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솔직히 제게도 이 <퀴즈쇼>가 위로가 되진 않았던 것 같아요. 너희들, 지금 잘 해 나가고 있어. 다른 어른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쁘진 않아. 이런 위로는 작가님의 인터뷰 기사나 작가 후기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낭독회에서도. 사실 저는 책보다 그 낭독회에서 더 많은 위로를 받고 돌아온 것 같아요. 읽어가는 도중에는 이 글귀 좋다, 이 글귀는 지금의 나 같아, 라고 느껴지는 문장들이 많아서 따로 적어두기도 했었는데, 책을 덮고 나니 그런 것들이 느껴지지 않는 거예요. 그런 '힘'들이 순식간에 회오리치며 사라져버리는 느낌이였어요. 민수가 '회사'에 들어가고 난 뒤였던 것 같애요. 밑줄 그어둔 부분이 멈춰진 지점이요. 밑줄 그어 둔 부분을 다시 읽어보니 확실히 '회사'는 민수의 꿈, 무의식이였어요. 들어가는 부분에 작가님이 분명하게 해 두셨더라구요.  


p.310


    꿈이라는 것, 무의식이라는 것에 관심이 많아서요. 책을 한 권 읽었어요. 아니, 끝까지 읽지는 못했는데요. 그 책 속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꿈이라는 건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이 자주 꾸고, 그런 사람들이 그 꿈들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구요. 그래서 창의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꿈을 다양하게 꾼다구요. 제가 꾸는 꿈의 경우만 봐도 어떤 꿈은 지독하게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고, 어떤 꿈은 아련하게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이기도 하고, 어떤 꿈은 너무나 이상적이라서 절대 깨어나고 싶지 않기도 해요. 민수의 '회사' 생활이 그러했던거죠. 그 생활 중 어떤 부분은 현실을 지독하게 반영했고, 어떤 부분은 너무나 이상적이라서 절대 깨고 싶지 않기도 하구요. 하지만 그건 꿈일 뿐이잖아요. 깨고나면 모든 게 끝나는. 존재한 적도 없게 되는. 곧 내 기억 속에서도 잊혀져 버리는. 적어두어도 그 꿈의 느낌 그대로는 기록되어지지가 않는. 그 꿈이 너무나 좋아서 다시 잠들면 그대로 그 꿈으로 쏙 들어갈 것만 같지만,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는 일회적인 꿈이요. 처음 <퀴즈쇼>를 읽을 때 민수를 따라가다 보면 내 불안한 20대의 끝이 보이지 않을까, 라고 기대를 했는데 결국 나는 그를 네비게이션도 없이 따라가다 길을 잃은 거예요. 끊임없이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선택을 해야 하는 20대의 길목에서 나의 네비게이션은 여전히 행방불명인거죠. 민수는 '회사'를 빠져나왔지만 저는 여전히 그 하얗고 복잡한 공간에 갇혀있는 듯한 느낌인 거예요. 그것만 확실하게 다시 한번 또렷하게 깨달은 셈이예요.

p.32


 
  <퀴즈쇼>는 제가 읽었던 김영하 작가님 소설 중에서 가장 재미있고 빠르게 읽었어요. 그래서 아쉬움도 많이 남구요. 우리의 20대가 정말 이런가. 빠르고 재미있고 복잡한 것 뿐인가. 뭔가 더 있을텐데 나는 왜 발견하지 못하고 있나. 낭독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것도 퀴즈인가. 그런 것 같아요. <퀴즈쇼>를 읽는 독자들은 모두 각자 다른 종류의 퀴즈 문제를 받으실 거예요. 작가가 내는 것 같지만 실은 읽는 자신이 자신에게 내는 퀴즈인거죠. 그리고 그 퀴즈의 정답은 독자 자신만 아는 거죠. 그리고 작가님, 적절한 매너가 뒷받침되었으니 얼마간의 과시는 용인해드릴께요. 너무 많은 종류의 문화적 비유가 있어서 말이죠. 책을 읽는 중간 중간에 사실 속으로 그래요, 작가님 똑똑해요, 박학다식해요, 라고 삐죽거렸을 때도 있었거든요.

