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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에게, 여행
    서재를쌓다 2014. 2. 12. 21:23

     

     

     

        군산에 가게 된 이유 중에 하나가 최갑수였다. 어느 토요일, 늦은 아침으로 죽을 사 먹고 들른 커피집에서 보게 된 최갑수 시인의 글 때문이었다. 최갑수 시인은 군산에 가라고 했다. 특별한 일 없이 가을을 쓸쓸히 보냈다면, 철길이 있고 예쁜 창문을 볼 수 있는 군산으로 여행을 떠나라고 했다. 그 글이 좋아서 결국 잡지까지 샀다. 여러 번 읽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군산에 가야지. 군산에 갔고, 철길과 예쁜 창문을 보지 못했지만, 쓸쓸한 기분이 더해져 돌아왔지만, 좋았다. 쓸쓸해서 마음에 남는 군산이었다.

     

        또 어딘가 나를 떠나게 만들어 줄 것만 같아서 산 책이다. <당신에게, 여행>. 사실 처음에는 좀 실망했다. 여행지마다 소개하는 글이 너무 짧았다. 한 페이지에서 세 페이지 정도다. <트래블러>에 실린 긴 글을 기대했던 내게는 너무 짧았다. 그래, 한번 떠나볼까? 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글이 끝났다. 그래도 끝까지 읽어보자 마음 먹고 읽었다. 그러자 장점들이 보였다. 이 책에 소개된 여행지가 99곳. 가고 싶은 생각이 들때마다 포스트잇을 붙여뒀다. 그러자 포스트잇이 가득 찼다. 시인의 글은 넘치는 감성에, 적당한 정보가 곁들여 있었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니 만족스러웠다. 와, 나 가고 싶은 데 정말 많이 생겼다. 뿌듯했다. 

     

        시월의 군산. 십이월의 강릉 보헤미안. 어느 때나 좋은 태안 꽃지해변. 삼월의 남해 물미해안도로. 십일월의 경주. 십일월의 동해. 시월의 정선 만향재. 유월의 횡성 숲체원. 사월의 강진 백련사. 십이월의 주문진. 시월의 영주 부석사. 삼월의 통영. 사월의 부산 기장 대변항. 유월의 안동.

     

        아쉬운 점은 모든 길 안내가 자가용이라는 것. 그래서인지 왠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는 가기 힘든 곳 같은 느낌이 든다. 뚜벅이들을 위한 길 안내가 있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

     

     

       이 책은 최갑수 시인이 밑줄 그어 놓은 곳, 그리고 아래는 내가 밑줄 그어 놓은 문장들.

     

    - 복성루는 1973년에 개업한 집이다. 우리나라 5대 짬뽕집(복성루, 강릉 교동반점, 공주 동해원, 평택 영빈루, 대구 진흥반점)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p.45, 군산 근대문화 여행

     

    - 다방 같았다. 열 개 남짓한 갈색의 테이블과 의자가 별다른 장식 없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갈색 설탕병이 놓여 있었고, 창문을 넘어온 투명한 겨울 햇살이 설탕병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바다. 멀리, 아득하게 바다가 보였다. 수평선에서 흰 파도가, 설탕 같은 파도가 일렁였다.

    p. 53, 강릉 보헤미안.

     

    - 당신과 다투었을 때, 그래서 나나 당신이나 낙담하고 있을 때, 나는 당신을 태안 안면도 꽃지해변으로 데려갔다. 낙조 아래에서 나는 당신의 손을 슬며시 잡았고 우리는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아왔다.

    p. 57, 태안 꽃지해변.

     

    - 파도가 밀려왔다 갈 때마다 해변은 자르륵 하는 소리를 낸다. 해변 한 켠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의 모습이 평화롭기만 하다.

    p. 61, 남해 물미해안도로.

     

    - 무덤을 보러 가끔 경주에 가곤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첨성대 건너편에 자리한 노서 노동동 고분군이라고 불리는 몇 기의 능을 보러 간다. 그 앞에서 딱히 하는 일은 없다. 이 능들, 참 예쁘다, 요렇게 감탄하며 우두커니 서 있다.

    p. 75, 경주 노서 노동동 고분군.

     

    -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도 아름다워 한국의 100대 명소리로 선정되었다.

    p. 81, 동해 망상해변에서 추암해변까지.

     

    - 몽환이다. 그 풍경 속에 서 있으면 마음도 저절로 만발한다. 사랑 따위는 없어도 살 수 있겠다 싶다.

    p. 136, 정선 정암사와 만향재.

     

    - 유월의 숲에는 온갖 살아있는 것들의 기척과 디테일로 가득하다. 햇살을 받은 나뭇잎은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유월의 따스한 공기 속에서 나무껍질은 말랑거린다. 엄지손가락으로 지그시 나무를 누르면 지문이라도 남을 것 같다.

    p. 145, 횡성 숲체원

     

    - 미륵은 석가모니불의 뒤를 이어 56억 7,000만 년 후에 도솔천으로부터 인간세계로 내려와 석가모니불이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다. 미륵불 곁에 서 있는 미륵보살의 합장이 간절하다.

    p. 151, 파주 겨울 나들이

     

    - 백련사는 7,0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는 곳.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11월부터 동백꽃이 피기 시작해 4월 중순에 만개한다. 4월말이 되면 떨어지기 시작해 바닥을 물들인다. 예로부터 동백꽃은 세 번 핀다고 한다. 나무에서 한 번, 땅에 떨어져서 한 번, 그리고 당신의 마음 속에서 또 한 번.

    p. 163, 강진 다산초당과 백련사.

     

    -  주문진은 세상사에 지쳤을 때, 회사에 출근하는 일이 정말이지 지긋지긋할 때 한번쯤 찾아보시길. 새벽 네 시의 포구에 나가보시길. 귀를 베어갈 것처럼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수평선을 향해 배를 몰아가는 어부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 속에서 부글거리던 불평과 불만이 깨끗이 사라진다.

    p. 181, 강릉 주문진항.

     

    -  해질 무렵, 백두대간을 넘어온 장엄한 노을이 절집 안마당에 내려앉을 무렵, 소슬한 가을바람이 무량수전 풍경을 흔들고 지날 무렵, 황금빛 노을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을 비출 무렵, 법고가 울리고 목어가 울리고 운판이 울릴 무렵...

    그 무렵이면 부석사를 찾은 모든 이들이 아무 말없이 합장.

    p. 184, 영주 부석사.

     

    - 도다리쑥국은 오직 봄에만 맛볼 수 있는 통영의 진미다. 도다리쑥국은 봄에 나오는 자연산 도다리와, 역시 봄에 나오는 쑥을 함께 넣어 끓인 국이다. 쌀뜨물에 된장을 풀고 절반 정도로 자른 도다리를 넣고 끓인다. 도다리 살의 촉촉한 질감과 향긋하면서도 강한 쑥의 냄새가 어울린 맛은 어느 문호의 글이나 고급 사진기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도다리 살은 입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는다.

    p. 251, 통영 봄맛기행.

     

    -  절터는 넓다. 동서 288m, 남북 281m. 이 자리에 구리 3만 근과 황금 1만 198푼이 들어간 본존불 금동장륙상이 있었고, 동양 최대 목탑인 9층 목탑이 있었다. 에밀레종보다도 규모가 4배 더 나간다는 황룡사종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모조리 불타버렸다.

    p. 311, 경주 황룡사지.

     

    - 한해살이인 멸치는 기장 앞바다로 번식을 위해 찾아들었다가 조류가 순해지는 조금물때를 기다려 암초 위에 알을 쏟고는 짧은 생을 마친다. 기장 대변항의 어부들은 이 멸치들을 쓸어담으며 생을 산다.

    p. 330, 부산 기장 대변항.

     

    - 선비들은 비 오는 날, 달이 밝은 날, 화창한 날, 만대루에 앉아 글을 읽었다. 스산한 바람이 부는 가을날, 만대루에 앉아 글을 읽는 그들의 심사는 어떠했을까. 배롱나무가 내내 그들의 등을 희롱했으리라.

    p. 341, 안동 병산서원.

     

    - 이빨 빠져 섭섭해진 접시 위에 사과를 깍아 올리는 일,

    오이나무를 비추던 여름 햇빛의 분주에 잠시 어지러웠던

    어느 하루라고 해 두자.

    여행 말이다. 여행.

    아니, 어쩌면 삶일 수도, 그게 사랑일 수도.

    p. 358-359, 에필로그.

     

     

        나는 이제, 꽃이 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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