,
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문학과지성사
 
   몇 해 전에 <그 남자네 집>을 읽었습니다. 그 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누군가가 함께 읽었으면 하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마침 명절이 다가왔고, 숙모라면 이 소설을 함께 읽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할머니댁 에 내려가기 전에 한 권을 구입했어요. 그리고는 책의 앞 부분에 뭐라고 작게 끄적거렸던 기억도 있어요. 읽고 너무 좋아서 숙모 생각이 났다느니, 항상 고맙다느니 그런 식의 짧은 편지였을 거예요. 그리고는 잠이 들려고 하는 숙모 곁에 마치 고백을 하는 소녀처럼 떨리는 손으로 놓고 나가려는데, 잠에서 깬 숙모가 뭐냐고 물으셨어요. 저는 그냥 선물이예요,라며 고백 뒤 대답을 듣지도 않고 도망가는 소년처럼 방문을 닫고 냉큼 나와버렸어요. 숙모가 그 책을 읽으셨는지, 읽지 않으셨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책 한 줄 읽기에도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시니까 아직 읽지 못하셨다 해도 섭섭한 마음은 없어요. 책이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요. 당장 읽지 않아도 사 두면 언젠가 읽게 되는. 그러니 숙모도 언젠가 읽으실테니, 그리고 그 책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씹는 맛이 우러날테니 걱정하지 않아요. 그 때 저는 노년의 한 여자가 젊은 날의 반짝반짝 빛났던 첫사랑을 추억하는 그 이야기를 엄마 또래의 누군가에게 읽어드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당신에게도 그런 날들이 있지 않았냐구요. 그 날들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구요.

   그리고 <친절한 복희씨>를 읽었습니다. 9년만에 낸 소설집이라는데, 목록에 '그 남자네 집'이 있는 거예요. 단편소설이었지만 내용은 같았어요. 알고보니 단편으로 먼저 발표를 하셨고, 긴 호흡으로 쓰고 싶어서 같은 내용으로 장편을 다시 내신 거더라구요. 저는 반대로 읽었지만요. 그래서 <그 남자네 집>을 읽었던 몇 해 전 생각이 났지요. 저는 그 시절 늘 책을 사면 제일 앞 장의 귀퉁이에다가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하는 심정에 대해서 짧게 끄적거려 놓곤 했어요. 너를 그리워하며 읽는다든지, 이 책의 이야기들이 너를 잊게 해줄 거라 믿는다든지. 그러고보니 책 앞에 메모를 남기던 버릇은 뭔가에 강하게 의지하고 매달리고 싶었던 그 때에 소유했던 습관이예요. 지금은 그러지 않거든요. 늘 이 이야기들이 나를 깊은 아픔에서 꺼내줄 거라고 바랬었고 믿었던 것 같아요. 그 시절에는 시도 아주 열심히 읽었거든요. <그 남자네 집>도 저를 따스하게 위로해주었죠.

   제 곁의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해 주겠어요?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노년의 즐거움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이중성을 누가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주겠어요? 때때로 젊음을 질투한다는 것에 대해. 내 엄마의 어머니에 대해. 늙어 기억을 잃어간다는 서글픔에 대해. 주름진 남편의 항문을 구석구석 닦아내는 시간들에 대해. 나이를 들어가는 것이 너무나 행복한 어떤 순간에 대해. 이렇게 살아온 것이 너무나 서러워 확 죽어버리고 싶은 어떤 날에 대해. 누가 이렇게 생생하게 직접 겪은 듯 솔직하게 무릎 앞에 나를 앉혀놓고 직접 말하듯 누가 이렇게 이야기를 들려주겠어요? 어떤 대목들은 지금도 충분히 이해가 되어서 나도 분명히 나이들면 그럴거야, 라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어떤 대목들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아 내가 나이가 들면 이렇게 생각하게 될까, 너무 보수적인 시각 아닌가, 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해요. 그러다보면 어느새 늙어가고 있는 나의 엄마와 할머니를 떠올리게 되구요. 우린 무뚝뚝한 경상도 사람들이라 그런 세밀한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에 익숙하지가 않거든요. 하지만 언젠가 엄마와 할머니와 마주앉아 맥주 한 병을 두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볼이 바알개진 엄마가, 혹은 할머니가 이런 고백들을 소녀처럼, 소년처럼 해 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 시간들을 좀 더 많이, 오래 가지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두요.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는 다시 마당이 있는 집을 꿈꿉니다. 저는 나이도 그렇게 많지 않은데 아파트보다 마당이 있는 집이 더 부러워요. 편리한 아파트보다 마당이 있는 주택은 불편한 점도 많겠지만, 제겐 그것이 줄 기쁨이 더 눈에 보여요. 마당 한 귀퉁이에 여러가지 채소를 가꾸고 커다란 평상 위에서 대접 위에 보리밥 얹고, 간을 알맞게 한 나물을 섞고, 차가운 물에 헹군 채소를 손으로 뜯어서 넣고, 고소한 참기름에 빠알간 고추장을 쓱쓱 넣고 비벼서 우걱우걱 한 숟가락을 입에 넣으면 입 안 가득 느껴지는 행복감에 대한 상상. 좋은 친구 한 사람 정도를 불러서 평상 위에 나란히 누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 파란 하늘에 따스한 햇살이 배 위로 겹겹이 쌓이고 동네 어귀에서 들리는 복작복작하고도 일상적인 소리들이 저절로 배경음악이 되어 아,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나이가 많이 든 후, 언젠가 행복할 상상을 하면서 책을 덮습니다. 상상만으로도 배가 기분좋게 불러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